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후소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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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일) 17: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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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神聖扶桑帝国
영어: Sacred Fuso
신성 후소 제국
국기 국장
표어 帝国永久なるべし
제국은 영원할 것이다
국가 신대봉축가
수도 도쿄도(東京都)
정치
공용어 일본어(日本語)
천황(天皇) 키요히토
태정대신(太政大臣)
의정대신(議政大臣)
판무대신(判務大臣)
휴우가 신지로
타테야마 와타루
시가 카즈나리
역사
정부수립  
 • 천황제 복고 (겐무 신정) 1333년
 • 메이지 신정 1868년
 • 쇼와 유신 1947년
지리
면적 414,108㎢
내수면 비율 0.79%
시간대 UTC (UTC+9(도쿄표준시), UTC+8(서부표준시))
DST 없음
인구
2016년 어림 158,379,040명
2017년 조사 158,382,044명
인구 밀도 382.47명/㎢
경제
GDP(PPP) 2017년 어림값
 • 전체 6조 5273억 9917만 9372$
 • 일인당 41,213$
HDI 0.896
통화 후소 엔 (SFY)
기타
ISO 3166-1 392, SFS, SF
도메인 .sf
국제 전화 +81


신성 후소 제국(일본어: 神聖扶桑帝国, しんせいふそうていこく 신세이후소테이코쿠[*], 영어: Sacred Fuso)은 동아시아의 후소 열도와 타이완 섬, 그리고 그 부속 도서 6,800여 개를 영토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서쪽에는 1969년 부산 조약을 통하여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한 조선공화국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러시아 연방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1947년 쇼와 유신을 통하여 천황을 절대 권력자로 하는 흠정 헌법이 제정된 이후로 신성 후소 제국의 정치 체제는 바뀌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른 국가의 사회 통제가 국제 사회로부터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수도는 도쿄도(東京都)이며, 국기는 일장기, 국가는 신대봉축가(神代奉祝歌), 공용어는 일본어이다. 사용 문자는 한자, 히라가나, 가타카나이다.

국호

후소(扶桑)이라는 명칭은 최초에는 중국의 고대 전설에 나오는 거대한 나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산해경은 동방의 바다 가운데에 흑치국이 있으며, 그 북쪽에 후소라는 거대한 나무가 있고 바로 그곳이 태양이 나오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정사 24서중 하나인 양서(梁書)에서는 후소의 위치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왜국의 동북쪽 3천여 킬로미터에 문신국 (文身国)이, 다시 그 동쪽 5천여 킬로미터에는 대한국(大漢国)이, 다시 그 동쪽 8천 7백여 킬로미터에 비로소 후소국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후소라는 나무는 거대하고 특별한 나무가 아니라, 그 지역에 많이 자라는 나무로서 나라의 이름의 유래가 된 것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후소국에서 왔다고 주장했던 케이신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한 증언에 의한 것이고, 다른 사서와의 교차 검증 과정에서도 각국의 명칭과 위치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어왔다.

고대와 중세의 후소에서 스스로 이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것은 죠간(貞観) 원년, 즉 859년의 일이다.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주로 외교관계에서 내지는 대외적으로 중국을 의식하고 쓴 한시나 불교와 관련해 언급할 때였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은 그 전까지 사용되던 왜(倭), 일본(日本) 등의 명칭을 모두 후소(扶桑)로 대체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에도 이 명칭이 정착하여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다만, 후소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여전히 일본어(日本語)로 불린다.

역사

고대

후소의 고대 시대를 언제까지로 여겨야하는 지는 학자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가적 봉건제가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이전까지를 고대로 칭하는 의견이 대세이다.

구석기 시대

해당 내용의 본문은 신성 후소 제국/구석기 시대입니다.

현재의 후소 열도 지역에 인류 자체가 도달한 것은 늦어도 8만년 전 경으로 추정되지만, 현생 인류가 도달한 것은 4만년 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후소 열도는 대륙과는 얕고 좁은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오래된 유물로서 확실히 인정받은 것은 약 4만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석기로, 유럽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이 석기들은 구석기 후기의 유물이다.

이 시기에서 주목할 만한 유물로는 국부 마제 석부(局部磨製石斧)가 있다. 이것은 나무로 만든 자루와 연결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농경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한 곳에 정착하여 완전한 농경 생활을 이루는 것은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주로 일정한 영역 내를 이동하며 수렵/채집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드물게는 석기가 제작되거나 석기를 이용한 생활이 이루어진 장소를 주위에 일정 기간 거주했는데, 이러한 장소를 블록이라고 칭한다. 다만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정주했다고 부를 수 있을만큼 오랜 시간 한 장소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살지는 않았다.

이후에는 동일한 종류의, 동일한 기능을 하는 석기가 지방별로 여러 형태로 나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석기의 형태와 그 제작법이 복잡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네 가지 부류로 석기들을 나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형태와 제작 기술의 발달은 소집단간의 교류와 지식의 축적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 역시 크게 이 네 가지 권역 내에서 각각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변화는 도구를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2만년 전부터 1만 7,8천년 사이의 기간에는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대형 동물들이 사라져가고, 이에 따라 주요한 동물 자원은 작고 개체 수가 많은 동물로 바뀌어갔다. 이 때 석기의 변화의 특징으로는 첨두기(尖頭器)의 등장과 나이프형 석기의 소형화 및 소멸이 있다. 이러한 첨두기는 목재와 연결해서 창의 형태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후기 구석기 시대 후반에는 잠시나마 한 곳에서 모여 생활을 하는 일이 적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대형 동물의 감소와 그에 따른 노동력 결집에 대한 필요성의 감소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1만 7,8천년 전에 이르면 최소한의 석재와 도구로 가능한 많은 도구를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것은 기후의 온난화로 인해 계절의 변화가 발생하고 빈번하게 거주지를 옮기는 형태의 생활이 퍼져나가게 되면서 생활의 기동성과 유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경향과 기술은 유라시아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나아가, 오카야마 현의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를 분석한 결과로부터, 당 시기의 후소 열도의 사람들은 장기간, 원거리의 이동 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조몬 시대

조몬 시대(縄文時代)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이 시기의 것으로 밝혀진 토기들이 새끼줄 무늬, 즉 승문(縄文)을 가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토기는 채집한 식물의 보관이나 조리를 위하여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몬 시대에는 단순히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의 토기만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을 한 조몬 토우 (縄文 土偶)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모양이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대에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하여 후소 열도가 대륙과 완전히 분리되었고, 후소 열도는 네 개의 큰 섬으로 나누어졌으며, 해안선이 길어지고 내륙이었던 지역까지 바다가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로 활동이 증가하였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유적은 패총(貝塚)이다. 이러한 패총에서는 세계 다른 국가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뼈와 석기 등이 함께 발견되어 단순한 자연의 유적이 아닌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증명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5~6명 안팎의 소규모 가족 단위 생활을 했는데, 수혈 주거(竪穴住居)방식이 널리 보급되었다. 위와 같은 조몬 시대의 문화와 생활 방식은 후소 열도에서 고루 보이는 것이다. 또 후소 열도가 대륙과 고립되면서 점점 후소 열도만의 독특한 신석기 문화가 발달해갔다.

야요이 시대

보편적으로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약 600여 년 간을 야요이 시대(弥生 時代)라고 부르는데, 야요이라는 명칭은 최초로 이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를 나누는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논농사, 도구의 변화 (철기와 청동기의 도입), 환호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도입된 것은 후소 지역 내에서 일어난 자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조몬 시대 후기에 일어난 지구 규모의 기후 변화로 인한 인구 이동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주로 한반도, 특히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해류를 타고 큐슈 지방으로 건너온 농경민 집단에 의해 일본 사회에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실 조몬 시대에도 후소 열도에서 쌀이나 콩류가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화전 방식으로 작물이 경작되었던 것에서 탈피하여 점점 논농사 방식이 확산되어 갔는데, 논농사는 화전과 달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집단과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사적 흐름과 동일하게 강력한 지도자가 탄생하기도 했다. 지배집단은 과시적인 무덤을 짓거나 청동기 등을 사용함으로써 위세를 드러냈다.

나아가 집단 의식이 확산되면서 자신의 집단을 위해 헌신하되 타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보편적인 사고관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이전의 전체적으로 둥근 무기와 달리 끝과 옆에 날이 서있는 무기가 발굴되는 점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또한 이러한 살상 무기를 가진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마을 주변에 환호를 파기도 했는데,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에서 복원된 마을의 모습에서도 주변에 빙 둘러진 환호를 볼 수 있다.

고훈 시대

고훈 시대 (古墳 時代)는 보통 3세기 중반부터 7세기까지를 가리키는 말로, 이러한 명칭이 붙은 이유는 각지에 전방후원분이라는 거대한 고분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중앙의 야마토 정권이 고대 중앙 집권 정권으로 성장해가는 시기였으며, 도호쿠 지방에서 큐슈 지방까지 전방후원분이 고루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각지의 호족들이 이러한 무덤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에는 외부와의 교류가 돋보이는데,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에 전란이 잇따르자 백제와 신라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각종 기술과 선진 문화가 전해졌는데 이 유민들을 도래인(渡来人)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 사회에서 강력한 권력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시대부터 백제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교류했으며, 5세기에는 야마토 오왕(倭五王)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자와 유교가 전래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일본 내의 변화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의 극히 적은 내용을 제외하고는 신뢰할만한 자료가 없으며, 이 시기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일본서기의 신뢰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고 있다. 다만 야마토 정권이 일본 내의 여러 호족이나 유력 씨족이 오오키미(大王)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성립된 일본 최초의 통일 왕권 조직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아스카-하쿠호 시대

아스카-하쿠호 시대 (飛鳥-白鳳時代)는 보편적으로 6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걸친 시기를 이르는 말이며, 아스카 문화와 하쿠호 문화가 번성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명칭이 붙여졌다. 6세기 말에 조선 반도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어 불교 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시기에 불교 문화와 함께 전래된 한자 발음을 오음(吳音)이라고 한다. 현재도 불경이나 불교 용어를 읽을 때에는 이 시기의 한자 발음이 사용되고 있다.

아스카-하쿠호 시대 초반에는 도래인 계열의 씨족이었던 소가 씨가 다른 씨족들을 제압하고 정치적인 실세가 되었으며, 황실의 외척으로서 그 권위를 떨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유명한 황족으로는 쇼토쿠 태자가 있는데, 쇼토쿠 태자는 백제로부터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불교를 후원했으며, 12게의 관위를 제정하고 십칠조헌법을 만드는 등 고대 후소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가 씨의 세력은 645년 을사의 변을 거쳐 나카노오에 황태자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이후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덴지 천황으로 즉위하고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 관한 조칙을 발표했다.

