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국(독일어: Deutsches Reich 도이체스 라이히[*]) 혹은 라이히(독일어: Reich 라이히[*])는 중앙 유럽에 위치하여 5개의 왕국, 8개의 대공국, 13개의 공국, 9개의 후국, 3개의 백국과 4개의 자유시로 구성된 입헌군주제 연방 국가이다. 북쪽으로 스칸디나비아 3개국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8개국이, 동쪽으로는 헝가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가, 서쪽으로는 저지대 2개국과 프랑스가 위치한다. 법적공용어는 독일어로 라이히의 극동과 극서에서 폴란드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이 소수의 제2국어 사용자들이 있다. 게르만 민족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일부 슬라브족과 켈트-게르만족이 존재한다. 라이히의 수도는 프로이센의 수도이기도 한 베를린으로 라이히의 최대 도시이다. 북해 연안의 브레멘과 함부르크, 라인 강 유역의 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슈트라스부르크, 오데르 강 동쪽의 슈테틴과 단치히, 발트 지방의 리가 등의 대도시가 있다.
라이히는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이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면서 건국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라이히는 권위주의적인 국가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엘자스로트링겐에서 일어난 탈권위주의-자유주의 운동에 의해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카이저의 권력은 강하여 카이저는 라이히를 대표하고, 인민의 통합의 주체가 되며, 국가수상을 임명하고 해임하며,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의회를 통과한 모든 법령과 국가내각의 정책에 대해 거부권을 지니며, 위기 시 독일군의 최고통수권을 지닌다. 그러나 사실상 카이저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1960년대의 운동의 결과로 삼계급 투표제가 폐지되고 평등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라이히의 각 구성국들은 연참의원에 의해 구속되되,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게 되었다. 카이저에 의해 임명된 독일 국가수상은 대부분 직접 선거로 조직된 독일 국가의회의 여당의 대표가 맡았으며, 독일 국가내각을 조각했다. 라이히의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로 라이히의 정책을 결정하고 이를 시행한다. 그리고 국가부수상이 이를 보좌한다.
국명
역사
기원
비스마르크 시대
국내정치적으로는 문화투쟁과 탄압법을 통해 카톨릭교와 사회주의를 탄압하였다. 문화투쟁은 프로이센에서 5월 입법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5월입법으로 인해 성직자는 프로이센 정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수도원이 해산되는 등 교황청에게까지도 큰 비난을 받았다. 교황청은 라이히의 성직자들에게 5월 입법을 거부할 것을 지시했고, 프로이센 정부는 이들을 체포하고 추방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은 보수주의자와 신교도에게서도 비난 받았고, 카톨릭 정당인 중앙당의 세력이 확대되는 등 실패로 종료되었다. 한편, 빌헬름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를 명목으로 사회주의 탄압을 위한 탄압법이 통과되었다. 여러 급진적 정당과 단체들이 금지되고, 이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탄압법은 2년의 유효기간을 지녔었으나 10년이 더 유지되었으며, 1878년 국가의회 선거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9석의 의석을 얻으며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이후 국가의회 의석이 증가된 중앙당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부터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라이히는 지정학적으로 양면전선의 위협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라이히의 지정학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강대국 간의 외교 질서를 새로 재편하였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반-라이히 감정이 높아진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며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와 삼제 동맹을 맺는 등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발칸 반도에서의 충돌로 삼제 협상은 파기되었고, 대신 라이히는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팽창보다 평화가 목표였으며, 이 때문에 라이히는 제국주의의 시기에서도 적극적인 식민지 확보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소극적인 팽창 정책 하에서도 아프리카와 태평양 일대에서 식민회사에 의한 식민지가 개척되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토골란트, 독일령 카메룬, 독일령 노이기니아, 독일령 자모아 등 식민지가 세워졌고, 독일령 키아우초우와 같이 조차지도 건설되었다.
