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제국
중국어: 東亞合衆國
영어: United States of East Asia
བོད་ཡིག: ཤར་ཕྱོགས།ཡ་ཀྲོའུ་གླིང་མེ་གོ
언어 오류(ug): ئامېرىكا قوشما شىتاتلىرى شەرقىي ئاسىيا
동아합중국
19111936
국기 국장
표어 만민의 축복, 공화의 실현
萬民的祝福, 共和的實現
국가 쉬어가자, 다시 갈 수 있기에
Let's go, let's go again
我們走吧,讓我們再去吧。

1925년경 세력도
수도 신징新京 (합중국 수도)
정치
공용어 한국어, 표준 중국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몽골어, 류큐어 등등 소수 언어
정부 형태 연방제, 부분적 공화정, 부분적 입헌군주정, 광역 자치정
대총통大總統 장쭤린張作霖 (초대)
융희제隆熙帝 (2대)
당경숭唐景崧 (3대)
복드 칸博克多汗 (6대)
툽텐 갸초土登嘉措 (7대)
호자 니야즈和加尼牙孜 (최후)
입법 동아입법원東亞立法院(1911~1930)
동아협화회東亞協和會(1928~1936)
역사
 • 신해회의 1911년 12월 29일
 • 합중국 조약 체결 1912년 3월 11일
 • 호국대립 1915년 5월 ~ 1916년 6월
 • 시베리아 출병 1918년 2월 ~ 1920년 8월
 • 직봉전쟁 1922년 4월 ~ 6월
 • 국민혁명 1926년 7월 ~ 1928년 6월
 • 당산조약 체결 1928년 7월 12일
 • 관동전쟁 1928년 6월 ~ 1928년 9월
 • 4.17 사태 1935년 4월 17일 ~ 20일
 • 협화 시대 선언 1936년 1월 7일
인구
1936년 어림 105,768,858명
기타
통화 동아 달러(東亞.$) (E.A $)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대한제국
복드 칸국
예티샤르 칸국
봉천 군벌
류큐 왕국
타이완 민주국
티베트 왕국
동아제국

동아합중국(중국어: 東亞合衆國, 영어: United States of East Asia, བོད་ཡིག: ཤར་ཕྱོགས།ཡ་ཀྲོའུ་གླིང་མེ་གོ, 언어 오류(ug): ئامېرىكا قوشما شىتاتلىرى شەرقىي ئاسىيا)은 1911년, 신해회의(辛亥會議) 개회 이후에 합중국 조약(合衆國 條約) 체결로 성립된 동아시아(東亞細亞)의 연방 국가(聯邦國家)이다. 이로서 20세기 초 동아시아는 일본 제국(日本帝國)과 봉천 군벌(奉天軍閥)을 제외한 중화민국(中華民國)과 함께 독자적인 자치 정권을 수립한 소수 민족들의 국가를 주축으로 수립된 동아합중국의 거대한 3대 세력으로 정립되었다.[1]

1911년, 신해 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자, 봉천 군벌의 수장이자 봉천 내에서 강력한 실권자로 군림하게 된 장쭤린(張作霖)이 당시 순방영 통령(巡防营統領)이었던 우쥔성(吳俊陞)과 동삼성 총독(東三城總督), 조이손(趙爾巽)을 설득하여 동북 정권(東北政權)을 중심으로 한 독자 세력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외몽골(外蒙古)에서는 여러 왕공들의 추대로 대칸(大汗)으로 추대된 복드 칸(博克多汗)과 고종 독살사건(高宗毒殺事件)으로 새로이 즉위한 융희제(隆熙帝)의 대한제국(大韓帝國)간의 삼국 연계(三國連繫)를 바탕으로 합중국 체제가 수립되었고, 이후에 독립 정권을 수립한 티베트 왕국(吐蕃王國)과 류큐 왕국(琉球王國), 예티샤르 칸국(喀什汗國)과 함께 타이완 민주국(台湾民主国)까지 합세하여 거대한 연방 체제로 정립되었다.

