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
카모이 모시르, 푸하이 구룬
河震
Хациен, カムイモシ, 契丹/女直
Бохай улс, ᡦᡠᡥᠠᡳ ᡤᡠᡵᡠᠨ, , Hadin(Kasandres Bohainae)
표어 “一個極東"
하나의 극동
수도 카무이 코탄カムイコタン
최대 도시 천경용천부川京龍泉府
 

하진(중국어: 河震)은 북해도(北海道), 사할린 섬(庫頁島), 쿠릴 열도(千島列島) 등을 영토로 하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위시한 다민족 영토 복합체이며, 이러한 영토 복합체는 수많은 영방정치체(領邦政治體)로 구성된다. 수도는 카무이 코탄(カムイコタン)이다.[1] 수많은 봉읍국가(封邑國家)들이 발해-송전(渤海-松前) 계통의 황제를 상위 군주로 삼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태로 결집해 있으며, 또 황제는 형식상으로 이들 국가의 지도자에게 각각의 영토를 분봉하기에 봉건제적 정치 성격도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

북방 문명의 성립

북해도(北海道) 북부 예문도(禮文島)에 있는 향심정(香深井) 유적에서 수많은 개 뼈가 발견되었던 점, 아피시리시(ア・パ・シリ市)[2]의 모요로 패총(貝塚)에서도 300여 개가 넘는 뼈를 비롯해 오호츠크 해(オホーツク海) 연안에서도 가축의 뼈가 발견되었던 점은 사할린 섬북해도 전역에서 개와 돼지 등이 사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가축 사육의 흔적들은 오직 오호츠크 해 연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는 내륙과 연안간의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이러한 연안 지대에서 발전했던 수렵적 형태의 원시 문명을 오호츠크해 문화(オホーツク海文化)로 명명하게 되었다. 사할린 연안에서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북해도에서는 10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이 문화는 유빙(流氷)이 흘러나오는 지역에서 널리 퍼져있었다. 오호츠크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대 유적에서는 이른바 '오호츠크식 토기'로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원통식 토기를 비롯하여 바다짐승과 어류들의 뼈, 이들을 잡기 위한 창의 촉과 낚시바늘이 발견되었고 이것은 오호츠크해 문화가 어로(漁撈) 활동과 가축 사육 및 수렵 활동을 병행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주 1]

오호츠크해 문화를 열었다고 추측되는 고대 니브흐인(ニヴフ)들은 사할린에 주로 거주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말갈(靺鞨)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융성시켰다고 한다. 이들은 점차 북해도 북부와 동부에 정착하여 그 문화를 아이누인(アイヌ)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허나 사할린은 동부여(東夫餘)에서 유입된 예맥인(濊貊人)들의 정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고, 북해도에서도 일본 북부와 유귀국(流鬼國)간의 교류를 통해 중세 즈음에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북해도 북부와 동부, 그리고 사할린 일대에 오호츠크해 문화가 널리 퍼져갈 무렵, 북해도 중부와 남부에 걸친 내륙 지역에서는 찰문 문화(擦文文化)가 전파되어 발전하였다. 이러한 명칭은 솔로 쓸어내는 듯한 무늬를 가진 '찰문 토기'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이전에 북해도 전역에 존재했던 속승문 문화(續縄文文化)가 혼슈(本州) 지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찰문 토기는 북해도는 물론이며, 일본(日本) 동북 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기에 찰문 문화가 쓰가루 해협(津輕海峽)을 넘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찰문 문화의 사람들은 하천의 하구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여 연어(鰱魚)와 송어(松魚)를 중심으로 한 어로 활동을 비롯하여 수렵, 채집, 농경을 생업으로 삼았으리라고 학계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찰문 문화의 사람들이 중근세의 아이누인들의 후손이 아닌가하는 학설도 연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한편으로, 찰문 문화오호츠크해 문화 사이에서의 사람들간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이누인들의 구비서사시인 「유카라(ユ-カテ)」에서 '내륙인'과 '해양인' 갈등을 고조시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양측 문화의 사람들의 싸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밝혀진 바 있다.[주 2]

이들 상반되는 문화의 사람들은 점차 민족공동체로서의 의식을 자각하여 '아이누'로 불리는 촌락연합체를 형성해가게 되었다고 한다. 찰문 문화가 몰락하고 북발해(北渤海)를 건립하는 유민들과의 융화 과정이 시작되는 10세기 무렵에 '수혈식주거'(竪穴住居)에서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으며 벽 외부에 흙을 쌓아 열 손실을 줄이고 실내 기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복토식주거'가 자리를 잡는 등 주거 양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전의 토기들을 대신하여 철제품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맥인들의 도래

본래 동부여(東夫餘)는 해부루(解夫婁)가 건국하여 두만강 유역에 존속했던 예맥계의 나라였다. 고구려(高句麗)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의 속국(屬國)이었으나 도중에 반(叛)했기에 광개토대왕의 정벌을 받게 되었으며, 410년에 동부여의 수도였던 여성(餘城)이 함락되자 말례왕(末禮王)[3]은 수만 명의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피해 해협을 건너 섬으로 건너간 후 그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주 3]