646년에 이루어진 다이카 개신은 율령체제와 문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개혁조치로, 공지공민제, 국군제, 반전수수법, 조용조 세제 등의 도입을 골자로 한다. 그 외에도 관위 제도를 개정하거나 신분을 가리지 않는 예법이 제정되는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으로부터 전래된 관료제와 유교적 사회 제도를 수용하여 일본식으로 변형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지고 단시간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7세기 중후반부터 8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일련의 개혁적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학계의 주류이다.

이후 덴지 천황의 후계를 둘러싸고 672년에 임신의 난이 벌어졌으며, 이를 통해 덴무 천황이 즉위했다. 덴무 천황의 후계자인 지토 천황을 합쳐 덴무-지토조라고 부를 정도로 덴무 천황과 지토 천황의 치세는 후소의 사회, 역사, 그리고 문화의 원형이 만들진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움직임은 덴무 천황의 통치 방향을 계승하여 완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천황'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것이 덴무 천황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 이 시기는 겐무 신정 이전까지의 시기에서 천황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라 시대

나라 시대(奈良時代)는 제 43대 겐메이 천황이 710년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한 때부터 794년에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기에 조정은 율령체제를 바탕으로 한 전제적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며 고대 국가로서의 모습을 대부분 완성했다. 또한 후지와라 가문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견당사와 견신라사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크게 유행한 문화를 '당풍 문화'라고 한다. 헤이조쿄 역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하여 건설한 계획 도시로, 공무원과 그 가족이 거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당과 서역의 문화 요소와 불교 문화가 후소의 고유 문화와 융합하여 형성된 문화를 덴표 문화라고 하는데, 그 배경에는 국가의 부가 집중되며 황족과 귀족의 부가 급격하게 증대된 시대 상황이 있다. 때문에 덴표 문화는 귀족적이고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또한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 등의 사서와 문학 서적이 발간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호쿠 지방의 아이누 민족(에미시)과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었으며, 귀족 세력의 발전과 사원 및 신사 세력의 발달로 인해 황권이 위협받는 일이 잦았다. 간무 천황인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천도를 추진하여, 헤이안쿄를 건설하여 794년에 천도하였고 헤이안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平安 時代)는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로 천도한 794년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된 1185년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간무 천황은 나라 시대의 정치적 불안과 잦은 내분을 일소하고 황권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헤이안쿄로 천도하였으나, 헤이안쿄로 천도한 이후 귀족과 승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황권은 약화되었다. 또한 후지와라씨는 부패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또한 후지와라씨의 독단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생활고로 도적이 된 백성들이 치안을 불안정하게 하는 등, 헤이안 시대 말기로 가면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전반을 안정시켜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이들이 무사 계급이다.

나라 시대의 중앙집권적 율령 정치를 계승한 것은 헤이안 시대 전기 뿐이었다. 율령제의 핵심 기반인 공지공민제는 이미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장원제가 확산되었고 토지 지배 체제도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지방의 유력자에게 토지에 대한 권한 전반을 위임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국사(國司)가 이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렇게 지방분권적 경향이 확대되면서 중앙 정부의 부담이 줄어들고 정치는 안정되었지만, 후지와라씨가 실권을 장악하고 고위직을 세습하면서 섭관정치(摂関政治)를 펼쳤다.

이후 11세기 후반에 이르면 태상천황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무를 돌보는 원정(院政)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황가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회복하지만, 이들은 대규모의 장원을 소유하였으며 혈연 관계로 엮인 후지와라씨와 유착하여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국사가 징세권을 행사하는 공령(公領)과 특정 가문이 독점적으로 징세권을 행사하는 장원(荘園)이 분리되며 장원공령제로 불리는 토지 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반란이나 불안정한 치안,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무사 씨족이나 하급 무사들이 자주 동원되었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하게 상승하게 된다. 나아가 토지 소유자인 지방의 무사들과 지방의 권력을 쥐게 된 무사 씨족이 유착하여 초보적인 봉건 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르고, 이러한 지방의 토지 소유자들은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또한 국사들 역시 이들과 엮어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며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1세기 말, 고산조 천황에 의한 일련의 개혁 조치에 의해 위와 같은 폐단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으나, 그의 손자인 토바 상황은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고 장원을 확대하는 데 집착하여 이를 무위로 돌렸고, 사회의 불안과 지방 분권화를 촉진시켰다. 이에 동반하여 황실의 권위과 약화되고 중앙 정부가 정당성을 잃어갔는데, 상황은 무사들에게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불만을 억누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타이라 씨는 최초의 무가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시기 타이라 일족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 사후에 미나모토 씨가 반기를 들었고, 이들 사이의 싸움에서 미나모토 씨가 승리했다. 그리고 미나토모노 요리토모가 무가 정권을 수립하면서 헤이안 시대가 막을 내리고 가마쿠라 막부가 열리게 된다.

이 시기에는 견당사의 파견이 중지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당풍 문화와는 다른 문화가 발전하는데 이것을 국풍(国風) 문화라고 부른다. 이는 비단 정치와 관복과 같은 공적 영역 뿐만 아니라 생활과 관련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모노노케(物怪)나 음양도와 같은 미신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불교가 융성하여 대사원이 건립되었고 이들은 장원을 소유하고 자체적인 군사력으로 승병을 보유하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마쿠라노소시(枕草子)와 같은 수필 문학이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같은 모노가타리(物語) 문학이 발달하여 유행하였고, 귀족들은 31자 내외의 단가인 와카(和歌)를 지어 불렀다. 9세기에는 와카를 수집하여 기록한 서적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중세-근세

신성 후소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와 근세는 가마쿠라에 막부가 설립된 시기로부터 메이지 신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기간이라고 여기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인 의견이다. 세분화하여 에도로 천도한 이후의 시기를 따로 근세로 구분하기도 한다.

가마쿠라 막부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타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이 무사 가문으로 쌍벽을 이루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1159년에 일어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 의해 미나모토 가문의 수장이었던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처형당하며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위시로 한 타이라 가문이 최고의 권세를 가진 가문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타이라 가문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아있었다. 1177년에 발생한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이나 1180년에 일어난 왕자 모치히토의 난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시기가 되면, 미나모토 가문은 여전히 타이라 가문에 비해서는 열세에 있었지만 충분히 세를 회복하여 타이라 가문에 반기를 들게 된다. 미나모토 가문은 모치히토 왕자의 봉기에 동참하여 군세를 일으켜 본격적으로 타이라 가문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양 가문의 성씨를 따서, 이 전쟁을 겐페이갓센(源平合戦)이라고 부른다.

1183년에 이르면,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간토 지방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한편 타이라 씨를 몰살시키기에 이른다. 이 때 삼종의 신기 역시 수몰될 뻔 했으나, 기적적으로 수몰만은 면하였다. 이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던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기에 이른다.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조정은 여전히 조정 소속의 장원에 대해서 확실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한편 가마쿠라 막부 역시 슈고와 지토를 통하여 막부 소속의 쿠니와 무사들에 대해서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이원적인 지배 체제는 죠쿄의 난 이후에 막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며 막을 내리게 된다.

죠쿄의 난으로 교토의 조정이 실권을 잃게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미나모토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었던 호죠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고 싯켄 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미나모토 가문은 실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내부의 권력 투쟁과 원나라의 침입 등이 원인이 되어 멸망하기에 이른다.

겐무 신정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가 약화되어가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헤이안 시대의 천황 중심 국가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1324년과 1331년에 난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당했고, 자신은 오키 섬으로 유폐되고 말았다. 그러나 곧 반막부세력은 고다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규합했으며, 1333년에는 그를 오키 섬에서 탈출시켜 거병하기에 이른다. 막부는 이를 진압하고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파견하였으나 그 역시 막부를 배신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서게 되었다.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등의 연합군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와 호죠 씨 세력은 멸망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가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일련의 개혁 조치를 취하는데, 이 개혁 조치들을 묶어 겐무 신정이라고 부른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막부・관백・인세이・섭정의 폐지, 구 군국령의 회복, 사원 토지 몰수, 오판 재심령 등의 발효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무사들이 기존에 가졌던 토지 소유권을 일단 무효로 하고 조정의 인정을 받아야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으며, 조정의 행정력이 무사들의 쇄도하는 소유권 인정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이 이외에도 무츠 쇼군부(陸奥将軍府)와 가마쿠라 쇼군부(鎌倉将軍府)의 성립을 통한 도호쿠 지방에 대한 지배권 확립 노력, 새로운 토지 조사의 실시, 지폐와 화폐 발행 계획 등이 있었다.

겐무 신정의 위기

그러나 급격한 계획에 따른 혼란과 겐무 신정 참여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 차이, 가마쿠라 막부 잔당 세력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신정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우선 가마쿠라 막부를 없애는 데 큰 공을 세운 모리요시 친왕과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서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반목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경우, 호죠 씨의 영지를 받고 동생인 타다요시가 가마쿠라 쇼군이 되었고, 모리요시 친왕의 경우에는 군사적 시위 끝에 정이대장군 직을 얻었다. 모리요시 친왕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이것이 실패하고 오히려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죄를 쓰고 가마쿠라에 유폐된다.

또,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시나노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키타죠 씨의 잔당 세력이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乱) 등이 있다. 나카센다이의 난에서는 가마쿠라가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가마쿠라가 점령당한 혼란의 와중에 모리요시 친왕이 살해당한다. 한편,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정이대장군 겸 총추포사(総追捕使)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경계하여 요구를 거절하고 나리요시 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결국 고다이고 천황의 칙령 없이 반군과의 싸움에 나서게 되고, 조정으로부터 뒤늦게 정동장군의 직책을 받게 된다.

이후 다카우지는 성공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였지만, 고다이고 천황의 귀경 명령을 거부한 채로 가마쿠라에서 천황의 칙령이 없이 논공행상을 실시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카우지는 당시 교토의 경비를 담당하던 무사소(武者所)의 장관이자 천황 측의 무사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장인 닛타 요시사다를 간신으로 몰아 제거할 것을 천황에게 요청한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오히려 요시사다로 하여금 다카우지를 공격하여 토벌할 것을 명하게 되고, 북쪽에서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이 이에 응하여 일부 세력이 가마쿠라로 남하하기에 이른다.

다카우지는 군사를 보내어 이들 세력과 맞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기에 이르고 결국에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결국 다카우지는 교토 조정에 맞서서 공식적으로 반기를 들기에 이른다.

