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51주): 두 판 사이의 차이

116번째 줄: 116번째 줄:


=== 추측과 출마 선언 ===
=== 추측과 출마 선언 ===
[[File:Biden at his presidential kickoff rally in Philadelphia, May 2019.jpg|thumb|right|240px|바이든이 필라델피아에서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2019.5.]]
2016년부터 2019년 사이에 많은 언론은 바이든을 2020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언급했다. 그는 관련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두 입장을 모두 내비쳤다. 어느 시점에서는 출마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했지만, 며칠 후에는 내가 걸을 수 있다면 뛸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해 언론의 관심을 유지시켰다. 바이든을 위한 시간으로 알려진 추대위원회가 2018년 1월에 결성되어 바이든의 프라이머리 진출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내 2019년 4월 25일 선거운동을 시작했으며, 바이든은 출마 선언에서 자신을 이끈 것은 바로 "의무감"이었다고 밝혔다.
2016년부터 2019년 사이에 많은 언론은 바이든을 2020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언급했다. 그는 관련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두 입장을 모두 내비쳤다. 어느 시점에서는 출마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했지만, 며칠 후에는 내가 걸을 수 있다면 뛸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해 언론의 관심을 유지시켰다. 바이든을 위한 시간으로 알려진 추대위원회가 2018년 1월에 결성되어 바이든의 프라이머리 진출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내 2019년 4월 25일 선거운동을 시작했으며, 바이든은 출마 선언에서 자신을 이끈 것은 바로 "의무감"이었다고 밝혔다.



2022년 11월 22일 (화) 12:43 판

미합중국 제46대 대통령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
Joseph Robinette Biden Jr.
출생 1942년 11월 20일(1942-11-20) (81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튼
재임기간 제46대 미합중국 대통령
2021년 1월 20일 - 현재
제47대 미합중국 부통령
2009년 1월 20일 - 2017년 1월 20일
[ 펼치기 · 접기 ]
부모 부 조셉 바이든 시니어
모 캐서린 바이든
배우자 닐리아 바이든 (1972년 사별)
질 바이든 (1977년 재혼)
자녀 아들 보 바이든, 헌터 바이든
딸 나오미 바이든, 애슐리 바이든
학력 델라웨어 대학교
시라큐스 법학대학원
종교 카톨릭
정당 민주당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Joseph Robinette Biden Jr., 1942년 11월 20일 ~)는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이다. 민주당 소속인 그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버락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 47대 부통령을 지냈고,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델라웨어 주 미국 연방상원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했다.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953년 가족과 함께 델라웨어로 이주했다. 그는 시러큐스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기 전에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1970년 뉴캐슬 카운티 의회에 선출되었고, 29세의 나이로 1972년 델라웨어에서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며 미국 역사상 여섯 번째로 어린 상원의원이 되었다. 바이든은 12년간 상원 외교위원회에 몸담으며 상임위원과 의장직을 역임했다. 그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상원 법사위원장을 맡았다. 폭력범죄통제법과 여성폭력법을 주도적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 6번의 미국 연방대법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를 감독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1988년과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에 실패했다. 그는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상원에서 네 번째 다선 의원이었다. 오바마와 바이든은 2012년 재선에 성공했다. 부통령으로서 8년을 지내는 동안 바이든은 상원에서의 경험을 살려 공화당과의 협상에서 정부를 대표해 교섭에 나섰다. 그는 또한 대불황에 대응하기 위한 2009년의 대규모 지출을 감독했으며, 외교 정책에 있어서 오바마 대통령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바이든은 부시가 시작한 페트로달러 전쟁에서의 미국의 확실한 목표를 설정하고, 우크라이나 미사일 위기를 통해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주도적으로 막아냈다.

바이든과 그의 러닝메이트인 툴시 개버드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꺾고 당선되었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고령인 대통령이자, 최초로 여성 부통령을 둔 대통령이 되었다. 바이든은 미국이 코로나 19 전염병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한 공중보건재건법안에 서명했다. 또한 그는 증세와 사회안전망 확충, 지출 삭감을 통한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는 BBB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트럼프 행정부에서 탈퇴한 파리 협약에 재가입했다. 또 바이든은 2022년 우크라이나 내전에 대응하여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한 무기대여법을 승인했다.

연방상원의원

2008년 대선

대선 출마 선언과 철회

2007년 1월, 바이든은 2008년 대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 전쟁[1], 상원의 주요 위원회 의장으로서의 역할, 외교 정책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2007년 중반에는 오바마에 비해 자신이 가진 외교 정책의 전문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 토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 줄리아니에 대해 "그의 말은 명사, 동사 그리고 9/11로 이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바이든은 2008년 1월 3일 실시된 첫 프라이머리인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5위를 하자 출마를 철회했다.