빌헬름 1세가 붕어하고 1888년,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당시 후두암을 앓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자유주의 사상과 별게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계속 수상의 직위에 머물게 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99일만에 붕어하였으며, 이후 빌헬름 2세가 즉위한다. 빌헬름 2세는 황자 시절부터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악감정이 존재했으며, 불과 며칠 전에는 그에게서 여러 경고를 담은 편지를 받았었다. 빌헬름 2세는 탄압법 연장에 대해 반대하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반기를 든다. 국가의회가 빌헬름 2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탄압법 연장은 부결되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를 사회복지법에 제동을 걸며 충돌이 계속된다. 그러나 1890년 독일 국가의회 선거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큰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많은 반대에 부딫치며 결국 1890년 3월 18일, 국가수상의 직위를 내려놓으며 비스마르크 시대는 종료된다.세계정치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는 옥수수 관세 인하 계획으로 인해 반대에 부딪치며 해임당했으나, 그는 빌헬름 2세에게 수상감으로 베른하르트 폰 뷜로를 적극 추전했다. 따라서 차기 수상은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임명되었으며, 그는 빌헬름 2세의 총애를 얻었다. 그가 국가외무청차관이던 시절 그는 국가의회에서 대외 팽창 정책에 관한 연설을 펼쳤다. 그의 의견은 빌헬름 2세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세계정치의 근원이 되었다. 그는 정치 세력의 의견에 편승하여 복지 개혁 정책과 비밀 투표를 이루었으며, 농업자동맹의 요구에 순응해 1902년 관세법을 통과하였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 시기, 라이히는 세계정치라 불리는 일련의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실시했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국가해군청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라이히 내에서 해군 증강 여론을 조정하여 수 차례의 함대건조법을 통과시켰다. 함대건조법으로 라이히의 해군력이 증강하자 영국은 이에 불안감을 느끼며 마찬가지로 해군을 증강하면서 독일-영국 해군력 경쟁이 이루어진다. 함대건조법을 통해 라이히는 영국의 뒤를 이은 세계 2위의 해군력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세계정치에서 "양지"는 중국과 중동으로써 오스만에게서 철도 부설권을 얻어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그를 잇는 3B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모로코 위기를 일으키는 등 영국과 프랑스의 위기감을 일으킨다. 세계정치로 인해 유럽 내 정치 지형이 재편되어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제협상과 라이히-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의 삼국동맹이 조직되었다.
1907년, 라이히 정치에 한바탕 거대한 스캔이 발생한다. 하르덴-오이렌부르크 사건이라 불린 동성애와 관련된 스캔은 라이히 역사상 가장 거대한 스캔을 이루었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를 포함한 수많은 정치 인사들이 동성애 혐의를 받는 등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베른하르트 폰 뷜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혐의자들이 무혐의 판결을 받으며 종료되었다. 이후 빌헬름 2세와 데일리 텔레그레프의 인터뷰 도중 빌헬름 2세의 실언이 공개되면서 데일리 텔레그레프 사건이 발생한다. 데일리 텔레그레프 사건으로 인해 빌헬름 2세의 국내외적인 명예가 실추되었으며, 영국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해당 사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며 국가수상직을 사임하면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가 차기 수상으로 취암한다.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에드워드 그레이와 함께 관개를 개선하기를 원했고, 해군경쟁을 종식하고자 협상하였다. 그러나 함대경쟁종식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제2차 할데인 미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완전히 실패하였다. 1914년, 보스니아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럽은 긴장 상태에 들어섰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의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승전 시 협상국에게 요구할 사항을 담은 9월 계획을 계획하고 입안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라이히가 전쟁에서 승전하고 국가의회가 이를 승인하면서 파리 조약과 리가 조약으로 현실화되는데 성공한다. 9월 계획의 실현으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승전의 대표자 중 한명이 되었다.
파리 체제 기간 동안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비교적 소극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9월 계획에서 영국의 권리를 인정한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라이히의 패권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민족주의자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영국의 기존 식민지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의 정책은 대부분 유럽 대륙과 동아시아에 치중했다. 일본 제국과 도쿄 조약을 맺어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을 저지했고, 동프랑스 독일군 전병력 최고지휘관의 독단적인 플로레알 27일의 쿠데타 진압을 방관했다. 또한 제3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를 지원했고, 캅카스 내전에 개입해 동유럽의 평화를 유지했다.
