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민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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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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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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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환향민(還鄕民)은 1870년대의 임신개혁 이후 1945년 대한 제국의 패망까지 한국의 식민지였던 만주, 연해주, 몽골 등에서 거주했다가 귀국한 한국인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들 중의 일부분은 해당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이다.

당대에 주로 농사를 지을 토지를 찾거나, 아니면 식민지에서 인생에 변화를 줄 기회를 찾으러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게 된 사람들이 보통 환향자가 되었고, 한국군의 경우 재향군인으로서 따로 분류되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리고 대한제국군 소속으로 참전한 한국인 남성이 현지의 한국계 이주민 여성이나 비한인(주로 식민지 토착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가 대한 제국 항복 후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간 경우에는, 아버지와 달리 환향자로 분류된다. 대한제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이들 중에서도 출신지가 한국 본토인 11도가 아니라 러시아 차르국, 예케 몽골 울루스를 비롯한 대한 제국의 괴뢰국, 혹은 만주같은 식민지였을 경우 환향자로서 분류된다.

숫자

임신개혁 이래 대한제국은 부국강병을 위한 서구화와, 그에 따른 사회 변화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고 이에 따른 인구의 차출지가 필요해지면서, 자연스레 여느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렇듯 만주, 연해주, 몽골 등으로 확장하였다. 빈곤과 토지부족,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한국인들이 식민지로 이민을 갔으며,이렇게 넘어간 이들의 수는 항복 당시인 1944년에서 1945년을 기준으로 약 280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군인을 제외한 숫자이다. 패전 당시 한국이 주권을 상실하는 지역 기준으로 동몽골, 예케 몽골 울루스와 중국에 약 80만 명, 만주에 약 120만 명, 간도에 약 70만 명, 연해주에 약 10만 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참고로 당시 대한제국 본토의 경우, 전체 인구가 1945년 즈음 약 5,500만 명 정도였다.

어떻게 등장하였는가

근본적으로는 대한제국 정부가 점령지에서 살던 거주민들의 반발심을 아예 제거하여 후환을 방지하는 것으로, 따라서 독립운동가, 레지스탕스 및 의병 등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제거하고, 대신 자국민들을 더 이주시켜서 정착시키는 식으로 점령지의 충성심을 확보하는게 목적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먼 타지로 오게 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상기한 대로 더욱 '한민족끼리'를 강요하는 사고관이 정착한 것. 그리고 이는 만주와 같은 외지, 혹은 괴뢰국 같은 해외[1]에서도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규율이었다.

문제는 당시 대한제국은 식민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정책을 미비했다는 것. 그래서 군사간섭통치 이후에도 식민지와 본토의 통치에 대한 개념, 질서 정리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기본적인 국적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서방의 지원으로 무늬라도 갖춘 러시아 차르국에도 못 미치던 예케 몽골 울루스에는 국적법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1944년 한국이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대한제국의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인은 언젠가 나가야 하는 불법점거자가 되어버렸고, 결국 거주 권한도 소멸하고 현지인의 적대감 역시 이길 수 없으니, 떠밀리듯 다시 본토인 한국 11도로 돌아간 사람들이 바로 환향자인 셈이다.

그리고 일부 환향자 여성들의 경우, 당시 전후였던 관계로 재정이 빡빡했던 한국에서 그닥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들 중 일부는 돈을 벌기 위해 매춘업에 뛰어들기도 했었는데, 이 여성들을 뜻하던 멸칭인 '환향녀'가 변형되면서 탄생한 것이 '화냥년'이라는 추측이 꽤나 신빈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성 계층

환향자들은 주로 농민, 빈민, 혹은 본토인 한반도에서 당시 제국주의에 협조하던 한국 대기업들의 회사원이나 그 가족들로 구성되었고, 군인의 가족으로 넘어온 한국인들도 많았다.

