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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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추계 공세===
===러시아의 추계 공세===
[[9월 15일]]부로 러시아 해군과 오스만 해군은 각각 흑해에서 축출되었다. [[브루실로프]]는 그들의 공세 일정을 앞당겨야 했다. 시간을 끌수록 오스만의 방어선은 더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정도 이 생각은 사실이었다. [[오스만주재 독일 군사고문단]]이 캅카스 일대에서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느라 파견되어 있었다. 주요 길목에는 [[지뢰]] 매설을 포함해서 [[참호]] 등의 구조물이 자리잡았다. [[주그디디]], [[쿠타이시]], [[고리]], [[트빌리시]], [[예레반]]과 같은 요충지에는 상당한 규모의 참호가 자리잡았는데, [[철조망]]과 [[기관총]]이 충분히 배치되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이러한 방어선을 순전히 -오스만이 공세 초기에 했던 것과 유사하게- 물량으로 밀어내 버리려 했다. 이미 9월 중반부터 러시아군이 집결시킨 병력은 캅카스 오스만군을 압도했다. (러시아군은 오스만군에 비해 야포는 3배, 보병은 4배에 달하는 물량을 집결시켰다.)
[[9월 15일]]부로 러시아 해군과 오스만 해군은 각각 흑해에서 축출되었다. [[브루실로프]]는 그들의 공세 일정을 앞당겨야 했다. 시간을 끌수록 오스만의 방어선은 더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정도 이 생각은 사실이었다. [[오스만주재 독일 군사고문단]]이 캅카스 일대에서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느라 파견되어 있었다. 주요 길목에는 [[지뢰]] 매설을 포함해서 [[참호]] 등의 구조물이 자리잡았다. [[주그디디]], [[쿠타이시]], [[고리]], [[트빌리시]], [[예레반]]과 같은 요충지에는 상당한 규모의 참호가 자리잡았는데, [[철조망]]과 [[기관총]]이 충분히 배치되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이러한 방어선을 순전히 -오스만이 공세 초기에 했던 것과 유사하게- 물량으로 밀어내 버리려 했다. 이미 9월 중반부터 러시아군이 집결시킨 병력은 캅카스 오스만군을 압도했다. (러시아군은 캅카스 오스만군에 비해 야포는 3배, 보병은 4배에 달하는 물량을 집결시켰다.)
 
공세는 너무 늦어서 산맥을 넘으며 [[동사]]자가 극심하게 발생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 결과 가장 빠른 [[9월 22일]], 캅카스의 일시적인 새벽 [[안개]]가 발생하면서 공세를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공세로로는 블라디캅카스와 트빌리시를 잇는 [[본대]]의 진격로, 흑해 연안으로 난 [[우익]]의 진격로, 바쿠에서 산맥을 넘어 공세를 가하는 [[좌익]]의 진격로이 있었다. 안개는 아군을 가려주는 가림막이었지만, 진격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주요 진격로는 산맥을 넘기에는 당연한 길목이었기에 해체되지 못한 다량의 지뢰에 의해 시작부터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었다.
 
====흑해 연안 공세====
가장 먼저 저항에 부딪친 곳은 우익이었다. [[수후미]]는 흑해 연안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지나야하는 길목이었다. 이곳은 다음 날 산을 넘어 시가지로 진입한 다음에서 통과할 수 있었다. 다음은


==각주==
==각주==

2021년 8월 6일 (금) 01:56 판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일부

사리카미스 전투 중 러시아군 참호
날짜1915년 7월 14일 ~ 1917년 12월 10일
장소아르메니아 고원, 남캅카스
결과

제정 러시아의 패배

교전국
반-러시아 동맹: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군수지원국:
독일 제국 독일 제국
대영 제국 대영 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제정 러시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지휘관

반-러시아 동맹 지휘관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5세
오스만 제국 엔베르 파샤
오스만 제국 탈라트 파샤
오스만 제국 아흐메드 제말
오스만 제국 무스타파 케말
불가리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불가리아 왕국 니콜라 제코프
불가리아 왕국 게오르기 토도로프
불가리아 왕국 블라디미르 바초프
불가리아 왕국 스테판 토셰프
불가리아 왕국 클리멘트 보야드지예프

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제정 러시아 지휘관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대공
러시아 제국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러시아 제국 라브르 코르닐로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v  d  e  h


