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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초반 난징 함락 등 대참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공군으로 전 중국에 폭격과 고엽제, 독가스를 쏟아붓고 우월한 무기로 밀어붙인 끝에 호국군이 궤멸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났지만, 2년이 넘는 전면전은 일본 경제를 파탄시켰고 1963년의 [[야스다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성장 일로이던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전쟁은 초반 난징 함락 등 대참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공군으로 전 중국에 폭격과 고엽제, 독가스를 쏟아붓고 우월한 무기로 밀어붙인 끝에 호국군이 궤멸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났지만, 2년이 넘는 전면전은 일본 경제를 파탄시켰고 1963년의 [[야스다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성장 일로이던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전쟁 이후 일본의 중국 정책은 그야말로 광기에 빠져, 197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고 고의적 대기근이 벌어져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또한 이전까지 살려 두었던 군벌들을 모조리 토벌하였다. 일본은 중국을 철저히 짓밣았고 전쟁으로 약화된 난징 정권은 일본의 폭주를 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중국에서의 폭주는 계속 이어진다.


여담으로, 유럽의 [[대게르만국 (신질서의 황혼)|대게르만국]]은 비슷한 시기 힘러의 부르군트와 [[대게르만국-부르군트 전쟁]]을 치렀다. 60년대 후반은 전반적으로 공영권 및 아인하이츠팍트의 분열로 인해 미국만 살판나던 시기였던 셈.
여담으로, 유럽의 [[대게르만국 (신질서의 황혼)|대게르만국]]은 비슷한 시기 힘러의 부르군트와 [[대게르만국-부르군트 전쟁]]을 치렀다. 60년대 후반은 전반적으로 공영권 및 아인하이츠팍트의 분열로 인해 미국만 살판나던 시기였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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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와 티베트 방면에서도 일본군은 공세를 퍼부었다. 어느때보다 심각해진 일본군의 잔학성에 호국군도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1968년이 넘어가자 전세는 완전히 일본 측으로 기울어졌다. 일본은 공장에서 찍어낸 폭탄들을 그대로 중국에 계속 쏟아부었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해갔다.
인도차이나와 티베트 방면에서도 일본군은 공세를 퍼부었다. 어느때보다 심각해진 일본군의 잔학성에 호국군도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1968년이 넘어가자 전세는 완전히 일본 측으로 기울어졌다. 일본은 공장에서 찍어낸 폭탄들을 그대로 중국에 계속 쏟아부었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해갔다.


결국 1968년 10월, 운남의 성도 쿤밍에서 최후 전투가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폭격기 수백 대를 동원해 쿤밍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이 여파로 쿤밍은 지금도 소도시로 남아있을 정도이다.
결국 1968년 10월, 운남의 성도 쿤밍에서 최후 전투가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폭격기 수백 대를 동원해 쿤밍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룽윈은 전사했다. 이 여파로 쿤밍은 지금도 소도시로 남아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2년 4개월간 이어진 대아대전, 또는 호국군 반란은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중국은 두 눈 뜨고는 볼수 없는 폐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2년 4개월간 이어진 대아대전, 또는 호국군 반란은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중국은 두 눈 뜨고는 볼수 없는 폐허로 전락하고 말았다.


== 결과와 영향 ==
== 결과와 영향 ==
전쟁은 일본의 처참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일본은 1963년의 경제위기에 이어 이번엔 반군과의 전면전까지 겪게 되면서 경제가 파탄에 몰렸으며, 60년대는 일본에 있어 암흑기로 기억될 지경이었다. 전쟁이 끝난 시점 이노 히로야 내각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새로운 총리 [[다카기 소키치]]가 집권했다.
중국은 몰락했다. 조금씩이나마 성과를 내고 있던 가오쭝우의 현대화 정책의 결과물은 일본의 전 중국을 향한 무자비한 폭격과 제노사이드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으며 고엽제 도배는 중국이 그나마 경제 규모만이라도 유지시키던 농업 기반마저 모조리 날려버리게 했다.
전쟁 이후 일본의 중국 정책은 그야말로 광기에 빠져, 197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고 대기근이 벌어져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또한 이전까지 살려 두었던 군벌들을 모조리 토벌하였다. 일본은 중국을 철저히 짓밣았고 전쟁으로 약화된 난징 정권은 일본의 폭주를 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중국에서의 폭주는 계속 이어진다.
가오쭝우는 이후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입법원 내 친일파로부터 지탄을 받다가 1970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또한 이 전쟁은 1949년 이래로 이어진 일본의 고도성장기 (1949-1971)을 사실상 종식시키고, 안정성장기로 접어들게 했다. 그나마 70년대 초의 1차 오일쇼크 대처에 성공하면서 일본은 호국군 전쟁의 충격을 만회할수가 있었다.
== 평가 ==
== 평가 ==
== 대중매체에서 ==
== 대중매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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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전쟁이다. 전쟁의 스케일이 매우 거대했던데다, 일본이 승리했기에 일본 밀리터리 덕후들에게 있어 태평양 전쟁과 지나사변에 이은 제3의 최애 전쟁이라고 할수 있다.
일본에서는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전쟁이다. 전쟁의 스케일이 매우 거대했던데다, 일본이 승리했기에 일본 밀리터리 덕후들에게 있어 태평양 전쟁과 지나사변에 이은 제3의 최애 전쟁이라고 할수 있다.
서양에서도 인기가 높다.

