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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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1일 (토) 05:51 판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일부

사리카미스 전투 중 러시아군 참호
날짜1915년 7월 14일 ~ 1917년 12월 10일
장소아르메니아 고원, 남캅카스
결과

제정 러시아의 패배

교전국
반-러시아 동맹: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군수지원국:
독일 제국 독일 제국
대영 제국 대영 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제정 러시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지휘관

반-러시아 동맹 지휘관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5세
오스만 제국 엔베르 파샤
오스만 제국 탈라트 파샤
오스만 제국 아흐메드 제말
오스만 제국 무스타파 케말
불가리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불가리아 왕국 니콜라 제코프
불가리아 왕국 게오르기 토도로프
불가리아 왕국 블라디미르 바초프
불가리아 왕국 스테판 토셰프
불가리아 왕국 클리멘트 보야드지예프

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제정 러시아 지휘관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대공
러시아 제국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러시아 제국 라브르 코르닐로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v  d  e  h

제3차 발칸 전쟁 또는 캅카스 전쟁(러시아어 : Кавказский война, 터키어 : Kafkasya Savaşı)은 1915년 7월 1일 ~ 1917년 12월 10일캅카스 국경분쟁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러시아오스만 사이에서의 열세 번째 전쟁이다. 러일 전쟁, 제3차 발칸 전쟁으로 제정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이나 대외 영향력의 약화가 현저해지자 오스만 제국1877년부터 1878년까지 치루었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치욕을 씻고 캅카스 일대로 진출하려는 일명, 북진 정책을 수립했다. 이는 전반적으로 제정 러시아군의 상태를 과소평가하고 남부 캅카스의 오스만 친화력을 오스만 군부가 과대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 사이에서 1915년 7월 1일, 캅카스 국경 일대에서 오스만 군과 러시아 군 사이에서 소규모 총격전이 있었다. (캅카스 위기)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에서 남부 캅카스 이슬람계 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함과 동시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으며 이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대부분은 서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 내부 분위기는 급격히 격화되었고, 전쟁 중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는 적백 내전으로 확전되었고 이에 튀르크와의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오스만과 트빌리시 조약으로 정전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남부 캅카스 일대가 오스만에 합병되었고 러시아 내 이슬람 세력의 보호를 약속받았다.

배경

오스만의 경우

제정 러시아1906년에 있었던 포츠머스 조약으로 극동에 강하게 유지하던 영향력을 상실했다. 또한, 제3차 발칸 전쟁에서 독오 동맹에 반하여 전쟁 수행 의지를 거두었고 그 결과 발칸반도에서 행사하던 영향력도 사실상 포기했다. 이에 오스만의 참모부에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캅카스 일대로 다시 확장시키려 했다. 상당 시간동안 오스만에서는 남부 캅카스에 자리잡은 이슬람 세력이 러시아보다 오스만에 친화적일 것으로 판단했고, 따라서 그들은 손쉽게 그들의 봉기를 일으켜 제국의 한 부분으로 통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커다란 정책 기조에 따라 수립된 것이 북진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굴욕으로 러시아와 오스만 관계는 상당기간 흑해 일대에서 팽팽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캅카스 일대에 영향력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의 보조자로 독일 제국이 등장한 것이 정책 시행에 가장 큰 추진력이 되었다. 빌헬름 2세3B 정책과 반 러시아 정책 기조에서 오스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1915년 1월부터 발칸에서 있었던 전쟁에 중립을 유지한 대가로 다량의 독일제 무기를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랜기간 오스만 군의 현대화를 돕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군사 체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고 오스만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다.

러시아의 경우

반면 러시아의 경우, 그들의 선택지는 점차 사려져갔다. 러일 전쟁 이후 자신의 이권보호에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부의 무능함에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한 국내 상황과는 별개로 남진 정책을 시행할 지리적 요충지는 점차 멀어져갔다. 발칸과 극동에서 더 이상의 진출은 각각 오스트리아-헝가리일본에 의해 저지되었고 영향력마저 완전히 소실했다. 따라서 영국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얻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악화되는 내부 사항과 상부의 고질적인 우유부단함에 그들은 감히 영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영러 협상으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발칸 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협력의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동맹 관계는 조금씩 뒤틀렸다. 니콜라이 2세는 서유럽 동맹국으로부터 신임을 얻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군부는 오스만을 제압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이는 영국에 간접적인 불안을 줄 수 있지만, 중동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에서 독일과 재보장 조약삼제동맹의 갱신하면서 반-오스만 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그럼에도 서유럽 열강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와 러시아의 앞마당인 루마니아를 교두보 삼아서 발칸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칸의 소국들은 러시아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칸 영향력이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도화선에 불 붙이기

