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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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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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大日本帝國 ・ Empire of Japan
국기 국장
八宏一宇・萬族協華・尊皇討奸
팔굉일우・만족협화・존황토간
(1937 ~ 現)
昭和維新
쇼와 유신
(1961~ 現)[1]
상징
국가 기미가요 ( (きみ) ())
국화 벚꽃, 국화
국수 일본 꿩
역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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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데이쿄 (帝京)
북위 37° 34′ 00″ 동경 126° 58′ 41″
최대 도시 도쿄 (東京)
북위 35° 41′ 22.4″ 동경 139° 41′ 30.2″
대륙 아시아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
면적 5,814,552.4km2 | 세계 7위
접경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중화민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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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억 9,244만명 | 세계 3위
밀도 50.29명/km2
출산율 1.9명 (1983년)
기대수명 75세 (1983년)
민족 야마토인 40.1%
만주인 23.4%
조선인 14.3%
중국인 10.3%
남방인 4.0%
몽골인 2.9%
러시아인 2.0%
기타 2.0%
공용어 일본어
공용 문자 가나, 한자
종교 국교 없음 (정교 분리)
분포 불교 51.2%
기독교 3.6%
기타 종교 2.2%
무종교 43.0%
군대 대일본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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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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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혼합 경제
GDP
(PPP)
$7조 4,297억 7,600만 | 세계 1위 (1984년)
1인당 $25,400
GDP
(명목)
$4조 1,526억 4,800만 | 세계 2위 (1984년)
1인당 $14,200
수출
입액
수출 $3,445억 6,000만 | 세계 1위 (1984년)
수입 $3,146억 7,600만 | 세계 2위 (1984년)
외환보유액 $1조 6,780억 3,100만 (1982년)
신용등급 무디스 Aa2
S&P A-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일본 엔(¥, 円)
ISO 4217 JP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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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쇼와(昭和)
시간대 GMT+07:00~09:00(일본 표준시)
운전 방향 좌측통행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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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가입 국제연맹 가입: 1920년
국제연맹 탈퇴: 1933년
국제연합 재가입: 1951년
대동아연맹 가입 1953년 (창립국)
ccTLD
.jp
국가 코드
JPN, EJP, JP, 382
위치

개요

八宏一宇・萬族協華・尊皇討奸
팔굉일우・만족협화・존황토간

온 천하가 하나의 집이다
모든 민족이 공동화합으로 살자
간신들을 치고 천황 폐하를 숭상하자

대일본제국(일본어: 大日本帝國 (だい にっぽん ていこく) 다이닛폰데이코쿠[*]), 줄여서 일본(일본어: 日本 (にっぽん))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수도는 데이쿄이며 최대 도시는 도쿄이다. 국가 원수인 천황은 히로히토, 정부 수반인 국무경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이다.

본래 일본은 일본 열도에 국한된 섬나라였으나, 1868년 대정봉환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근대화되었고 이후 비서구권의 최초이자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여 조선, 대만, 만주 등을 합병하며 그 영토를 넓혔다. 현재와 같은 영토를 지니게 된 것은 1943년 극동사변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시베리아 지역의 주권을 인정받은 이후이다.

메이지 유신 자체가 무신들의 주도로 일어난만큼 국가 초기에는 군국주의적인 면이 강했으나, 1913년 내지는 1918년부터 진행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하여 근대적인 의원내각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치안유지법 등이 발동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전시 준비 체제로 인하여 국가가 불안정해졌으나, 이에 반발하는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1936년의 2.26 혁명을 시작으로 쇼와 유신이 진행되어 현재와 같은 체제가 정착하였다.

1984년 현재 기준으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군사력, 외교적 영향력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소련, 미국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이다. 1953년 UN에 재가입한 이후 1960년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유엔에 가입한 것과 같은 해에 자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제 정치, 군사, 경제적 연합인 대동아연맹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의장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상징

국호

일본의 공식적인 국호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다. 그러나 대일본제국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40년대이며, 그 이전에는 대일본국(大日本國), 일본국(日本國), 일본제국(日本帝國), 대일본(大日本) 등의 일관되지 않은 표현들이 서류 상으로 사용되었다. 쇼와 유신이 이뤄진 이후, 초대 국무경으로 취임한 기타 잇키가 이를 시정하고자 공식적인 국호를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정하고 국제적인 조약 및 서류에서 사용하도록 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다.

약칭으로는 일본(日本)과 일본제국(日本帝國)이 주로 사용된다. 일본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인 아스카 시대에는 왜국(倭國)이 공식적인 명칭이었으며, 701년의 다이호 율령 반포 당시 왜국의 명칭이 일본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는 야마토(大和)라는 명칭도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일본의 별칭(別稱)이다.