제3차 발칸 전쟁 또는 캅카스 전쟁(러시아어 : Кавказский война, 터키어 : Kafkasya Savaşı)은 1915년 7월 1일 ~ 1917년 12월 10일캅카스 국경분쟁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러시아오스만 사이에서의 열세 번째 전쟁이다. 러일 전쟁, 제3차 발칸 전쟁으로 제정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이나 대외 영향력의 약화가 현저해지자 오스만 제국1877년부터 1878년까지 치루었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치욕을 씻고 캅카스 일대로 진출하려는 일명, 북진 정책을 수립했다. 이는 전반적으로 제정 러시아군의 상태를 과소평가하고 남부 캅카스의 오스만 친화력을 오스만 군부가 과대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 사이에서 1915년 7월 1일, 캅카스 국경 일대에서 오스만 군과 러시아 군 사이에서 소규모 총격전이 있었다. (캅카스 위기)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에서 남부 캅카스 이슬람계 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함과 동시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으며 이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대부분은 서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 내부 분위기는 급격히 격화되었고, 전쟁 중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는 적백 내전으로 확전되었고 이에 튀르크와의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오스만과 트빌리시 조약으로 정전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남부 캅카스 일대가 오스만에 합병되었고 러시아 내 이슬람 세력의 보호를 약속받았다.

배경

오스만의 경우

제정 러시아1906년에 있었던 포츠머스 조약으로 극동에 강하게 유지하던 영향력을 상실했다. 또한, 제3차 발칸 전쟁에서 독오 동맹에 반하여 전쟁 수행 의지를 거두었고 그 결과 발칸반도에서 행사하던 영향력도 사실상 포기했다. 이에 오스만의 참모부에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캅카스 일대로 다시 확장시키려 했다. 상당 시간동안 오스만에서는 남부 캅카스에 자리잡은 이슬람 세력이 러시아보다 오스만에 친화적일 것으로 판단했고, 따라서 그들은 손쉽게 그들의 봉기를 일으켜 제국의 한 부분으로 통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커다란 정책 기조에 따라 수립된 것이 북진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굴욕으로 러시아와 오스만 관계는 상당기간 흑해 일대에서 팽팽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캅카스 일대에 영향력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의 보조자로 독일 제국이 등장한 것이 정책 시행에 가장 큰 추진력이 되었다. 빌헬름 2세3B 정책과 반 러시아 정책 기조에서 오스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1915년 1월부터 발칸에서 있었던 전쟁에 중립을 유지한 대가로 다량의 독일제 무기를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랜기간 오스만 군의 현대화를 돕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군사 체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고 오스만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다.

러시아의 경우

반면 러시아의 경우, 그들의 선택지는 점차 사려져갔다. 러일 전쟁 이후 자신의 이권보호에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부의 무능함에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한 국내 상황과는 별개로 남진 정책을 시행할 지리적 요충지는 점차 멀어져갔다. 발칸과 극동에서 더 이상의 진출은 각각 오스트리아-헝가리일본에 의해 저지되었고 영향력마저 완전히 소실했다. 따라서 영국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얻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악화되는 내부 사항과 상부의 고질적인 우유부단함에 그들은 감히 영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영러 협상으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발칸 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협력의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동맹 관계는 조금씩 뒤틀렸다. 니콜라이 2세는 서유럽 동맹국으로부터 신임을 얻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군부는 오스만을 제압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이는 영국에 간접적인 불안을 줄 수 있지만, 중동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에서 독일과 재보장 조약삼제동맹의 갱신하면서 반-오스만 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그럼에도 서유럽 열강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와 러시아의 앞마당인 루마니아를 교두보 삼아서 발칸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칸의 소국들은 러시아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칸 영향력이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도화선에 불 붙이기

1915년 6월에 이르러서는 양측 병력이 캅카스 국경 일대에 배치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특히 오스만은 현대화가 거의 완료된 육군에 2개 군을 새로이 편제하여 배치하면서 캄카스 진출을 위한 준비를 지속했다. 그러던 도중 7월 1일, 아르메니아 고산지대에서 양측의 정찰대가 조우하였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캅카스 위기가 있었다. 이 사고로 총 8명의 병사가 사망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이 사건으로 양 국가간의 갈등은 극에 치달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독일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주재무관을 통해 외교 채널을 확보하여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에 상부에서는 최후통첩을 몇번의 조정을 거쳐 완성한뒤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 7월 12일 전달된 최후통첩의 주요 사항은 남부 캅카스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다게스탄, 쿠르디스탄의 독립과 자치권부여, 이슬람교 보호, 이들 지역에 오스만 군의 진주와 같은 것들 이었다. 러시아는 당연하게도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킬 예정이었고, 여전히 오스만 군의 전력을 얕보고 있었다.

