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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우휠 8편
뒷배경

삶이란 길지 않다.
삶이란 짧다.
너무나도 짧아서
손에 움켜쥔 모든 걸
금방 잃어버리고 만다.
심지어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게 아꼈는지도

그리고 그게 무엇이었는지도
정말로 존재하긴 했었는지
그 모든 것에 의심이 든다.

두렵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붉은머리의 중년은 책을 덮는다. 계획이 진행된지 이제 고작 사흘이다. 남매에게 각각 다른 미끼를 던지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들은 의심하고 고민할 것이다. 이상한 일도 아니고,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다. 그는 의심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게 바로 그 '의심'이니까.

그러니 어리석게도 자신에게 저항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기회를 앗아갈 생각은 없었다. 애시당초 이레프 가문이 아니라면, 자신의 계획은 성공할 수 없다.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왕도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절박한 심정 앞에서는 평생의 지론도 무시하는 법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병 앞에서는 더더욱 나약하다.

총통의 집무실에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왔는가?"

"천개의 창으로서, 총통을 뵙습니다."

"웃기지도 않네. 보고하게"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는 서류를 읊었다.

"우선, 다섯명의 마법사 이송을 절반 정도 완료했습니다."

"다음"

"호소니행 비공정에서 공화수호전선이 탈취를 시도했는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다음"

"타라바오 세그넌이 이송 중 자살했습니다. 비공정에서 하차한 후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살했다고 합니다."

총통은 머리를 긁적인다.

"관련자들 처벌하고, 본보기로 이송담당자는 사형시키도록"

"왕당파 기지 3곳 중 1곳을 파악했습니다. 위치는 동부도시 군청 3동입니다."

"음. 좋아."

총통은 흡족한 표정으로 외쳤다.

"우리 친애하는 워렛 경에게, 지체하면 어떤 벌이 따르는지 보여주도록 하지"


"부고라니? 호소니 혁명세력이 테러?"

반델이 설명을 덧붙였다. "방금 확인된 소식입니다. 동부도시 시내 한복판이어서 전보가 빠르게 왔습니다."


"저런..."

옆자리에 있던 레이먼트 소장은 긴박한 소식에 편히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부고의 주인공은 자신과 같은 소속의 동료들이거나 혹은 부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위장신분'. 즉... 살해당한 이들은 왕당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호소니에서 왜 그런 짓을? 자신이 이곳에 와서? 당혹감이 머리를 꽉조였다. 그리고 다행이긴 하지만, 부상자 명단에도 동생은 없다. 워렛은 어디간거지?

"소장님. 호소니 혁명세력이라는 조직이 따로 있습니까?"

"그... 예. 있습니다."

"..."

혼란스러웠다. 호소니에 대해 방금 막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고작 몇 분이나 지났다고 이 사단이라.

"아."

"소장, 중장님. 우선 숙소로 돌아가시죠. 제가 이후 전보를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반델은 멍하니 있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수습했다.

"사령관, 내일 뵙겠습니다."

레이먼트는 자리를 떴고, 아렌은 다시 의자에 앉는다.

"하"

깊은 한숨이다. 아렌의 표정도 행동도 심경이 굉장히 예민해보인다. 옆에 서있던 반델은 자신의 상관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무의미하다 싶어 그저 자리를 지켰다.

"내겐.. 모두 가족과.. 다름 없는 사람들이지. 반델은 잘 모르겠지만.."

"..."

"돌아가도 돼. 난 혼자 좀 쉴 테니까"

그리고 아렌은 말 한 마디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반델은, 총끈을 꽉 쥐고 멍하니 방 앞에 서있다가, 노을이 끝나고 해가 저물고 나서야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제야 근무가 끝나신 겁니까? 반델 소령님."

그를 부르는 이는 검은 군복 위에 파란 조끼를 입은, 반델과 같은 근위대원이다.

"음. 그렇지. 내륙에서 돌아온 건가?"

"예. 총통께서 부탁하신 내륙지도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장교들 지도가 대부분 엉터리여서 실제 상황에 맞춰서 다시 만들었습니다."

