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시움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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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리아 왕국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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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리아 전쟁
Nailia War | ภคเLเค ฬคг
기간 1489년 3월 18일 ~ 1489년 7월 4일
(총 3개월 18일)
장소 노던웨스 전역
교전국 엘리시움 왕국 엘리시움 왕국 나일리아 왕국 나일리아 왕국
지휘관 엘리시움 왕국 이칼루스 1세
엘리시움 왕국 엘베르토 트루먼
엘리시움 왕국 안드레아스 셰우첸코
나일리아 왕국 토리노 9세
나일리아 왕국 알렉산더 베나세르
나일리아 왕국 루카스 모리스
결과 엘리시움 왕국의 승리, 엘리시움 왕국의 노던웨스 지역 탈환
영향 클레이시아 전쟁의 도화선
나일리아 왕국의 몰락기, 엘리시움 왕국의 강대국 등극

개요

나일리아 전쟁은 1489년 3월 18일부터 1489년 7월 4일까지 노던웨스 지역에서 엘리시움 왕국나일리아 왕국이 벌인 전쟁이다.

배경

1342년 9월 26일 엘리시움 왕국이 독립한 이후로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1345년 우리가 알고 있는 아케론주를 수복하고 있는 엘리시움 왕국의 영토가 형성되었다. 클레이시아 최초로 20~25세의 남자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완전징병제를 시행하기 시작하면서 1460년 기준으로 인구가 450만 명밖에 되지 않는 소국이었음에도 육군 병력이 80만에 달할 정도로 군사강국이었다.

반면 나일리아 왕국은 엘리시움과 완전히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토리노 6세 시대 예산을 상당히 많이 투입한 아케론 신도시 건설 계획도 엘리시움 왕국의 독립으로 인해 완전히 무산되었으며[1], 오히려 건설 단계에 있었던 이 신도시를 엘리시움 왕국이 활용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팍스 나일리아는 진작에 불이 꺼진 지 오래인 상황에서, 레트로폴리스 원정에서도 크게 패배하며 병력 손실은 물론이고 군대 자체의 사기도 상당히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렇게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양국은 영토는 15배, 인구는 약 17배가 차이났지만 군사력은 동일한, 어쩌면 엘리시움이 더 강력한, 굉장히 모순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힘을 키운 엘리시움 왕국은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을 펼치기 시작하고, 마침 아케론을 잃은 후 아케론을 제외한 노던웨스 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던 나일리아 왕국의 상황을 보고 1489년 3월 18일 리트보아 지역을 시작으로 나일리아 전쟁을 일으킨다.

전개

1489년 3월 18일, 리트보아 지역을 시작으로 엘리시움 왕국은 80만 육군을 총동원하여 노던웨스 국경 전역을 동시에 침공하기 시작한다. 당시의 나일리아는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나일리아 반도사우스이스트 지역에 밀집되어있었으며, 지금 당장 엘리시움의 침공을 막을 수 있던 사람들은 그레이터리시움에 위치해있던 단 10만 명뿐인 육군들과 노던웨스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던 아무 힘없는 시민들과 인부들밖에 없었다.

우선 나일리아 왕국은 그레이터리시움의 10만 군대를 신도시 건설 속도가 가장 빨랐던 리트보아 지역으로 투입시켜 시간 끌기 전략을 사용한다. 엘리시움 왕국의 병력도 리트보아에 집중되어있었기에 이는 나일리아가 할 수 있던 선택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엘리시움의 침공을 임시방편으로 방어해두고, 사우스이스트와 나일리아 반도 지역에 몰려있던 육군들을 함선에 태워 노던웨스 지역으로 상륙하는 작전을 개시한다. 병력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가능한 한 전쟁에 투입시킬 수 있는 모든 병력들을 모두 동원시켜 엘리시움의 침공을 최대한 막아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나마 있던 나일리아의 병력도 리트보아 지역에 몰려있었으며, 엘리시움은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이를 파악하고 있었다. 리트보아 지역에 병력을 밀집시킨 것은 모두 나일리아의 병력을 리트보아로 유인시킨 뒤, 보리스트빌 지역을 수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일리아는 이 유인 작전을 사우스이스트 지역에서 출발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나일리아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나일리아의 군사 기지들은 수도인 나일리아 부근에 몰려있었으며, 이는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제2차 키오피-나일리아 전쟁을 통해 클레이시아 전역을 수복하고 난 뒤에도 이런 나일리아의 고질적인 군사적 문제점들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니, 고칠 필요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이스톨리아의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기였고, 웨스티시아는 제대로 된 통일 민족 국가가 건설되지 않았을 정도로 성장이 더디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노던웨스 지역에 굳이굳이 돈을 들여가면서 군사기지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있었던 병력도 그레이터리시움에 있었던 소규모 군사기지의 10만 군대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일리아의 허점을 제대로 파악한 엘리시움 왕국은 리트보아가 아닌, 보리스트빌 지역에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빠르게 노던웨스 지역을 섬멸하기 시작한다. 사우스이스트 지역부터 약 3,500km를 말을 타고 온 나일리아군들이 목격한 모습은 보리스트빌과 알로스키 지역을 모두 탈환당하고, 마지막 남은 리트보아 지역도 거의 탈환당한 시점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던 아군들이었다. 함선에서 내려 리트보아로 상륙한 육군들은 버텨보았으나, 전쟁이 완전히 엘리시움에게 유리해진 시점에서 초강대국이었던 나일리아도 전쟁의 양상이 소모전으로 전개되는 것은 버틸 수 없었다. 결국 1489년 6월부터 협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7월 2일 엘리시움에게 협상을 요청했고, 안 그래도 엘리시움의 계획에는 "휴식 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있었기에 1489년 7월 4일 이칼루스 1세그레이터리시움에서 조약에 서명하면서 그레이터리시움 조약이 발효되었다.

평가

세계사 최고의 자이언트 킬링이라 여겨지는 클레이시아 전쟁에 묻혀서 그렇지, 이쪽도 이칼루스 1세-이칼루스 2세의 전략적 판단력을 증명한, 역사적인 사건이라 여겨진다. 클레이시아 전쟁이 총력전이라면, 나일리아 전쟁은 총력전을 시작하기 전, 이칼루스 부자의 전략적 판단력을 전 세계에 증명한 '연습 게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만약 엘리시움 왕국이 그레이터리시움 조약을 쌩까고 욕심을 더 부렸다면 나일리아 왕국 전체를 밀어버릴 수도 있다고 평가될 정도다. 그리고 이를 엘리시움은 이후의 클레이시아 전쟁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칼루스 1세는 즉위한 후부터 나일리아의 대부분의 병력들이 엘리시움과 멀리 떨어져있는 클레이시아 남동쪽에 몰려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도 그레이터리시움리트보아 지역에 몰려있던 최고의 타이밍, 1489년 3월에 공세를 시작해 나일리아를 완벽히 속이며 전쟁에서 완승했다. 이후 그레이터리시움 조약을 무시하고 바로 6년 뒤 클레이시아 전쟁을 일으키면서 단 두 차례의 전쟁 만에 엘리시움은 중견국에서 클레이시아 전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각주

  1. 쉽게 설명하면 아케론 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엘리시움에게 하필 그 아케론 지역을 빼앗겨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