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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제47대 내각총리대신 후나다 나카 船田中 | Funada Nak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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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5년 4월 24일 |
대일본제국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 |
사망 | 1979년 4월 12일 (향년 83세) |
대일본제국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 | |
국적 | 일본 |
재임 기간 | 제47대 내각총리대신 |
1960년 7월 13일 ~ 1963년 4월 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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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후나다 나카는 일본의 제47대 내각총리대신으로, 1960년부터 1963년까지 재임했다.
상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철혈로 승리한 이후, 정치 상황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쇼와 천황의 의지에 따라 도조 히데키가 1947년 지나사변 종식과 동시에 실각하고, 스즈키 간타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기도 고이치, 하토야마 이치로, 아오키 가즈오 등 3년을 넘기지 못하는 단명 총리들이 이어지며 익찬회 내 치열한 권력다툼이 비화됐다. 대체로 이러한 혼란은 군부에 의한 것이었고, 20년이 넘도록 익찬회는 군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1959년의 쇼와 34년 농민 쟁의가 제국의 모순을 드러내고 아오키 가즈오 내각이 실각했으며, 한때 만주에서 두각을 드러냈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집권했지만 군부의 철저한 대변자인 기시는 더이상 20년을 시달려온 익찬회 내 문민관료 세력의 비토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후나다 나카가 정권을 잡게 된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된다.
내무성을 기반으로 하는 내무계는 익찬회 내 최대의 계파인 익찬의원동맹과 연합해 기시를 실각시키고 내무대신 후나다 나카를 총리에 올렸다. 그렇게 후나다 내각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익찬회도 권력 분점문제나 대장성, 내무성, 상공성 등등 각 행정 조직간의 갈등으로 여러파벌로 갈라져 있어서 권력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후나다와 익찬회라고 군부가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군부는 여전히 폭주하여 미국과의 긴장을 일으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61년 하와이에 대한 미사일기지 설치 방침. 즉 미국을 향한 직접 도발이라는 군의 대담한 계획안에 대해 후나다는 무력하게 승인하는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1962년 하와이 미사일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후나다의 가장 큰 실책은 자이바츠에 대한 대란 통제 실패였다. 승전 이후 공영권에서 흘러오는 자원을 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한 자이바츠가 일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커져 있었고, 자이바츠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져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1963년 4대 자이바츠 중 하나인 야스다의 초대형 비리가 적발되고, 그 때문에 경제 자체가 폭발해버리는 야스다 위기가 발생하며 일본은 자이바츠 문제가 곪아 터지고 만다.
1963년 3월 드러난 이 엄청난 스캔들은 제국 전역을 뒤덮었고, 정계 익찬회의 주요 인사들도 연루되었으며 후나다 역시 깊게 관련되었다. 4월 총리직에서 사임한 그는 곧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익찬회와 정계에서 퇴출된 뒤 각종 비리혐의로 기소되어 최고재판소는 징역 15년을 선고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된다. 1968년 가석방되었고, 1979년 도쿄 마루노우치 저택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