이중 만주의 경우는 식민지가 된 시절부터 이미 '극동의 쌀가마니'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농민들이 많이 진출한 지방이였고[2], 광산으로 간 이들도 제법 수가 되었다.

연해주의 경우 지리적인 특성상 주로 국제무역, 소상공인 생활을 통해 이득을 보거나, 산림이 울창하다는 점을 이용해 벌목업으로 어떻게든 돈을 모아보려는 이들이 주로 모였고, 나중에는 연해주의 개간을 하려는 농민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비교적 나중에 생긴 식민지였던 몽고주와 예케 몽골 울루스의 경우 미개발지라는 특성 탓에 개척을 통해 돈을 벌어보려는 이들이 주류였으며, 특히 인프라 건설 붐이 일던 1930년대였던지라 이를 통해 한 몫을 잡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공통적으로 이곳에 일직이 정착한 이들은 대지주, 대상인, 거물 기업가 혹은 광산주가 되어 막대한 부를 벌 수 있었으나, 1930년대 중반으로 가면 경쟁이 심해지고 입지가 좁아진지라 이후에 온 이주민들은 이들만큼 부유해지지는 못했다. 대신, 이들은 주로 소작농이나 소상공인, 혹은 노동자가 되어 한국인이 주로 모인 한인타운에 거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형

만주의 환향민

만주의 경우, 항복 이후 한국이 인구를 귀국시킬 시간을 달라며 협상안을 제시했기에 첫 몇달간은 땅을 팔거나 하는 식으로 재산을 남길 수 있었고, 본토를 제외한 만주 전체가 빠져나간다는 소식을 신민들이 들으면 일어날 큰 혼란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초기엔 정보를 통제했기에 혼란이 가속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본격적으로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관외에서 토지들이 강탈되기 시작하자 한국인들은 부랴부랴 땅을 헐값에라도 처분하고 본토로 가는 방법을 마련해야 했으며, 제때 빠져나가지 못했거나 남겨두고 간 자산들은 전부 몰수되어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 혹은 만주 인민위원회 측에 불하되었다.

그나마 한국 정부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내전을 통해 자발적으로 민주주의 정부로 전환하고 공세로 인한 파멸을 막기 위해서 항복한 덕에 어느정도 자신들의 의견을 철수 과정에 반영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때문에 빨리 상황을 눈치챈 인원들은 최소한 무사히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추방이 결정된 1945년말기까지 머무르다가 빈털털이가 된 채로 부랴부랴 본토로 온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것은 사실이며, 수요의 폭증으로 가격이 급상한 본토행 배편과 기차값 대신, 공짜였던 미국이 제공한 선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자산을 대부분 버리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차피 본토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였던 일부 소시민들의 경우는, 쥐꼬리만한 토지를 처분하거나 거액의 돈을 내고 만주 국적을 얻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들의 수가 만주 남동부에는 오늘날에도 꽤 많은 편.

특히 관외, 즉 만주 북부 지역에 살던 환향자들의 피해가 큰 편이었는데, 중도적인 성향이었던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과 달리 북부를 점거한 만주 인민위원회는 한국과 전쟁을 치른 소련의 관리를 받았던지라, 대한제국에 대한 증오로 인한 만행 탓에 수백명이 집단거주지에서 영양실조, 건강악화 및 감염병으로 사망했고 나중에 관외를 벋어나 남부, 혹은 본토로 들어왔더라도 귀환 과정의 굶주림, 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인터뷰에 출연한 만주 내 한국인 마을 출신의 노인에 따르면. 자신들은 그 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으로 강제로 귀국할 때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긴 마음이었고[3] 억울한 생각도 있었지만, 후에 자신들의 고향인 그 마을 또한 만주인에게 부당하게 빼앗은 땅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침탈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연해주의 환향민

중국의 환향민

시베리아의 환향민

몽골의 환향민

간도의 환향민

유사사례

환향자와 유사한 사회 문제는 20세기 전반까지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던 식민제국 대다수가 탈식민주의의 대두로 인해 겪은 문제였으며, 꼭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었더라도 20세기 내내 지속된 국경의 변화에 따라 주민들이 추방되는 일들은 빈번했다.

