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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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 · 프랑스 황제

프랑스 황립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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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4 선정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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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프랑스의 민영 방송사 TV4에서 1,200만명의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설문한 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의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 조제프 2세 루이 파스퇴르 장 산상드뉘베르
6위 7위 8위 9위 10위
에디트 피아프 몰리에르 장 자크 루소 필리프 르클레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프랑스 제5대 황제
Joseph II
조제프 2세 | Losephus II
본명 샤를 루아 보나파르트
Charles Loi Bonaparte
출생 1900년 4월 12일
프랑스 일 드 프랑스 파리 바르세유 궁전
사망 1973년 3월 6일 (향년 72세)
프랑스 일 드 프랑스 파리 콰르드벨르베르 중앙병원
국적 프랑스
재위 베트남 공
1928년 10월 20일 - 1951년 12월 1일
프랑스 황제
1939년 5월 11일 - 1968년 12월 31일
영국-프랑스 연방 공동 황제
1951년 10월 1일 - 1968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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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아버지 조제프 1세
어머니 뷰 뱌놀래 황태비
황후 실리아 보나파르트 (1928 - 1966)
형제자매 피에르 보나파르트 (1907 - 1977)
상블레 보나파르트 (1908 - 1983)
자녀 슬하 2남
장남 나폴레옹 4세 (1930 - 1998)
차남 샤를 보나파르트 (1932 - )
신체 키 178cm, 몸무게 80kg, 혈액형 A형
학력 프랑스 황립 대학교 (사학 / B.A)
종교 기독교 (가톨릭)
군사 경력
임관 프랑스 군사관 대학교
복무 프랑스 제국군
1926년 1월 12일 - 1928년 1월 11일
최종 계급 대위

개요

프랑스 제국의 5번째 황제이자, 영국-프랑스 연방의 초대 공동 황제이기도 했다.

칭호

라틴어 칭호는 로제푸스 2세 (Losephus II)이었으며, 공식 칭호는 Sa Majesté Joseph II, l'empereur de France, protecteur de l'Afrique, de l'Amérique du Sud et de l'Indochine, co-seigneur d'Andorre et cinquième empereur de la famille Bonaparte(프랑스의 황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인도차이나의 보호자, 안도라의 공동영주이자 보나파르트 황가의 5번째 황제이신 조제프 2세 폐하)였다. 동시에 영국-프랑스 연방의 공동 황제로서 영국-프랑스 연방의 공동황제(Co-Emperor of British-French Commonwealth)라는 칭호도 가졌다. 프랑스어로는 Co-empereur du Commonwealth franco-britannique라고 한다.

줄여서 조제프 2세라고 한다. 생전에는 존칭의 의미로 Imperator라고 더 자주 칭해졌다. 이는 라틴어로 "황제"라는 뜻이다.

생애

황제가 되기 이전

1900년 파리에서 조제프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못했지만, 사학에 있어서만큼은 큰 흥미를 보였기 때문에 황립 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였다. 1926년에는 황실의 일원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야한다는 부군 조제프 1세의 지시에 따라 2년간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하였다.

1929년, 실리아 보나파르트와 혼인을 맺었다. 1930년에는 장남 니벨 보나파르트가 태어났고 2년 뒤에는 차남 샤를 보나파르트가 태어났다. 1930년대 후반, 조제프 1세가 결핵으로 인해 앓아 누워 사실상 황실 업무를 보는게 불가능해지자, 황태자였던 그는 부군을 대신하여 대부분의 황실 업무를 처리하였다.

황제로서

아버지 조제프 1세가 1939년 5월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 당시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 체코 등 주위 국가들을 집어 삼키던 국제 정치가 불안한 때였다. 또한 미국 역시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어 1939년 9월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침공당하자, 폴란드와 연합을 맺었던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나치 독일은 초반 기동전으로 파리의 코앞까지 진격하며 그 위세를 떨쳤다. 심지어 프랑스 시내에 나치 독일군이 쏜 대포가 떨어져 수십명이 죽거나 다칠 정도였다. 1940년 초에 들어 나치 독일군의 파리 항공전이 시작되자, 황제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던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 거국 내각은 조제프 2세에게 당시 영국-프랑스 공동 통치령이었던 아이슬란드 망명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조제프 2세는 프랑스를 버릴시 신민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을 우려해 끝까지 파리를 지켰다.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끝까지 파시즘에 맞서 싸울 것을 요청했고 이러한 황제의 간청에 프랑스 시민들이 힘을 합쳐 나치 독일을 무찌르고, 몇년 뒤에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과 미국도 쓰러트리는데 성공했다. 전쟁 이후 조제프 2세는 프랑스 국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전후, "제국은 합쳐야 강력하다"라는 신념 하에 평생의 앙숙이었던 국가인 영국과의 연방 결성을 추진하였고,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 프랑스 총리와 조지 길퍼드 영국 총리, 조지 6세 영국 국왕이 모두 동의한 가운데 1951년 영국-프랑스 연방이 건국되었다. 이로서 그는 영국-프랑스 연방의 초대 공동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민들과 국가를 통치하는 국왕이 된다.

또한 강탈적 제국주의의 해체를 주도하기도 하였고,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 및 인종 관련한 차별 철폐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프랑스의 여론에 따라 황실의 씀씀이를 줄이고 황권도 약화하는 등의 개혁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전후에도 조제프 2세의 국민적 인기는 대단하였다.

그러나 1966년, 평생을 함께했던 황후 실리아 보나파르트가 지병이었던 폐렴으로 세상을 뜬 이후 그는 실의에 빠지고 만다. 이후 프랑스의 젊은 좌파 대학생들이 주도한 68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대적인 왕실, 기득권 혁파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민의를 반영해 황실에서 물러나겠다는 연설을 하며 1968년 12월 31일 황위를 내려놓았다. 이후 그는 노르망디공으로 조용히 살아가다가, 1973년 파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가

그가 재위하던 193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는 유럽이 격동의 현대사를 거친 때였지만, 이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프랑스는 유럽 내 최대 패권 국가로 올라서면서 최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러한 것에는 조제프 2세가 보인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며, 따라서 현대 프랑스 인들이 조제프 2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매우 호의적이다.

프랑스의 TV 채널인 "TV4"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제프 2세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3위에 올랐다. 이는 나폴레옹 1세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 다음으로 높은 순위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조제프 2세가 제국주의자라는 일부 공화주의자들이 비방이 있으나, 오히려 사학자들은 조제프 2세를 제국주의의 해체를 주도한 인물로 평가한다. 실제로 그의 치세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는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 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고, 식민지 주민들을 향한 차별 역시 대부분 사라졌다. 이 때문에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성향의 인물중에서도 조제프 2세를 긍정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애처가로 유명했으며, 사려 깊은 성격으로 전국민적 존경을 받는 등, 현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불가침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여담

  • 그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독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1960년대부터는 주치의들의 조언에 따라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강경한 채식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치즈나 우유 등 유제품류는 여전히 즐겨 먹었다. 이는 그가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라 건강 문제로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채식주의자들을 "나약한 사람"이라고 여기던 풍조가 있던 유럽에서는 좀 독특한 일이기는 하다.
  • 2차 대전 시기 거국 총리를 맡았던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와는 친구 사이로도 발전했고, 1966년 드오트클로크가 사망할때까지 조제프 2세와 드오트클로트는 극진한 우정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