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 한나라당 당수
김응적
金膺敵 | Kim Ung-jeok
출생 147년 6월 (76세)
경산직할시 부선시 중앙동
(경산특별시 부선시 중앙동)
거주지 북제신자치구 서구
종교 증산도 (환단교회)
학력 부선중앙초등학교 (졸업)
부선중앙중학교 (졸업)
부선중앙고등학교 (졸업)
증산학당 (졸업)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일병 소집해제
신체 172cm
가족 아버지 김응준
어머니 김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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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1
정치 성향 극우
중도주의 (주장)
현직 당수
약력 대한민국 민의원 의원
증산학당 교수
민주자유당 대변인
민주자유당 부대표
당수
중국의 한족은 본래 한민족의 일부였으며, 이 한민족들은 점점 확장하여 마침내 구라아대륙까지 도달한 용맹한 배달민족이다!
증산학당 교수 직무 중
환단고기는 한민족을 위한 것이다. 고로 환단고기는 좋은 것이다.
증산학당 교수 직무 중
여러분, 환단고기를 믿지 않으면 한민족이 분열되고, 결국 이 나라는 우리 역사를 탐내는 광신도들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21대 민선 당시
여러분, 한나라당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증산도를 탄압하고 환단고기를 찢어버린 이명재 대통령에게 큰 죄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215년 복귀 당시
우리는 나라를 해치러 온 파시오이스트가 아닙니다! 한민족을 구원할 유일한 정당 한나라당입니다!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유세 중

김응적(金膺敵, 147년 6월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한나라당의 現 당수이자, 前 증산학당 교수, 제21대 민의원 의원이다.

생애

147년 6월 경산직할시 부선시에서 태어났으며, 부선중앙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를 가지 않다가 191년 현실 한국에 전파된 환단고기에 빠져 증산도를 믿기 시작한다. 이후 193년 환단고기를 연구·전파하기 위해 증산학당을 만들었고, 환단고기를 열심히 가르친 덕에 졸업 후 정치에 입문한다.

처음 정치에 입문한 것은 바로 민주자유당이었으며, 그는 202년 입당한다. 이후 김진척 당대표와 함께 잠깐이나마 투톱을 이뤘지만 본인이 출마를 하지 않아 선거에 잇따라 패배, 본인의 환단고기 사상과 선거 패배 책임 때문에 김 대표와 갈등이 일어난다. 결국 20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범국민주의 정당인 한나라당을 창당해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그러다 제21대 대한민국 민의원 선거을 맞은 김응적은 한경특별시 민의원 의원으로 후보에 등록되었다. 그는 4차원 국가 건설, 모든 국민에게 100만원 지급이라는 공약만으로 단숨에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는데, 이를 계기로 증산학당은 수많은 신도들을 영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한국민족당과 함께 민의원에 입성한 김응적의 인기는 여야의 불만과 함께 금방 사그라들었다.

여야가 범국민주의 정당들의 의회 입성에 대해 불만을 표하자 김응적은 "여당은 하는 짓이 증산도 때리기 밖에 없고, 야당이 하는 짓은 환단고기 때리는 것이냐"라고 언성을 높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논란이 되었으며 김응적에 대한 불만은 오히려 커지기만 했다. 또 한나라당에 인물난이 발생하는 등 첫 번째 위기를 맞았고, 결국 김응적은 당 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곧 있음 다가올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한경특별시장에 출마하기로 한다.

그런데 2회 지선에서 비록 낙선했지만 소수의 범국민주의 정당들보다 가장 많은 득표율(9.2%)을 기록하고야 만다. 당시 언론에서는 환단고기에 미친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결국 다른 의미로 유명해지게 된다.

그러나 207년 이명재 대통령이 역사수정방지법을 통과시켜 증산도를 탄압하자, 김응적은 자신도 범죄자가 될 것을 우려해 한나라당과의 활동을 중단하고 7년 동안 북제신자치구 지하로 도피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 후 211년 민주자유당의 김진척 전 대표가 역사수정방지법을 위반했고 선관위가 이를 해산하기로 하자, 민주자유당은 해산 직전 한나라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하지만 김응적에게는 좋은 희소식이었다.

이후 215년 유영호 정부에 의해 역사수정방지법이 폐지되었고 한나라당을 다시 합법화하자 김응적이 당수로 복귀해 본인과 친분이 있는 임금림 대변인을 후보로 내세우게 된다. 이후 215년 후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임금림 후보를 당선시켰고, 218년에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북제신선거구 기초의원 출마 후보들의 유세를 지원했었다.

220년 4월 제26대 대한민국 민의원 선거에서 후보로 나섰으나 0.2%로 낙선했다. 결국 김응적은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어떤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혀 사실상 선거 참여에 불참하게 되었으며, 20대 대선이 다가왔음에도 본인이 후보가 아닌 당대표직을 맡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