사할린 섬(庫頁島)의 토착민족들은 점차 예맥계 유민들의 정주 문화로 흡수되었으며,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와 같은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부여 사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움무덤(土壙墓)과 독널무덤(甕棺墓)이 이 시기에 대거 조성되었으며, 출토된 유물들이 치레걸이(裝身具)와 같은 치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청동도끼(銅斧)와 청동끌(銅鑿)같은 청동기 유물을 포함하여 동북 지역의 특성을 지닌 굽은날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의 출토가 이를 반증했다. 이에따라 문화적/산업적 우위를 갖추었던 예맥계 유민들은 점차 지배층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되었으며, 영고(迎鼓)의 제천행사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며 부여 법률의 영향을 받은 책법을 통한 처벌의 기록이 남아있는 등 이전의 오호츠크해 문화가 빠른 속도로 사멸하고 예맥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음을 추정하게 되었다.[주 4]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계는 이들의 나라를 '유귀국(流鬼國)'이라고 부르며 존재를 인식했으며, 특히 고구려문자명왕(文咨明王)은 만주 지방에 남아있던 잔왕(孱王)의 북부여 세력을 멸망시킨 후, 부여의 실질적인 후신이 된 유귀국을 정벌하려고도 했다.[주 5] 다행히 당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통한 한반도 세력의 위협과 물길(勿吉), 거란(契丹) 등의 주변 세력에 대한 종속력이 약화됨에 따라 무산됨으로서 예맥 문화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주 6]

유귀국은 7세기 경에 당나라(唐國)에 조공하면서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을 시도하였으며, 예맥 문화를 바탕으로 북방 발해(渤海)와 일본(日本), 통일신라(統一新羅)와의 교역을 통해 발전을 거듭했다고 한다.[주 7] 덕무왕(德武王) 시기의 목간에 따르면 '대부여(大夫餘)는 수천 리에 이르는 땅을 확보하여 칠천 호(戶)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발견됨으로서 상당히 융성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때 발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유귀국과의 교류를 시도했고, 덕무왕에게 '유귀국공'(流鬼國公)을 수여했다.[주 8][주 9]

북발해의 수립

916년, 거란(契丹)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분열되었던 부족을 통합하고 요나라(大遼國)를 세웠다. 925년 음력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渤海)를 공격하였고 이 당시 발해는 내부에 쌓여진 모순과 지배층의 내분[4]이 다분했던 가운데, 야율요골(耶律堯骨)의 상경(上京) 함락으로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함으로서 926년에 발해는 급작스럽게 멸망하였다. 다수의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가 세운 괴뢰국인 동단국(東丹國)의 거주하게 되었으나, 지속적인 발해부흥운동(渤海復興運動)이 전개되면서 정안국(定安國), 후발해(後渤海)와 같은 후계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956년, 정안국을 세운 열만화(烈萬華)의 아들, 열안림(烈安林)과 대인선의 아들로 추정되는 대광혜(大光暳)는 압록강(鴨綠江) 일대와 만주(滿洲) 지역에서 지속적인 독립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 이천여 호(戶)[5]에 이르는 유민들을 이끌고 사할린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예맥 문화와 대립이 발생하면서 완흥전투(完興戰鬪)[6]가 발발하였고, 이에 발해 유민 세력이 승리함에 따라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유민들을 이끌고 온 대광혜열안림을 비롯한 발해 왕족 및 귀족 출신 유민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대광혜는 수도를 덕안 용천부(德安龍泉府)로 하여 이전 예맥 지배층이 쌓은 관릉성(館陵城)을 정비하여 사할린 남부의 도시화를 꾀하였다.

학계에서는 이를 '북발해'(北渤海)라고 부르며, 12세기~14세기에 이르는 거란, 여진 유민들의 이주로 인한 혼란까지 가독부(可毒夫)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전 사할린 지역을 통치하던 예맥 민족들은 북발해의 귀족 사회로 편입되었으며, 대광혜의 뒤를 이은 민왕(悶王, 959?~970)은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고구려-발해를 잇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제시했다. 외교면에서는 사할린 남부의 아이누 문화와 융화되었던 이전 예맥 유민들과는 달리, 발해계 지배층은 사할린 아이누를 확고하게 복속시켰으며, 북해도를 통한 일본(日本)과의 교역 루트를 개척하였고, 동해 바다를 관통하여 고려(高麗)과 접촉하기도 했다.[주 10]