다카우지의 패배

이후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군을 격파한 다카우지는 그 기세를 몰아 교토를 점령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의 공격에 의해 다카우지는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그는 다시금 교토를 점령하기 위하여 교토에 보다 가까운 셋츠에 진을 치는데, 요시타다와 아키이에 등이 이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다. 이들은 테지마가와라(豊島河原) 지역에서 맞붙었는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군이 다카우지 군을 격파하고 다카우지 군은 패주하게 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하리마의 아카마츠 노리무라, 히젠의 쇼니 요리히사 등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규슈의 많은 슈고들은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서 있었고, 키쿠치 타케토시 등이 이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후 요리히사는 영토를 빼앗기고 자살하였으며, 다카우지는 타케토시가 이끄는 군대와 타타라하마(多々良浜)에서 맞서게 된다. 이 때, 타케토시의 휘하에는 약 2만여 기, 다카우지의 휘하에는 약 2천여 기의 군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상세한 숫자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다카우지가 몹시 불리했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카우지는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 가운데 몇몇 무장이 타케토시를 배신하여 다카우지 군에 합류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다카우지가 싸움에서 패배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할복 자살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교토 시대

근대

현대

~1949년

아가냐 조약

헐 노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미국 외무부의 비공식적 제안은 제국 정부 내에서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제안의 내용이 후소 제국에 극히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조건 없이 부중전쟁 이전으로 국경선을 회복시키는 것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군은 제안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중의회에서도 격렬한 찬반 논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쇼와 천황이 제안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측을 지지함에 따라, 결국 1942년 미합중국의 괌에서 양국의 공동 제안 형식을 취하여 제 1차 괌 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괌의 아가냐 지역에서 서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가냐 조약이라는 별칭으로도 부른다. 쇼와 천황이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1차 괌 조약의 체결은 후소 제국 국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정국의 불안을 가져오게 된다.

6구의 변

이에 1946년 12월 9일, 이리자키 타카시로 대좌를 지도자로 하는 반란 세력이 4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치요다 구를 비롯한 도쿄 내 6개 구의 주요 지점에 병력을 전개하였는데, 이를 6구의 변이라고 부른다. 또 주모자인 이리자키 대좌의 이름을 따 이리자키 반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후소 황군이 미처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 중의원과 대장성을 비롯한 일부 국가 주요 시설과 대로를 점거하고 제 1차 괌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였으나, 천황이 직접 나서 이들을 역적으로 규정하자 기세가 크게 꺾이게 되었다. 결국 황거 수비대와 본토 각지의 부대가 소탕 작전을 펼쳐 반란 개시 13일 만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리자키 대좌를 비롯한 좌관급 주모자 10여 명은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1950년 12월 30일에 모두 처형되었다.

쇼와 유신

결국 1947년 10월 28일에 쇼와 천황과 내각총리대신 사쿠라자카 타케히토의 주도 하에 신성 후소 제국 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시무슈 조약

제 1차 괌 조약의 영향으로 정국 불안과 경제난이 계속해서 이어짐에 따라, 후소 제국은 1949년에 시무슈 조약을 통하여 그다지 큰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던 사할린 남부(카라후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당시 남사할린에 거주하던 후소 국적자 중 대다수가 조약의 내용에 의하여 후소 영내로 추방당하였다. 이 조약의 결과로 후소 제국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각종 자원을 제공받게 되었고, 카라후토청이 폐지되며 치시마 열도는 치시마 현으로 재편되었다.

1950~1968년

타이호쿠 항쟁

결국 1956년에 타이완 독립 민주시민회와 그 지도자인 리쉬치엔(李世权, 리세권, リ•セゴン)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 시민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를 타이호쿠 항쟁이라고 부른다. 신성 후소 제국 내에서는 8월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다.

타이호쿠 항쟁에는 30만여 명에 달하는 시민이 참가했는데, 메이지 거리 사건에서 육군 병력이 비무장 시민들을 대상으로 발포함에 따라 시위가 격화되었고, 시민들은 자위적 조직을 구성하는 한편 시내 일부를 점령하며 무장 항쟁에 나섰다.

제 2차 괌 조약
블라디보스토크 사건

국경 분쟁은 점점 확대되어 만주국군과 만주 주둔 후소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코앞까지 진격하기에 이르고, 일시적으로 후퇴하였던 소련군 역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가 핵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던 후소, 소련, 미국 정부는

1969~

부산 조약

부산 조약의 결과, 원산 군항과 청진 군항 및 청진 육군 기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조선 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정치

전체 정부 조직

후소 제국 정부의 조직도.

후소 제국의 정부 조직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주제 정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제국 정부는 외견상 행정, 입법, 사법의 세 분야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분야의 최종 결정 권한은 오로지 천황에게 집중되어 있다.

천황 (天皇)

천황(天皇)은 신성 후소 제국의 최고 권력자이며, 그 권력은 일본 신화에 기초하여 정당화되어왔다. 일본 신화에 의하면, 천황은 신의 자손으로서 신으로부터 지상 세계를 통치할 것을 명령받은 진무 천황의 직계 후손이며, 그 지위는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의 의사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단 한 번도 복수의 천황이 옹립되거나 타인이 천황의 자리를 참칭한 적이 없는데, 이를 만세일계 (万世一系)'라고 부른다. 신성 후소 제국 헌법 제 1장에 따르면, 천황은 행정, 입법, 사법에 걸쳐 전권을 가지고 있으며,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칙령을 독단적으로 공포하여 발효시킬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절대적인 군 통수권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천황의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며 절대적인 권한을 천황대권 (天皇大権)이라고 칭한다.

메이지 신정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천황들이 즉위하였다.

  • 제 122대 메이지(明治) 천황 (1852-1912 / 재위 1867-1912)
  • 제 123대 다이쇼(大正) 천황 (1879-1926 / 재위 1912-1926)
  • 제 124대 쇼와(昭和) 천황 (1901-1989 / 재위 1926-1989)
  • 제 125대 헤이세이(平成) 천황 (1933-2017 / 재위 1989-2017)
  • 제 126대 키요히토 (1980- / 재위 2017-)

"천황"이라는 명칭

고대에는 야마토 정권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로 오오키미 (大君), 스메라기(須賣良伎)' 등으로 불렸으나, 다이호 울령 (大宝律令)에서 처음으로 "천황"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는 법률상의 표기였을 뿐, 실제로는 스메미마노미코토 등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대내외적 칭호를 모두 '"천황"으로 통일한 것은 고다이고 천황이다.

천황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다이호 율령의 성립을 즈음하여 당 태종이 천황이라는 칭호를 자처했기때문에 그것을 보고 수입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도교적 용어인 천황대제(天皇大帝)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천황가

천황가의 수장은 신성 후소 제국의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며, 또한 후소 신토의 최고 제사장이다. 천황가는 창세 신화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御神)를 시조로 삼으며, 최초의 천황이라고 여겨지는 진무(神武) 천황은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의 6대손이다.

또한 천황가로부터 타이라(平) 가문과 미나모토(源) 가문이 직접 분가했으며, 다시 이들 가문으로부터 분가된 가문이 수십 개에 달하므로, 진무 천황은 후소의 대다수 귀족 가문에 있어서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진무 천황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정말로 그 이후에 즉위한 천황들에 대해서 만세일계라고 칭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신성 후소 제국의 학계에서는 진무 천황의 존재와 천황가의 만세일계가 실증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해외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지극히 회의적이다.

현재 천황가의 수장은 현직 천황인 키요히토(清仁)이며, 연호는 도우닌(道仁)이다.

내정황족

내정황족은 황후, 태황태후(천황의 조모), 황태후(천황의 모), 황태자, 황태자비, 황태자의 자녀를 가리킨다.

현재의 내정황족은 다음과 같다.

  • 메구미 황후 (1988.07.20~)
  • 토요노미야 노리히토 (豊宮 儀仁) 친왕 (2013.2.26~)
  • 이즈미노미야 타카코 (泉宮 貴子) 내친왕 (2016.9.8~)


세습친왕가

본래 천황의 3대손부터는 친왕의 칭호를 잃고, 황족의 일원으로 남지만 왕의 칭호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후손 단절 등의 위험이 제기되어 대를 이어도 친왕 칭호를 잃지 않는 가문이 만들어졌다. 이들 가문을 세습친왕가라 하며,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세 가문과 쇼와 시대에 만들어진 한 가문을 합해 네 가문이 있다.

  • 후시미노미야 (伏見宮)
  • 아리스가와노미야 (有栖川宮)
  • 간인노미야 (閑院宮)
  • 스루가노미야 (駿河宮)

미야케

  • 아키시노노미야 (秋篠宮)
  • 히타치노미야 (常陸宮)
  • 미카사노미야 (三笠宮)
  • 타카마도노미야 (高円宮)
  • 아즈마바라노미야 (東原宮)
  • 카미사토노미야 (上郷宮)

궁내부 (宮内部)

궁내부 (宮内部)는 황실과 관련된 사무를 전담하는 기관으로서, 천황 직속 기관이며 그 최고 책임자를 시종장이라고 한다. 관련 법률에 따르면, 시종장에는 남성만이 임명될 수 있다. 궁내부는 내시청, 의례청, 신기청, 출납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시청(内侍庁)은 천황가의 생활과 업무를 직접 보조하는 기관으로, 요리, 청소와 같은 단순 생활보조 업무부터 천황의 잡무를 보조하는 비서실까지 수 많은 인원이 속한, 궁내부 내에서 가장 거대한 기관이다. 시종장은 내시청장을 겸한다. 의례청(儀礼庁)은 천황가의 예전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천황가의 이동이나 행차시의 의전에 대해 자문하고 지휘하거나 천황가와 관련된 예절에 대하여 교육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전에는 학령기의 황족의 교육에 대한 사무는 내시청과 의례청이 분담하여 담당했으나, 현재는 의례청이 전담하고 있다. 신기청(神祇庁)은 신토와 관련된 업무를 주관하는 기관으로, 신기청장은 일본 신토에서 천황 다음의 지위를 가지는 제관이다. 따라서 신기청장은 일본 신토의 고위 신직자중에서 임명되는 것이 관례이며, 행정직 공무원이 부청장을 맡아 신기청 업무를 보조하는 조직 구조가 자리를 잡았다. 신기청은 특히 천황가가 지내야 할 제사를 준비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는다. 이외에도 신기청은 일본 신토에 속하는 수많은 신사를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함으로서 천황에게 종교적 권위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출납청(出納庁)은 천황가와 궁내부의 재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태정관과 참의회는 출납청에 대해 간섭할 수 없으며, 법적으로 그 자세한 수입/지출 내역을 공개하지 않을 권리가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1950년의 칙령 이후로, 출납청은 모든 수입/지출 내역을 공개해 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황실의 총 재산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대본영 (大本営)

대본영(大本営)은 천황 직속의 군 통수 기관이며, 태정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대본영의 장이자 후소 황군 내에서 천황 다음의 지휘권을 가지는 자는 삼군참모대신(三軍参謀大臣)으로, 1949년의 칙령에 따라 삼군참모대신은 현역 무관 중에서만 임명하도록 정해져 있다. 육해공군에 속하지 않는 대본영 직속 기구로는 인사본부, 정보본부, 작전본부, 군수본부가 있으며, 육군 참모본부, 해군 군령부, 공군 사령본부 역시 대본영 휘하의 기구이다. 삼군참모대신은 이들 삼군 및 후소 황군 전체에 대하여, 천황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한 절대적인 결정권을 가지지만,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대본영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본영 회의를 열어 결정하는 것이 관습이다. 대본영 본부는 도쿄 치요다구의 황거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최소 연대급의 병력이 항시 주둔하고 있다. 대본영은 대본영 회의를 통하여 군 예산안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궁내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정부 부서와 달리 태정관 회의의 인가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천황의 명이 있지 않는 한 천황이 아닌 그 누구도 군 예산안을 임의로 변경할 수 없다.

