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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디스코드 • ![]() |
니더란데 국가판무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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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 29일 ~ 1976년 4월 19일 | |||||||||||||||||||||||||||||||||||||||||||||||||||||||
파일:니더란데 국가판무관부 기 1 (CLBI).png | |||||||||||||||||||||||||||||||||||||||||||||||||||||||
국기 | |||||||||||||||||||||||||||||||||||||||||||||||||||||||
이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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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2.역사
설명 |
출처 |
3.정치
4.참고
4.1.비고(Obsidian)
네덜란드는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개전부터 중립국임을 표방했으나 1940년 5월, 독일은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5월 15일, 네덜란드는 항복했으며 네덜란드 왕실과 정부는 영국 런던으로 피신했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에는 국가판무관부가 설치되었고 같은 게르만족 국가라는 이유로 데네마르크 국가판무관부와 오스틀란트 국가판무관부와 마찬가지로 관용적인 통치와 경제성장을 보여주어 지지자들이 늘어났다.
5월 28일 제1대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판무관부 설립을 이끌었고 향후 네덜란드의 전권을 장악했다.
점령당한 네덜란드나 벨기에 모두 초기에는 그 여파가 미미했고 점령 직후 몇 달간은 거의 아무련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언론은 겉으로는 완벽한 자유를 누렸으며 암스테르담의 주요 신문인 《더 텔레흐라프(De Telegraaf)》는 라이히스마르크와 훨던 간 환율을 좀 더 부각해서 보도하는 이외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식당과 카페, 영화관은 다시 문을 열였고, 금주령은 철회되었다. 잉크바르트의 취임식에는 당시 네덜란드 임시군사행정지역 사령관인 폰 팔켄하우젠의 수행을 받았다. 그는 단호하지만 온화한 태도를 보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국가판무관 취임선서를 했다.
"본인은 오늘부터 네덜란드 민간행정의 최고 수반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총통의 아량과 독일군의 노력으로 불과 며칠 만에 공공질서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일정조치들이 취해지겠지만, 필요한 사항에만 한정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총통의 궁극적인 목표가 호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질서를 보장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계속 올바르게 처신해서 이러한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주시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한동안은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 정부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네덜란드의 여왕과 수상은 영국으로 망명했지만 헤이그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관료조직은 그대로 남아 독일점령지 행정기구로 존속했고 정부의 각부 주요 서기관들이 네덜란드 최고 권위의 민간 행정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정기적인 회의를 가지면서 내각과 비슷하게 행동했지만, 그것은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1941년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전선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은 해산되었으며 네덜란드의 관료 조직 또한 통폐합되고 국가판무관인 잉크바르트를 수장으로 한 판무부가 최고 행정 기관으로 완전히 확립되었다. 잉크바르트는 네덜란드 행정기관의 최고 수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 또한 네덜란드의 전권을 모두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요아힘 안델란케의 부상 이후 본토 외의 민정, 군정 할 것 없이 모든 행정기관에는 무장친위대 출신의 각료나 "국방군"이라는 미명 아래에 SS사단이 배속되었으며, 네덜란드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국가판무관부 설립에 현지 부역자 부대인 "제34SS의용척탄병사단 란트슈토름 네데를란트"이 깊이 관여했으며 이후의 정규군으로 인정받았다. 국가판무관부의 행정조직, 서방 행정위원회에도 이들 출신 장교가 소수 포진했으며 행정위원회는 서방 행정위원회 "란트슈토름 네데를란트"이라고 통칭되었다.
네덜란드 현지 친위대인 네덜란드 SS가 조직되었고 이들은 SS 네더를란트와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 네덜란드 친위대 사령관인 한스 라우터의 상관은 잉크바르트 임에도 불구하고 안델란케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네덜란드의 선전 업무를 총괄하는 선전 및 일반판무관은 괴벨스의 선전부와 계속 충돌했다. 네덜란드의 대군주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잉크바르트는 아래에서 날뛰는 현지 친위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프랑스 침공
판무관 판하엘케르컨의 급사와 함께 비상행정위원회가 소집되었고 펠트메이어르는 판무관 대행과 행정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네더를란트 제1 군단과 헤르만스허 SS를 이끌어 친 부르군트 SS 기사단국 노선으로 갈아타고자 했다. 1976년 5월 16일, 니더란데 평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