7월 14일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루마니아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의 불참 의사를 확인했고 오스만은 독일, 영국, 프랑스의 군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오스만은 독일군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독일의 상임군사고문단은 여전히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1개 사단이 추가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외교적인 사항이 어느정도 확실시된 14일 저녁, 최후통첩에 기재된 시간이 지났고 러시아는 끝내 응답하지 않으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경과

오스만의 계획

캅카스는 고산지대에 험준한 산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방어군에 매우 유리했다. 또한, 오스만 대부분의 병사는 중동의 사막 지역이나 터키 해안부에서 징집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다. 독일 상임군사고문단과 오스만 참모부는 반년 동안 캅카스를 공략하기 위해 계획을 준비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주력군을 자국 영내로 깊숙이 끌어들여서 섬멸한 뒤, 캅카스 일대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어느정도 동의했다. 그러나 평지가 아닌 험준한 산맥에서는 기동하여 포위하는 것이 힘들었으니 아라라트 평야 후방으로 펼쳐진 고지대에 방어선을 미리 구축하고 그곳에서 러시아군을 저지할 계획을 수립했다.

원래부터 산간 지역을 담당했던 제3군아르다한이디르에서 수비를 맡고 새롭게 창설된 제6군이 고지대 방어선을 구축하고 러시아군을 저지하는 역에 배정되었다. 마찬가지로 신규 군인 제5군은 전선 중 평야 일대에 초기 공세를 주도하여 아르메니아에 주둔하는 러시아군을 제압하고 반격하는 군을 포위망으로 유도해야 했다.

러시아의 계획

러시아의 참모부는 적절한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내부적인 혼란이 그대로 군사 작전에 반영되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강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상당한 병력은 후방 유럽 전선에 배치되었고 캅카스 일대에서는 -보급 문제도 포함하여- 1개 군만이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군부는 오스만 군이 크림 전쟁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평야 일대로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여분의 군대를 우크라이나 해안 일대에 배치하면서 캅카스 방어 병력은 오스만 군의 전력에 비해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캅카스 산맥을 일대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오스만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열강들의 참전없이 치루어지는 전쟁에서 러시아는 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공세 초기

하계 공세

전쟁 초기에 공세 주도권을 가진 것은 오스만 군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적의 예상 공세 시작점을 잘못 예측한 러시아 군사 참모부캅카스 방면 러시아군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실책이었다. 그는 오스만 군의 주공이 험준한 캅카스로 진군하기 보다는 해군력을 빠르게 투입하여 크림 일대 평야로 상륙해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오스만 군이 결정적인 공세 위치에 놓여있었을 때도 그는 크림 반도로의 공세를 보조하는 양동 작전이거나 두 갈래로 분산된 약한 공세라고 생각했다. 이와 다르게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만 군의 가용가능한 병력의 8할을 캅카스 방면으로 투입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 펼쳐진 자바케티 고원아르메니아 고원으로 수적 우위를 이용한 공세가 펼쳐지면서 유리한 전황이 지속되었다. 15일부터 시작된 공세는 나흘 동안 예레반규므리, 아할치헤 일대에서 러시아 수비대를 패퇴시키고 점령했다. 공세 5일 째에 접어든 오스만 군은 소캅카스 산맥 이남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고 곧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브루실로프 사령관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도브루자, 우크라이나에 넓게 배치된 러시아 군을 캅카스로 집결시키는 것에 열중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 사정은 그를 궁지로 내몰았다. 이와 함께 캅카스 군을 트빌리시보르조미와 같이 소캅카스 산맥의 관문에 방어선을 구성했다. 방어군은 7월 21일에 이르러 야포와 함께 방어선에 자리잡을 수 있었고, 이는 오스만 군의 첫 걸림돌이 되었다. 산맥을 동쪽으로 넘으려는 오스만 군은 볼니시 일대에서 러시아군 야포에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고, 북쪽 방면의 진출은 보르조미에서 러시아 군의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케말은 즉시 오스만 함대와 함께 포니 일대에 리오니 강 삼각주로 상륙 작전을 하달했다. 리오니 강 일대를 따라 진군하면 보르조미 후방을 위협하여 캅카스 군을 캅카스에서 축출하거나 너머로 몰아낼 수 있는 위치였다. -독일영국에서 3척을 양도받아- 5척의 오스만 전함이 24일 포니 앞바다에서 포격하며 상륙의 시작을 알렸다. 이에 -8척의 드레드노트 전함을 필두로 한- 러시아의 흑해 함대는 멀리 떨어진 세바스토폴에서 오스만 함대를 흑해에서 퇴각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니 일대에 대한 상륙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대의 러시아군이 산악지역 방어선을 차출되어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에 제대로된 방어전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오스만군은 이내 삼각주를 장악하고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하여 이틀동안 쿠타이시까지 진출해 아할치헤 북부의 러시아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동안 산악 지대에서는 소모전이 지속되어 양측에 상당한 사상자를 만들었다. 오스만의 경우 러시아 야포에 의해 더 집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시시안, 고리스, 세반 호수 일대를 넘어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쿠라-아라스 저지대로 진출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캅카스 군 사령부가 위치한 트빌리시 서쪽 22마일까지 접근했다. 이에 포시에 상륙한 오스만 군까지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트빌리시를 세 방면에서 압박할 수 있었다.