본래 대본영은 국가에 중요한 위기가 닥치거나 전쟁에 발발했을 때, 각군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연합 사령부로서, 가장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부청전쟁 때의 일이다. 1931년의 만주 사변이후로는 사실상 대본영이 상설화되어 최고 군 통수 기구로 작동했으며, 1947년 쇼와 유신 직후에 대본영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대본영은 완전히 상설 통수 기구가 되었다.

태정관 (太政官)

태정관 (太政官)은 제국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관청으로, 그 장을 태정대신 (太政大臣)이라고 칭한다. 태정관은 행정자문실, 법률자문실, 정책자문실, 재정자문실, 탄정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탄정대는 공직자의 비리를 감찰하고 공공기관을 수사, 감시하여 고발하는 기관이다. 태정관 및 행정부에 관한 법률에 따라, 태정대신은 월 1회 정기적으로, 혹은 필요가 있을 때마다 태정관 회의를 열도록 되어 있다. 태정관 휘하에는 외무성, 내무성, 대장성, 사법성, 문부과학성, 상공성, 농업환경성, 보건후생성의 8개 행정 부서가 있는데, 각 부서의 장은 태정관 회의의 구성원이다. 8개 부서의 장관 역시 그 직함은 태정대신과 같은 "대신"이지만, 태정대신에 비하여 한 단계 낮은 관등의 직책이다.

특히 법률자문실은 제국 정부에서 진행하는 입법 활동의 중추로 알려져 있는데, 8개 부서에 속한 입법관들의 활동을 총괄 관리하며, 태정관 회의에서, 혹은 천황의 명으로 결정된 정책 방향 및 세부 시행 사항에 대하여 법률적으로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법률자문실의 입법관들은 고등 문관 시험의 입법과에 합격한 인재들이다.

중의원(衆議院)

중의원(衆議院)은 입법 기관의 성격을 띠는 기구로, 신성 후소 제국 헌법에 따르면 연 1회 정기회를 개회하도록 되어있고, 이외에 천황의 명이나 신민 9만인 이상의 연서가 있을 때 임시회를 열 수 있게 되어있다. 중의원은 헌법상 그 어떤 법적 구속력도 보장받지 않지만, 제국 정부와 천황은 민의를 파악하는 기구로 중의원을 중시해왔다. 연 1회 정기회 이외에, 임시회는 보통 연 1~2회 개회되는데, 한 번에 10여 개의 법률안이나 결의안이 상정된다. 법률안이나 결의안의 상정은 천황의 명이나 신민 9만인 이상의 연서가 있을 경우에 이루어지며, 의결은 유권자 (만 19세 이상의 남녀) 전체의 투표에 의하되 가부 동수인 경우에는 가결된 것으로 한다. 투표는 보통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이루어지며, 강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1980년의 칙령에 의하여 투표에 참여할 경우 각종 세금을 소폭 감면해주기 때문에 보통 투표율이 70%를 웃도는 편이다. 투표는 직접 투표, 비밀 투표, 평등 투표, 보통 투표의 원칙을 지켜서 이루어지며, 10여 개의 안건 각각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찬반을 묻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률 제/개정과 폐지는 중의원을 거치지 않고 제국 정부 내에서 이루어진 뒤 일방적으로 공포하고 일정 시간 후에 실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의원 (参議院)

참의원 (参議院)은 천황이 임명하는 111인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의회로, 상시 개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토론이나 의결의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의원들을 소집한다. 참의원의 의원은 주로 전직 고위 관료, 특정 분야 권위자, 재계 고위 관계자, 저명한 학자 등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10년이다. 참의원 의원은 현행범으로 체포되거나 내란 및 외환의 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체포되지 않는 불체포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매년 일정 금액의 의정 활동비를 지급받는다. 참의원 의원은 천황의 명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직위를 상실하지 않는다. 참의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상정된 안건은 의결 참여자 과반의 찬성으로 가결되고, 가부동수의 경우에는 가결된 것으로 하지만, 재적 의원의 1/3 이상이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결 절차를 개시할 수 없다. 중의원의 의결 결과는 바로 제국 정부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고, 11개의 분야 별로 나누어진 중의 심의회(衆議 審議会)에서 토론을 거친 후 그 내용과 함께 안건으로 상정된다. 참의원은 중의 심의회에서 토론한 내용과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전체 회의를 거친 뒤 해당 안건에 대하여 의결하는데, 안건의 가부결과 상관 없이, 투표 결과를 중의 심의회 토론 내용, 전체 회의 토론 내용, 그리고 보충 자료와 함께 태정관에 송달한다. 태정관은 이를 다시 정리하여 태정관 회의를 거친 뒤에 천황에게 보고한다. 중의원 투표일부터 천황이 결정하기까지, 모든 과정은 평균적으로 2개월 정도 소요된다. 때문에 긴급한 사안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중의원 의결에 부쳐지지 않는다. 참의원의 의장은 의정대신(議政大臣)이며, 참의원과 중의원의 모든 의결 과정을 총괄하는 직책이자 입법부에서 최고 직위를 가진다.

참의원과 중의원의 관계

신성 후소 제국 헌법에 규정된 의정 절차에 따르면 참의원이 중의원보다 우월한 의결 권한을 가지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양 의원 모두 실질적인 입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성 후소 제국의 헌법학계에서는 두 의원을 상하관계도 평등관계도 아닌 특수한 관계로 해석한다. 참의원은 단지 중의원에서 의결된 안건을 가지고 숙고하여 전문가와 정치가의 의견을 추가로 표명하는 기구에 불과하다.

정당

선거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정당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메이지 신정 이후에 제정된 후소 제국 헌법에서는 의회의 역할과 권한이 현재보다 컸을 뿐만 아니라, 납세액에 따라서 선거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1925년에 이르면 만 21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조건 없이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중전쟁 이후로는 사회 전반이 군국주의화되며 다당제 정당 정치가 급격히 쇠퇴하였고, 사실상 대정익찬회가 의회를 좌지우지하는 일당 체제가 정립되었다.

제 1차 괌 조약 이후에는 급격한 군국주의화에 대한 반동으로 대정익찬회가 해산되고 여러 정당이 난립하여 정치의 혼란이 가속된다. 그러나 쇼와 유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의회의 입법권을 천황에게 완전히 귀속시키게 된다.

다만 해외에는 제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결성되고 활동중인 아래와 같은 정당들이 있다.

  • 후소 공산당
    •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활동중인 공산주의 정당으로, 서기장은 세키타니 이사오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버리지 않았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유럽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띄고 있다. 다만, 의회제도 내에서 개혁을 달성할 수 없는 신성 후소 제국의 국가 구조 탓에 여전히 무장 혁명을 주요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 후소 자유민주당
    • 미합중국에서 활동중인 자유주의 정당으로, 후소 민주 공화국의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 신성 후소 제국 내에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까지 그 실체가 밝혀진 바가 없다. 정당의 성향은 대체로 중도 좌파의 성격을 띈다고 여겨지며, 의원 내각제 헌법을 지향한다. 미도리카와 마모루는 이들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아 재판 끝에 투옥되었다.

사법부

사법부는 대심원장을 겸임하는 판무대신 (判務大臣)이 통솔하는데, 대심원 판무행정총국은 모든 재판소에 대하여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사법부는 다른 공공기관과 비교하여 극도로 경직된 관료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기본적으로 재판은 3심제도를 택하고 있는데, 1심은 하급재판소, 2심은 중급재판소, 3심은 대심원(大審院)에서 담당한다. 신성 후소 제국 헌법에 의하면, 사법권은 천황을 제외하고서는 오직 사법부에 속한 재판소에서만 행사할 수 있다. 2017년 10월 현재 재판소는 하급재판소 60청, 중급재판소 10청, 대심원 1청이 있다.법관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높은 급여와 각종 복지 혜택을 부여받기 때문에 그 인원수에 비하여 지망하는 자가 가장 많다.

공무원 제도

신성 후소 제국의 공무원 제도는 쇼와 유신 직후에 대대적으로 정비된 이후, 지금까지 그 큰 틀을 유지하고 있다. 공무원은 크게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며, 문관의 경우에는 내사관, 행정관, 의정관, 판무관으로 나뉜다. 또한 지방 자치 제도가 따로 없어 지방 정부가 중앙 정부에 완전히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지방직 공무원 역시 중앙직 공무원과 동일한 체계에 포함된다. 무관의 경우에는 명칭의 구분은 따로 없으나 대본영에 근무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사실상 분류된다. 징병된 사병 역시 법적으로는 공무원의 신분을 가지지만, 무관으로 칭하지는 않는다.

한편 공무원은 정 1위부터 종 8위까지의 16개 관등으로도 나눌 수 있는데, 정 1위에서 정 2위까지를 특임관, 종 2위에서 종 3위까지를 칙임관, 정 4위에서 종 5위까지를 고등관, 정 6위에서 종 8위까지를 사무관으로 분류한다. 특임관의 경우에는 승진만으로는 임명될 수 없고, 천황의 명이 특별히 있어야 한다. 한편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한 경우, 성적에 따라 정 5위 또는 종 5위에 해당하는 직책에 임명된다. 관등의 서열은 의전의 서열과 같다.