1919년, 이집트 케디프국의 수에즈 운하 점거로 영국이 무력 시위를 감행한다. 라이히는 영국의 무력 시위에 대해 파리 조약 위반을 명분으로 수에즈 사태에 개입한다. 영국은 물러났으며, 라이히는 수에즈 운하의 30% 지분을 차지하는 등 큰 이익을 얻었다. 수에즈 사태에서 영국이 물러나면서 영국의 해양 패권 종식이 의미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국령 식민지에서 독립 요구가 증가했다. 이러한 가운데 영국령 인도 정부가 붕괴되면서 대영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라이히는 이러한 대영제국 분할을 선두하며 전 세계의 영국령 식민지를 점거하였으며, 기존 영국 패권을 완전히 대체하는데 성공한다.
영국의 붕괴로 인해 전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일시적인 무주공산이 되었으며, 중동도 그러한 지역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음에도 무주공산이 된 중동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아르메니아를 지원하며 오스만 전쟁을 일으킨다. 기타 다른 국가들까지 오스만 전쟁에 참전하면서 오스만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라이히는 러시아의 중동 영향력 증가를 견제하며 해당 사태에 개입한다. 세바스토폴 조약을 통한 중재의 결과로 라이히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무주공산이 된 "양지" 중동의 패권을 확보한다. 몇년 뒤에는 러시아가 내전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동유럽과 중동에서의 위협이 소멸하면서 패권을 확고히하는데 성공하였다.대공황
아르투어 침머만의 사임 이후 빌헬름 2세는 빌헬름 쿠노를 차기 국가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전에 재무청차관을 맡은 만큼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붕괴에 알맞는 수상으로 보였다. 빌헬름 쿠노는 빌헬름 그뢰너를 국가재무청차관을 임명하였고, 빌헬름 그뢰너는 구조조정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자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며 라이히는 점차 대공황에서 빠져나왔고, 경제는 점차 복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해 라이히의 동쪽과 서쪽에서 여러 문제들이 터져나왔다. 폴란드와 프랑스 제3공화국모두 군부 쿠데타로 정부가 전복되고 군국주의적이고 반라이히적인 정부가 들어섰다.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 쿠데타 당시 쿠노 내각은 프리에드리히 1세의 신변을 위해 쿠데타군과 협상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리에드리히 1세의 신변을 보장하였으나 인민적 지지를 잃는다. 거기에 더해 벨기에가 내전으로 붕괴되면서 결국 반대파들의 공격에 의해 빌헬름 쿠노는 해임당한다.
빌헬름 쿠노 이후 중앙당의 프란츠 폰 파펜이 독일 국가수상에 오른다. 그러나 파펜 국가내각 시기 동안 라이히를 둘러싼 유럽 정세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강철 조약을 맺었으며, 발칸 반도에서는 제4차 발칸 전쟁이 발발해 라이히의 우방국인 불가리아가 몰락한다. 한편 프란츠 폰 파펜은 벨기에 내전에 소극적으로 개입하여 브뤼셀을 중립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경고성 차원의 소극적인 대응은 국내적으로 큰 불만 여론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소극적인 개입은 프랑스나 사회주의의 확장을 막지 못했으며, 벨기에 내전이 벨기에를 분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한다. 동쪽에서도 폴란드의 위협이 계속되었으며,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 코뮌이 튀르키스탄을 침공하였다. 이러한 파펜 국가내각의 외교적 무대응으로 인해 라이히 내부에서는 급진정당들이 세를 얻어 1934년 국가의회 선거에서 중앙당이 몰락하고 독일 조국당 등 급진 정당들이 의석을 확보했다. 결국 인민적 여론 악화로 빌헬름 2세는 프란츠 폰 파펜을 해임하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차기 독일 국가수상으로 임명한다.슐라이허의 도당