2024년 5월 2일 (목) 08:09 판

Destiny634, 2024 - | CC-0


호국군 전쟁
護國軍戰爭
Chinese Rebellion
기간 1966년 7월 19일 – 1968년 11월 7일
장소 중국 대륙
원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중국에서의 수탈에 대한 불만 폭발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호국군 대동아공영권
중화민국 호국군


대일본제국
중화민국 남경정부
몽강연합국
대만주제국
타이 공화국
필리핀 공화국
베트남 제국
티베트 왕국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버마국
캄푸치아 공화국
인도네시아 공화국
지휘관 룽윈
쑹시롄
장충
리미
쇼와 천황
이노 히로야
이케다 하야토
무토 아키라
혼마 마사하루
다카기 마사오
다케다 고로
가오쭝우
츠하오톈
천다칭
쑨뎬잉
성덕제
위징위안
쁠랙 피분송크람
호세 율로
병력 약 710만명 약 1,050만명[1]
피해 전사 600만명 이상
민간인 2000만명 이상 사망
전사 130만명 이상
민간인 200만명 이상 사망
결과 대동아공영권의 승리, 중화민국 호국군의 패배
영향 상하이 조약 체결. 중국의 모든 권리 박탈. 대일본제국의 중국 지배 과격화

개요

두 개의 태양. 하나의 하늘.

호국군 전쟁은 1966년 7월부터 1968년 11월에 걸쳐 중국에서 룽윈의 중화민국 호국군과 대동아공영권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의 반일 전쟁 또는 반란이다. 1947년 이레로 시작된 일본과 난징 국민정부에 대한 지배가 중국 민중의 전면적 저항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사건이었으며, 공영권 자체의 총체적 실패를 상징했다.

전쟁은 초반 난징 함락 등 대참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공군으로 전 중국에 폭격과 고엽제, 독가스를 쏟아붓고 우월한 무기로 밀어붙인 끝에 호국군이 궤멸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났지만, 2년이 넘는 전면전은 일본 경제를 파탄시켰고 1963년의 야스다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성장 일로이던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여담으로, 유럽의 대게르만국은 비슷한 시기 힘러의 부르군트와 대게르만국-부르군트 전쟁을 치렀다. 60년대 후반은 전반적으로 공영권 및 아인하이츠팍트의 분열로 인해 미국만 살판나던 시기였던 셈.

중국에서는 대아대전, 대아전쟁 등으로 부르고, 일본에서는 호국군 반란이 공식 명칭이다.

배경

1937년부터 1947년까지 10년간이나 이어진 지나사변(중일전쟁)의 끝에, 47년 5월 충칭 대공세로 백제성에 욱일기가 휘날리면서 모든 전쟁은 끝이 났다. 앞선 1945년 11월의 도쿄 조약으로 중국은 일본에 의해 모든 권리를 잃고 산업은 개발하지 못한채 농업 착취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군벌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중국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았다.

대동아공영권이 건설되어 그 잔해 위에서 일본이 번영을 누리는 동안 중국은 갈수록 비참해져 갔으며 중국인은 노예가 되었다. 중국의 산업이 일본인에게 장악되고, 주요 도시에는 일본의 기업이 들어섰으며 일본인 거주구역이 정비되었다.