바이든의 대통령 후보 지명 노력은 실패했지만, 그의 출마는 정계에서 그의 명성을 높였다. 특히 그의 출마로 바이든과 오바마의 관계가 바뀌었다. 그 전까지 둘은 같은 상원 외교위원회에 있었지만 서로 가깝지 않았다. 바이든은 오바마가 빠르게 정치적 스타덤에 오른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오바마는 바이든을 평범한 정치가로 생각했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바이든을 제대로 보게 된 오바마는 바이든의 선거 운동 스타일과 노동계급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것을 높게 평가했고, 바이든은 오바마가 "실속 있는 달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통령 후보

2008년 8월 23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부통령 지명 사실을 알리는 연설

바이든이 대통령 후보 지명 과정에서 출마 철회를 선언한 직후, 오바마는 개인적으로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8월 초, 오바마와 바이든은 그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났고, 강한 유대감을 확립했다. 8월 22일, 오바마는 바이든이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뉴욕타임즈는 오바마의 결정 배경에는 바이든의 외교 정책과 국가 안보 경험이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른 언론사는 바이든의 블루칼라 유권자들에 대한 호소력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바이든은 덴버에서 열린 2008년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8월 27일 공식적으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7년에 시작된 금융위기가 2008년 9월 유동성 위기와 함께 절정에 달했고, 미국 금융시스템의 허점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자 바이든은 상원에 올라온 7천억 달러 규모의 긴급경제안정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2008년 10월 2일, 그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사라 페일린과 함께 부통령 토론회에 참석했다. 토론 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페일린보다 인기와 토론 모두 바이든이 승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적으로 바이든은 60%를 넘는 지지를 받았지만, 페일린은 44%에 불과했다.

2008년 11월 4일, 오바마와 바이든은 매케인-페일린의 163인의 선거인단 확보를 뛰어넘어 377인의 선거인단, 52.7%의 대중득표를 획득해 당선되었다.

부통령 재임

초선

바이든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던 딕 체니가 가지고 있던 수준의 큰 권한을 가질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오바마 인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고, 서민 경제의 안전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주도했다. 2009년 1월 초, 상원외교위원회 의장으로의 마지막 활동에서 그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조지아의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1월 20일 바이든은 첫 델라웨어 출신 부통령이자, 최초의 카톨릭 신자 출신 부통령으로 취임을 선서했다.

오바마는 바이든을 "통계에 잡히지 않는 농구 선수의 능력치와 같다"며 치켜세웠다. 5월 바이든은 페트로달러 전쟁의 전장인 이란 미군기지를 방문하여 "국제질서의 기초는 페트로달러를 중심으로 한다"는 미국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바이든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이란에 12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는 것에 대한 내부 논쟁에서 패배했지만, 그의 목표론은 가치가 있었다. 2009년 오바마가 페트로달러 전쟁의 목표를 "이란 정권의 축출 및 서구 민주주의 정착"에서 바이든이 주장한 "이란의 페트로달러 시스템 이탈 저지"로 변경하면서 바이든의 견해는 행정부 내에서 더욱 많은 영향력을 얻었다.

이란 미군기지를 방문하는 바이든

바이든은 약 두 달에 한 번씩 이란을 방문했으며, 이란 지도부에 미국의 입장을 확실히 전달하는 데 있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2] 이 이후로 오바마는 국제정세, 특히 중동과 동유럽에 관한 정책 감독 권한을 사실상 바이든에게 주었다. 바이든은 2012년까지 여덟 차례 이란을 방문했으며, 결국 이란의 지도자 하메이니가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떠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미군이 이란에서 철수하며 전쟁이 끝났다. 2011년 체결된 테헤란 조약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40개 국가가 서명했다.[3]

바이든은 오바마의 경기 부양책 중 하나인 인프라 지출을 감독했으며, 계속된 경기침체에 주도적으로 대응했다. 이 기간 동안 바이든인 예산의 낭비나 부패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했고, 2011년 2월 그 정책이 성공했을 때, 그는 부양책을 통한 사기 사건은 1%가 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9년 7월까지 실업률 상승에 직면한 바이든은 행정부가 "경제의 침체 정도를 잘못 파악했다"고 인정했지만, 대규모 확장재정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유지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구성원들은 백악관에서 바이든의 역할은 정부 내에서 쓴소리를 하는 입장이었다고 말한다. 백악관 비서실장은 바이든이 군중심리에 의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잘 막아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조의 가장 좋은 점은, 우리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낼 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모든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이든은 부통령 관저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냈고 종종 손주들과 함께 일상을 보냈으며, 델라웨어에 있는 자신의 집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시간을 보냈다.

