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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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 한성부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 대한제국 황실 인원들과 추존 황족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이자 대한국의 초거대 유교 시설.면적은 186,786 ㎡로, 황실 측에서는 태묘(太廟)라고 한다.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 한성부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 대한제국 황실 인원들과 추존 황족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이자 대한국의 초거대 유교 시설.면적은 186,786 ㎡로, 황실 측에서는 태묘(太廟)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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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매체에서 간간히 언급되며, 주로 조선시대, 대한 황실과 관련된 설정을 짤 때 사용되고 있다.
한국 대중매체에서 간간히 언급되며, 주로 조선시대, 대한 황실과 관련된 설정을 짤 때 사용되고 있다.


*드라마 《쌍갑포차》에서 역대 대한 황실에서 죽고 환생한 영혼들을 살펴보는 곳으로 잠시 출현.  
*드라마 《쌍갑포차》에서 역대 대한 황실에서 죽고 환생한 영혼들을 살펴보는 곳으로 잠시 출현했다. 묘사를 보면 저승과 보이지 않게 바로 연결되어 있는지라 접근이 용이한 편인듯.  


*애니메이션 《달빛 궁궐》에서 한성부에 쳐진 결계의 근원으로 등장. 대량의 토사 때문에 파손 직전까지 갔었으나, 사건이 일단락되면서 종묘가 부서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달빛 궁궐》에서 한성부에 쳐진 결계의 근원으로 등장. 대량의 토사 때문에 파손 직전까지 갔었으나, 사건이 일단락되면서 종묘가 부서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2024년 4월 18일 (목) 05:55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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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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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원격제도(近代院格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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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원의 명칭 및 서원격은 근대원격제도가 폐지된 1946년 3월 5일을 기준으로 함
  • 서원의 광무시대 당시 재건립 및 건립 날짜 순서로 나열
서원격외
(書院格外)
종묘
관제경원
(官祭擎院)
국제경원
(國祭擎院)
관제부원
(官祭副院)
국제부원
(國祭副院)
관제참원
(官祭參院)
국제참원
(國祭參院)
별격관제원
(別格官祭院)
종묘
宗廟|Jongmyo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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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종묘(宗廟)
소재지 경기도 한성부 종로구 종로 157
제현(祭俔) 역대 조선 왕조, 대한 황실의 일원들
원격 태묘(太廟)
대한국 국립제례시설
근대원격제도로부터 논외
창건 조선 태조 4년(1396년)
향례제 종묘대제

(5월 첫째주 일요일, 11월 첫째주 토요일)

홈페이지
2012년 촬영된 종묘 외대문(宗廟 外大門)) 2015년에 촬영된 종묘 정전(宗廟 正殿)

개요

대한국 한성부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 대한제국 황실 인원들과 추존 황족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이자 대한국의 초거대 유교 시설.면적은 186,786 ㎡로, 황실 측에서는 태묘(太廟)라고 한다.

단순히 국체유교의 선전의 장소 중 대표적인 장소 정도로만 아는 시각 또한 존재하나, 근본적으로 종묘는 예로부터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한국사에서 조선사로 들어가면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이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

조선 전기

조선의 건국 직후 태조 고황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새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초기엔 천도를 하고 그 천도한 수도에 적당한 터를 잡아 종묘를 건설하려 했으나 천도 계획이 미뤄지면서 결국 개경 내의 적합장소를 고르기로 노선을 바꾸었고, 이렇게 해서 고려의 종묘가 허물어지고 그 위에 새 종묘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후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으로의 천도가 확정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궁궐(경복궁), 사직과 함께 태조 4년 9월 새로운 종묘가 완공되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은 당시 여론 등을 반영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정작 중요한 종묘를 한양에 두고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경에 다시 종묘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대신 매번 대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태종이 다시 한양에 환도하면서 해소되었다.

이후 태종과 시기에는 비를 피하기 위해 건축학적인 재건축이 주로 이루어졌고, 세종 시기에는 조선 종묘의 시묘조 확정 등 제독적인 면에서의 변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로써 조선 종묘 제도의 중요한 원칙과 구조적인 틀은 완성되었고,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고, 이후 명종대까지 확장을 거듭한 끝에 종묘는 총 11칸의 시설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조선 중기

임진년에는 일본이 쳐들어오자 전쟁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장조의 종묘 출입이 놀라울 수준으로 빠르고, 잦게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이후 효종대에 들어 중원의 통일이 요원해지자 중화문명의 보존을 위해 종묘의 구조를 변화시키자는 논의도 잠시 올라왔었는데, 후일 새로운 천조가 들어서고 나서 결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고 이후엔 전통을 유지하자는 입장이 강세가 되면서, 결국 기존의 종묘 시스템이 유지되게 되었다.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

조선 후기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다시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에 4칸을, 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영녕전은 장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고, 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대한제국

이후 국체유학의 도입과 고조의 칭제건원이 이어져 조선 종묘는 5묘제에서 7묘제로 바뀌었으며, 시조묘인 태조는 태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문제는 이후 배향할 감실이 다시 부족해졌다는 것이었고, 결국 융희 9년(1909년)에 5칸을 더 증축하면서, 총 24칸의 감실이 종묘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는 임금이 아닌 일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므로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숙종대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숭 복위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왕조 재위 임금 신위 총 25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정식으로 재위한 임금은 아니지만 덕종, 원종, 장조, 문조 등 추존 임금들도 종묘에 모셔져 있다.