이후 수립된 다민족 연방 국가는 만족공화(蠻族共和)에 의거된 자치 사회를 추구하였으나, 실질적인 중앙 정부의 권력이 유지되던 곳은 동북 정권을 위시한 장쭤린봉천당(奉天黨)이었다. 허나, 호국 대립(護國戰爭)과 직봉 전쟁(直奉戰爭)을 거치면서 대내외적 입지가 좁아진 봉천당은 결국 이들을 통솔하던 장쭤린우쥔성 등이 관동주(關東州)를 둔 일본 제국과의 대립 과정에서 암살됨으로서 와해되었으며, 이후에는 동아 협화회(東亞協和會)를 위시한 파시즘(法西斯主义) 성격의 독재 체제로 변질되었다가, 1936년에 대한제국의화제(義和帝)와 동북 정권계운제(啓運帝)를 위시한 황제 정권(皇帝政權)이 수립되는 협화 시대(協和時代)의 선언으로 동아제국(東亞帝國)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

1910년대

신해 혁명을 기점으로 동북 정권조이손장쭤린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보경안민(保境安民)을 위시한 보황주의(保皇主義)를 표방하여 강제 퇴위된 선통제(宣統帝)를 복위시켜려고 하였다. 이 당시 봉천성(奉天城)에서는 무창봉기(武昌蜂起)에 호응하기 위한 혁명단원들의 운동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징롄(吳景濂) 등의 당원 수령들은 동북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봉천 보안회(奉天保安會)를 조직하여 조이손을 내쫓고 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지방 정권을 세우기로 논의하였으며, 이러한 논의에 조이손장쭤린은 이들 회의에 참석하여 분통을 터뜨리며 이들 회의를 무산시킨 후 보황 세력 중 한명이었던 남천위(攝汝淸)를 앞세워 동북 정권의 앞날을 도모했다.

허나 장쭤린위안스카이(袁世凱)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정권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도리어 조이손을 이용하여 동북 정권의 독립과 만주(滿洲)에서의 자신만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계략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자신에게 충성심을 보인 장쭤린[2]에 대해 조이손을 대신하여 동삼성 독판(督辦)으로서의 자리를 보장하고 장석란(張錫欒)을 견제장치로서 동북 정권을 수하에 두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노령의 군인이었던 장석란은 도리어 장쭤린의 야심에 당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위안스카이의 정권에 대한 동아시아 사회의 안정을 명목으로 신해회의(辛亥會議)를 개회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주도한 복드 칸퇴그스오치린 남난쉬렌(那木囊蘇倫) 총리, 대한제국융희제(隆熙帝)와 이완용(李完用) 총리대신을 접견하여 '합중국 체제'의 구상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장쭤린은 "중원(中原)을 기반으로 삼은 대총통(大總統)을 제제(帝制) 선언케 하여 훗날을 도모합시다."라는 말로서 비밀리에 연합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윽고 이듬해 3월에는 을 중심으로 한 합중국 조약(合衆國條約)을 체결토록 종용하여 합중국 사회의 기반을 다졌다.

이 당시 대한제국고종 독살사건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기 시작했으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요청으로 제2차 서남전쟁(第二次西南戦争)에 개입하여 류큐 왕국(琉球王國)에 대한 형식적인 종주권을 획득한 것 외에는 전쟁 이후의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일당 정권(一堂政權)[3]에 대한 불신임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위안스카이러시아 제국(俄罗斯帝国) 등지에서 지속적인 정계 개입과 간섭과 함께 신해혁명의 발발로 국내에 공화파(共和波)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국제 상황까지 도달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을 것이 필요했다. 이때 장쭤린을 중심으로 한 동북정권과의 '합중국 체제'의 구상안은 국내에 불만을 외부로 해소할 수 있었음은 물론, 국격의 향상과 대외적인 제국주의적(帝國主義) 성격으로의 진출을 암시하는 통로로서 크게 각광받았으며, 이완용 역시 이러한 장쭤린의 노골적인 야심적 정책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외몽골의 경우에도 종교 수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겸임하는 신정 체제(神政體制)에 대한 몽골인들의 회의감과 지지부진한 근대화, 위안스카이몽골 지역에 대한 탈환의 야심은 러시아 제국의 일시적인 간섭으로 저지된 상태였으나 대한제국을 제외한 열강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상황에서[4] 장쭤린의 제안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장쭤린 역시 외몽골의 독립이 좌절될 시에는 러시아 제국위안스카이를 위시한 중화민국의 압박으로 동북 지대에 대한 권력의 자리를 포기하게 될 것임을 생각함으로서 외몽골의 독립을 최대한 비밀리에 지원하는 것으로 현재의 상황을 모면코자 했다.