"...본국에서 테러가 있었다던데, 호소니인들이.."

"들었습니다. 흔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

반델의 숙연한 표정에, 그 근위대원이 물었다.

"걱정마십시오. 작전이 수행되면 충분히 응징이 될겁니다. 그게 국가에 대한 충성 아니겠습니까?"

"..."

반델은 눈을 감고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만 쉬십시오. 들어가보겠습니다. 가자."

그의 뒤에 서있던 다른 근위대들도 앞서서 간 사내를 따라 우르르 이동했다. 정말, 전쟁이 머지 않은 분위기였다.

반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도 조용히 방으로 돌아간다.

그 무렵 아렌은 쉬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건물 3층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창문 너머로 반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델이 자리를 뜨자 그녀는 조용히 블라인드를 내리고는 작은 등불을 키고 머릿속의 이미지들을 종이에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찜찜한 점이 많다. 이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보를 이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우선 왜 자신을 사령관에 부임시켰을까?, 그것이 첫번째 단추다. 그 다음 줄을 쭉 긋는다. 하지만 아직 이유는 알 수 없다.

두번째 단추는 부관이다. 반델의 존재가, 그냥 감시가 아니라면?

반델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비공정에서 위험천만한 일을 다 해냈고, 단순히 총통의 충성스러운 개라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 연기일 리가 없다. 하지만 부관이 바뀐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신뢰하고 또 부정할 수 없다. 반델을 계속 의심해보아야 한다.

세번째 단추는 세그넌의 말이다. 마법사들을 옮기고 있다? 왜? 이것도 여전히 알 수 없다. 자신들에게 마법이라고 해봤자 말도 안되는 이야기 하나밖에 없으니, 그런 일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고.

워렛. 워렛이 네번째 단추다.

워렛은 어디에 있는거지? 이미 대양을 건너서 다른 대륙에 온 아렌에게 워렛의 위치를 파악할 방법은 없다. 호소니에는 자신의 동료들도 없고, 의지할 구석이라고는 반델과 군부대 뿐이다. 그들을 통해서 비밀리에 정보를 받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 총통은 그래서 자신을 여기에 보냈을까? 워렛과 자신을 떨어트렸다?

문득 워렛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 계획을 위해선 필요하잖아."

"계획.."

아렌은 그렇게 속삭인다.

아렌의, 그리고 남매의 계획이란. 이 나라를 뒤집어엎어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 나라를 무너트리고 귀족들을 대학살한 저주스러운 군부를, 다시 학살하는 것. 그건 파멸만 낳을 수 있는 방법이다. 아렌 자신이 그토록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방법.

"걸렸다?"

아렌은 그렇게 말하며 큰 종이 한쪽에 적었다.

자신들이 걸렸다면? 그래서 워렛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혹은.. 잡혀있다? 아렌은 펜을 내려놓는다. 아니. 완전히 망상이다. 그런 계획이 걸렸다면 자신은 진작에 총통의 장난감이 됐겠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총통이 알았으면 시기적으로 진작에 알았을 텐데. 자신을 사령관을 부임시킬 이유는 없다. 무슨 꿍꿍이가..

"말도 안돼.. 그건 말이 안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올 리 없다.

똑똑똑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고 아렌은 흠칫 놀랐다. 반델?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반이었는데, 이 늦은 시간에 누구일까.

아렌은 급하게 낙서를 한 종이를 접고 자신의 서랍에 집어넣었다.

"누구십니까?"

문 너머로 소근거리는 말이 들린다.

"중장님. 저 맥거만입니다."

맥거만? 갑자기? 아렌은 문을 비스듬히 열고서 상체를 내밀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아직도 군복을 입고 계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반델 소령님도 쉬고 계시고.. 전보를 받았는데 제목을 보니 꼭 전달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핫."

연락이 더 온 모양이다. 내용을 살펴보았다.

"아"

한 장은 곧 물자를 실은 선박이 내일 오전에 선착장에 도착한다는 것, 그리고.. 워렛.. 워렛이 호소니로 온다는 내용이다.