내사관

내사관(内司官)은 궁내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등 궁내부 내시청 의례청 신기청 출납청
정 1위 특임관
종 1위 특임관 시종장
정 2위 특임관 부시종장
종 2위 칙임관 시종대보 내시대보 의례대보 신기백 출납대보
정 3위 칙임관 시종대승
종 3위 칙임관 내시대승 의례대승 신기부 출납대승

행정관

행정관(行政官)은 태정관과 그에 속한 관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등/관위 태정관 외무성 내무성 대장성 사법성 문부과학성 상공성 농업환경성 보건후생성
정 1위 특임관 태정대신
종 1위 특임관 대납언 외무대신 내무대신 대장대신 사법대신 문부과학대신 상공대신 농업환경대신 보건후생대신
정 2위 특임관 탄정윤
종 2위 칙임관 자문실장 외무부대신 내무부대신 대장부대신 사법부대신 문부과학부대신 상공부대신 농업환경부대신 보건후생부대신
정 3上위 칙임관 탄정부윤/부정경 외무경 내무경 대장경 사법경 문부과학경 상공경 농업환경경 보건후생경
정 3下위 칙임관 현정경
종 3위 칙임관 자문실장보 제국대학청장

의정관

의정관(議政官)은 중의원 및 참의원, 그리고 그에 속한 관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등 입법부 참의원 중의원
정 1위 특임관 의정대신
종 1위 특임관
정 2위 특임관
종 2위 칙임관 의정부대신 참의경 중의경
정 3위 칙임관 참의원 중의대부
종 3위 칙임관

판무관

판무관(判務官)은 사법부 및 그에 속한 관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판무관은 크게 재판관(裁判官)과 판무행정관(判務行政官)으로 나뉜다.

관등 판무관 판무행정관
정 1위 특임관 판무대신
종 1위 특임관
정 2위 특임관 대법관
종 2위 칙임관 판무행정총국장
정 3위 칙임관 재판소장
종 3위 칙임관

지방행정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에 완전히 소속되어 있기에 외형상이나 법률상으로는 자치권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중앙 정부가 모든 지방을 직접적으로 통치하면 막대한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기에, 이들 지방 정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의사 결정의 자율성이 존중되는 편이다. 지방 정부에는 천황이 없는 대신 태정관에 속한 관료들이 행정의 전권을 행사하게 된다.

현 단위의 경우에는 정 3하위 칙임관인 현정경(県政卿)이 그 역할을 가지고 있다. 현정경은 오직 행정권만을 가지고 있으며, 입법이나 사법에는 일절 관여할 수 없다. 또한 현정경은 태정관에 직속된 부서인 현정국(県政局)을 총괄하는데, 현정국은 각 현에 현정청(県政庁)을 두고 있으며, 모든 현에는 현정국이 설치되어 있다. 부 단위의 경우에는 정 3상위 칙임관인 부정경(府政卿)이 같은 역할을 하며, 역시 각 부에는 부정청(県政庁)이 설치되어 있다. 부정경과 현정경은 매월 부정국과 현정국의 활동에 대하여 보고할 의무를 가지며, 탄정대는 이를 감사하는 것을 주된 업무의 하나로 삼고 있다.

또한 대납언, 탄정윤, 자문실장, 각성 제1부대신, 부정경, 현정경으로 구성되는 지방행정협의회(地方行政協議会)가 매년 2회 열린다. 그 해의 1회차는 도쿄에서, 2회차는 지방에서 열리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지방행정협의회는 부정국 및 현정국과 중앙 정부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과 각 부정국 및 현정국 사이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국방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미합중국국 다음으로 강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 2017년의 국방비는 GDP 대비 무려 3.6%에 달해 약 2350억 달러에 이르렀으나, 대체로 평시에는 3.0% 내외를 유지하는 편이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국방비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에는 중국의 분열과 그에 따른 안보 위협이 있다.

병역 제도

신성 후소 제국은 메이지 신정 이후로 국민 개병제의 원칙에 입각하여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만 19세의 남성은 만 28세가 되기 전까지 입대하여 의무적으로 군에 복무해야만 한다. 의무 복무 기간은 육군이 12개월, 공군이 13개월, 해군이 15개월이다. 여성의 경우에는 자원하여 입대하거나 대체 세금을 납부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자원 입대를 선택하는 여성의 비율은 2017년 기준으로 1.03%로 매우 낮은 편이다.

한편, 모든 국민은 만 19세가 된 날로부터 1년 이내에 신체 검사를 받아야 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징병 자원으로서의 적합도에 따라 피검자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병역
갑종(甲種) 현역 입역 대상
을종(乙種) 현역 입역 대상
제 1병종第一丙種) 보충역 대상
제 2병종(第二丙種) 전시 근로역 대상
정종(丁種) 병역 면제 대상
무종(戊種) 재검사 대상

계급

육군 해군 공군
장관 대장 대장 대장
중장 중장 중장
소장 소장 소장
좌관/영관 대좌 대좌 대령
중좌 중좌 중령
소좌 소좌 소령
위관 대위 상위 대위
중위 중위 중위
소위 소위 소위
준사관 준위장 일급준위 준위
상급준위 이급준위 X
하급준위 삼급준위 X
하사관 군조장 선임병조 선임원사
상급군조 병조장 원사
일등군조 삼등병조 상사
이등군조 일등병조 중사
오장 이등병조 하사
병장 수병장 병장
상병 상등수병 상등병
일등병 일등수병 일등병
이등병 이등수병 이등병

육군

신성 후소 제국의 육군은 후소 황군을 구성하는 삼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후소 제국 황군 육군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메이지 신정 이후, 메이지 10(1877)년의 일이다.

장비

기갑 차량
보병 장비

해군

개요

신성 후소 제국은 섬나라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해군이 가장 중시되고 있다. 또한 2개의 항공모함 전단을 운용하고 있는데, 각각 요코스카 군항과 사세보 군항에 주둔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마이즈루 군항, 구레 군항, 키류 군항, 원산 군항 등이 주요한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함정

  • 항공모함
    • 카가(加賀) - 1척
    • 야마토(大和) - 1척
  • 전함
    • 시나노(信濃)- 1척
  • 순양함
  • 구축함
  • 호위함
  • 초계정
  • 잠수함
  • 상륙함
  • 소해함

편제

공군

자연환경

타이완 섬을 포함한 후소 제국의 영토는 열대 기후에서 냉대 기후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조선 공화국과는 소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사할린 섬과 좁은 해협을 두고 접하고 있다. 한편, 서부의 타이완 섬은 폭 180km의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다.

지리

후소 열도는 전체적으로 활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환태평양 조산대의 일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화산 및 지진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북쪽으로 부터 치시마 열도,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등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부속 도서를 가지고 있다. 최동단은 도쿄도의 미나미토리 섬, 서단은 타이완 보코 현 카쇼 섬, 남단은 도쿄 도 오키노토리 섬, 북단은 키타치시마 군 시무슈 섬이다.

기후

후소 제국은 섬나라이므로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었으므로 남북의 기온차가 큰 편인데, 타이완 섬의 타이보쿠 시는 연평균 기온이 섭씨 23도에 달하는 반면, 치시마 열도 가장 북쪽의 시무슈 섬의 경우 연평균 기온이 섭씨 3도에 불과하다. 많은 산지를 가지고 있어 집중적인 강설과 강우로 인한 피해가 자주 일어나는 편이기도 하다. 겨울에는 대륙에서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고 건조하며, 여름에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습하고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특히 여름에는 특정 지역에 편중된 강우가 자주 관측되는데, 대표적인 다우지 중 한 곳인 키이 반도에서는 연간 4,000mm가 넘는 강우량이 기록되기도 한다.

후소 열도의 기후를 가리키는 고유 단어가 두 가지 있는데, 바로 6월에서 시작되어 1개월 정도 지속되는 특유의 장마 현상을 가리키는 바이우(梅雨)와, 9월 초에 시작되는 초가을의 태풍은 노와키(野分)가 그것이다.

지방과 행정구역

홋카이 지방

홋카이 지방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개척과 지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19세기 중후반까지 에조치(蝦夷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후소 열도의 일부로 취급받지 못했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중후반까지 이어져, 현재도 홋카이 지방의 일부 노인층 사이에서는 홋카이 지방을 외지(外地)라고 부르는 언어 습관이 남아있기도 하다.

1875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후소 제국은 사할린을 러시아 제국과의 공동 거주지로 인정받는 한편 치시마 열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했다. 이 시기에는 치시마 열도와 남부 사할린이 모두 카라후토청(樺太庁)에 속해 있었다.

후소 제국은 1949년에 시무슈 조약을 통해 사할린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히 포기했다. 왜냐하면 미국과의 제 1차 괌 조약에 따른 식민지 및 점령지 포기와 그에 동반된 경제난이 후소 제국을 덮쳤기 때문이다. 후소 제국은 남부 사할린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원유와 비철금속을 포함한 여러가지 자원을 제공받게 되었다. 시무슈 조약에 대한 후속 조치로, 카라후토청이 폐지되었다. 이후 카라후토청의 치시마 지청이 관할하던 영역이 키타치시마 군과 미나미치시마 군으로 재편되었으며, 남쪽으로는 하보마이 군도와 쿠나시리 섬부터 북쪽으로는 시무슈 섬에 이르기 까지 치시마 열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치시마 현이 되었다.

한편 홋카이도 지역을 대상으로는 후소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개척과 이주 정책이 진행되었다. 1950년대 까지는 홋카이도 및 치시마 열도 거주민에 대한 병역이 면제되었으며, 개간지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낮은 생산성과 부족한 기반 시설로 인해 대다수 홋카이도 거주민의 생활은 윤택하지 못했으며, 인구 증가도 빠르지 않았다.

현재는 후소 8대 도시 중 하나인 삿포로 시가 2017년 기준으로 인구 약 200만 명을 가진 대도시로 성장하는 등 개발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개발과 도시화는 일부 지역에 한정된 것이며, 대부분의 지역은 여전히 저개발 상태이며 사회 기반 시설이 부족하다.

1970년대 후반까지는 광업이 주된 사업이었으나, 채산성이 격감하면서 홋카이도 내륙의 주요 광산 도시들은 극심한 재정난과 인구 감소를 겪게 된다. 현재의 주요 산업은 관광업과 서비스업, 농업 등이며, 하코다테와 삿포로 등이 관광지로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1. 치시마 현
  • 2. 홋카이도

도호쿠 지방 

도호쿠 지방은 10세기에 이르러서야 야마토 민족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했으며, 이전에는 에미시 혹은 에조로 불리는 아이누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대에는 진수부(鎮守府)를 설치하여 이들과의 싸움에 대비했으며, 이곳을 지휘하는 직책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이 있었다.