1915년, 캬흐타 협정(布連斯奇協定)을 통해 외몽골의 자치권을 인정받는 동안, 위안스카이쑹자오런(宋教仁) 등의 정적을 암살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으며, 캬흐타 협정 체결 바로 전년에는 량치차오(梁啓超)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의회 해산을 단행함으로서 입법권을 장악하고 종신 총통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은연 중에는 군주론에 대한 여론을 확산시키면서 황제로의 추대를 꾀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의 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은 빌헬름 2세로부터 군주론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더불어 주변 측근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위안스카이는 제제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캬흐타 협정의 해가 끝나기 직전인 12월에 추대서를 받아 황위에 오름으로서 중화제국(中和帝國)을 수립하게 되었다.(홍헌제제, 洪憲帝制) 장쭤린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으나, 차이어(蔡鍔)를 중심으로 한 운남성호국군(護國軍)이 군주제에 염증을 느끼고 공화정의 복귀를 희망하는 호국 전쟁(護國戰爭, 혹은 호국 대립)이 발발함으로서 중원 각지에 엔시산(閻錫山)을 비롯한 군벌들의 난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위안스카이는 다급히 장쭤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는 "앞으로 중원의 땅과는 이별이기에 가제(假帝, 거짓 황제)께서는 알아서 하시옵소서."라는 전보를 남긴 뒤 돤즈구이(段芝貴)를 내쫓고 공식적인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의 건립을 선언하였으며, 장쭤린은 국부(國父)로서 합중국의 초대 대총통(大總統)과 함께 합중국군(合衆國軍)의 대원수(大元帥)로 추대되었다.

이후 호국 전쟁이 한창인 1916년부터 군벌이었던 장쉰(張勳)을 주도로 한 복벽파가 득세하기 시작하자, 장쭤린을 주도로 한 동아합중국은 직예성(河北省, 하북성)과 산둥성(山東省)을 호북성(湖北省)에서의 복벽론의 호응 할 것임을 언급함으로서 선통제(宣統帝)의 복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동아합중국과 북양군벌들은 '제1차 서주회의'(第一次 西州會議)를 열어 안휘도독(安徽都督) 니쓰충(倪毓楓) 등의 도움을 받아 복벽을 확고히 결의했다. 1917년 6월에는 '제2차 서주회의'(第二次 西州會議)를 통해 복벽 이후에 대한 논의로서 일본제국의 압제를 받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와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国)을 지원하고 중원 서부에 국가들을 통합할 것을 결의함으로서 '대동아사회권'(大東亞社會圈)을 주창하였다.

동아합중국의 구성국이었던 복드 칸국(博克多汗国)은 근대화 정비와 사실상의 무력 행위가 불가한 소규모의 군사력을 이유로 들어 중화에서의 복벽 운동에 대해 불참여를 선언했으며, 대한제국이완용 총리대신을 주축으로 '반중원 정책'(反中原政策)을 표방함으로서 실질적인 복벽 운동에서의 참여는 봉천당(奉天黨)의 군사력을 주축으로 한 제1 합중병단(第一合衆兵團)만을 활용하게 되었다. 한편, 191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을 빌미로 한 논쟁이 동아시아에도 전달되면서 장쭤린안휘군벌의 수장인 돤치루이(段啓瑞)는 대독 선전을 통해 연합국(聯合國)의 지지를 선언하여 구미 열강에 대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부원지쟁(府院之爭)를 통해 돤치루이를 해직시키는데 성공한 리위안홍(黎元洪)과 장쉰안휘성, 직예성, 산서성 등의 각 군벌들의 독립과 더불어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복벽 여론들을 조성한 뒤 합중국군에 도움을 얻어 선통제를 설득하여 정사복벽(丁巳復辟)을 통해 약 12일 간의 왕정복고를 선언했으나, 청 황실의 복벽 거부와 함께 서구 열강들의 복벽 거부 및 베이징(北京) 시민들의 반발에 굴복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돤치루이가 이끄는 반복벽파에 의해 실패되었다. 이에 장쭤린선통제와 일부 청 황실을 이끌고 만주로 향하여 부분적인 황권 회복을 도모했다. 이에 선통제가 '만주국 황제'(滿洲國皇帝)의 직함이라는 제한적인 형태로 다시 복권되었으나, 여전히 만주국에 대한 실권은 절대적으로 장쭤린이 주도하는 봉천당에게 억눌리게 되었다.