제2차 세계 대전은 발발 이전부터 제1차 세계 대전과 달리 장기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은 라이히가 세 개의 길다란 전선을 가지면서 본격화되었다. 라이히는 사방으로 둘러싸인 적으로 인해 난관에 봉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7년 1월 18일, 국가 수호를 명분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의 사조직은 베를린의 주요 국가기관을 점거했으며, 성공적으로 라이히의 전권을 장악한다. 라이히의 전권을 장악한 그는 연방참의원과 국가의회를 모두 해산했으며, 그의 입맛대로 내각이 조직되었다. 슐라이허의 도당이라 불린 그의 국가내각은 오직 융커 게급으로 구성된 귀족과두정으로써 빌헬름 2세는 그들의 허수아비가 되었다. 슐라이허의 도당은 강력한 권한과 통일된 이해관계로 신속하게 라이히를 전시체제로 변화시켰다. 슐라이허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을 지닌 전시 게획은 라이히로 하여금 세개의 길다란 전선을 가지고도 이를 유지하고 혹은 되려 전진할 수 있게 하였다. 5년간의 제2차 세계 대전은 제3인터네셔널이 개입하면서 종전되었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 복구라는 명분으로 전쟁 도중 성립된 슐라이허의 도당 체제를 지속했다. 실제로 5년 간의 소모전 끝에 라이히는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었다. 더군다나 전쟁 중 슐라이허 프로그램은 전쟁 수행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택과 다름이 없었으나 장기간 지속된 전시 경제체제는 민간 경제를 붕괴시켜놓았다. 더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3인터네셔널의 팽창은 라이히로 하여금 경계감을 불러왔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이러한 경계심을 이용하며, 그리고 자신과 융커의 기득권을 위해, 정권 유지에 대한 또 다른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52혁명
세계 전쟁
팍스 게르마니카
자연 환경
지리
기후
정치
독일 황제
Deutscher Kai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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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ne Majestät der Kais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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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I 빌헬름 1세 Wilhelm Friedrich Ludwig |
Friedrich III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Wilhelm Nikolaus Karl Hohenzollern |
Wilhelm II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Victor Albert |
재위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
재위 1888년 3월 9일 ~ 1888년 6월 15일 |
재위 1888년 6월 15일 ~ 1941년 6월 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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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ne Majestät der Kais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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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III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Victor Augustus Ernst |
Friedrich IV 프리드리히 4세 Wilhelm Friedrich Franz Joseph Christian Olaf |
Friedrich Wilhelm V 프리드리히 빌헬름 5세 Wilhelm Karl Franz Ludwig |
재위 1941년 6월 4일 ~ 1951년 7월 20일 |
재위 1951년 7월 20일 ~ 1970년 2월 6일 |
재위 1970년 2월 6일 ~ 1993년 7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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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ne Majestät der Kaiser |
Wilhelm IV 빌헬름 4세 Wilhelm Ernst Joach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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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993년 7월 28일 ~ 현재 |
