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행정부
Jimmy Carter Administration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하는 지미 카터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출범 이전 이후
제럴드 포드 행정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대통령 지미 카터 / 제39대
부통령 월터 몬데일 / 제42대
여당 민주당

지미 카터 행정부는 1977년 1월 20일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취임과 함께 시작하여 1981년 1월 20일까지 존재했었다. 조지아 출신의 민주당원 카터는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카터 행정부는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좁고 아슬아슬한 패배를 당하며 끝났다. 카터는 2023년 현재까지 살아있기 때문에 현재 살아있는 대통령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대통령이자, 대통령을 퇴임한 후 전 대통령 타이틀을 달고 있는 역사상 가장 긴 대통령이기도 하다.

카터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침체를 동반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한창인 시기에 취임했다. 그의 재정 및 통화정책은 정부 지출을 줄이고 높은 금리를 유지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1970년대의 대부분을 함께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여 카터 행정부는 장기적인 에너지 확충과 대체 자원의 개발을 위해 에너지부를 설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에너지 위기에 시달렸고, 자신감의 위기 연설을 통해 지지율은 반등했지만 1980년 대선을 앞두고 큰 경기 침체가 시작되었다. 카터는 국가의 복지, 의료, 조세제도의 개혁을 모색했고 청견연합의 도움을 받아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카터 행정부는 미국의 외교 정책을 고립주의에서 범지구적 인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특히 인도차이나에서의 킬링필드를 언급하며 베트남 전쟁에서 섣불리 철수한 닉슨과 공화당, 그리고 그것을 지지한 미국인들을 지적하며 부채감을 조성했다. 결국 1978년 재 파병이 결정되었다. 그는 소련과의 추가적인 전략 무기 제한 회담을 추진하면서, 전임자들의 유화적인 냉전 정책을 유지했다.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을 끝내기 위해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준비했다. 또한 토리호스-카터 조약으로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으며,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면서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군사적, 외교적 압박을 시작했다.

카터 행정부의 마지막 15개월은 이란 인질 위기와 심각한 경제적 침체를 포함한 중대한 위기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이란 폭격이글 크로우 작전으로 외부적 위기를 잘 넘겼으며, 이전의 광범위한 제도 개혁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음과 동시에,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완전한 크메르 공화국을 지켜냈다며 자신을 공산주의의 방파제로도 이미지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레이건은 대선 기간 내내 임기 내로 끝내겠다던 베트남 전쟁이 아직도 지속되는 것을 비판했으며, 이는 주효했다.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카터를 평균 이하의 대통령으로 평가하지만, 최근에는 카터의 고금리, 긴축 정책이 1980년대까지 이어진 스태그플레이션의 해결에 어느정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평균 정도의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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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