이후 1919년, 쉬수정(徐樹錚)을 위시한 변방군이 외몽골 출병(外蒙古出兵)을 선언하여 복드 칸국을 침공코자 하자, 장쭤린제1 합중병단제2 합중병단을 이끌어 니슬렐 후레(Нийслэл Хүрээ) 시내에 진주시켰다. 이에 쉬수정중화민국 쉬스창(徐世昌) 정권에 대해 전면적인 도전임을 밝힘으로서, 대립 구도가 극심해졌다. 한편, 1918년부터 시작된 러시아 지역에서의 적백내전(赤白內戰)이 치루어지자 제6 합중병단의 지휘관이었던 우쥔성대한제국 의용군(大韓帝國義勇軍)을 이끌던 민영환(閔泳煥)과의 독자적인 작전 수립을 통해 시베리아 출병(西伯利亚出兵)에 나서면서 사할린(樺太)과 바이칼 호(贝加尔湖)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파르티잔의 저항과 러시아 백군의 의지 상실로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간부들과 민권대표 33인(民權代表三十三人)을 주도로 한 한성 데모크라시(漢城民主)가 시작되었다. 대외적 정세가 중원의 군벌 난립을 제외한 장쭤린봉천당동북정권을 주도로 안정화되며, 이완용일당정권에 대한 지식인과 민중의 불만이 가속화됨으로서, 특히 시베리아 출병이 실패하면서 불필요한 군비가 지출된 점, 유기성(柳冀聖) 육군 참장(參將)과 현영운 육군 부장(副将)[5]을 중심으로 한 군정 내각(軍政內閣)이 성립되려 하자, 이에 반발한 김창숙(金昌淑), 이상재(李商在) 등의 지식인들은 '민주혁신, 헌정개혁'(民主革新, 憲政改革)을 외치며 호민운동(護民運動)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에 입헌민당(立憲民黨) 등을 발족하여 대한제국 군부(大韓帝國軍部)의 정계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입헌민당이 출범한지 60여 일만에 지멘스 뇌물공여사건이 벌어지면서 총사퇴를 결의함에 따라 1910년대의 민정 정권 수립 운동은 와해되었다. 다만, 입헌민당의 주도 아래 그 지위가 불안정하게 유지되던 종속국, 류큐 왕국의 처분이 최종적으로 합중국 체제에 가맹하는 것으로, 또 타이완 민주국류융푸(劉永福) 방변(幇弁)[6]의 요청을 받아들여 동북 정권복드 칸국과의 논의를 통해 남중국해(南中國海)에 합중국 세력을 넓히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1920년대

1920년 7월, 중원의 패권을 두고 합직전쟁(合直戰爭)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장쭤린직예군벌(直隸軍閥)과의 협력을 통해 안휘군벌(安徽軍閥)의 거두인 돤치루이, 쉬수정과 대립하였다. 특히나 외몽골 출병 이후로 합중국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요구하던 안휘군벌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을 내뱉은 장쭤린을 비롯하여 환계의 횡포에 참을 수 없었던 직예독군, 차오쿤(曹錕)은 물론이며 강소독군 리춘(李純), 호북독군 왕잔위안(王占元), 강서독군 천광위안(陳光遠) 등의 직계군벌들은 합중국군의 대원수였던 장쭤린을 중심으로 흑룡강 방면을 통솔하는 제3 합중병단순열신(孙烈臣), 길림 방면의 제7 합중병단을 이끄는 포귀경(鮑貴卿)과의 이른바 '합직 연맹'을 구성한 뒤 비밀리에 회동했다. 점차 직계와 안휘간의 대립이 극도로 치열해지자 위기를 느낀 쉬수정복드 칸국 근처에 주둔해 있던 병력들을 베이징으로 회군시켰으며, 이에 대립이 극단화 되어 중원 통일 및 세력 확장에 우려를 표한 쉬스창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합중국 대총통, 장쭤린을 불러들여 현재의 난국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장쭤린 역시 이에 응하였다. 여기서 장쭤린중화민국의 시국 해결을 위해 진윈펑(靳雲鵬) 총리의 복직을 비롯하여 내각 개조, 쉬수정의 병권 박탈 등을 요청하였고, 쉬스창 역시 해당 방안을 채택하려 했으나, 돤치루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