공영권 내에서 중국은 일본의 영향과 간섭을 가장 크게 받았고, 곡창지대로서 쌀을 보급하는 가치만이 있을 뿐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는 공영권 내의 절대적인 최하위 서열에 있었다.

비록 1950년대 농업 국가로서의 발전이 이루어져 국가의 경제 규모 자체는 신장되었으나 공업 발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주요 권리를 되찾지 못했으며, 군대 무장 제한이 걸려있는 이상 중국의 행동 반경은 제한적이었다. 1953년 집권한 가오쭝우는 현대화를 노렸지만 일본은 치밀하게 방해하였다.

한편 중국의 서부 분지에는 아직 소탕되지 않은 구 국민혁명군과 공산당의 잔당들이 저항을 이어갔다. 특히 운남과 사천 등지에서는 상당수의 지역이 난징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이 전쟁의 시작이 되는 운남 지역은 저항군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1966년, 1962년부터 시작된 가오쭝우의 오대개혁운동은 은밀히 성과를 내고 있던 시기. 중국 대륙 서부 변방에 위치한 운남국은 총통 루한이 통치하고 있었다.

운남은 당시 국민혁명군이었다가 전향했던 원로 룽윈이 부총통으로 밀려나 있었는데, 당시 82세이던 그는 중국 수복의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6년 3월에 루한이 개인 직무로 인해 일본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고, 바로 이때 운남에서 룽윈에 의한 정변이 벌어진다. 그는 운남에 산재한 국민혁명군 잔당의 궐기를 획책했던 것이다.

운남 정변

운남에서의 정권 장악은 매우 빨랐다. 정변은 새벽 시간대 무혈로 종료되었으며 쿤밍에서 룽윈이 운남 지도자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그는 공식 연설을 통해 운남국을 폐지하고 명칭을 중화민국 호국군(護國軍)으로 간판을 바꿔달았으며, 총동원령을 선포해 군대를 모았다.

도쿄는 운남 정변을 공영권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그 다음날인 1966년 3월 20일 운남의 새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특히 이노 히로야 내각총리대신이 직접 나선 담화는 일본이 룽윈의 반기를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반영했다.

이에 난징 국민정부의 가오쭝우 역시 룽윈에게 반역을 멈추고 투항할 것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내며 일본과 보조를 맞추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운남의 정변은 단지 공영권 내의 사소한 일탈로 비추어질 뿐이었고, 그 누구도 이 상황이 향후 2년간 공영권을 뒤흔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룽윈은 사천성을 자신의 세력권에 끌어들였다. 사천의 군벌인 허잉친과 장제스의 대의 계승이라는 목표에 의기투합한 그는 1966년 5월 사천성을 호국군에 끌어들일수 있었고, 이제 호국군은 중국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두 분지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난징은 호국군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6년 7월 19일, 난징에 대한 선전포고문을 발표함과 함께 호국군의 진군이 시작되며, 이른바 "룽윈의 난"으로도 불리는 호국군 전쟁은 그 막이 오르게 된다.

전개

개전

중화민족이여,

우리는 오늘,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에 이르렀습니다. 가오종우 정권과의 접전은 우리의 투쟁에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워왔고, 이제는 그들의 앞잡이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가오종우와 그의 협력자들은 중화민국의 독립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끝없는 억압과 학살의 위협 아래 두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압박에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그들에게 당당히 맞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과의 평화조약에 반대합니다. 가오종우와 그의 괴뢰 정권은 중화민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중국 영토를 반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단호히 요구합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의 영토와 인민을 지키겠습니다.

중화민족이여, 이제는 우리가 함께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가오종우와 그의 괴뢰 정권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함께 싸워 우리의 국토와 자유를 지키는 일에 헌신합시다.

중화민족이 이기리라!
1966년 7월 19일, 난징 정권에 대한 룽윈의 선전포고문

호국군의 공격은 기습적이었다. 애초에 도쿄 조약으로 난징 정권은 군대를 10만 명 밖에 보유할수가 없었고, 일본 스스로가 걸어놓은 무장 제한으로 인해 초반 난징 정부군은 치밀하게 준비해 공격해온 호국군에 의해 참패하며 대륙의 영토들을 내주어갔다. 중국 주둔 일본군도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은지 오래였던지라, 초반의 기습에 당하기 일쑤였다.