건국 당시, 독일 황제는 국가수상을 임명-해임하고, 모든 행정권이 종속되며, 장교를 임명하고, 처벌을 경감하고,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는 등 막대한 권력이 독일의 헌법 및 프로이센의 헌법에 의해 인정되었으나, 탈권위주의-자유주의 운동의 결과로써 황제의 권한은 불문법적으로 축소되었다. 현재 독일 황제인 빌헬름 4세는 내정에 대해 큰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라이히의 외교 정책과 군사 정책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의장국인 프로이센의 헌법에 따라 프로이센의 국왕, 독일 황제는 직계 가족이 황위를 이으며, 1960년 대 이전에 남성 우선적으로 계승되던 승계법이 탈권위주의-자유주의 운동의 결과로 성별에 관계없이 장남녀가 황위를 잇게 되었다. 만약 황제가 후사가 없을 경우 동생이 황위를 잇는다.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후사가 없어 프로이센의 국왕을 이었으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도움 하에 1871년 라이히의 황제가 된다. 1888년에 프리드리히 3세가 황위를 이었으나, 후두암으로 인해 단 99일만에 붕어한다. 프리드리히 3세의 첫째 아들인 빌헬름 2세가 황위를 이었으며, 빌헬름 2세는 세계정책이라 불리는 팽창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등 큰 존경을 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붕어하였다. 그의 첫째 황자인 빌헬름 3세가 황위를 이었고, 1951년까지 통치하다 그의 첫째 황자인 프리드리히 4세가 황위를 잇는다. 프리드리히 4세 시기 반권위주의-자유주의 운동이 발생하여 황실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5세가 통치했으며, 1993년부터 현재까지 빌헬름 4세가 즉위하고 있다.행정
국가수상
국가내각
입법
연방참의원
Bundes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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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 | 부의장 |
올리버 디터 베르너 | 루돌프 에베레트 폰 베스코 |
의원
| |
프로이센 17석 · 오스트리아 6석 · 바이에른 6석 · 작센 4석 · 뷔르템베르크 4석 · 바덴 3석 · 올덴부르크 1석 · 룩셈부르크 3석 · 엘자스로트링겐 3석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2석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2석 · 헤센 3석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1석 · 주데텐란트 2석 · 림부르크 1석 · 부르군트 1석 · 잘츠부르크 1석 · 쿠를란트 1석 · 노르트리프란트 1석 · 쥐트리프란트 1석 · 에스틀란트 1석 · 리타우엔 1석 · 안할트 1석 · 브라운슈바이크 2석 · 작센알텐부르크 1석 · 작센마이닝겐 1석 · 작센코부르크고타 1석 · 리페 1석 · 리히텐슈타인 1석 · 샤움부르크리페 1석 · 마조비엔 1석 · 오버슐레지엔니더슐레지엔 1석 · 발데크 1석 · 슈바르츠부르크 1석 · 로이스그라이츠 1석 · 로이스게라 1석 · 베스트로트링겐 1석 · 티롤 1석 · 발로니엔 1석 · 외젤 1석 · 함부르크 2석 · 브레멘 2석 · 뤼베크 2석 · 리가 2석 · 트리스트 2석 | |
94석 | |
위원회 |
육군위원회
|
해공군위원회
|
외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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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2석 · 오스트리아 2석 · 바이에른 2석 · 작센 1석 · 뷔르템베르크 1석 | 프로이센 3석 · 올덴부르크 1석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1석 · 쥐트리프란트 1석 · 에스틀란트 1석 · 함부르크 1석 · 브레멘 1석 · 뤼베크 1석 · 리가 1석 | 프로이센 2석 · 뷔르템베르크 1석 · 룩셈부르크 1석 · 엘자스로트링겐 1석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1석 · 헤센 1석 · 브라운슈바이크 1석 · 발데크 1석 |
8석 | 11석 | 9석 |
세무위원회
|