28일에 이르러서 양측의 보급선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러시아의 경우 트빌리시 북쪽으로 난 하나의 보급로와 카스피 해를 통해 바쿠로 연결된 보급선이 전부였다. 이 보급선을 통해서 엄청난 수의 러시아 군과 장비가 추가적으로 투입되어야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스만의 경우도 비슷했다. 캅카스 군보다 많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보급품이 거대한 산악 지형을 넘어서 오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나마 29일부터 포시로 해상 운송이 가능해졌지만, 이마저도 불안하게 유지되었다. 결국 8월 2일이 되어 양측은 기아, 탈진, 동상, 열사 등 다양한 요인으로 전력 공백이 우려될 만큼의 손해를 입어야했다. 이로 인해 8월 5일, 러시아 군이 대캅카스 산맥 일대로 방어선을 후퇴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8월 12일까지 오스만 군은 대캅카스 이남 모든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급에 커다란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병력을 본토의 방어선 일대로 해상으로 후퇴시켜야 했다. 이는 초승달 계획에 따른 행동이었는데, 다음에 올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세를 본토까지 지속시킨 다음 일련의 방어선 라인에서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의 일부였다. 애초에 러시아 군의 공세가 깊숙이 진행되어야 했기에 캅카스 일대에 병력은 소규모로 남겨두어야 했다. 이에 반해 러시아 군은 러시아 각지에서 철도를 통해 블라디 카프카스, 바쿠, 소치 일대의 병력을 크게 충원했고 캅카스 후방에도 오스만 군을 상회하는 규모의 러시아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오스만 군이 북부로 진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기에 산악에서 산발적인 소규모 교전만 있었을 뿐, 전선은 대체로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흑해 해전

흑해러시아 해군오스만 해군이 맞부딪칠 수 있는 유일한 전장이었다. 개전과 함께 세바스토폴 모닝콜이라 불린 일련의 오스만 해군의 선제 타격은 러시아 해군의 흑해 제해권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 그 이후로 흑해는 오스만 해군에게 있어서 점령한 캅카스 일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흑해를 통한 보급선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지난 사건의 보복과 함께 대규모 공세에서 오스만군의 저항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이 보급선을 타격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흑해 함대의 사령관인 안드레이 에버하르트오스만군의 포시 상륙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음에 책임을 지고 제해권을 다시 장악해야 했다. 흑해 함대가 오스만 함대에 비해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오스만 해군은 최근에 건조된 2척의 영국제 전함과 2척의 독일제 전함을 양도받으면서 그 균형추가 크게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전함에서 3척 더 많이 보유한 러시아였으나, 이는 성능적인 면에서 러시아 전함이 오스만의 신식 전함에 대적하기 힘든 것이 명확했다. 에버하르트 또한 전면적인 함대 포격전이 있을 경우 승리를 담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속도가 현저히 느린 전함을 작전에서 배제하고 적의 보급선을 빠르게 타격하고 빠지는 전술을 채택했다.

흑해 함대8월 25일 8월 해상작전 임무를 부여받고 세바스토폴 항구에서 출항했다. 7척의 전함과 2척의 순양함, 호위함들은 작전 반경 밖의 대기 지점으로 이동했으며, 주 타격부대인 구축함 17척이 3개 전대로 분리하여 작전 지역으로 향했다. 17시가 넘어 포티 앞바다에서 오스만군의 보급상선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그날 구축전대는 상선 2척을 침몰시켰다. 27일에는 3개의 작전 해역에 걸쳐 4척의 상선을 침몰시켰다. 2주일 동안 러시아 해군은 오스만이 해상 보급에 사용하는 상선 배수량의 3할 이상을 침몰시키거나 운행 불능으로 만들었다.