대륙과 운남의 체급차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상대도 되지 않는 승부였으나, 안일한 초동 대응의 실패는 재앙적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부랴부랴 일본은 난징에 전시 동원을 허용했지만, 오합지졸의 병력인 데다 대의도 호국군 측에 있는지라 사기가 낮아 투항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에 전선은 급격히 붕괴하는 형세를 취해 9월에 이미 광동까지 호국군이 당도하는 등 비상이 걸리기 시작했다. 9월 난징 정권의 방어선이 난닝 - 창사 - 우한 선까지 밀렸고, 호국군은 현지 징집을 통해 세력을 불렸다.

10월 일본이 일본령 광동에 총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일본군과 호국군의 직접적인 전투가 광동 경계선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일본 육군은 만주와 중국 국경선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상하이에 일본 해군 육전대와 육군이 상륙했다. 그러는 한편 광동 구원을 위해 사단 추가 파병이 이뤄졌다. 이 시점에서 세계는 아시아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10월 중순, 호국군은 결국 우한을 돌파하고 난징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광동은 일본 광동 군관구의 수비 아래 굳건히 버티고 있었고 대륙과 고립된 채로 저항했다. 이 때 일본은 난징 수비를 위해 군 파견을 시작하였으며, 일본의 공군력이 호국군을 타격하며 점차 난징을 둘러싸고 전투는 격렬해져갔다.

1966년 겨울 겉잡을수 없이 커진 호국군을 상대로 난징의 정부군과 일본군이 막아선 난징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난징 공방전은 약 한달에 가까운 기간 이어지며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였으나, 그 결과를 놀랍게도 난징의 함락이었다. 1937년의 파괴에 이어 30년 만에 난징은 다시 파괴됐다. 가오쭝우를 비롯 난징 정권의 주요 정부기관은 베이징으로 피신하였고 일본군은 상하이로 퇴각했다.

호국군의 깃발이 난징 곳곳에 휘날리고 있었다. 난징의 일본인들은 잔혹하게 보복을 당했고, 상하이에선 일본으로 도망가려는 일본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제국 전체가 패닉에 빠졌다.

이때가 되면, 관찰자들은 정말로 일본 제국의 붕괴라는 것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이 최악의 위기에 맞닥뜨린 순간 일본은 결국 공영권 전체의 전면 참전이라는 결단을 내리며 전 국력을 중국 전쟁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일본의 개입, 대아대전

이는 공영권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고, 아시아 민족에 대한 배신이다. 이제 대동아의 이름으로, 전 동아민족이 뭉쳐 반도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1967년 1월 17일 일본, 공영권 전면참전 선언
쇼와 42년 2월 12일부로 제국 전역에 시행된 국가 총동원이란, 전시에 국방상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제국 국민을 병역 또는 사역에 동원할수 있고, 제국 영토 내의 물자를 징발할수 있다.
1967년 2월 12일 제국의회를 통과한 일본 국가총동원법 요강
난징 함락 직전, 난징에 배포된 호국군 선전물

일본의 전면적인 개입은 곧 전쟁이 호국군과 공영권 전체의 전쟁으로 확전됨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 공군도 본격 참전하고 육군 역시 동원령에 따라 현역병은 대부분 중국 전선으로 향해 투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어 전시체제로 전환되었다. 그야말로 20년 만의 중국과 일본 간 리벤지 매치가 벌어진 셈이었다.

일단 난징을 빼앗긴 이상 외항인 상하이를 지키는 것은 거의 어려운 일이었고, 일본은 1967년 3월 상하이 철수작전을 단행하여 대부분의 전력과 일본인들을 상하이에서 빼내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만족, 상하이도 호국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에 룽윈은 화북평원을 향해 진군할 것을 명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호국군은 크게 발목이 잡히는데, 일본이 진심으로 참전하기 시작하자 당장 중일전쟁 시절의 폭격은 우습게 보일 정도의 대폭격이 날아들고, 막강한 일본군의 기갑전력은 보병 위주의 호국군을 깔아뭉갰다. 거기다 독가스 전력으로 대표되는 생화학무기는 덤이었다.