10세기에 이르면 도호쿠 지역의 아이누 민족이 모두 야마토 민족에 소멸되거나 동화된다. 이후에도 700년 정도가 지날 때까지, 도호쿠 지방의 최북단인 츠가루 지역은 후소 열도의 북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홋카이도 지방의 아이누 민족과의 거래를 위한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호쿠 지방 북부와 서부는 산간 지형 등으로 인한 교통의 불편때문에 발전이 늦어졌는데, 아키타 신칸센과 야마가타 신칸센이 개통되며 이들 지역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관광업, 공업인데, 대체로 인구 밀도가 낮은데 반해 공장을 설립하기에 적합한 넓은 평지가 많아 대기업의 대규모 생산 공장이 다수 들어서 있다. 이외에도 후쿠시마의 복숭아를 비롯해 후소 전역에 높은 인지도를 가진 농산물이 생산되기도 한다. 또한 아키타 현이나 아오모리 현은 후소 내에서도 온천이나 산행 등을 위한 관광 수요가 높아 관광업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다.

2011년에는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간 나오토 태정대신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발생과 미흡한 초동 대처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기도 했다.

  • 3. 아오모리현 
  • 4. 이와테현 
  • 5. 미야기현 
  • 6. 아키타현
  • 7. 야마가타현 
  • 8. 후쿠시마현

간토 지방 

간토 지방은 도쿄도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일일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간토 지방의 인구는 4천 3백만 명에 달한다. 간토 지방의 개념의 형성된 것은 7세기의 임신의 난 이후로, 이 때 수도인 아스카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관문의 동쪽에 위치한 지방이라는 점에서 간토(関東)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현재는 간토 지방이라는 개념이 수도권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동일하지 않다.

간토 평야는 일본 최대의 평야지대로, 비옥하며 농업 생산력 역시 높아 인구 부양 능력이 높다. 그러나 간토 지방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의 일로, 이전에는 조정의 행정력이 미치기 힘든 거리에서 귀족 세력이 세를 얻는 땅에 그치고는 했다. 그러나 에도 시대 이후에 천도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개척이 시작되었고, 19세기 말부터는 철도와 도로의 확장에 힘입어 도쿄 23구 뿐만 아니라 교외 지역에 대한 개발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때문에 간토 평야의 상당 부분이 대규모 택지 개발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농업 생산력은 높은 편이다.

도쿄도는 에도 시대 이후로 후소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이며, 인구가 2천만에 달하는 세계적인 거대 도시이다. 특히 도쿄만에 접하는 도쿄 23구 지역은 인구 밀도가 극도로 높으며, 황거를 비롯한 국가의 중심 시설과 첨단 산업, 서비스업이 집약적으고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토치기, 군마, 이바라키 등의 북부는 도쿄도, 사이타마, 치바, 카나가와 등의 남부보다 비교적 덜 개발되었으며,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특히 토치기와 군마는 높은 산지 비율로 인해 그 넓이에 비해 인구가 적다.

토치기 현의 현청 소재지인 우츠노미야 시 외곽에는 정치범 수용소인 우츠노미야 형무소가 있다. 이곳에는 2천여 명에 달하는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으며, 후소 제국의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주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카나가와 현의 요코스카 시는 19세기 중후반 이후로 후소 제국 최대의 군항인 요코스카 항이 위치해 있기도 하다.

  • 9. 이바라키현 
  • 10. 토치기현 
  • 11. 군마현 
  • 12. 사이타마현 
  • 13. 치바현 
  • 14. 도쿄도 
  • 15. 카나가와현

주부 지방 

주부(中部) 지방은 후소 열도의 중부에 있다고 하여 이러한 명칭을 가지게 되었으며, 니가타, 나가노, 야마나시 지방은 간토 지방의 영향력이 강하여 고신에츠(甲信越) 지방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주부 지방 중 소태평양에 접한 지역은 호쿠리쿠(北陸) 지방이라고 하기도 하며, 아이치 현을 비롯해 태평양에 접한 지역은 도카이(東海) 지방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유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한 조사에 의하면, 주부 지방을 구분하는 기준은 최대 25가지에 이른다.

소태평양에 접한 지역은 후소에서 손꼽히는 다설지 중 하나이지만, 태평양에 접한 지역은 조선 반도와 유사한 온난한 몬순 기후를 가졌다. 중앙의 고산 지대는 후소 알프스의 일부로, 연교차와 일교차가 심한 산간 기후를 가지고 있다. 후소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지산이 야마나시 현에 속한다.

주부 지방의 인구는 2300만 여명으로, 1, 2, 3차 산업이 고루 균형 잡힌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혼슈의 중앙에 위치한 탓에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한데, 도카이 지방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국도 중 하나인 도카이도(東海道)가 있으며, 현재는 도카이도를 따라 철도와 신칸센, 고속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아이치 현의 나고야 시는 후소 8대 도시 중 하나로, 나고야 제국 대학의 소재지이기도 하며 자동차 산업과 정보 기술 산업이 발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 16. 니가타현 
  • 17. 토야마현 
  • 18. 이시카와현 
  • 19. 후쿠이현 
  • 20. 야마나시현 
  • 21. 나가노현 
  • 22. 기후현 
  • 23. 시즈오카현 
  • 24. 아이치현

긴키 지방 

긴키(近畿) 지방은 간토 지방에 견줄만한 후소의 핵심 지역 중 하나이며, 후소 열도에 고대적 중앙 정부가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 5세기 이래로 에도 시대 중반까지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긴키 이외에도 기나이(畿内), 간사이(関西)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긴키 지방은 폭이 좁은 평야가 산지 사이로 펼쳐진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평야가 으로 산재한 대도시들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으로는 도카이도 신칸센, 산요 신칸센 등이 있으며, 오사카의 간사이 국제공항은 후소 최대의 공항들 중 하나이다. 또한 고베 항은 후소의 주요한 무역항 중 하나이며, 교토부에 속한 소태평양 연안의 도시인 마이즈루에는 후소 해군의 거점 중 하나인 마이즈루 군항이 위치하고 있다.

오사카부, 효고현, 교토부에는 제조업이 발달했다. 뿐만 아니라, 긴키 지역에는 전통 문화의 흔적이 많고 문화적으로 융성한 덕분에 국내외로부터의 관광 수요가 많기도 하다. 특히 교토부의 교토 시에는 기요미즈데라와 킨카쿠지 등의 중근세 유적이 있다. 또한 차 문화가 발달하여 교토부의 우지 시는 질이 높은 차로 유명하다.

  • 25. 미에현 
  • 26. 시가현 
  • 27. 교토부 
  • 28. 오사카부 
  • 29. 효고현 
  • 30. 나라현 
  • 31. 와카야마현

주고쿠 지방 

주고쿠(中国) 지방은 혼슈 섬의 가장 남서쪽에 위치한 지방으로, 서쪽으로는 규슈 지방과 간몬 해협을, 남쪽으로는 시코쿠 지방과 세토내해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있다. 주고쿠라는 명칭은 고대 율령제에서 유래한 것으로, 교토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다시 말해 중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방이라 하여 붙은 것이다. 최대의 도시는 히로시마 현의 현청 소재지인 히로시마 시이며, 최고봉은 돗토리현의 오오야마(大山)이다. 주고쿠 지방 전체의 인구는 약 770만 명이다.

주고쿠 지방을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태평양에 인접한 산인(山陰) 지방과 세토내해에 인접한 산요(山陽) 지방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산인 지방의 경우 일반적으로 돗토리현과 시마네현, 그리고 야마구치현의 일부를 가리키며, 산요 지방의 경우 오카야마현과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그리고 때로는 효고현의 일부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산인 지방은 소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기후인 반면, 산요 지방은 세토내해의 영향을 받아 연간 강수량이 적다.

산요 지방의 경우 히로시마나 오카야마와 같은 큰 도시가 많고 신칸센이 통과하는 반면, 산인 지방의 경우에는 인구 정체와 교통 불편이 심각하고 낙후된 편이다. 이러한 두 지방 간의 지역 격차가 문제가 되고 있다. 히로시마현의 구레시에는 후소 제국 해군의 주요 거점인 구레 군항이 위치해 있으며, 히로시마시 역시 군수 산업이 발달한 편이다. 그 외에도 농업이 발달했으며, 세토내해와 접한 지역에는 해안을 따라서 공업 지대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 32. 돗토리현 
  • 33. 시마네현 
  • 34. 오카야마현 
  • 35. 히로시마현 
  • 36. 야마구치현

시코쿠

시코쿠(四国) 지방이란 곧 시코쿠 섬과 그에 속한 부속 도서를 가리키는 말이며, 고대 후소의 행정 체계에서 네 개의 국(国)이 있었다고 해서 이와 같은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시코쿠 지방에는 다른 지방과 다르게 유명한 큰 도시가 없고, 중앙에 시코쿠 산지와 사누키 산맥 등이 솟아있어 통합된 발전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속도로의 건설을 추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관광 산업 발전과 투자 활성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북부 지방의 기후는 세토내해의 영향을 받아 온난하고 태풍의 피해가 적고, 남부 지방의 기후는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강수량이 많고 홍수와 태풍의 피해 역시 잦다. 이렇게 전반적으로는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이지만, 산지가 많은 관계로 시코쿠 지방 내에서도 기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전체 인구는 약 380만 명 정도인데, 가장 큰 도시이자 에히메현의 현청 소재지인 마츠야마(松山)시의 인구가 약 52만 명이다. 또한 세토 대교, 아카시 해협 대교 등의 육상 연결로나 해상 연결로를 통해서 주변 지방들과의 경제 교류가 활발한 편이며, 이 때문에 혼슈의 지역들과 일일 생활권으로 묶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 37. 토쿠시마현 
  • 38. 카가와현 
  • 39. 에히메현 
  • 40. 고치현

규슈 

규슈(九州) 지방은 고대 후소의 행정구역 단위에서 9개의 국(国)이 있었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전체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약 1340만 명에 달한다. 후소 열도에서 중국 대륙이나 조선 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방인 덕분에 예로부터 문물의 전달과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특히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서는 유럽이나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고, 나가사키현의 사세보시에는 후소 해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사세보 군항이 위치해 있다. 가장 큰 도시는 후쿠오카현의 현청 소재지인 후쿠오카시로,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1,620,819 명이다.