재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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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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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2석 · 오스트리아 1석 · 바이에른 1석 · 작센 1석 · 뷔르템베르크 1석 · 바덴 1석 · 룩셈부르크 1석 · 엘자스로트링겐 1석 · 부르군트 1석 · 잘츠부르크 1석 · 티롤 1석 | 프로이센 2석 · 오스트리아 1석 · 작센 1석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1석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1석 · 작센마이닝겐 1석 · 로이스그라이츠 1석 · 로이스게라 1석 · 트리스트 1석 | 프로이센 2석 · 바이에른 1석 · 뷔르템베르크 1석 · 엘자스로트링겐 1석 · 헤센 1석 · 주데텐란트 1석 · 노르트리프란트 1석 · 리페 1석 · 발로니엔 1석 · 함부르크 1석 · 브레멘 1석 · 뤼베크 1석 |
12석 | 10석 | 13석 |
교통통신위원회
|
행정위원회
|
법무위원회
|
프로이센 2석 · 바이에른 1석 · 작센 1석 · 바덴 1석 · 룩셈부르크 1석 · 헤센 1석 · 쿠를란트 1석 · 브라운슈바이크 1석 · 작센알텐부르크 1석 · 샤움부르크리페 1석 · 슈바르츠부르크 1석 · 리가 1석 | 프로이센 1석 · 오스트리아 1석 · 바이에른 1석 · 주데텐란트 1석 · 림부르크 1석 · 안할트 1석 · 작센코부르크고타 1석 · 리히텐슈타인 1석 · 오버슐레지엔니더슐레지엔 1석 · 외젤 1석 | 프로이센 1석 · 오스트리아 1석 · 바덴 1석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1석 · 리타우엔 1석 · 마조비엔 1석 · 베스트로트링겐 1석 · 트리스트 1석 |
13석 | 10석 | 8석 |
국가의회
사법
국가대법원
Reichsobergericht
|
Reichspräsident
Reichsvizepräsident
Reichsvizepräsident
Reichsrichter
|
구성국
Struktur des Deutschen Reich |
Königreich 왕국 | ||||
Preußen 프로이센 |
Österreich 오스트리아 |
Bayern 바이에른 |
Sachen 작센 |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
베를린 | 빈 | 뮌헨 | 드레스덴 | 슈투트가르트 |
Großherzogtum 대공국 | ||||
Baden 바덴 |
Oldenburg 올덴부르크 |
Luxemburg 룩셈부르크 |
Elsass-Lothringen 엘자스로트링겐 |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카를스루에 | 올덴부르크 | 룩셈부르크 | 슈트라스부르크 | 슈베린 |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Hessen 헤센 |
Saxe-Weimar-Eisenach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
슈트렐리츠 | 다름슈타트 | 바이마르 | ||
Herzogtum 공국 | ||||
Sudetenland 주데텐란트 |
Limburg 림부르크 |
Burgund 부르군트 |
Kurland 쿠를란트 |
Nordlivland 노르트리프란트 |
라이헨베르크 | 마스트리흐트 | 비잔츠 | 미타우 | 도르파트 |
Südlivland 쥐트리프란트 |
Estland 에스틀란트 |
Lietauen 리타우엔 |
Anhalt 안할트 |
Braunschweig 브라운슈바이크 |
볼마어 | 레발 | 볘로스토크 | 데사우 | 브라운슈바이크 |
Saxe-Altenburg 작센알텐부르크 |
Saxe-Meiningen 작센마이닝겐 |
Saxe-Coburg-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
||
알텐부르크 | 마이닝겐 | 고타 코부르크(여름) |
||
Fürstentum 후국 | ||||
Lippe 리페 |
Liechtenstein 리히텐슈타인 |
Schaumburg-Lippe 샤움부르크리페 |
Masobien 마조비엔 |
Ober- und Niderschlesien 오버니더슐레지엔 |
데트볼트 | 파두츠 | 뷔케부르크 | 플로크 | 트로파우 |
Waldeck 발데크 |
Schwarzburg 슈바르츠부르크 |
Reuss-Greiz 로이스그라이츠 |
Reuss-Gera 로이스게라 |
|
발데크 | 루돌슈타트 | 그라이츠 | 게라 | |
Grafschaft 백국 | ||||
Westlothringen 베스트로트링겐 |
Wallonien 발로니엔 |
Ösel 외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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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히 | 펠비슈 | 아렌스부르크 | ||
Freiestadt 자유시 | ||||
Hamburg 함부르크 |
Bremen 브레멘 |
Lübeck 뤼베크 |
Riga 리가 |
Triest 트리스트 |
함부르크 | 브레멘 | 뤼베크 | 리가 | 트리스트 |
Struktur des Deutschen Reich 독일의 구성국 | ||||
Königreich 왕국 | ||||
Preußen 프로이센 |
Österreich 오스트리아 |
Bayern 바이에른 |
Sachen 작센 |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