또한, 당시 융희 정부는 대한제국 신민들에게 국체유학 교육의 목적으로 종묘가 국체유학처럼 국가의 근본과 국가의 존엄인 황실을 수호하는 신성한 장소라고 사상을 주입했고, 종묘에 대한 모욕을 불경죄로 처벌하는 등의 법률 또한 제정하였다. 위와 같은 법률들은 이후 대한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폐기되었고, 이 외에도 종묘재례를 보좌하는 제관들중 몇몇은 황제가 직접 선정하는 친임관으로 이루어지도록 개정되어, 황족, 작위를 받은 고위 사족, 고위 관료 등으로 인원이 편성되었다.

현대

1945년의 항복 이후 현대의 대한국 체제에 들어서는 세속주의, 정교분리와 유교 파시즘 잔재 청산을 이유로 황실 인원들이 제례를 올리는 식으로 다시 교체되었고, 일부 지역들이 대중에게도 더 넓게 개방되면서 종묘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졌다. 이후 이 체제가 쭈욱 이어지고 있는것이 현재의 종묘라고 할 수 있겠다.

등급

문자 그대로 황실의 인원들을 모신 장소인지라, 근대원격제도가 폐지된 지금도 타 서원들을 능가하는 시설로 취급되고 있다. 여기다가 세계유산으로서 등재됬다는 사실과 황실이 한 해에 2번 직접 행차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점 때문에, 이 위상은 한국이 군주정을 폐지하지 않는 이상 떨어질 일이 없을 듯 보인다.

관람

평일에는 1시간 간격으로 종묘 해설사와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반드시 단체 인원을 꾸려야 하는 건 아니고, 해당 시간대에 입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같이 들어가고 나오는 방식이다. 물론, 단체 인원을 꾸려도 관계 없다.

음식 섭취는 타 지역에서는 허용되기는 하나, 황실 일원들이 안치되어 있는 영녕전 안[1]에서는 엄격히 금지되어있으며 이곳에서의 사진 촬영도 종묘 관리부 측에서 금지하고 있다. 또한, 1년에 두번 있는 종묘제례 기간동에는 황제의 신변보호와 그 외 보안상의 이유로 추가적인 출입이 금지될 수 있다.

시간제 관람은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12월 말부터 중단되었다가 2022년 6월 1일부터 거리두기 해제와 함께 재개되었다. #, 자유관람일도 개방하고 있으므로 시간대와 휴관일을 잘 보고 방문하여야 한다.

창작물

한국 대중매체에서 간간히 언급되며, 주로 조선시대, 대한 황실과 관련된 설정을 짤 때 사용되고 있다.

  • 드라마 《쌍갑포차》에서 역대 대한 황실에서 죽고 환생한 영혼들을 살펴보는 곳으로 잠시 출현했다. 묘사를 보면 저승과 보이지 않게 바로 연결되어 있는지라 접근이 용이한 편인듯.
  • 애니메이션 《달빛 궁궐》에서 한성부에 쳐진 결계의 근원으로 등장. 대량의 토사 때문에 파손 직전까지 갔었으나, 사건이 일단락되면서 종묘가 부서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기타

종묘는 한국인이 아닌 이상 비교적 외국인들에게는 마이너한 건축이긴 하지만, 건축의 권위자들에게는 반대로 반드시 방문하는 대한국 대표 건축물로 자주 언급된다. 대표적으로 일본 현대건축의 거장 시라이 세이이치는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종묘가 있다."며 종묘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고,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세계 최고의 건물 중 하나이며,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며 15년 만에 한국에 왔을 때도 가족들과 다시 종묘에 방문하고,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라고 말했다. 거기에 이미 한국에서 작업을 했던 렘 콜하스, 장 누벨, 자하 하디드 처럼 건축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들은 한번씩 다녀갔고 건축 사진작가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헬렌 비네는 오직 종묘, 병산서원, 소쇄원의 사진만 찍어 책으로 출간하는 등, 건축가들에게는 조선 궁궐이나 대한제국 시기의 신축 궁전보다 더 높은 취급을 받고는 한다.

이곳에도 연못이 세 개가 있는데, 주변에는 향나무와 같은 수목이 식재되어 있는 편이며 후원에는 화계(花階)가 있으나 궁궐 화계들이 기본적으로 상당히 화려한 걸 감안하면 수수한 걸 떠나서 상당히 살풍경스러운데, 그 이유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신성한 공간이므로 그냥 이런 화계는 구색 맞추기용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엄연히 한국 황실의 조상들과 선대 황제들이 모셔진 장소다보니, 구글 코리아에 한성부의 관광명소로 검색하면 신전(神殿)으로 표기된다.


  1. 하지만 밖에서의 사진 촬영은 허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