이에 일본의 정식 참전이 이루어진지 불과 몇달 만에 전세는 크게 뒤집혀, 호국군은 대략 산동반도 즈음에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랐다. 그마저도 어마어마한 피를 흘리고 일본이 어느정도는 전략적 후퇴를 한 결과였다. 일본은 이때 상하이를 향해 재차 상륙공세를 퍼부어 상하이를 탈환하고, 난징까지 진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호국군이 코너에 몰린 이후부터 일본의 진정한 광기의 막이 오르게 된다.

피의 진군

이때부터 일본은 호국군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초대형 공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작전명 신멸작전(殲滅作戦)으로, 1967년 8월부터 개시된다.

먼저 일본은 폭격기 수만 대를 동원하여 수천만 톤의 소이탄과 네이팜탄, 백린탄으로 중국 대륙 전역을 폭격하고, 고엽제 수백만 톤을 중국 농지 전역으로 뿌려댔으며, 독가스를 전지마다 살포하며 진군했다. 또한 포로 금지 원칙을 내세워 호국군은 포로 없이 무조건 사살하도록 하였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도 희생되었고, 일본군은 수복한 지역마다 호국군에게 협조한 것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를 몰살하는 등의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인류사에 기록될 수준인 일본의 중국 대륙 폭격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불타오르고 지옥도로 변했으며, 일본군은 그 지옥도 위를 진군하며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않고 살육했다.

이는 난징에서 벌어진 일본인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 수만배에 이르는 목숨이 사라지며 대가를 치렀다.

인도차이나와 티베트 방면에서도 일본군은 공세를 퍼부었다. 어느때보다 심각해진 일본군의 잔학성에 호국군도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1968년이 넘어가자 전세는 완전히 일본 측으로 기울어졌다. 일본은 공장에서 찍어낸 폭탄들을 그대로 중국에 계속 쏟아부었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해갔다.

결국 1968년 10월, 운남의 성도 쿤밍에서 최후 전투가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폭격기 수백 대를 동원해 쿤밍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룽윈은 전사했다. 이 여파로 쿤밍은 지금도 소도시로 남아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2년 4개월간 이어진 대아대전, 또는 호국군 반란은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중국은 두 눈 뜨고는 볼수 없는 폐허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과와 영향

전쟁은 일본의 처참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일본은 1963년의 경제위기에 이어 이번엔 반군과의 전면전까지 겪게 되면서 경제가 파탄에 몰렸으며, 60년대는 일본에 있어 암흑기로 기억될 지경이었다. 전쟁이 끝난 시점 이노 히로야 내각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새로운 총리 다카기 소키치가 집권했다.

중국은 몰락했다. 조금씩이나마 성과를 내고 있던 가오쭝우의 현대화 정책의 결과물은 일본의 전 중국을 향한 무자비한 폭격과 제노사이드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으며 고엽제 도배는 중국이 그나마 경제 규모만이라도 유지시키던 농업 기반마저 모조리 날려버리게 했다.

전쟁 이후 일본의 중국 정책은 그야말로 광기에 빠져, 197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고 대기근이 벌어져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또한 이전까지 살려 두었던 군벌들을 모조리 토벌하였다. 일본은 중국을 철저히 짓밣았고 전쟁으로 약화된 난징 정권은 일본의 폭주를 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중국에서의 폭주는 계속 이어진다.

가오쭝우는 이후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입법원 내 친일파로부터 지탄을 받다가 1970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또한 이 전쟁은 1949년 이래로 이어진 일본의 고도성장기 (1949-1971)을 사실상 종식시키고, 안정성장기로 접어들게 했다. 그나마 70년대 초의 1차 오일쇼크 대처에 성공하면서 일본은 호국군 전쟁의 충격을 만회할수가 있었다.

평가

대중매체에서

2차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다보니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중국에서는 결국엔 패배한 전쟁이기는 하나 중국인이 단합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의의에 대해 인정하고 이를 대아대전으로 칭하고 있다. 영화도 많은 편.

일본에서는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전쟁이다. 전쟁의 스케일이 매우 거대했던데다, 일본이 승리했기에 일본 밀리터리 덕후들에게 있어 태평양 전쟁과 지나사변에 이은 제3의 최애 전쟁이라고 할수 있다.

서양에서도 인기가 높다.

  1. 그러나 공영권 측 병력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거나 태국, 인도, 베트남처럼 소수의 병력만 투입한 경우도 포함된 것이라 실제 전선에서의 병력은 비슷하거나 일본군보다는 호국군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