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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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 · 프랑스 황제

프랑스 황립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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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6대 황제
Napoléon IV
나폴레옹 4세 | Napoleon IV
본명 나폴레옹 미셸 프레데데리크 보나파르트
Napoléon Michel Frédéric Bonaparte
출생 1930년 12월 25일
프랑스 일 드 프랑스 파리 부르봉 궁전
사망 1998년 8월 12일 (향년 68세)
프랑스 일 드 프랑스 파리 루브르 궁전
국적 프랑스
재위 베트남 공
1951년 12월 1일 - 1973년 10월 5일
프랑스 황제
1969년 1월 1일 - 1998년 8월 12일
영국-프랑스 연방 공동 황제
1969년 1월 1일 - 1998년 8월 12일
작위 베트남 황제
알제리 국왕
세네갈 국왕
인도차이나의 보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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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아버지 조제프 2세
어머니 뤼종 보나파르트
황후 엘리자베트 보나파르트 (1954 - 1998)
자녀 슬하 3남
장남 나폴레옹 5세 (1957 - 2012)
차남 루이 보나파르트 (1958 - )
3남 그레비 보나파르트 (1963 - )
신체 키 183cm, 몸무게 84kg, 혈액형 O형
학력 프랑스 황립 대학교 (사회학 / Ph.D)
종교 기독교 (가톨릭)

개요

프랑스 제국의 6번째 황제이자, 영국-프랑스 연방의 제2대 공동황제. 1969년부터 1998년까지 약 30년간 프랑스의 황제였다.

생애

유년기

1930년 파리 부르봉 궁전에서 태어났다. 9살때 전쟁이 터지자, 조제프 2세는 전시 내각과 군 참모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파리에 남았지만 조제프 2세는 마지못해 안전한 후방 지역으로 대피시켰다. 16살때 독일과 미국이 패망하자 어린 나폴레옹 4세는 파리로 복귀하였다.

1951년,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이 과정은 TV로 생중계되어 세계에서 8천만명 이상이 지켜봤다.

황제로서

1968년 12월 31일, 부군 조제프 2세가 건강 문제로 생전 왕위를 양위하면서 1969년 1월 1일 즉위식을 가지고 프랑스의 황제로 공식적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한 직후 프랑스 식민지 순방을 떠났다. 베트남, 알제리, 세네갈 등 프랑스 식민지를 방문해 현지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이후에는 영국-프랑스 연방의 일원인 미국, 캐나다, 영국 등도 순방하였다. 당시에는 조제프 2세의 인기가 매우 좋았고 나폴레옹 4세 역시 헌신적인 처신으로 이미지가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 4세를 환영해주었다. 특히나 베트남 순방 당시에는 나폴레옹 4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 본다"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 조제프 2세가 숨을 거둔지 5년이 지난 시점에서 황비 엘리자베트 보나파르트가 별거를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불화설이 나왔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4세에 동정적인 시선이 많았지만 나폴레옹 4세의 불륜 및 부적절한 처신 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황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급감했다. 이로 인해 황실과 척을 두던 인사인 장 산상드뉘베르가 총리가 되어 10년 내내 황실이 내각과 불편한 관계를 맺는 껄끄러운 일도 있었다. 하지만 불륜은 오보로 드러났고, 엘리자베트 보나파르트와 나폴레옹 4세가 1983년경 5년만에 다시 공식 석상에 함께 모습을 보이고 화해를 하면서 나폴레옹 4세에 대한 안좋은 시선도 옅어졌다.

대체로 보수적이고 전형적 왕당파의 식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1984년에는 프랑스 황실 최초로 황실이 가지고 있던 예술품들을 내놓아 전시회를 가져 화제를 모았다. 또한 국가 경제가 어려울때에는 황실이 사치를 할 수 없다면서 예술품을 비롯한 황실의 여러 재산을 국가에 기증하여 프랑스가 1970년대 후반 빠져있던 경제 침체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1995년 65세의 고령으로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이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이때 뇌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총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지만 극복하지 못하고 1998년 종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이후 황태자였던 나폴레옹 5세가 황제직을 이어받았다.

평가

솔선수범하는 태도와 소탈한 행보, 프랑스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1990년대 초반을 이끌었던 것 등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Yougov의 여론조사에서는 나폴레옹 4세의 인지도는 98%, 긍정 평가 60%, 부정평가는 12%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복잡한 여성 관계와 1970년대 후반 불륜 의혹으로 인해 사생활에 대한 평가는 미묘하다. 불륜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나폴레옹 4세와 엘리자베트 황태비의 관계가 1977년~1983년 경 극도로 틀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나폴레옹 4세는 이에 대해 입을 함구했고 엘리자베트 황태비도 2005년 사망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4세의 사생활 및 결혼 생활에 대한 사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여담

  • 환경주의자였다. 정치적인 행보를 삼갔지만 유일하게 보인 정치적 행보가 프랑스 정부를 압박해 유럽 환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게 한 것이었다. 평소 환경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환경과학에 대한 황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장 산상드뉘베르 총리와 생전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나폴레옹 4세는 온건 보수주의를 선호했는데, 산상드뉘베르는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와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산상드뉘베르는 고인에 대한 예를 다한다는 뜻으로 나폴레옹 4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