바이든은 2010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을 위해 열정적인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선거에서 공화당이 선전한 것에 책임을 지고 에마누엘 비서실장이 퇴임했고, 행정부 내에서 공화당 의회와 교섭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이든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바이든과 의회의 관계는 더욱 긴밀 해졌다. 그는 러시아와의 핵 감축 협정에 대한 상원의 승인을 얻기 위해 물밑에서 움직였고 이 조약은 성공적으로 체결되었다. 2010년 12월, 바이든은 상원의 중도파 지도자 미치 맥코넬과 함께 부시의 감세 기조를 유지하면서 세금 정책을 개혁하는 패키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정책은 2010년 감세, 실업보험 재승인 및 일자리 창출법으로 통과되었다.

2011년 3월, 오바마는 바이든에게 의회와의 협상을 이끌도록 결정권한을 위임해 정부 셧다운을 피했다. 2011년 5월까지, 여섯 명의 하원의원이 활동하는 "바이든 패널"은 전반적인 적자 감축 계획의 일환으로 부채 한도를 상향하는 초당적 합의에 도달하려고 시도했다. 부채한도 위기는 몇 달 동안 고조되었지만, 바이든과 맥코넬의 관계는 교착 상태를 깨고 바이든의 의도대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이든은 행정부에서 부채 문제에 대해 의회와 협상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한 공화당 참모는 "바이든이 진정한 협상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맥코넬은 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성공적인 거래의 열쇠였다."고 말했다.

2010년 10월, 바이든은 오바마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러닝메이트로 남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지만, 오바마의 인기가 하락하자 윌리엄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은 2011년 말에 바이든을 힐러리로 교체하는 것에 관한 여론조사를 비밀리에 실시했다. 그 결과 이 교체가 오바마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든 교체론은 힘을 잃었다. 그리고 백악관 관계자들은 나중에 오바마가 바이든을 교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바이든은 9월에 열린 2012년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다시 한 번 지명되었다. 10월 11일 공화당의 폴 라이언 하원의원과의 부통령 토론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기록을 변호했다. 11월 6일 오바마와 바이든은 미트 롬니와 폴 라이언을 상대로 540명의 선거인단 중 353명과 대중투표의 51.2%를 확보해 승리했다.

2012년 12월, 오바마는 바이든을 총기폭력 태스크포스의 위원장으로 임명했으며 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을 해결하고 총기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달 말, 미국이 2012년 납세자 구제법안을 통과시킬 때 바이든과 맥코넬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납세자 구제법안은 부시의 감세 정책기조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되, 상류층에 대한 세율만 상향 조정한 것이었다.

재선

부통령 공식 초상화, 2013

바이든은 2013년 1월 20일 그의 관저에서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주재하는 작은 행사에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바이든은 2013년 말에 발생한 부채한도 위기에서 거의 역할을 갖지 못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2012년 바이든이 납세자 구제법안에서 민주당과 행정부를 대표해 협상할 때 너무 많은 부분을 공화당에 내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2014년 이라크가 테헤란 조약을 탈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오바마에게 무력 시위를 제안했으며 이는 곧바로 승인되어 이라크 위기로 이어졌다. 사담 후세인은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바이든은 몇몇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행정부에 몸담은 동안 이 지역의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부통령 재임 기간동안 라틴아메리카를 16번이나 방문했으며, 이는 어떤 대통령이나 부통령보다도 많은 기록이다.

또 바이든은 2014년 발생한 러시아의 무력 침공이 발생하자 오바마에게 지금 당장 B-2 폭격기를 발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는 바이든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바이든은 오바마에게 지금 러시아를 막지 못하면 이 정부 뿐만 아니라 미국 자체가 대러 외교에서 앞으로 수 십년간 뒤쳐질 것이라고 경고했고, 바이든의 의견은 많은 민주당 외교정책 전문가들의 견해와는 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바이든은 사태 발생 이틀만에 직접 혼란한 우크라이나를 찾아 과도정부 대표단을 만나 우크라이나에 미군과 미사일기지를 건설할 것을 합의했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미사일 위기다.