국제적으로는 일본국(日本國)의 중국식 발음이었던 지펀구를 마르코 폴로가 라틴 문자로 옮긴 Zipangu가 Japan이라는 단어로 변형되어 보통 일본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일본 측의 공식적인 명칭은 Empire of Japan이며, 드물게 Empire of Great Japan 혹은 Greater Japanese Empire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국기

대일본제국의 법정 국기
일장기 | 히노마루
日章旗 | 日の丸
빨간색 (#AA4455) 하얀색 (#FFFFFF)

일본의 공식적인 국기인 일장기(日章旗)는 일본 민족의 상징으로서 수천년간 사용되어온 깃발이었다. 공식적인 국기로 채택된 것은 메이지 3년(1870년) 2월 27일의 일이다. 하지만 가마쿠라 시대 때부터 일장기와 디자인이 유사한 니시키노미하타가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일본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일장기가 사용되어온 기간은 가늠할 수 없이 길다. 공식적인 명칭인 일장기보다도 히노마루(日の丸)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깃발이다.

속 일본기에 따르면, 701년 몬무 덴노가 태양을 나타낸 깃발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태양 상징 깃발을 사용한 사례이지만, 흰색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는 아니었다. 다만 바탕에 원 하나라는 디자인은 고대나 현대에나 같았고, 이 깃발은 일본의 조정을 상징하는 깃발로서 사용되었다. 늦어도 16세기 이전에는 빨간색 동그라미에 하얀 바탕이 디자인이 되는 현대 모양의 일장기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에도 시대 때부터 상선에 흰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상징을 사용하게 되면서 일장기는 국제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욱일기 역시 일장기와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지만, 공식적인 국기는 아니며 군기(軍旗)로 사용된다. 하지만 욱일기 역시 일장기에 못지 않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기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국가


(きみ) () (임금의 치세)

일본의 국가는 <기미가요>이다. <기미가요>는 국가치고 분위기가 매우 어두우며, 단 11마디의 단가로만 되어있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적인 요소가 들어가있는 것도 특징이다.

기미가요는 가사가 먼저 나왔고 곡은 나중에 붙었다. 912년 편찬된 <고금 와카집>에 익명의 단가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후 여러 문헌에 수록되며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로써 신분에 관계없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이뤄진 이후, 일본에는 자국을 상징할만한 국가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프란츠 에케르트가 기미가요에 현재의 곡조를 붙여 곡을 완성하였다. 20세기 들어 기미가요는 천황을 기리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다.

<기미가요> 이외에도 <바다에 가면>(海行かば) 역시 국가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고 군가(軍歌) 및 준국가로서 사용된다. 이 노래는 비교적 늦은 1937년 작곡되었으며, 쇼와 유신극동사변이라는 국내외적인 정세에 맞춰 준국가로 사용되어졌다.

역사

대일본제국의 성립

쇼토쿠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냈고, 19세기 중엽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교류 과정을 거치면서 에도 막부는 붕괴, 근대로 이행하게 된다.

에도 막부의 붕괴 이후 메이지 유신을 맞이한 일본은 근대 국가의 건설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인접국들과의 국경 확정을 행하여 가라후토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 양도하는 대신 지시마 열도(쿠릴 열도) 전역을 일본령으로 하였고, 난세이 제도류큐국은 류큐 처분을 통해 실효적인 지배력을 확보하여 지금의 일본 영토 범위가 거의 확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유 민권 운동이 이루어져 1885년 내각 제도가 성립하고, 1889년에는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이듬해인 1890년 중의원 총선거를 실시해 제국의회를 설치함으로써 명목 상의 입헌 국가가 되었다.

이와 함께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주의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통해 조선(대한제국), 타이완, 미나미카라후토(사할린섬 남부)를 강제 합병하고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도시에 조차지를 설치하는 등 주변국 침략에 뛰어들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정당 정치와 보통 선거가 실현되기도 하였다.

쇼와 유신

2.26 혁명 당시 혁명군의 깃발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이뤄진 이래 많은 사회적인 부분에서의 개혁이 있었으나, 근대 자본주의의 도입 과정으로 인하여 오히려 지주권이 강화되었고 이는 소작농의 증가를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의 간토 대지진, 쇼와대공황 등 여러가지 경제난으로 인해 일본 농촌의 경제 사정은 악화되어갔으나 일본의 주요 정치인들과 군장성들은 이를 무시하고 거대 재벌들의 이권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937년 2월 26일, 빈농 출신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로 구성된 쿠데타군이 궐기하여, 사이토 마코토 등 군정재계의 유력 인사들을 암살하고 히로히토 천황의 인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를 2.26 혁명이라고 부른다. 1937년 3월 2일 일본 신정부는 쇼와 친정 체제였으나 실질적으로 기타 잇키가 실권을 가지고 신정부를 이끌었다. 기타 잇키는 쇼와 유신의 명목 아래에 의회를 해산하고 기존의 내각제를 해체, 내각총리대신의 이름을 국무경으로 바꾸고, 재벌 기업들을 해체하며 보통 선거권을 시행하는 등의 각종 파천황적 개혁들을 추진하였다. 또한 조선과 대만의 참정권을 인정하였고,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통하여 일본의 경제 체제를 개편하였다.

1938년 6월 1일, 기존의 대일본제국 헌법을 수정한 헌법이 시행됨에 따라 내각총리대신제도는 폐지되고, 화족과 귀족원도 폐지되었으며 그 자리를 각각 국무경과 참의원이 대체하였다. 중의원의 의석 역시 종전의 466석에서 600석으로 증가했고 초대 참의원 선거도 개편된 중의원 선거와 함께 치뤄졌다. 기타 잇키와 이시와라 간지 등의 유신 인사들이 창당한 유신제국당이 전체 600석중 522석을 차지해 초압승하였고 초대 국무경으로 기타 잇키가 취임하게 되었다.

