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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로우휠 1편
집무실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땀을 흘리고, 눈을 깜빡이고, 숨을 들이마신다. 긴장한 모습이었다.

당연히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섬세하게 치장된 문을 밀고 들어가자 순간 빛이 쏟아졌다. 연회장처럼 트인 거대한 방, 그리고 정면에는 벽 한면을 메울 거대한 창문이 세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대한 창문과 그리고 그 앞으로 ‘각하’라 불리는 남자의 책상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담백한 장소였다. 그 흔한 미술품 하나 없는 방. 하지만 그보다 더 눈이 가는 존재가 있다. 바로 걸상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복면을 쓴 채 앉은 두 남자다. 그 사이 걸상에는 권총 한 자루가 놓여있다. 이곳에 처음 방문한 그녀로서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알 리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다, 번갈아가며 두 사람을 처다보았다.

아마도 둘 중 하나는 총통일 것이다.

그런데, 머리에 눌러 쓴 복면은 대체 뭘까.

난해한 상황 속에서 걸상 밑 자명종이 울리자 두 남자가 보이지 않는 앞으로 총을 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왼쪽 남자가 권총을 얻어냈고, 떨리는 손으로 실린더를 탁 치더니 상대편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렇구나.

그래. 이게 사람들의 말하는 독재자의 괴랄한 취미인가.

그녀는 지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방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는 오직 총을 든 남자 뿐이었다. 그는 거친 숨과 함께 해머를 젖히 방아쇠를 당겼다.

아.

해머가 부딪히자, 총을 쏜 남자도, 지켜보는 그녀도 어깨를 들썩이며 움찔했지만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남자는 결국 걸상에 다시 총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반대편 남자가 먼저 거머쥔다. 그 역시 실린더를 돌렸고, 방아쇠를 당겼으며, 여전히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분명 여기까지라면, 둘 모두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남자, 뭔가 언짢은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입고있던 바지 주머니에서 총알을 한움큼 꺼내들었다. 냉철한 철덩어리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고, 적적한 방을 채웠다. 그리고 실린더를 꺼내 총알을 하나하나 집어넣는다. 마기 꾸깃꾸깃 쓰레기를 집어넣듯, 한발, 두발, 세발.. 여섯발. 총에 처음부터 총알은 없었던 거다. 건너편 상대는 흠칫 했지만, 몸을 덜덜 떨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곧 이유를 납득했다.

이 게임의 승자는 처음부터 정해져있던 셈이다.


총을 쥔 남자는 복면을 벗어던졌다. 불그스름한 머리의 중년. 그녀는 총통의 모습을 거의 처음보았다. 깊게 파인 주름만큼이나 진한 눈썹. 날선 핏줄이 가득한 손으로 앞머리를 넘기더니, 고개를 손님이 온 방향으로 틀어 물었다.

"말하게"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누구를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곧바로 경례했다.

"아. 각하 죄송합니다. 하나의 눈을 위하여[1], 보고가 늦었습니다. 전 중앙전선 4군단 참..."

"굳이 계급은 필요없네. 어차피 내 아래가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서류봉투를 더듬었다.

"중앙전선 전선 상황과 지표, 보급 현황을 보고드리려 방문했습니다."

총통이 손을 까딱하자, 그녀는 직접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는 내용물을 꺼내고 내용을 훑어보더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몸을 벌벌 떠는 남자의 건너편에 앉아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열세란 얘긴가?"

"공세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군"

총통은 무언가 깊게 생각하다 그녀에게 물었다.

"전쟁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나?"

"그건..."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얼버무리려 했지만 이 답답한 환경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총통은 또 못마땅하다는 듯 턱을 더듬으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소매를 걷어 실린더를 만졌다.

"그러니까?"

"국가와 개인이 원리적으론 같기에.. 사회에서의 경쟁처럼 국가도 경쟁으로 비교우위를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합리적인 일인가?"

이번에는 뜸들이지 않고 서둘러 대답한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대의 이익을 산출한다면.. 가장 가시적이고 효과적인 형태의 정치입니다."

"그럼 살인은? 살인은 합리적인가?" 그녀는 자연스레 총통이 쥐고 있는 총에 눈이 갔다. 살인이라니. 설마 싶었다. 애시당초 사회와 개인은 다르지 않나?

"군인이기에 필요하다면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실행해야 합니다."

"훌륭해. 기회를 준 보람이 있군"
총통은 흐뭇하다는 듯 웃고, 그녀가 약간의 안심을 하자마자 중년은 팔소매를 걷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반동을 억누르는 힘줄에서는 금방이라도 붉은 피가 튀어나올 듯 날 서 있었다. 한 발이 아니다. 무려 연신 여섯 번 총을 쏴 그 총성은 온 벽에 부딪혀 그녀의 귀를 묵직하게 때렸다.

탄피 6개가 떨어지는 순간마다 솟아올랐던 피는 가깝게는 의자 아래부터 중년의 하얀 셔츠까지 선혈이 뻗어나갔다. 그녀는 먹먹해진 청각보다 빨간색으로 가득한 시각이 더 아려왔다.

"복무신조를 말해보게."
"우리는,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향하는, 올곧은 천개의 창이다."

복무신조의 의의. 그건 복종이었다.

소리의 미세한 떨림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힘겹게 말했다. 총통은 그 앞에서 권총을 바닥에 내던지고 핏자국을 밟으며 걸상에 걸터앉았다.

"참모장.. 참모장이면, 그래 5등 병사"

"예. 각하"

"질문을 다시 바꾸겠네. 전쟁은 정당한가?"

"정전(正戰)을 논하신다면, 경우에 따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말마따나 경우에 따라 다르다면, 살인도 마찬가지군 그래. 정당한 살인 말이야" 그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복면을 쓴 남자를 쏴죽인 게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괘변론자로 유명한 그의 말장난 때문에 수없이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생각한다면, 이곳은 끔찍한 지옥과 다르지 않아보였다.