규슈 섬의 중앙에는 규슈 산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아소 산은 세계 최대 규모의 칼데라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도 화산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활화산이다. 또한 후소 열도에서도 남쪽에 속하기 때문에 기후가 온난한 편이지만, 규슈 산지의 고지대는 연간 평균 기온이 몹시 낮고 강설량도 많은 편이다. 오키나와현은 규슈 제도와 지리, 기후, 문화 면에서 모두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규슈 지방에 포함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지만, 많은 행정 기관 등에서는 편의상 오키나와현을 규슈 지방에 포함시키고 있다.

북부 규슈 지방에는 대규모 공업 지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철강, 석탄, 화학, 반도체 공업 등이 모두 번성했다. 또한 센다이, 나고야와 더불어 주요한 자동차 공업 지대로도 꼽힌다. 후쿠오카시를 중심으로 하여 IT 산업과 금융 서비스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 41. 후쿠오카현
  • 42. 사가현 
  • 43. 나가사키현 
  • 44. 쿠마모토현 
  • 45. 오이타현 
  • 46. 미야자키현 
  • 47. 가고시마현 
  • 48. 오키나와현

타이완

타이완은 19세기 후반까지 청에 속해 있었으며, 1895년에 부청전쟁의 결과로 조인된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후소에 할양되었다. 이후 후소 제국은 타이완 지역에 타이완 총독부를 세워 식민지로 지배했다. 1949년의 제 1차 괌 조약에서는 포기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이후 1958년에 후소의 일부로 완전히 편입됨으로서 타이완 총독부가 폐지되고 1개의 부와 6개의 현이 들어섰다.

1950년대까지는 억압적인 융화 정책으로 인해 독립 운동을 주장하는 세력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타이완 독립 민주시민회'를 조직하고 반 후소 투쟁을 전개했다. 타이완 독립 민주시민회는 세력을 확대하여 1956년 8월에 타이호쿠 항쟁을 일으켰다. 타이호쿠 항쟁에는 30만여 명에 달하는 시민이 참가했다. 하지만 후소 제국은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유혈 진압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타이완의 독립 운동 세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현재는 후소풍의 문화와 중국풍의 문화가 어우러져 발달한 독특한 문화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관광지로서 인기가 높다. 또한 타이호쿠 부는 후소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 덕분에 금융업이 발달하고 고도의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타이완 섬은 중국에 대항하는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가치도 높은 편으로, 후소 해군의 주요 군항 중 하나인 키류(基隆) 군항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타이완 지역은 오키나와 현을 포함한 후소 본토와 다르게 UTC+8의 시간대를 사용하며, 이를 후소 제국 내에서는 서부 표준시라고 부른다.

  • 49. 타이호쿠 부
  • 50. 묘리현
  • 51. 타이토현
  • 52. 헤토현
  • 53. 보코현
  • 54. 운린현

경제

후소는 세계에서 두 번째의 경제 대국이지만, 공공 부채는 연간 국내총생산의 170%에 이른다. 주로 공업과 서비스업이 중심으로, 대규모 산업 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품은 자동차, 가전 제품, 철강, 비철금속, 선박, 화학 물질, 섬유 및 가공 식품 등이다. 서비스업이 연간 총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와 전자 기기는 일본의 수출액 중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수출 시장은 미국, 유럽 연합, 중국, 조선공화국, 중화민국 등이며, 주요 수입 시장은 중국, 미국, 유럽연합,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오스트레일리아, 조선공화국 등이다. 주요 수입품은 기계 및 장비, 원유, 쇠고기를 주로 한 음식류, 화학 제품, 섬유품, 원자재이다.

한편으로는 2010년 이래 장기적으로 디플레이션 현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휴우가 내각은 엔화량을 늘림으로써 계속되는 엔화의 강세를 해소해 무역에서의 불리한 점을 해소하고자 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정책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국내외에서 이어지고 있다.

교통

후소 제국은 발달된 철도 교통으로 유명한데, 1960년에 세계 최초의 고속 철도인 도카이도 신칸센을 개통시킨 전적이 있다. 고속 철도 체계인 신칸센 이외에도, 도시 철도 체계와 광역 철도 체계 역시 고도로 발달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통한 육상 수송이 특이 여객 수송을 중심으로 하여 철도와 맞먹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박과 항공기를 이용한 수송이 국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과학 및 기술

후소 제국은 대부분의 분야에 걸쳐 연구를 선도하는 국가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과학기술 투자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투자는 기초 과학 분야와 응용 과학 분야 모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과학 분야에서 후소 제국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는 16명이며, 필즈상 수상자는 4명에 이른다. 또한 후소제국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FAXA)는 세계적인 항공우주 분야 연구 기관으로 국제 우주 정거장 계획에 참가했다. 나아가 금성 탐사선 아카츠키와 달 탐사선 카구야, 소행성 탐사선 하야부사 등이 태양계 천체에 대한 탐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전적이 있으며, FAXA는 2033년 이내로 달에 과학 연구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외교

미합중국과는 우방 관계에 있다.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의 외교적 갈등과 제 1차 괌 조약 등으로 인하여 한때는 관계가 악화된 적이 있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는 후소 제국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이자 안보 파트너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 공화국과는 수교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중립적인 관계에 있다. 조선 공화국은 1968년에 신성 후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기 때문에, 신성 후소 제국에 대해서 기본적인 반감을 가지는 인구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상호간에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중요한 이웃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산 조약의 결과로 2048년까지 신성 후소 제국의 육군과 해군이 원산과 의주에 주둔할 예정이므로, 안보 면에서도 중요한 관계에 있다.

중화민국과는 동맹 관계에 있다. 신성 후소 제국이 제 1차 괌 조약으로 중국 대륙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한 이후에는 후소인을 철수시키는 이외에 별다른 교류가 없었으나, 신성 후소 제국이 미합중국의 요구로 제 3차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에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 기지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며 다시금 교류가 시작되었다. 1955년에 중국의 분단이 고착화된 직후 수교했으며, 미국의 전후 복구 프로그램에 동참하여 사회/경제 전반에서 교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준 적대 관계에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여전히 신성 후소 제국과의 수교를 거부하고 있으며, 상호간에는 최소한의 업무를 보기 위한 출장소 정도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민족

전통적으로 후소인은 규슈 북부와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발달시킨 야마토(大和) 민족과 동일시되어 왔으나, 후소 제국에는 야마토 민족, 조선 민족, 류큐 민족, 아이누 민족, 니브히 민족, 오로치 민족 등의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규슈 남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쿠마소 민족과 하야토 민족이 있었으나, 이들은 이미 고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소멸 및 융화되어 야마토 민족에 흡수되었다.

사회

신성 후소 제국의 사회는 국제 사회로부터 억압적인 사회로 평가받고 있다. 좌파 계열의 사상은 대체로 탄압받으며, 종교 역시 일본 신토와 불교 이외에는 간접적인 억압으로 인하여 극히 미미한 세력만을 가지고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도 잘 보장되지 못하여, 언론 자유 지수는 집계된 이래로 최하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하지만 여성 문제나 성 소수자 문제에 있어서는 비교적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편에 속한다.

인구

2017년의 정기 인구 조사에 따르면, 신성 후소 제국의 전체 인구는 약 1억 6천만 명에 달한다. 이 중 타이완 섬의 인구가 약 2350만 명에 달하며, 나머지는 오키나와 및 치시마 열도를 포함한 후소 본토에 거주한다. 후소인의 평균 수명은 2015년 기준으로 남성이 81.03세, 여성이 87.15세로 여성의 경우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수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의학의 발달과 높은 생활 수준에 힘입어 평균 수명은 높은 반면에, 출생률은 2017년 기준 1.40명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후소 제국은 2015년 8월 경에 고령화율이 25%를 돌파하며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세대를 가리지 않는 높은 자살률 역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정부와 사회 각계각층의 노력 덕분에 연간 자살자 수는 2005년에서 2015년 사이에 8천명 이상 감소하여, 2015년에는 2만 8천명이 자살했다.

언어

신성 후소 제국의 공용어이자 일상 언어는 일본어이다. 일본어는 후소 열도 지역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되어 온 언어로, 고대 중국어와 조선 반도 지역 언어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어는 대표적인 고립어이자 개음절 언어이며,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세 가지의 문자 체계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중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음절 문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만엽집을 필두로 한 고대 및 중세 일본어 자료가 많이 보존되었기 때문에, 18세기 이후에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그 발달 과정과 문법, 어휘, 음운이 상당 부분 밝혀지게 되었다.

한자의 경우, 1952년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는 기존의 자체를 바꾸지 않고 이용했으나, 1952년에 문부과학성이 상용한자 1958자를 지정함으로써 기존에 통용되던 약자나 이체자가 공식적인 자체로 편입되었다. 이를 신자체(新字体)라고 부르고, 이 중에는 타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후소 고유의 한자들도 있고, 타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간략화된 글자들도 있다. 2017년 현재는 신자체 목록이 2036자까지 확장된 상태이다. 1952년까지 사용되던 기존의 자체는 구자체(旧字体)라고 부른다. 일상생활에서는 구자체 역시 종종 사용되는 편이다.

이 외에도 아이누 민족의 고유 언어인 아이누어, 류큐 민족의 고유 언어인 류큐어, 그리고 타이완에서 일상 언어로 사용되는 대만어, 조선계 이민자나 잔류 조선인들이 사용하는 조선어 등이 있지만, 이들은 일본어에 밀려 공공 목적 혹은 학술 목적의 용어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문부과학성은 1980년대부터 이들 언어에 대한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의 탄압이 극심하여 학술 언어는 물론 일상어로서의 지위까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는 상태이다.

외국인

전통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폐쇄적인 사회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외국인의 이주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현재 신성 후소 제국 내부에는 약 380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 중에는 조선인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중국인, 미국인, 소련인, 필리핀인, 베트남인, 태국인, 러시아인 등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수 거주하고 있다.

종교

특별히 지정된 국교는 없으나, 사실상의 국교는 일본 신토이며 국가에는 이를 주관하는 기구가 여럿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일본 신토를 믿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무신론을 신봉하거나 타 종교를 믿는 국민들도 10% 정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본 신토와 불교 이외의 종교는 직간접적으로 억압받기 때문에, 사실상 신성 후소 제국 내에는 일본 신토와 불교의 두 가지 종교만이 인정되고 있다.