극동사변

2.26 혁명 이전까지는 일본 육군 내 파벌중 지소 반미 반중파였던 통제파가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새로이 집권한 황도파는 반소 친중 지미파였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을 견제하려던 기존의 일본 육군과는 달리 소련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급한 혁명 이후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공산주의자, 식민지 독립론자들도 기승을 부렸기 때문에 이들을 탄압할 적절한 명분 역시 필요했고 이 때문에 신생 일본 정부는 소련을 공격하여 국민적인 결속을 추구하고 소련의 대 동아시아 영향력을 항구적으로 차단하고자 하였다.

1938년 1월 7일, 신징 조약을 통하여 일본은 내몽골 및 만주국에 대한 문제에서 중화민국 정부에 양해를 구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대신 일본제국이 향후 15년간 내전으로 폐허가 된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것과, 공산당 세력을 분쇄하는데 군사적 힘을 지원할 것임을 약속하는 등 중화민국에 유리한 내용도 많았다. 아무튼간에 중화민국과 대일본제국의 동맹 협상을 통하여 대소련 및 공산당 공동 전선을 펼 수 있었고 1939년 말엽 공산당 세력을 중국 본토에서 쫓아내는데에도 성공하였다.

연해주로 진격하는 일중 연합군

그리고 1940년 2월 12일, 대일본제국과 중화민국의 연합군은 러시아의 패권주의적인 세력 팽창을 저지하기 위하여 소련을 공격함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중국-일본 연합군과 소련의 전쟁인 극동사변이 발발하였다. 극동사변 당시 일본군과 중국군은 보급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데다가 소련 측의 전쟁 준비가 미비하였으므로 단숨에 바이칼 호수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막대한 공업력을 통해 소련은 1940년 9월 재반격에 나섰고 1940년 11월 캄차카 상륙 작전에서 일본군 1만 8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겪는다.

그러나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급습하며 상황은 반전되었다. 히틀러는 전선이 양분된 상태에서 쉽게 소련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미 인구 수에서만 3배의 차이가 났던 중국-일본 동맹을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소련은 결국 대독일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억지로 일본-중국 동맹군과 평화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1월, 이르쿠츠크 조약을 통하여 중화민국은 소련에게 빼앗겼던 위구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하였고 일본은 극동 시베리아 지역과 몽골, 투바, 부랴트 지역의 영유권을 획득했다. 이 조약을 체결하는 대신, 일본과 중화민국은 20년간 소련을 침공하기 않으며 소련에 유상으로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로 하였다.

외교 정상화와 대동아연맹 설립

대동아연맹 가입국의 가입 연도

1942년 소련과의 협상으로 성공적으로 북진 정책을 종료한 일본은 현상 판도 유지와 괴뢰국의 대일본 합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의 괴뢰국으로는 만주국, 몽골, 몽강, 투바, 극동 시베리아 공화국, 부랴트가 있었는데, 이 국가들을 전부 자국의 영토로 만드는 것을 추진한 것이다. 주민투표에 따라 만주국이 1944년 총 93.5%의 투표율이 71.1%의 찬성으로 대일본제국에 합병되었고 이후 1945년에는 몽골, 몽강, 투바, 부랴트가 각각 86.4%, 83.3%, 71.2%, 78.4%의 찬성으로 대일본제국에 합병되었다. 마지막으로 1949년, 극동 시베리아 공화국이 91.1%의 투표율이 52.7%의 찬성으로 대일본제국에 합병되었다. 이로서 현재 대일본제국의 판도가 완성되었다.

괴뢰국의 합병 과정을 종료한 일본은 대내적으로는 강도 높은 동화 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국제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결속과 국제연합 재가입에 집중하였다. 2차 세계 대전 내내 일본은 독일과 미국, 소련중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은채 중립을 추구하였으나 잠재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전쟁 수행을 도왔기 때문에 국제 연합에 재가입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1951년 대일본제국은 UN에 재가입하였으며, 1955년 커져가는 영향력 속에서 프랑스를 밀어내고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또한 만주국 합병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국교도 1950년대 이후 전부 복구하며 외교적인 정상화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모든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친구가 되어 제3의 세력을 구축해야한다"는 요시다 시게루 제5대 국무경의 외교적인 신조대로 기존의 일중동맹을 넘어선 범아시아적인 외교 연합이 결성되었다. 아시아 국가간의 느슨한 연결은 1940년대 이시와라 간지 국무경의 집권기부터 추구되어왔으나, 이를 대동아연맹이라는 이름으로 결속시킨 것은 1953년이었다. 1953년 기준으로 대동아연맹의 가입국은 대일본제국, 중화민국, 그리고 두 나라의 괴뢰국이었던 동투르키스탄티베트 왕국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연방 등이 가입하였으며 1950년대 일본과 중국이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독립 운동을 지원한 이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가입국이 늘어났다.