베를린 | 빈 | 뮌헨 | 드레스덴 | 슈투트가르트 |
Großherzogtum 대공국 | ||||
Baden 바덴 |
Oldenburg 올덴부르크 |
Luxemburg 룩셈부르크 |
Elsass-Lothringen 엘자스로트링겐 |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카를스루에 | 올덴부르크 | 룩셈부르크 | 슈트라스부르크 | 슈베린 |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Hessen 헤센 |
Saxe-Weimar-Eisenach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
슈트렐리츠 | 다름슈타트 | 바이마르 | ||
Herzogtum 공국 | ||||
Sudetenland 주데텐란트 |
Limburg 림부르크 |
Burgund 부르군트 |
Salzburg 잘츠부르크 |
Kurland 쿠를란트 |
라이헨베르크 | 마스트리흐트 | 비잔츠 | 잘츠부르크 | 미타우 |
Livland 리프란트 |
Estland 에스틀란트 |
Lietauen 리타우엔 |
Anhalt 안할트 |
Braunschweig 브라운슈바이크 |
리가 | 레발 | 볘로스토크 | 데사우 | 브라운슈바이크 |
Saxe-Altenburg 작센알텐부르크 |
Saxe-Meiningen 작센마이닝겐 |
Saxe-Coburg-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
||
알텐부르크 | 마이닝겐 | 고타 코부르크(여름) |
||
Fürstentum 후국 | ||||
Lippe 리페 |
Liechtenstein 리히텐슈타인 |
Schaumburg-Lippe 샤움부르크리페 |
Masobien 마조비엔 |
Ober- und Niderschlesien 오버니더슐레지엔 |
데트볼트 | 파두츠 | 뷔케부르크 | 플로크 | 트로파우 |
Waldeck 발데크 |
Schwarzburg 슈바르츠부르크 |
Reuss-Greiz 로이스그라이츠 |
Reuss-Gera 로이스게라 |
|
발데크 | 루돌슈타트 | 그라이츠 | 게라 | |
Grafschaft 백국 | ||||
Westlothringen 베스트로트링겐 |
Tirol 티롤 |
Wallonien 발로니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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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히 | 인스부르크 | 펠비슈 | ||
Freiestadt 자유시 | ||||
Hamburg 함부르크 |
Bremen 브레멘 |
Lübeck 뤼베크 |
Triest 트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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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 브레멘 | 뤼베크 | 트리스트 |
경제
국방
독일 육군은 프로이센을 비롯한 라이히의 구성국들의 군대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은 평시에 각 구성국들의 독자적인 명령을 따르나, 전시 혹은 특수 상황에 경우 최고육군사령부의 통일된 지시를 받는다. 세계 대전 시기까지만 해도 이들은 독자적인 제식 장비를 채용하였으나, 제3차 세계 대전 이후 동일된 복식과 장비로 무장하여 일부 부분에서만 이들이 어떤 구성국에 소속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독일 육군은 현대적인 전차 운용과 엘리트적인 장교로 대표되는 세계 최강의 육군력을 자랑하고 있다. 독일 황립해군의 경우 빌헬름 2세의 세계정치의 일환으로써 창설되었으며, 오직 라이히의 지휘를 받는다. 팍스 게르마니카 시대에 라이히는 유럽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동맹국에 그들의 함대를 파견하여 해양 패권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 황립해군은 해상대대(독일어: Seebataillon 지바탈리온[*])이라 불리는 해병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다. 독일 황립공군은 제2차 전간기 시기 육군의 내부 조직이던 독일 제국 항공대가 독립하여 최고공군사령부와 함께 창설되었다. 이들은 황립해군과 마찬가지로 오직 최고공군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군대이다. 같은 시기 창설되었던 독일 해군항공분견대는 황립해군의 조직으로 남아있다.
라이히는 징병제 국가로 고등교육을 받은 18세 이상 남성은 2년 간 병역을 져야 한다. 또한 과거 독보적이던 예비군 제도를 활용하는 국가로 3단계의 예비군 단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전역 후 5년 동안은 예비군 부대에 입소해야했고, 39세까지 국방대(독일어: Landwehr 란트베어[*])에 소속되었다. 그 후 45세까지 국민군(독일어: Landstrum 란트스트룸[*])에 소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