9월 11일에 이르러서 오스만 해군은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오후부터 포시 먼바다에서 3척[1]의 전함과 한 척의 순양함[2]을 주력으로한 포시 부대(P부대)가 대기했고, 2척[3]의 전함을 포함한 이스탄불 부대(I부대)는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보급선을 호위하며 기동했다. 운 없게도 러시아의 구축전대는 오스만의 두 개 작전 단위 사이로 침투했다. 오후 5시 즈음 오스만의 상선 한 척이 러시아 군의 어뢰에 침몰되면서 해전이 시작되었다. P부대는 즉시 북쪽으로 기동하여 흑해 함대의 본대를 색적했고 I부대는 휘하 후퇴하는 러시아 구축함의 앞에서 세바스토폴로 기동했다. 다음날이 되어서 후퇴하던 러시아 구축전대가 먼발치에서 I부대를 탐지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화력면에서 러시아는 확실한 열세였지만, 양측의 명중률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구축전대는 빠르게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교전지역을 벗어나려했다. P부대는 노보로시스크 먼바다에서 서쪽으로 기동하고 있었는데 1시간 뒤, P부대가 러시아의 구축전대를 가로막으면서 두번째 교전이 시작되었다. P부대는 오스만 해군의 최신예 전함을 포함하였고 특히, 독일에게 양도받은 미딜리 순양함가 활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전함 레샤디예의 포격을 시작으로 러시아 구축전대는 굉장한 피해를 입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아야 했던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진- C전대는 1척이 침몰, 2척이 중파되어 작전 능력을 상실했다. C전대가 두들겨 맞는 동안, 다른 구축함은 회피 기동과 연막으로 몸을 숨기며 북쪽으로 기동했다. 그럼에도 2척이 추가로 중파 되었고 오스만 군의 뇌격에 1척이 추가로 침몰하는 등 불운이 따랐다. 이 교전으로 러시아 구축전대는 총 3척이 침몰하고 1척이 대파, 5척이 중파 되면서 -17척의 구축함 중- 9척의 구축함이 전선에서 이탈했다. 절반 이상의 구축함을 잃은 러시아와는 달리 오스만의 피해는 구축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중파, 장갑순양함 1척 중파에 그쳤다.

에버하르트는 구축전대가 교전 중임을 2번째 교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전해받을 수 있었다. 그는 즉시 흑해 함대에 구축 전대를 구출하기 위해 기동할 것을 종용했지만, 함대의 속도는 너무 느렸다. 그들과 속도가 비슷한 오스만의 I부대는 남쪽으로 이미 방향을 틀었기에 그들이 P부대와 교전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결국 구축전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이후에야 교전 해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밤 동안 남쪽으로 느리게 후퇴하는 오스만 함대를 기적적으로 탐지할 수 있었다. 두 함대는 해가 밝아오르자 교전을 시작했다. 속도면에서 빠른 P전대는 빠르게 러시아의 함대를 앞질러 T진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 함대는 오스만의 위협적 기동을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야했다. 러시아 함대를 추격하기 위해 일렬로 따라붙은 오스만 함대는 좌측으로 기동하며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첫 유효타로 레샤디에가 포템킨에 3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후 2개의 명중탄을 추가로 맞고 포템킨은 주포에 심각한 손상과 화재로 작전불능이 되었다. 다음으로 포격을 받은 전함은 에프스타피였다. 술탄 오스만 1세함의 공격에 유효타에 함교가 타격받으면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는 러시아 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따라 서쪽으로 진열하며 포격을 개시했다. 이제 막 작전을 시작한 임페라트리차 마리야는 러시아 최신예 함선이라는 것을 확인하듯 레샤디에에 2발의 명중탄을 냈다. 레샤디에는 3번 포탑 아래에 화약고가 관통당하며 유폭되며 순식간에 침몰했다. 오스만 구축함은 포격전을 틈타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에 뇌격을 시도했지만, 1개의 어뢰가 경미한 침수피해만 주는 것에 그쳤다. SMS 괴벤은 이후 이오안 즐라투스트를 두들겨 상부 구조물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전열에서 뒤에서는 시노프미딜리의 뇌격에 침수가 발생하면서 배를 버려야했다. 지속되는 교전으로 러시아측은 포템킨, 에프스타피, 이오안 즐라투스트, 시노프가 대파되었고,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가 소파되었다. 오스만측은 레샤디에가 침몰되고 술탄 오스만 1세가 중파 되었다.