제국 정부는 도쿄가 지나치게 한 위치로 쏠려있다는 판단 하에, 1940년대부터 조선 반도로의 천도를 계획하였으며 1953년 계획이 완료되어 데이쿄로 천도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발전

에다 사부로 제10, 12대 국무경 (1965~1967, 1970~1974)

1937년 2.26 혁명 이후 설립된 유신제국당은 중참의원 의석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사실상의 합법적인 독재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나, 제3의 위치에 가까운 특징 때문에 중도파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실제로 동아시아 국가 사회주의의 대부이자 정계 은퇴 이후에도 일본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기타 잇키가 1957년 병사한 이후 유신제국당의 온건화가 진행되었다. 비슷한 시기 2.26 혁명을 이끌었던 이시와라 간지, 치치노부미야 야스히토, 야마시타 도모유키, 오카와 슈메이 등도 사망함에 따라 혁명 세력의 공백이 발생했고 그 자리를 비교적 온건한 중도 보수 정치인들이 대체하면서, 극우 내지는 제3의 성향이었던 유신제국당은 급격하게 중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일본 내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이 합법화되면서 일본 사회민주당을 위시로 한 중도파 사회주의자들의 대두 역시 두드러졌다. 1951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이 처음으로 50석 이상의 의석을 얻으며 선전한 가운데, 가타야마 데츠, 스즈키 모사부로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일본 내외에서 활동하며 인지도를 쌓았고 1950년대 후반에는 안정적으로 100석에서 150석을 얻는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한편으로 비슷한 시기 유신제국당 내부에서도 시대적인 변화에 맞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며 츠지 마사노부 국무경을 마지막으로 군인 출신의 정치인들이 제국당 내에서 감소하였고 중도 보수파 기시 노부스케가 5년간 안정적인 내치를 보이며 당 내 좌경화가 진행되었다.

1960년대에는 사회민주당에게 첫 집권 기회가 찾아왔는데, 1965년 총선에서 일본 사회민주당이 226석을, 유신제국당이 287석을 얻으며 어느 정당도 과반인 300석을 얻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사민당은 공명당, 자유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과 연합하여 사상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혁신계 정부를 설립하였다. 국무경으로 취임한 에다 사부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 정책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중간에 제국당의 사토 에이사쿠에게 잠깐 정권을 뺏기나 1970년 총선에서 되찾아 다시 4년간 국무경직을 역임하였다.

현대

에다 사부로 국무경이 퇴임한 이후 나리타 도모미가 신임 국무경으로 취임하였으나, 과도한 친소적 정책과 무능한 국정 운영으로 인기가 형편 없었고 결국 1년만에 당 내에서조차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나리타 도모미는 이에 불복하여 사회민주당을 탈당하고 당 내 좌파 및 친소파들을 이끌어 일본사회당을 창당, 당을 분열시킨다. 1975년 당이 두개로 분열된 상태에서 총선이 치뤄졌고 당연히 제국당이 초압승을 거둬 다나카 가쿠에이가 국무경으로 취임하였다.

이케다 하야토 국무경의 국무 기간이었던 1964년 1964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으며 이는 전세계적으로 일본이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초강대국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이후 1968년 만슈에서 열린 1968 신쿄 엑스포 역시 일본의 발전된 경제상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었다. 이러한 홍보 효과에 고무를 받은 일본 정부는 1970년대 공격적인 대외 홍보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일본의 국제적 위상 상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1980년대에도 경제적인 성장이 매우 빨라, 1980년대 중후반에 미국의 경제 규모를 추월한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지리

일본 열도, 조선 반도, 대만섬이 정치 경제적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만주의 드넓은 지역에도 수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살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일본 열도에 가까워질수록 인구가 밀집하며 멀수록 밀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큰 도시는 도쿄부이다. 도쿄 자체의 인구수는 1,200만명이며 요코하마, 지바, 사이타마 등 근교 도시까지 전부 합한 도쿄권의 인구는 3,000만명에 육박해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53년, 대동아연맹의 설립과 동시에 일본제국 정부가 조선반도의 데이쿄로 천도하였기에 도쿄는 현재 제2의 수도 지위를 지니고 있으나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권이라는 메리트 때문에 제국의 중심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1953년부터 수도로 지정된 데이쿄는 인구 800만, 배후 인구 1,700만으로 도쿄권에 이은 제국 2위이자 세계 5위의 도시권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제국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열도와 조선 반도는 온대기후에 속해 살기 편하지만, 만주와 몽골, 몽강, 시베리아 지역 등 일본의 영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북부 지역은 겨울 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것이 기본인지라 기후가 매우 혹독하다. 대만섬과 같은 열대 기후 지역도 일부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북방 영토는 대일본제국의 영토에서 60% 이상을 차지하지만 인구의 35% 이하만이 거주한다.