아시아에서 대표적인 유사사례로는 동시기 일본제국의 히키아게샤(引揚者 / ひきあげしゃ)가 있다. 한국과 비슷하게 국외로 내국인들을 이민보내던 정책을 펼치던 일본의 경우 보통 남양 군도, 동남아, 중국 및 러시아 일대에서 거주하다가 본토로 귀국한 케이스들이 많으며, 개중 본토에서도 살 방법이 없다 판단한 이들 일부는 일본에 비해 전쟁피해가 덜했고, 전방이었던 평양과 중심부였던 한성에 비해, 전쟁에서 후방이었던지라 비교적 여유가 있던 한국의 부산에 정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한국에서 먹거리 등을 판매하거나 수공예품을 제조하며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김밥, 오뎅이나 어묵 등의 일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4] 한국에서 유행을 타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과 같은 추축국 출신인 독일에서도 동방 영토 및 동유럽에서 독일인들이 대거 추방당한 사례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오랜 기간 독일의 영토였거나 독일계의 영향권이었고, 인구도 독일인이 절대다수였던 지역에서 주민들이 추방당했다는 차이가 존재하며 규모 역시 훨씬 방대했다. 상술했듯 현재는 만주의 영토인 간도·내만주 출신의 환향자가 그나마 이들과 비슷하나, 규모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관련어록

내지의 입이라고 하던 도시 대련을 거쳐, 학교에서 내지 중의 내지라 배워온 팔도에 환향한 나는 그곳에서 단지 이방인이었다. 본토의 풍속을 모르고, 살아야 할 집도, 경작해야 할 땅도 없는 우리들은 내지(한국)에 고립되어 있었다. <화냥년의 자식>이라 불리며 조소의 대상이 될 때마다 나는 만주를, 마음에 근심 하나 없었던 그곳의 넓었던 평야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곳은 이미 우리를 거부하고 떠나간 땅이었으니까.
이명박 著, 저서 <인생의 시간들> 中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떳떳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일전의 치명적인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과거 식민제국이었던 내 조국의 총리로서 솔선수범 한다는 각오 아래 우리의 과오가 담긴 서원 일부를 철폐하고, 국민들에게 우리가 식민지를 만들어서 무슨 폐를 끼쳤는지 알리고자 했다.
김영삼 전 총리대신 著, 환향자 문제 및 역사에 대한 강연 中

기타


  1. 심지어 괴뢰국이 아닌 주권국 해외에서도 그대로였던지라, 동맹 일본의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공작을 위해 본토에서 온 제국익문사가 캐나다에 채류중인 한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한동안 검거되지 못한 적도 있었다.
  2. 이유는 간단하다. 대한제국 정부가 산업화로 인한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을 달래고 기득권층인 지주들의 심기를 지나치게 건드리지 않게 만주로 간 농민들에게 대량의 토지를 공짜로 나누어주었기 때문. 이 과정에서 엄연히 주거지인 게르나 유목민촌을 주거지 조성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불태우고 농지, 혹은 주거용으로 사용될 땅을 배급한지라, 만주족의 대한제국에 대한 인식이 그 어떤 식민지 피지배민족보다도 최악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 당시 여느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러했듯, 한국인들은 보통 만주 내의 한인 구역에서 몰아서 자랐기 때문에 만주인을 볼 일이 의외로 잘 없었다고 한다. 세부적인 것들을 제외하면 한국 본토랑 언어, 문화적인 면에서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었던 셈.
  4. 엄밀히 말하면, 이미 비교적 개방되어 있던 한국 식민지들 중 일부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유행한 일식이 들어온 상태기는 했다.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굉장히 좋은 편이기도 했고, 앞서 언급한 부산의 일식 유입까지 합쳐지면서 위상이 높아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