러시아의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와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로스티슬라브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함대를 두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I부대가 교전에 참가하면서 선두에 있던 로스티슬라브는 투르구트 레이스에 의해 대파되었다. 그 대신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가 북쪽으로 강행 돌파에 나서며 응사함에 따라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이 중파되었다. 뒤따르던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또한 투르구트 레이스의 주포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순양함(각각 3척)을 모두 잃었고, 러시아는 전함 7척 중 5척 (대파 5척) 을 잃었고, 오스만은 5척의 전함 중 4척 (침몰 1척, 대파 2척, 중파 1척) 을 잃었다.

러시아 제국 러시아 해군 오스만 제국 오스만 해군
병력 전함 7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7척 전함 5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노급 전함 임페라트리차 마리야 (소파) 레샤디예 (침몰)
야부즈 술탄 셀림 (소파)
전노급 전함 포템킨 (대파) 투르구트 레이스 (중파)
에프스타피 (대파)
이오안 즐라투스트 (대파)
로스티슬라브 (대파)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중파)
시노프 (대파)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소파)
순양전함 ( - ) 술탄 오스만 1세 (중파)
순양함 3척 (침몰 1척, 대파 1척, 중파 1척) 3척 (침몰 1척, 중파 2척)
구축함 17척 (침몰 3척, 대파 1척, 중파 5척) 4척 (침몰 1척, 중파 2척)
피해 전함 5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활동 가능 전함 2척, 구축함 8척 전함 1척, 구축함 1척

양측의 공세적인 격돌이 두 해군 모두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었다. 특히, 오스만 해군은 전투 후 작전 가능한 군함이 2척으로 중파된 군함들이 수리되기 전에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다. 러시아 해군은 제한적인 작전은 가능했지만, 한 전투에서 전함 5척을 잃으면서 전함 전투에서 불리해졌다. 게다가 러시아 해군에서는 오스만의 전함 4척이 여전히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의 우위를 가진 러시아 해군은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

러시아의 추계 공세

9월 15일부로 러시아 해군과 오스만 해군은 각각 흑해에서 축출되었다. 브루실로프는 그들의 공세 일정을 앞당겨야 했다. 시간을 끌수록 오스만의 방어선은 더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정도 이 생각은 사실이었다. 오스만주재 독일 군사고문단이 캅카스 일대에서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느라 파견되어 있었다. 주요 길목에는 지뢰 매설을 포함해서 참호 등의 구조물이 자리잡았다. 주그디디, 쿠타이시, 고리, 트빌리시, 예레반과 같은 요충지에는 상당한 규모의 참호가 자리잡았는데, 철조망기관총이 충분히 배치되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이러한 방어선을 순전히 -오스만이 공세 초기에 했던 것과 유사하게- 물량으로 밀어내 버리려 했다. 이미 9월 중반부터 러시아군이 집결시킨 병력은 캅카스 오스만군을 압도했다. (러시아군은 캅카스 오스만군에 비해 야포는 3배, 보병은 4배에 달하는 물량을 집결시켰다.)

공세는 너무 늦어서 산맥을 넘으며 동사자가 극심하게 발생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 결과 가장 빠른 9월 22일, 캅카스의 일시적인 새벽 안개가 발생하면서 공세를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공세로로는 블라디캅카스와 트빌리시를 잇는 본대의 진격로, 흑해 연안으로 난 우익의 진격로, 바쿠에서 산맥을 넘어 공세를 가하는 좌익의 진격로이 있었다. 안개는 아군을 가려주는 가림막이었지만, 진격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주요 진격로는 산맥을 넘기에는 당연한 길목이었기에 해체되지 못한 다량의 지뢰에 의해 시작부터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었다.

흑해 연안 공세

가장 먼저 저항에 부딪친 곳은 우익이었다. 수후미는 흑해 연안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지나야하는 길목이었다. 이곳은 다음 날 산을 넘어 시가지로 진입한 다음에서 통과할 수 있었다. 다음은

각주

  1. Reşadiye, Sultân Osmân-ı Evvel, Yavûz Sultân Selîm, Reshad-I-Hamiss
  2. Midilli
  3. Barbaros Hayreddin, Turgut Re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