행정구역

대일본제국
도부급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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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급 행정구역

도급 행정구역의 행정구역 변천사

1937년 쇼와 유신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일본은 현부(縣府)제를 사용하였다. 그보다 이전에는 각 영지를 다이묘가 번을 다스리는 일종의 느슨한 국가 연방에 가까운 형태로 국가가 운영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이후 폐번치현이 이뤄져 번은 폐지되고, 이후 현이 설치되었다. 1937년 2.26 혁명을 통해 설립된 쇼와 친정 정부는 현부 제도를 폐지하고, 과거 7세기부터 1871년까지 사용되었던 도(道) 제도를 부활하여 주요 지역을 현으로 묶는 행정구역 개편안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홋카이도, 도호쿠도, 호쿠리쿠도, 고신에쓰도, 도카이도, 간토도, 간사이도, 주코쿠도, 시코쿠도, 규슈도, 조센도, 다이완도, 만슈간토도가 설치되었다.

1953년 대동아연맹 설립을 통한 영토 확장이 완료된 이후 일본 정부는 다시한번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호쿠리쿠도와 고신에쓰도를 합쳐 호쿠리쿠고신에쓰도를 신설했고 조센도는 총 7개로 쪼개 젠라도, 게이쇼도, 주슈도, 간쿄도, 고카이도, 헤이안도, 게이키고겐도가 신설되었다. 규슈도에서 오키나와도가 분리되어 신설되었고, 194~50년대 새로 합방한 영토들에는 일시적인 총독부를 설치했다.

1956년 3차 개편안에 따라 만주 지역에 만슈도, 모고도, 모교도, 우라지로도가 만들어졌고 만슈간토도는 폐지되어 만슈도에 합병되었다. 만주의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 행정적으로 불편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1960년 제4차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져 만슈도가 총 3개의 지역인 홋조도, 료토도, 류가와도가 설립되었고 간쿄도의 북부 지역이 홋조도에 합병되었다.

1970년 최종적인 제5차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방 총독령은 해체되고 난호도가 설치되었으며 모고도로부터 즈가도가 분리 독립하였다. 이로서 현재 대일본제국에 존재하는 도급 행정구역은 총 26개가 되었다.

부급 행정구역

1868년 처음으로 부급 행정구역이 설치되었을때는 하코다테부와 교토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1년 후 나가사키, 오사카, 도쿄, 나가사키, 가나가와, 와타라이, 나라, 에치고, 카이가 부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1년 후 부는 교토, 오사카, 도쿄의 3개로 축소되었다.

1937년 제1차 행정구역 개편 당시 기존의 도쿄, 오사카, 교토에 더하여 게이조, 다이호쿠, 나고야, 요코하마, 나가사키가 부로 승격되었다. 제2차 행정구역 개편에서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는 부의 자격을 잃었으나 대신 기타큐슈가마야마가 부로 승격되었다. 제3차 개편에서는 신쿄(장춘), 세이쿄(선양), 한빈(하얼빈), 세키조(울란바토르), 우라지오(블라디보스토크), 하쿠료쿠(하바롭스크), 히로시마, 센다이, 시즈오카, 헤이조, 간코, 다이텐, 히레야마, 다카오 등 엄청나게 많은 도시들이 새로이 부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부가 너무 많다는 지적하에 제4차 개편에서는 신쿄, 한빈, 세키조, 우라지오, 하쿠료쿠, 히로시마, 센다이, 헤이조, 다이텐을 제외한, 제3차 개편에서 승격된 부들이 폐지되고 데이쿄도의 설치로 인하여 게이조가 부에서 해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급 행정구역의 특징은 단순히 도시가 클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도시권도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니가와요코하마, 고베와 같은 큰 도시들은 다른 큰 도시의 위성도시라는 이유로 부 승격이 시행되지 않고 있다.

정치

대일본제국은 일찍이 독일제국식 의원내각제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한 의회민주주의를 발달시켜왔다. 1937년 2.26 혁명 이후 제정된 수정 제국헌법에 따라 남녀에 관계 없이 모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선거권이 도입됨에 따라, 대일본제국은 동아시아 내에서도 손꼽히게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대일본제국 천황의 권력이 매우 강력하긴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권력일 뿐이며 2.26 혁명쇼와 친정과 1949년 8월부터 11월까지 있었던 치치노부미야 아스히토 친왕의 국무경 대리 정도를 제외하면 황족이 직접 정치에 관여한적은 극히 드물다. 대신 하원에 속하는 중의원과 상원에 속하는 참의원이 입법에서 대부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중의원에서 선출되는 대일본제국 국무경이 사실상의 정부수반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다.

대표적인 일당우위 정당제 국가로 유신제국당이 1937년 집권한 이래 현재까지 6년 정도를 제외하면 항상 여당의 자리에 있었다. 또한 동아시아와 일본 특유의 정서 때문에 실제 시행되는 제도에 비하여 정치적으로 경직되고 보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면이 많은 것이 일본 정치의 흠으로 자주 꼽힌다. 2.26 혁명을 주도한 군인들이 혁명후 20년간 정권을 장악했던 탓에 여전히 군대의 정치 개입도 상당한 편. 전반적으로 체제 자체는 민주적이나 사회유기체설이 국민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파시즘의 잔재가 많다.