"나는, 정당한 전쟁이 없다고 생각하네. 모든 이야기는 궤변이야. 나도 알고 있네. 개인이 개인을 살해할 정당성도 없는데, 하물며 사회가 사회를 파괴할 명분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터무니 없어. 오히려 해결은 대화밖에 없지. 자네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전쟁은 기필코 일어나네. 왜?"

총통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뭐 때문이라 생각하나?"

그녀는 차마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각하. 이해하기 경외로운 혜안이십니다."

"미안하군. 내가 이상한 말을 많이 하는 편이지. 난 모든 싸움이 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네. 정당하느니.. 정당하지 않느니. 그런 건 현실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어. 역사적으로 모든 전쟁은 명분 하에 일어났고, 그게 힘의 논리지. 내가 방금 게임에서 이긴 것 처럼. 단지 총알을 가진 내가 이겼을 뿐이네. 총알이 없는 상태에선 누구도 죽지 않았을 테지. 그러나 그렇다고 가진 자를 욕할 순 없지 않나? 그런 걸 이해해줄 만큼 세상은 균형적이지 않네."

"내게 그런걸 잘 이해시켜준 학자들에게 크게 감탄했고 말이야. 지금은 비록 이렇게 널부러져 계시지만 말이지." 총통은 선혈이 흐르는 시체를 툭툭치고, 그녀의 앞에 서서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럼에도 심금을 울리는 지론이지" 곧 문이 열리고 하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들어와 익숙한듯 손에 피를 묻혀가며 시체를 옮긴다. 바닥에 있는 적혈을 닦으며. 시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라. 이곳은 또 다른 전쟁터가 분명했다.

"내 얘기가 어떤가? 반박할 수 있나? 걱정하진 말게. 군인을 쏘는 취미는 관뒀거든."

입을 다물었다. 교육받은 무지라고 했던가. 된통 아무말이나 내뱉으며 떠드는 지배자 앞에서 그녀는 노예로서 곱게 입을 물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길인 걸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럼.. 그렇다면 힘의 논리라면 무엇이든 용납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데도 터져나오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격앙된 어투다.

총통은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내비추었다.

"그렇지. 약자가 도태되는 건 이미 역사로 증명됐지 않나? 무구의 기간동안 신화로 여겨지던 용도, 이제는 인간이 가죽을 벗겨먹지. 가죽과 머리가 잘팔리는 소비재에 불과해. 그 지적인 생명체들이 한낮 미물에게 잡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것이 힘이야. 이 매커니즘을 부정할 수 없네. 심지어 자네도. 자네가 입은 군모에서 신발까지, 혹은 평생을 걸쳐 배운 지식조차 말일세"

"..."

총통은 직접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가 입은 제복을 보곤 옷맵시를 가다듬는다.

"처음보다 표정이 일그러졌군 그래. 내가 윗사람이라 말못하는 아랫사람처럼.. 혹시나 자네가 내 이야기를 듣고, 괘변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난 내 지론에 확고해.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오히려 살아남는 일이 드문 일이야. 그러면서도 인간들이 다른 종족보다 높은 자리에 선 건, 그만큼의 힘이 있었기 때문일세. 또한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부족함을 보여선 안되네."

그녀는 생각했다. 괘변은 커녕, 논리조차 없는 말이라고. 마치 어줍짢게 공부한 사상가처럼 형편없다고. 그녀는 한치의 영혼도 실려있지 않은, 정말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각하의 모든 말씀, 가슴으로 새기겠습니다."

총통은 그녀의 군모를 똑바로 씌워주고는 서류뭉텅이의 가장 마지막 장을 피며 물었다.

"자네는 내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나?"

기어코 싫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선다고 의미도 없으며, 명령은 따라야 한다. 죽고 싶지 않아도 죽어야 한다. 그녀는 그렇기에 뻔뻔하게 또 영혼없이 대답했다.

"각하의 명이라면 죽겠습니다."

그러자 총통은 딱딱한 주름들이 풀려나며 활기차게 웃어넘겼다. 그 거짓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과연! 연기를 못하는군. 상관이 누구였지?"

"헤반 중장님이십니다."

"훌륭하군. 훌륭해. 자네가 죽고싶지 않아하는 모습이 잘 보였어. 죽는 건 자네 상관일세. 단지.. 중장은 딱 2년 전에 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네. 나를 위해 죽는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죽겠다. 그렇게 말했지. 그때는 그 올곧은 말이 참 멋있었는데 말이야. 전쟁을 다 망쳐놓고 나랑 만나기 어려울 만큼 송장이 되었다지 아마? 그 책임을 져야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아첨에 재능이 있는 자네가 군대를 맡아보면 어떨까 싶은데."

그러나 이번 만큼은 난색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무슨..... 전 그럴 자격이 못됩니다. 각하."

"헤반 전 중장도 그렇게 이야기했지. 중앙전선의 장이 된걸 축하하네. 중장! 젊은 나이에 성공했군."

그녀의 앞에 엎드려 바닥을 닦던 시녀가 마침내 일어날 즈음, 총통은 걸상의 보관장에서 종이 한장을 더 꺼내든다.

"이건 선물일세"


한 장의 사인, 이 서류의 의미

"44사단부터 50사단까지, 그리고 내 근위대대 투입을 명하겠네"

그리고 그는, 다시 복면을 쓰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더했다.

"아무쪼록, 전쟁을 승리로 이끄길 바라네. 아렌 중장"


라이프니츠는 동부 대륙에 위치한 독재국가이다. 15년 전 혁명으로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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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이프니츠 군대 경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