직후 많은 사람들이 바이든이 자주 하던 말실수를 우크라이나에서 굉장히 크게 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바이든이 미국 정부와는 대치되는 입장을 보였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6시간 후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브리핑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에 관해 의회의 요청을 구하는 연설을 하자 국제사회는 임박한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오바마는 브리핑에서 "러시아가 크림반도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존중한다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상하원은 초당적 협력으로 빠른 시일 내에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위 법안"을 의결했고,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만이 남자, 푸틴을 고심하게 했다. 결국 푸틴은 크림 반도에서 철수했으며, 러시아 내에서 푸틴의 지지기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4] 바이든은 푸틴이 크림반도에서 철수 명령을 내릴 때까지 일주일 간 우크라이나에 머물렀고, 이것은 많은 미국 사람들에게 바이든의 이미지를 배짱과 카리스마 있는 사람으로 각인 시켰다.

바이든 부통령과 펜스 부통령 당선인

그의 두 번째 임기 동안, 바이든은 종종 2016년 민주당 프라이머리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의 가족, 많은 친구, 후원자들이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한 2014년 중반부터 그가 다음 대통령 경선에 출마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특히 2015년 중반에 힐러리 클린턴의 호감도가 떨어지면서 바이든은 대통령 출마를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5년 9월까지 바이든은 여전히 출마를 결정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아들이 최근 죽은 것으로 감정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은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바이든은 201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16년 1월, 바이든은 "지금 내게 대통령직은 과분하다"며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지만, 트럼프 당선 이후 바이든은 "매일"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오바마가 2016년 6월 9일 힐러리를 지지한다고 밝힌 후, 바이든 역시 그날 늦게 힐러리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2016년 대선 내내 바이든은 트럼프에 대해서 다채로운 어휘를 사용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바이든은 부통령 재임 8년 동안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딕 체니 수준의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물론 바이든은 이 점을 부인하고, 또 실제로 체니의 경우처럼 권한을 공식적으로 위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행정부 각료들은 바이든이 행정부 내에서 중요한 정책에 보통의 부통령보다 훨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인정했다. 한편 바이든은 부통령 재임기간 동안 상원에서의 가부동수 표결권은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도 공화당과 바이든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재야

바이든이 오바마트럼프와 함께 취임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7

부통령을 퇴임한 후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암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지원했고, 2017년 회고록 약속해주세요 아버지를 집필했다. 2018년에 그는 상원의원 매케인이 미국의 이상과 초당적 협력에 관심이 많은 것을 칭찬했다. 한편 바이든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을 겨냥한 2018년 우편물 폭탄 테러 시도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바이든은 재야에 있으면서도 대중의 인기나 언론의 조명을 유지했으며, 정치, 외교, 기후변화, 경제 및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직에 대해 계속 언급했다. 2019년까지 바이든과 아내는 여러 저술활동을 통해 자산이 2.2백만 달러에서 8백만 달러로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의 아들 헌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가스회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우크라이나에 헌터 바이든의 혐의점을 찾을 것을 종용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민주당 의원들은 국내 정치인 탄압을 위해 외국 세력과 결탁하려 했다며 탄핵안을 가결시키려고 준비했다. 바이든은 "우리가 싫어하는 상대와도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며 탄핵안 제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하원은 탄핵안을 가결했다. 물론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바이든의 이런 행보는 바이든의 정치적 위상에 흠집을 내기위한 트럼프의 체면을 구겼으며, 재야에서도 계속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강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를 명분을 강화했다.

대통령 후보

추측과 출마 선언

바이든이 필라델피아에서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2019.5.

2016년부터 2019년 사이에 많은 언론은 바이든을 2020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언급했다. 그는 관련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두 입장을 모두 내비쳤다. 어느 시점에서는 출마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했지만, 며칠 후에는 내가 걸을 수 있다면 뛸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해 언론의 관심을 유지시켰다. 바이든을 위한 시간으로 알려진 추대위원회가 2018년 1월에 결성되어 바이든의 프라이머리 진출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내 2019년 4월 25일 선거운동을 시작했으며, 바이든은 출마 선언에서 자신을 이끈 것은 바로 "의무감"이었다고 밝혔다.

선거운동

2019년 9월, 트럼프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바이든과 그의 아들 헌터 바이든의 부정 혐의를 조사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어떤 혐의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언론은 바이든을 조사하라는 이런 압력이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시도로 해석했기 때문에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으며 이 사건은 곧 하원에 의한 트럼프의 탄핵을 초래했다.