천황


대일본제국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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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메이지 다이쇼 히로히토
신대 통치 · 야마타이 국왕 · 북조 천황 · 추존 및 비정통 천황
히로히토

대일본제국의 천황은 대일본제국 그 자체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이자, 국체(國體)이다. 동시에 살아있는 신의 대우를 받는 현인신(現人神, 아라히토카미)로 국가 신토의 권위 아래에 신격화되는 대상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에도 막부의 권력이 메이지 덴노에게 이양되었고, 대일본제국 헌법에서도 천황의 절대적 권력을 인정하고 있기에 표면적으로 일본 천황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권한은 무한하나 실제로는 입헌군주제 국가인 일본 내에서 천황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신이자 일본의 국민들을 통합하는 위치에 있는 천황은 전국민적인 존경이 되며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일본인들은 천황을 지키기 위하여 단결한다.

본래에도 일본 내에서 천황은 숭배받는 분위기였지만, 2.26 혁명쇼와 유신 이후 강력한 근황파였던 황도파가 정계 주도권을 잡으면서 히로히토 천황은 말 그대로 절대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거의 모든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국가의 수호자가 되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쇼와 친정 이후 극도로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일단 말이 나왔다 하면 정권이 뒤엎어지고 각 정당의 희비가 엇갈릴 수 있을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히로히토 천황이 가지는 권한이 매우 절대적이기에, 일본에서는 중대한 정책을 천황이 직접 발표하게하여 국민에게 아래로 하달하며 사실상 강제하기도 한다.

일본 천황의 가문은 2,600년 전부터 이어져온, 인류 역사상 가장 그 유례가 깊은 가문이며, 역사적으로 존재가 인정된 천황만 포함하더라도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두고 만세일계라고 하는데, 이는 2,600년간 한 가문이 끊김 없이 내려져왔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의 시조는 아마타레스 오미카미로, 아마테라스 여신이 손자 니니기에게 일본을 다스리라며 천상계에서 내려보낼때 삼종신기를 함께 보냈는데, 이 삼종신기는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다.

영문으로는 Emperor of Japan, Tennō 라고 불린다. 1984년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Emperor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일본이 황제국인지 아닌지는 고대로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대일본제국의 건국 이후 천황의 권위가 확립되며 일본은 대외적으로 널리 황제국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일본의 천황들은 예로부터 교토에서 살았고, 메이지 덴노다이쇼 덴노는 도쿄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1953년 데이쿄로 천도하면서 일본의 천황 역시 데이쿄에 위치한 고쿄로 이동해 현재 거처하고 있다. 교토고쇼도쿄고쇼 역시 일본 천황의 거주지로 여전히 사용된다.

내각


대일본제국 국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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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의 국무경은 천황의 권력을 대리하는 사실상의 정부 수반이다. 정해진 임기는 없고 중의원의 표결을 통해 선출된다. 보통 다수당의 총재가 국무경을 맡는다. 외무경, 내무경, 대장경도 모두 국회에서 선출하지만 국무경보다는 급이 약간 낮다.

국무경이라는 자리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내각총리대신이 국무경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하지만 2.26 혁명으로 인해 내각총리대신은 폐지되었고 대신 국무경 직위가 신설되었다. 국무경은 내각총리대신에 비해서는 한단계 아래에 위치한 권력을 가지며 대장경, 내무경 등과 명목상 같은 권력을 가진다. 내각을 조각하는것 역시 국무경이 아니라 천황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무경이 천황에게 내각 조각 초안을 제출하면, 천황이 한두명 정도의 장관만 바꾸고 이 초안대로 장관을 임명하기 때문에 국무경이 지니는 실질 권력은 내각총리대신과 같다.

국무경은 내각 회의를 주선하는 의장의 위치에 있고, 그 아래로 재무의 업무를 맡는 대장경과 내무의 업무를 맡는 내무경, 외무의 업무를 맡는 외무경이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전쟁대신, 문부대신 등 행정각부의 수장인 장관들이 포진해있다.

천황은 이 모든 인사들을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무경, 대장경, 내무경, 외무경은 국회 표결로 선출하고 상술하였듯 행정각부의 장관들은 대체로 국무경의 의중이 반영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천황이 인사권에서 가지는 권력은 제한적이다.

선거

크게 참의원 의원을 선출하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와, 중의원 의원을 선출하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그리고 지방 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지방선거로 나뉘어져있다. 투표권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은 대일본제국의 국적을 소유한 18세 이상의 남녀이다. 피선거권 역시 이와 동일하지만 태생적으로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선거권만 있고 피선거권은 없다.

참원선은 3년에 한번, 중원선은 4년에 한번 치뤄진다. 하지만 중의원은 의회 해산이 잦기에 1~3년정도의 임기만을 실질적으로 가진다.

1889년 만 25세 이상의, 15엔 이상의 국세를 납부하는 남성에게 제한적으로 투표권이 주어졌다. 여성과 저소득층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이때는 제한선거의 면모가 강하였다. 1900년, 선거권의 기준을 10엔으로 낮추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행된 1919년에는 3엔으로 대폭 감축시켰다.