유왕(流王, 1023?~1039?)은 사할린 중부와 북부에 넓게 포진된 니브흐인, 오로크인(ウィルタ)들의 세력권을 복속시키기 위해 여러번 정벌을 하였고, 재위 말기에 이르러 이들이 조공을 바치고 복속할 것을 선언하면서 목거주(木居州), 북화주(北和州)와 같은 지방 통치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때 덕안 용천부관릉성 일대를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가 정비되어 '견려로'(遣麗路), '견일로(遣日路)' 등이 개설되는 등 대외 무역이 원활해졌으며, 「국조서기(國趙書紀)」와 같은 사서를 편찬하여 발해 왕실에 대한 정당성과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허나 유왕을 이후로 왕권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가혹한 조세 제도까지 겹치면서 농민 및 소수민족의 봉기 등의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헌왕(憲王, 1087?~1103)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민사재법'(田民私財法)을 공포하여 개간 토지에 대한 무제한 사유권을 공인하였다.[7][주 11]

재력을 가지게 된 귀족들과 방계 왕족 그리고 대대적인 후원을 받은 사찰회(寺刹會)는 사할린 중부, 북부를 향한 개척을 시도했다. 이들이 개척하게 된 사유 토지들을 '장원'(莊園)이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장원 체제는 점차 토지의 소유자인 영주(領主)와 해당 토지를 경작하는 작인(作人)과 야민(野民)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자급자족 경제 공동체가 구상되었다. 탁왕(卓王, 1103~1136)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국사(國司)를 파견했으나, 이미 중앙 통제력을 벗어난 영주들은 '불입권'(不入權)과 '불수권'(不輸權)[8]을 내세워 중앙 통치를 거부하고 조세 면제를 선언했다. 이로서 150년간 이어진 중앙집권체제가 붕괴되고 중세 봉건 사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주 12]

봉건 사회가 도래하면서, 중앙정부 주도의 무역이 쇠퇴하고 각각의 장원에 속한 민간 상인들의 주도로 교역로를 독점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사할린 최남단에 위치한 병서항(炳逝港)을 차지한 오치욱(烏治昱)은 일본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들 민간 상인들은 남송(南宋)의 도자기와 서적 등을 포함하여 동전까지 일본을 통해 수입하면서 선진 문화를 습득하고 화폐경제의 성황을 이룩했다. 이렇게 무역을 독점하게 된 항구들은 점차 재력을 갖춘 상인들과 일부 토호(土豪)들을 주축으로 영주들의 불간섭을 선언하고서 이들의 자치를 바탕으로 한 자유도시(自由市)로 성장하게 되었다.

1117년, 대륙 내 최후의 발해계 국가인 대발해(大渤海)의 건립자인 고영창(高永昌)이 수백여 호(戶)를 이끌고 귀순하였으며, 이에 탁왕은 그에게 수백 리의 땅을 주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땅을 수여받은 고영창은 곧장 장읍성(長邑城)을 세우고서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기를 들고 스스로를 '진정한 발해의 후예'임을 자청하여 흥원국(興元國)을 세웠다. 봉건 사회의 도래로 결집력이 약화되었던 중앙정부는 여릉전투(餘陵戰鬪)에서 패배하였으며, 탁왕오소천(烏昭川)의 장경부(杖硬府)로 피난하였다. 고영창은 '대가독부'(大可毒夫)를 칭하여 황제와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며 장원을 통제하려했으나, 이에 반발하던 장원들이 일제히 덕안 용천부장읍성을 함락시킴으로서 고영창은 몰락하고 그를 따르던 유민들은 장원의 작인(作人)이 되었다. 탁왕을 보필하던 오소천은 이를 계기로 발해 왕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하기 시작했다.[주 13]

정치

하진의 중앙 정부는 황제를 국가 원수로 삼는 의원내각제(단원제)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의회 의원은 각 영방정치체에서 인구에 비례하여 선출하며, 주로 다수당의 당수가 의회에서 행정 수반으로 선출된다. 이 행정 수반은 내각대내상(内閣大内相)이라고 부른다.

행정

경제

사회

국방

각주

  1. 아이누어(アィヌイタㇰ)로 '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예맥계에서는 이곳을 '흥안부'(興安部)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아이누어(アイヌ・イタㇰ)로 '우리가 찾은 땅'을 의미한다.
  3. '말례'(末禮)는 시호가 아닌 이름이다. 시호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여 이름으로 기재한다.
  4. 이것은 학계에서 추측하고 있는 부분이며, 이외에도 백두산(白頭山) 분화설, 농민 반란과 종속하고 있던 말갈 부족들의 봉기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따지려고 시도하고 있다.
  5. 대략 1만명에서 2만명에 이르는 인구로 추정하고 있다.
  6. 실제로 전투가 있었는지는 학계에서도 분분하다. 전쟁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갈주사기(鞨州史記)》와 같은 고서 기록에 집중하는 한편, 전쟁설을 부정하는 이들은 기존 예맥 문화 유물을 바탕으로 한 실증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7. 이전까지 토지 제도는 '국공토지법'(國公土地法)을 바탕으로 개간된 토지는 국가 소유로 귀속되어 땅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토지세를 취했다.
  8. '불입권'은 국사(國司)의 출입권을 제한하는 권리, '불수권'은 장원에서의 생산물에 대한 조세 면제의 권리를 말한다.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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