화해 및 중재가 실패로 끝나간 장쭤린을 두고 쉬수정돤치루이에게 "를 비밀리에 압송하여 처형시켜야 한다."라고 말하며 실제로 이를 진행시키려 하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장쭤린이 화물 열차를 타고 톈진(天津)을 거쳐 봉천성으로 돌아오면서 실패하게 되었다. 파국으로 돌아간 중화민국의 내부 상황에서 결국 쉬스창돤치루이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북 정권(공식 국명은 만주국)과 직계 군벌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허나 안휘군벌 소속으로서 서로군 총사령관이었던 취퉁펑(曲同豊)이 우쥔성제11 합중병단[8]에 의해 붕괴되고, 정국군 총지휘관 돤즈구이(段芝貴)가 싸울 의지를 잃고 베이징으로 후퇴하면서 안휘군벌은 와해됨에 따라 전쟁은 종전되었으며, 진원펑 내각이 복권되고 직계 군벌이 중원 천하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뿐더러, 장쭤린 역시 합중국 내부에서 확고한 자리를 유지하고 외부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

허나 봉천당직예 군벌간의 중원을 두고 영향권에 대한 행사가 양분됨에 따라 분열되었으며, 결국은 1922년 4월을 기점으로 직봉전쟁(直奉戰爭)이 이어지게 되었다. 직예 군벌우페이푸(吳佩孚)는 "중원 통일로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는 작자가 도리어 장애를 만들고 있다."라고 비난하면서 "장쭤린이 죽지 않으면 중원의 통일은 결코 불가할 것이다."라고 표명한 후 펑위샹(馮玉祥)에게 후방 각군의 통제권을 맡긴 뒤 합중국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장징후이(張澄煇)를 합중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장신점(長辛店) 사령부를 설치한 뒤 직접적인 대립 구도가 이어졌고, 직예 군벌합중국군 우익을 우회하여 앙향과 장신점 사이에 있는 남강와(南崗窪)의 합중국군을 공격함으로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합중국군은 전열이 무너졌으며, 제1 합중병단 산하의 장락산 여단과 주익청 기병단을 투입하여 일시적으로는 모면했으나 외몽골 방면에서 양조동 여단을 지원해 온 제16 사단이 피로에 누적됨으로서 격퇴되고, 과거 직계 군벌 소속이었으나 흡수하게 된 일부 병단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선은 붕괴되었다. 이에 장쭤린은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인정하고 총퇴각령을 발표하여 산해관(山海關) 북부까지 전력을 후퇴하였다. 이 시기에 직봉전쟁에서의 패전을 두고 장쭤린대총통 직책을 사임하고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융희제(隆熙帝)를 새로운 대총통으로 추대하였다.

1930년대

최대 세력권과 구성국

합중국군

합중국의 식민지 및 점령지

각주

  1. 다만 중화민국의 경우에는 북양정부(北洋政府)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군벌 사회로 난립했다가 1928년을 기점으로 국민혁명(國民革命)이 완수되면서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을 주축으로 한 군벌 연합 정권이 겨우 수립되었으며, 일본 제국 역시 도쿠가와 막부국(徳川幕府國)와 하코다테 철검단(函館哲劍團)으로 일본 열도가 양분된 형태를 띄고 있다.
  2. 이떄 장쭤린은 자신의 야심을 보이지 않기 위해 위안스카이를 만날 당시에 술을 마신 채 촌놈 구식군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면서 아부를 떨음으로서 자리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3. 이완용을 위시한 근황 성격의 파벌을 통틀어 의미하는 용어로서, 1910년대의 대한제국의 정치는 독립 협회(獨立協會)와의 잦은 대립이 주가 되었을 정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4. 물론 대한제국은 중견 국가였으며, 외몽골의 독립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상황'(러시아 제국의 보호 및 중화 국가에 대한 자치형태)만을 허용하는 분위기였다.
  5. 타국 군인 계급을 기준으로 각각 소장(小將), 중장(中場)에 속한다.
  6. 타이완 민주국총통(總統) 직책을 대행하는 직책을 말한다.
  7. 이는 돤치루이의 충실한 심복인 쉬수정의 병권이 박탈되는 것에 대한 영향력 약화를 우려한 것이었다.
  8. 시베리아 출병 이후 남아있던 제6 합중병단 소속의 잔존병과 제8 합중병단을 통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