후소인들의 종교 생활은 기독교적 혹은 이슬람적 신앙 생활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생활과 밀착한 기복형 신앙의 형태로 드러나거나 결혼식 및 장례식과 같은 주요한 의식에 있어서 그 형태와 의미를 차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진다. 특히 일본 신토의 사원인 신사(神社)는 전국에 널리 퍼져 있으며 약 9만여 곳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불교의 절과 일본 신토의 신사가 한 곳에 모여있기도 하는 등, 후소인의 신앙 체계에 있어서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교육

현재의 의무 교육 체계는 2006년에 결정된 것으로,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합하여 총 12년의 의무 교육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 후소 제국에 근대적 교육 체계가 소개된 것은 메이시 신정 이후인 1870년의 일로, 의무 교육은 1871년에 소학교 6년, 1925년에 중학교 3년, 2006년에 고등학교 3년까지 단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소학교의 입학 연령은 만 6세이며, 따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표준 연령은 만 18세가 된다. 고등학교 교육은 의무 교육 단계에 속하지만, 일반 고등학교 이외에도 직업 고등학교나 예술 고등학교, 과학 고등학교 등의 특성화 고등학교가 다수 존재해 선택의 폭은 넓은 편이다.

대학 진학률은 2017년 기준으로 약 77%이며,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이 몹시 치열하기 때문에 사교육 시장 역시 활발한 편이다. 최상위 대학은 도쿄와 교토 등에 설립된 6곳의 제국 대학이며, 이들은 문부과학성의 하부 조직인 제국대학청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대상이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문부과학성 주관의 대학 입학 시험 이외에 각 대학이 별도로 실시하는 본고사의 성적이 필수적이다. 이 이외에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 시험 역시 실시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어린 학생들을 입시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노출시킨다는 지적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신학기는 4월에 시작되며, 졸업식 및 종업식은 3월 중순에서 3월 말 사이에 주로 행해지는 편이다.

인권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언론과 출판 및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 시민적 자유가 광범위하게 제한되는 탓에, 국제 앰네스티와 UN 인권 이사회 등은 지속적으로 신성 후소 제국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실제로 20세기 초중반에 제정된 치안유지법 등의 공안 법률이 폐지되지 않고 개정되며 여전히 반체제 운동가 및 좌익 운동가 등에 대한 탄압의 근거로 쓰이고 있다.

1998년에는 국제 앰네스티에 의해 반체제 운동가에 대한 고문과 협박, 재판 없는 구금 등의 실상이 공개되어 크게 비난받았다. 대표적인 반체제 운동가로는 소설가인 아마다 타케마사 등이 있으며, 현재 그는 우츠노미야 형무소에 구금된 상태이다. 이러한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높은 삶의 수준과 발달된 문화 때문에 일반적인 국민들의 불만도는 낮은 편이다.

반면에 성 소수자 문제와 여성 문제 등의 소수자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천황 키요히토는 2018년 신년사에서 법률을 제정하고 정부 기구를 조직하여 이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며, 나아가 2020년 이전에는 동성간의 결혼 및 시민 결합 제도가 완비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년법

서력 기원 역시 널리 사용되지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막론하고 연호를 사용한 기년법 역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재 신성 후소 제국에서 사용되는 기년법은 다음과 같다.

  • 서력 기원 - 2018년)
  • 황기 (皇紀) - 2678년
    • 황기 년도의 공식적인 명칭은 '진무 천황 즉위 기원 년도'이며,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 연호 - 도우닌(道仁) 2년

황실의 문서와 각종 황실 관련 행사에서는 황기 년도와 연호 기년법을 동시에 사용하며, 정부의 공문서에는 연호 기년법과 서력 기원을 동시에 사용한다.

노동

억압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때문에 노동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지거나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메이지 신정 이후로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노동 문제의 해결이 요구되고 1920년대에 이르면 후소 공산당이 설립되기도 했지만, 1925년 치안 유지법의 제정과 함께 이러한 적극적인 노동 운동은 탄압받게 되었다.

쇼와 유신 이후에는 노동자나 하층민이 합법적이고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할 길이 사라졌으나, 제국 정부는 현대화의 목표를 가지고 공장법, 노동기준법, 노동복지법 등을 제정하여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했다. 한편 1970년대에는 유럽의 68혁명 등의 영향으로 비교적 과격한 좌익 노동 운동이 펼쳐졌지만, 이들의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다.

현재는 장시간 노동과 과로, 잔업 문제 등이 제기되고 있다. 후소 제국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약 1,918시간에 달하며, 통계로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노동 시간까지 합하면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노동 정책을 내놓았지만, 오히려 고용 불안정과 실질 임금 저하 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2017년 기준으로 실업률이 3.0%에 불과해 완전 고용 상태에 가까우며, 대졸자의 취업률은 96.6%에 달한다. 다만 이러한 통계는 노동의 질을 반영하지는 않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문화

신성 후소 제국의 문화는 문학, 음식, 게임 및 애니메이션 등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7세기를 전후로 한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처음 유럽에 직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문학

후소 문학이 기록 문학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8세기 무렵의 일로, 이 시기에는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 등의 역사서 및 문학 서적이 만들어졌다. 이후에는 헤이안 시대에 형태가 갖추어져 크게 유행한 와카(和歌)나 17세기에 이르러 마츠오 바쇼가 만들어내고 유행시킨 하이쿠(俳句) 등이 있다. 이렇듯 일본의 중근세 문학은 서정적인 단가 문학이 유명하지만,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등의 산문 문학 역시 발전했다.

근현대 후소 문학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 시가 나오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츠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이들은 후소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각자의 다양한 문학적 사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써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경제 침체와 더불어 정부에 대한 불만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반체제 문인들이 등장해 작품을 내놓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아마다 타케마사저무는 해와 핏빛 신세계 등이 있다. 이런 작품들은 곧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문학가들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아가 기존의 문학에 구애받지 않고 가벼운 문체를 바탕으로 내용을 자유롭게 서술하는 라이트 노벨이 크게 유행하고 있기도 하다.

음식

후소 제국의 식문화는 중국 음식과 함께 동양을 대표하는 식문화 중 하나로 손꼽힌다. 유명한 음식으로는 식초로 조미한 밥에 생선회 등을 올린 뒤 가볍게 쥐어 내놓는 스시, 전통 술인 사케, 구불구불하고 얇은 면과 육수를 함께 먹는 면요리인 라멘 등이 있다. 특히 이 중 라멘은 인스턴트 식품의 형식으로 발전하여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음식이 되었는데, 1958년에 후신 식품이 인스턴트 치킨 라면을 만든 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의 식문화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일본서기 등의 정사서에서는 의식의 문화에 대한 내용을 사소한 것으로 여겨 직접적으로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발견되는 목간 등의 유물이나 기타 기록에 의하면, 쌀과 어류, 해조류 등이 널리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개류는 선사 시대부터 후소 열도에서 널리 소비된 흔적이 있다.

현재 후소의 전통 요리로 여겨지는 것들은 에도 시대에 발달한 식문화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전통 요리는 가이세키 요리, 혼젠 요리 등이 있으며, 신년 명절을 기념하여 만드는 오세치 요리와 같은 것도 있다. 특히 가이세키 요리는 격식을 차리는 정식으로, 5첩, 7첩, 11첩 등의 여러 종류가 있으며, 국, 해산물, 생선회, 밥, 츠케모노 등이 제공된다.

음식을 먹는 데에는 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데, 밥과 국을 그릇째로 손으로 들어서 입에 대고 먹는다는 점에서 한국이나 중국의 식문화와 차이점이 있다. 또, 장례시에 젓가락으로 유골을 옮기는 풍습때문에 젓가락을 이용해 음식을 주고 받는 것이 금기시되기도 한다.

현대에는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식품들이 발달했는데, 상술한 인스턴트 라면 이외에도 레토르트 식품, 도시락 등 소매점에서 쉽게 구입하여 조리할 수 있거나 조리할 필요조차 없는 식품들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 또, 서양의 포크 커틀릿을 변형시킨 돈까스나 인도의 커리를 변형시킨 카레라이스처럼, 타국의 식문화를 자국화하여 정착시킨 사례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복식

음악

후소 제국에 관한 문헌 기록에서 음악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지 중 '위지왜인전'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아무리 늦어도 5세기 경에는 고유의 악기와 음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이 때의 악기와 음악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는 바가 없고, 와곤(和琴)이라는 이름의 5현 악기가 있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이후에는 9~10세기까지 당의 궁중 음악과 대중 음악, 불교 음악 등이 유입되었으며, 중앙 아시아와 서역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역의 악기와 음악 역시 당을 통해 수입되었다.

이후에는 주로 궁중 음악과 귀족적 음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8세기의 다이호 율령 제정 이후로 정립되고 발전되어 온 궁중 음악을 아악(雅楽)이라고 하며, 현재는 궁내청에서 아악의 보존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전해 내려 오는 아악곡은 300여 수에 달한다. 또한 아악은 전통 음계인 5음음계와 7음음계를 사용하며, 국가인 신대봉축가 역시 아악 7음음계를 기반으로 작곡된 음악이다. 아악과 대비되는, 평민들이 주로 즐기고 전승해 온 음악은 속악(俗楽)이라고 한다.

해외의 음악은 이후에도 후소의 음악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16세기에는 류큐로부터 샤미센과 기독교 음악이 유입되었고, 메이지 신정 이후에는 서양의 고전 음악이 유입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재즈 음악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또한 후소 황립 관현악단이 설립되었는데, 후소 황립 관현악단은 2018년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악단이다.

현대의 대중 음악으로는 엔카와 에프팝(F-POP) 등이 있는데, 엔카는 주로 장년층 이상에 의해 향유되는 장르로 현재는 그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에프팝의 경우는 비틀즈와 같은 서양의 유명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으며, 현재는 독자적인 색채를 가지고 세계 각국에서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에프팝 아티스트로는 오자키 유타카, 우타다 히카루, 코무로 테츠야 등이 유명하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아티스트가 적어졌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으며, 에프팝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후소의 록 음악은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에프록(F-ROCK)이라고 불린다. 후소의 록 음악은 음악사를 논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이며, 유명한 아티스트로는 사잔 올 스타즈, BOØWY, B'z, X-FUSO, Mr. Children, MONGOL 800, 범프 오브 치킨, SEKAI NO OWARI, ONE OK ROCK 등이 있다. 이렇듯 후소의 록 음악 시장은 아주 거대해서, 규모 면으로는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크다.

특징적인 면으로는, 아이돌 음악이나 애니메이션 및 게임의 주제가 역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이들 음악은 전국민적으로 인기가 있는 대중 음악과는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으며, 소수의 매니아 층을 중심으로 소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