2019년 3월과 4월, 바이든은 여덟 명의 여성에 대한 포옹, 접촉, 키스 등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을 이유로 논란이 일었다. 바이든은 자신의 행동이 문제를 일으킨 것을 사과하며, 사람들의 개인 공간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2019년 내내 바이든은 전국 여론조사에서 다른 민주당 주자들보다 전반적으로 앞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이오와 코커스와 8일 후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3위를 차지했다. 그는 네바다 코커스에서는 전보다 높은 2위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버니 샌더스에게 뒤쳐져 있었다. 바이든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흑인 유권자들과 샌더스의 당선을 우려하는 민주당 내의 자유-중도-보수파 유권자에게 강한 호소를 했다. 이는 효과를 발휘해 바이든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샌더스의 두 배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슈퍼 화요일 이후 피트 부티지지가 철수하였고, 바이든은 앨라배마, 아칸소, 메인, 매사추세츠, 미네소타,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테네시, 텍사스, 버지니아 등 26개 프라이머리 중 18곳에서 우승해 경선의 리드를 유지했다. 워렌과 블룸버그는 곧 사퇴했고, 바이든은 3월 10일 아이다호, 미시간, 미시시피, 미주리에서 샌더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선두를 더 벌렸다.

샌더스는 사우스코리아의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역전을 기대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사우스코리아는 바이든에 70%가 넘는 대의원을 몰아줬다. 샌더스는 5월 23일 선거운동을 중단했다. 샌더스는 5월 28일 자신의 집에서 생중계를 통해 바이든을 지지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익일 바이든을 지지했다. 2020년 3월, 바이든은 러닝메이트로 여성을 선택하기로 약속했다. 6월 초 바이든은 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1,863명의 대의원을 충족시켰다. 8월 11일, 그는 하와이의 툴시 개버드 미국 하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발표하여 그녀를 주요 정당 후보 가운데 최초의 미국령 사모아 출신이자, 최초의 힌두교인, 여성 의원 최초의 참전용사 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 2020년 8월 18일, 바이든은 2020년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2020년 대선의 민주당 대선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바이든 인수위

바이든은 2020년 11월 제4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를 꺾고 당선되었으며, 이는 1992년 빌 클린턴조지 H. W. 부시를 꺾은 이후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승리한 후보였다. 트럼프는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대중투표의 득표차나 확보한 선거인단 수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곧바로 기각되었다. 하지만 트럼프 백악관이 연방 기관들에 정권 인수에 협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인수위 활동은 몇 주 지체되었다. 결국 11월 23일 GSA의 에밀리 W. 머피 국장이 바이든이 명백한 대통령 선거의 승자임을 선언하고 모든 연방기관에 인수위에 협조하라는 공문을 발송하고 나서야 실제로 정권 인수가 시작되었다.

2021년 1월 6일 의회의 선거인단 개표 중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앞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투표사기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고, 곧이어 그들은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국회의사당이 습격 받는 동안 바이든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 사건을 "현대에서 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례 없는 공격"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특히 트럼프에게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이행하기 위해 지금 당장 전국 텔레비전에 출연할 것"을 촉구했다. 국회의사당이 다시 안정을 되찾은 이후 의회는 합동회의를 재개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상원의장 자격으로 선거 결과를 공식적으로 인증하여 바이든과 개버드를 승자로 선언했다.

대통령 재임

취임식

바이든은 2021년 1월 20일 미국의 4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당시 78세인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존 F. 케네디 이후 두 번째 카톨릭 대통령이자, 고향이 델라웨어인 첫 번째 대통령이다. 그는 또한 조지 H.W. 부시 이후 부통령과 대통령을 모두 역임한 최초의 인물이자, 1968년 리처드 닉슨 이후 첫 번째로 현직이 아닌 부통령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또 침묵의 세대의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하다.

바이든의 취임식은 COVID-19 예방조치와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공격으로 인해 보안이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취임식과는 다른 "조용한" 취임식이 되었다. 트럼프는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아 1869년 이후 후임자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최초의 퇴임 대통령이 되었다.

2021년

2022년

정치적 입장

평가

지지율

선거이력

각주

  1. 2000년대 초 당시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이었다.
  2. 바이든은 이란 정부에게 페트로달러 시스템으로 돌아오면 전쟁은 끝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던졌다.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개전했지만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고, 미군은 이란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정확한 목표조차 수립되지 않아 그저 상륙지점을 중심으로 점령지를 확대해가던 상태였다.
  3. 조약에서 탈퇴할 경우 모든 조인국이 연합해 국제경제체제에서 퇴출 시킬 것을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참여했다. 러시아와 중국, 인도는 참여를 거부했다.
  4. 미국 역시 미군 주둔과 미사일 배치 계획을 백지화했다. 미국이 참을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 인지 확고히 보여준 셈이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아니라 반란을 사주해 친러정권을 수립하는 기존의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