1925년에는 국세액의 기준을 폐지하여 만 25세 이상의 모든 남성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인과 대만인, 여성들과 만 18세 이상 24세 이하의 남성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으므로 보통선거의 시행이라고 볼 수 없었고 실제 선거권을 받은 사람도 20%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7년 제20회 대일본제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기하여 25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5엔 이상의 국세를 납부하는 조선인 및 대만인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면서, 보통 선거라고 할 수 있는 제도가 신설되게 된다. 이어 1938년의 제1회 대일본제국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조선인과 대만인의 참정 권한을 5엔에서 2엔으로 낮추었고 1942년 극동사변 종료 이후에는 이 제한도 철폐하여 완전한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1953년 선거 연령을 25세에서 21세로 낮추었고, 1973년 18세로 다시 낮추어 현재에 이른다.

의회

대일본제국 국회
원내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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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1982 - )
여당

유신제국당
176석 · 384석
야당

일본 사회민주당
55석 · 131석

일본사회당
32석 · 58석

공명당
10석 · 26석

몽골시민클럽
6석 · 20석

자유당
8석 · 9석

노농결사
2석 · 6석

대일본평화당
3석 · 5석
무소속 8석 · 11석
재적 300석 · 650석
좌측은 참의원 의석 수, 우측은 중의원 의석 수

본래 대일본제국에서는 귀족원과 중의원이 각각 상원과 하원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2.26 혁명을 통하여 화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귀족원은 해체되고 그 자리를 일반 대중의 민의에 총하는 참의원이 대체하였다. 1938년 제1회 대일본제국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가 치뤄진 이래 현재까지 참의원 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권한은 중의원에 비해 제한적이며 중의원에서 제출한 입법안들을 검토하는 수준에 그친다.

참의원에는 대신 인사권이 존재하기 때문에 중의원에서 아무리 많은 표수로 대장경, 국무경, 외무경 등을 선출한다고 하더라도 참의원 의원의 과반 이상이 반대하면 그 투표는 무효로 처리된다. 따라서 참의원에는 많은 권한이 존재하지 않지만 인사권이 강력하기에 이를 중의원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하고 있다.

중의원 의원과 참의원 의원은 보통선거로 선출한다. 중의원 의원은 쇼와 유신을 통해 600석의 정원으로 규정되었다가, 1953년 650석으로 늘어났다. 의석은 전원 하나의 지역구에서 하나의 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선출된다. 한편 참의원 의원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하고 있으며 정원은 1937년부터 현재까지 300석을 유지하고 있다.

정당

유신제국당의 로고
일본 사회민주당의 로고

강력한 일당우위정당제의 양상이 나타나는 국가로, 2.26 혁명 이래 민주적인 보통 선거제도가 실시되고 있지만 유신제국당이 여당이 아니었던 적이 불과 6년정도에 불과하여 압도적으로 제국당의 우위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 사회민주당이 부상하기 이전인 1950년대 중반까지 유신제국당은 중참의원 의석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고, 참의원에서도 단독 과반이 깨진건 불과 두차례 뿐이다.

유신제국당기타 잇키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파시즘적인 정당이었으나 1957년 기타 잇키의 사망 이후 점차적으로 유신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관료 출신의 중도우파적 정치인들이 유입됨에 따라, 현재는 중도화된 보수 정당으로 분류되고 있다. 1965년~1967년, 1970년~1974년을 제외한 모든 기간동안 집권하였다.

최대 야당인 일본 사회민주당은 1950년대 들어 성장한 정당으로 1930~50년대 기존의 제1야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리버럴 민주당을 흡수하여 중도좌파 대중 정당으로서 발돋움하였다. 이후 1965년에는 에다 사부로를 국무경으로 배출해 1967년까지 집권했고 약 3년간 사토 에이사쿠유신제국당에게 정권을 빼앗기나, 1970년 정권 재창출에 성공해 1974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1974년 나리타 도모미 의원의 제명 사태 당시, 나리타 도모미를 지지하던 의원 수십여명이 사민당을 탈퇴해 좌파 성향의 일본사회당을 창당했고 당내 극좌파도 덩달아 빠져나가 노동결사를 창당하며 사회민주당의 짧은 전성기는 끝이 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중도우파 성향의 자유당, 공명당과 지역 정당인 몽골시민클럽, 극우파 대동아평화당 등 여러 군소정당들도 제도권으로 안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민당의 야당 헤게모니는 점차적으로 저물었다.

따라서 사민당은 현재 야당 공투를 통하여 오는 중의원 선거에서 유신제국당의 과반을 무너트리고 7당 연정을 통하여 집권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각 당의 이해관계가 달라 실현될 확률은 낮다.

경제

도쿄의 길거리

총 GDP는 명목으로 4조 1,526억 달러에 이르며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다. PPP 규모로만 보면 7조 4,297억 달러로 미국보다도 경제 규모가 크고, 일본과 연계된 대동아연맹 회원국들과 경제적으로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2] 전체적인 경제력은 미국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또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제외하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주요 국가와 사이도 매우 친밀하며 여러 일본 기업들이 진출해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안정성 역시 매우 뛰어나다.