아직 정오도 아니었지만 햇살은 강하게 내리찐다. 비공정의 도착으로부터 이튿날이 되는 시점이다. 인원 뿐만 아니라 전차, 차량, 중화기등의 무거운 물자들이 도착했다. 선박은 두터운 철문을 내려 쉼없이 물건들을 쏟아냈으며 도착한 인원들도 열을 맞춰서 이동했다. 총통이 이야기했던 지원병력이 대거 도착하면서 아렌에게 꼬박꼬박 보고가 들어갔다. 아렌은 서류를 확인하다가 역시나 전보대로 워렛이 인원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동생의 소속이 조금 이상하다.

"조금 이상한 일입니다."

반델 역시도 서류의 내용을 알음알음 보았기에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워렛의 소속은 근위대 소속이었다.

"제가 동생분을 모셔오는 건 어떻습니까? 인파가 제법 많아서, 직접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반델은 묵묵히 선박을 바라보는 아렌에게 자신이 제안한다.

"괜찮아. 내가 직접 다녀올게. 그리고 각 사단장들한테 3시까지 작전회의실로 모여달라고 전달해줘."

"충성. 알겠습니다."

아렌은 선박이 도착한 이후 내내 기다렸지만 결국 워렛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 남매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생사를 같이하는 존재다. 그럼 역시 무슨 일이 있는건가? 고작 5일이다. 동생과 자신이 떨어진지는 5일이었다. 그 사이에 일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었겠나. 아렌은 그런 생각으로 근위대 인원이 모여있는 막사 쪽으로 발을 옮겼다. 괜시리 이상한 기분이 계속 아렌의 신경을 뒤덮는다.

불안하다. 무언가 불안해.

"천개의 창으로서, 사령관님 인사드립니다."

천막에 도착한 아렌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근위대 대장은 안중에도 없고, 그 뒤에서 서류를 보고있는 워렛에게 막무가내로 다가갔다.

"워렛"

이름을 부르자, 워렛은 천천히 뒤를 바라본다.

"천개의.. 창으로서, 충성"

워렛은 아렌의 목소리와 얼굴을 보고는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보인다. 뭔가 반가워보이면서도 입술을 꼭 물었고, 초점이 흔들렸다.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뭔가 어벙하고 어색하게 행동한다. 아렌은 단숨에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뭐하는거야? 왜 여기있어? 시안은? 동부도시는?"

아렌은 답답한 심정에 모두가 있는 앞에서 워렛을 쏘아붙이듯이 행동한다. 내심 무시당해서 뻘쭘했던 근위대장은 상황을 파악하다가, 워렛에 대한 정보를 자신이 설명했다.

"사령관님. 워렛 상등관은 각하의 직할명령으로 근위대 작전고문으로..."

"직할명령이라니 무슨...!!"

"사령관님. 장교들 앞에서 이런 행동은 좀.. 아니신 듯 싶습니다."

아렌은 워렛의 말을 듣고는 호흡을 고른다. 그래. 아렌 자신답지 않게 너무 눈치가 없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근위대 장교들은 사령관이 보여주는 이상한 모습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게 무슨 일인지 바라보고 있다. 아렌은 옷깃을 괜히 더듬고는 다시 막사를 나갔다.

동생의 상태가 이상하다. 대화도 이상하고, 동생은 정확히 맞다. 대화를 해봐야...

"중장님!"

"어."

정신없이 그곳에서 도망친 아렌은, 초점없이 걷던 그녀를 반델이 부르면서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어제부터 상태가 좀 안좋으신 것 같습니다. 작전회의실 건물은 이쪽입니다..."

반델은 진심으로 아렌을 걱정하는 어투다.

"그래."

이성을 잃었었다. 이상한 것 투성이어서 그나마 아군인 동생과 대화하려 했는데, 동생은 자신을 나몰라라 하고, 게다가 소속은 총통 직속의 근위대..

"반델. 근위대원이 아닌데 근위대로 발령받는 경우가 있었나?"

"제가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이상한데..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과민반응 하시는 게.."

"그렇지.."

과민반응. 그렇게 보일 것이다. 이레프 남매에게 찔리는 일이 없었다면야..

"식사부터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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