1915년 6월에 이르러서는 양측 병력이 캅카스 국경 일대에 배치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특히 오스만은 현대화가 거의 완료된 육군에 2개 군을 새로이 편제하여 배치하면서 캄카스 진출을 위한 준비를 지속했다. 그러던 도중 7월 1일, 아르메니아 고산지대에서 양측의 정찰대가 조우하였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캅카스 위기가 있었다. 이 사고로 총 8명의 병사가 사망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이 사건으로 양 국가간의 갈등은 극에 치달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독일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주재무관을 통해 외교 채널을 확보하여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에 상부에서는 최후통첩을 몇번의 조정을 거쳐 완성한뒤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 7월 12일 전달된 최후통첩의 주요 사항은 남부 캅카스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

오스만의 경우

제정 러시아1906년에 있었던 포츠머스 조약으로 극동에 강하게 유지하던 영향력을 상실했다. 또한, 제3차 발칸 전쟁에서 독오 동맹에 반하여 전쟁 수행 의지를 거두었고 그 결과 발칸반도에서 행사하던 영향력도 사실상 포기했다. 이에 오스만의 참모부에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캅카스 일대로 다시 확장시키려 했다. 상당 시간동안 오스만에서는 남부 캅카스에 자리잡은 이슬람 세력이 러시아보다 오스만에 친화적일 것으로 판단했고, 따라서 그들은 손쉽게 그들의 봉기를 일으켜 제국의 한 부분으로 통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커다란 정책 기조에 따라 수립된 것이 북진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굴욕으로 러시아와 오스만 관계는 상당기간 흑해 일대에서 팽팽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캅카스 일대에 영향력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의 보조자로 독일 제국이 등장한 것이 정책 시행에 가장 큰 추진력이 되었다. 빌헬름 2세3B 정책과 반 러시아 정책 기조에서 오스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1915년 1월부터 발칸에서 있었던 전쟁에 중립을 유지한 대가로 다량의 독일제 무기를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랜기간 오스만 군의 현대화를 돕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군사 체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고 오스만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다.

러시아의 경우

반면 러시아의 경우, 그들의 선택지는 점차 사려져갔다. 러일 전쟁 이후 자신의 이권보호에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부의 무능함에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한 국내 상황과는 별개로 남진 정책을 시행할 지리적 요충지는 점차 멀어져갔다. 발칸과 극동에서 더 이상의 진출은 각각 오스트리아-헝가리일본에 의해 저지되었고 영향력마저 완전히 소실했다. 따라서 영국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얻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악화되는 내부 사항과 상부의 고질적인 우유부단함에 그들은 감히 영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영러 협상으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발칸 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협력의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동맹 관계는 조금씩 뒤틀렸다. 니콜라이 2세는 서유럽 동맹국으로부터 신임을 얻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군부는 오스만을 제압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이는 영국에 간접적인 불안을 줄 수 있지만, 중동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에서 독일과 재보장 조약삼제동맹의 갱신하면서 반-오스만 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그럼에도 서유럽 열강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와 러시아의 앞마당인 루마니아를 교두보 삼아서 발칸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칸의 소국들은 러시아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칸 영향력이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도화선에 불 붙이기

1915년 6월에 이르러서는 양측 병력이 캅카스 국경 일대에 배치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특히 오스만은 현대화가 거의 완료된 육군에 2개 군을 새로이 편제하여 배치하면서 캄카스 진출을 위한 준비를 지속했다. 그러던 도중 7월 1일, 아르메니아 고산지대에서 양측의 정찰대가 조우하였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캅카스 위기가 있었다. 이 사고로 총 8명의 병사가 사망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이 사건으로 양 국가간의 갈등은 극에 치달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독일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주재무관을 통해 외교 채널을 확보하여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에 상부에서는 최후통첩을 몇번의 조정을 거쳐 완성한뒤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 7월 12일 전달된 최후통첩의 주요 사항은 남부 캅카스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다게스탄, 쿠르디스탄의 독립과 자치권부여, 이슬람교 보호, 이들 지역에 오스만 군의 진주와 같은 것들 이었다. 러시아는 당연하게도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킬 예정이었고, 여전히 오스만 군의 전력을 얕보고 있었다.

7월 14일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루마니아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의 불참 의사를 확인했고 오스만은 독일, 영국, 프랑스의 군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오스만은 독일군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독일의 상임군사고문단은 여전히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1개 사단이 추가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외교적인 사항이 어느정도 확실시된 14일 저녁, 최후통첩에 기재된 시간이 지났고 러시아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전쟁 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