1920년대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까지 올랐었으나, 1920년대 중후반 이후 쇼와대공황이라고 불리는 각종 경제 위기로 인해 1930년대까지 경제는 침체되었다. 하지만 2.26 혁명 이후 기타 잇키의 주도로 부패한 재벌들을 청산하고 불합리한 소작제도를 개편하는 등의 사회주의적 경제 개혁이 이뤄졌다. 갑작스러운 계획 경제의 도입으로 인하여 194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혼란하였지만 극동사변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패권을 장악하고 빈부격차와 정경유착 등을 크게 줄인 이후 유연한 혼합 경제 체제로 경제 체제를 개편하면서 1950년대 들어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기타 잇키의 사회주의적 경제 사상이 국가 경제 운영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일본의 경제 체제는 소련보다는 자유시장 경제적이지만 미국보다는 통제적인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혼합 경제 체제이다. 국가 자본주의적인 성향도 존재한다. 기업의 자유로운 경쟁은 존중하나 경쟁을 장려하는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기업들의 불법적 행위를 엄격히 처벌하며 한 기업이 여러가지 사업에 진출하는 것 역시 막고 있다. 또한 강력한 복지 정책이 시행되어 국가 예산의 약 27%에서 32%가 복지 정책을 위하여 사용된다.

자원

세계 최대의 금 은 보유국이다. 16세기부터 일본의 각종 광산에서 개발된 금광과 은광 때문에 17~18세기 세계 은 생산의 70%가 일본에서 이뤄졌으며 1945년 이후 은과 금의 생산량은 줄어들었으나 이때의 비축량 및 성장한 경제 규모 때문에 여전히 금과 은의 압도적인 보유량을 자랑하고 있다.

한편 석유의 경우 매장량이 많지 않아 주로 정치적 동맹국인 중국, 인도네시아와, 경제 협정을 맺고 있는 이란 등에서 수입을 해오는 처지이다. 이 국가들과는 경제적인 협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싼 가격에 석유를 수입하고 있으며, 자국 내 원전 개발에도 앞장서 만주 지역과 사할린 지역의 유전을 개발하여 소량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베트남과 협력하여 남중국해의 유전을 개발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들로부터 석유를 받고 이를 정제하여 역수출하기도 하기 때문에, 적은 석유 매장량에 비하여 석유에 대한 취약성은 크지 않다.

사회

교토

기원전 6~7세기부터 이어져오는 애니미즘적인 전통과 근대화된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국가로,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사회관과 현대의 서구적 가치관이 융합되어 독특한 사회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민주주의,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기본적으로는 천황과 공동체를 개인보다 우선시해야한다는 과거 동아시아의 사회관 때문에 서구에 비해 보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면모가 있다.

일본학 저서로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가 널리 알려져있다.

민족

야마토계(일본 열도 출신), 조선계(조선 반도 출신), 만주계(만주 출신), 러시아계(연해주 출신), 몽골계(몽골, 부랴트, 투바 출신), 남방계(남방 영토 출신) 등 수많은 민족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문화 사회이지만 대내적으로는 일본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모자이크 사회보다는 일본 문화로의 동화를 더욱 중시하는 정책을 시행중에 있다. 본래 일본에서는 일본 열도 출신이 가장 우월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쇼와 유신을 통해 대일본제국 천황의 통치를 받는 모든 신민은 평등하다는 민족 평등의 의식 및 황국신민 민족주의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의 차별은 존재하기 때문에, 일본 열도 출신의 야마토계가 1등 신민, 조선인과 대만인이 2등 신민, 나머지는 3등 신민이라는 식의 인종 차별이 있다. 하지만 조선인, 대만인, 일본인, 만주인, 몽골인 등은 외양 면에서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는 일부 남방계 및 러시아계를 비롯한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을 제외하면 표면적인 인종차별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또한 제도적으로도 모든 인종은 황국 신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에 인종 차별도 점차적으로 사라지는 추세이다.

종교

일본인의 97.6%는 국가 신토를 믿고 있지만, 일본 헌법은 신토가 종교가 아닌 일본 민족을 정의하는 일종의 이념에 더 가깝다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타 종교를 믿음에도 신토를 믿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불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도 개인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이상한 행위로 여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신토는 일본인들의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상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토를 제외하면 불교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은 기독교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종교를 가지지 않는 무종교인이나 신토만을 믿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신토 자체가 불교적인 성향이 강한 만큼,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사찰에 방문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은 드물다.

신분제

19세기 메이지 유신이 이뤄진 이래 대일본제국 내에서는 오등작으로 나뉘어진 화족이 귀족으로서 존재하였다. 하지만 2.26 혁명으로 집권한 신정부는 만민 평등을 주장하면서 화족 제도를 폐지하였고 이들이 불법적으로 모은 재산 역시 압류하였다. 이런 조치가 취해진 결과, 일본 내에서 구 화족 출신이더라도 특권 의식을 가지거나 경제적으로 기업의 사장만큼 잘사는 경우는 드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족들이 정계에 미친 영향력이 컸던 만큼, 여전히 일부 구 화족 출신들은 현재까지도 정계에 영향을 미치며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가족에게 물려주는 세습을 거듭하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언어

일본어가 제국의 유일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소수 언어로는 류큐어, 조선어, 러시아어, 만주어, 몽골어 등이 쓰이지만 이 언어을 실생활에서 쓰는 사람들은 다 합쳐도 5%가 되지 않는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에서는 중국어가 주로 쓰였고 조선에서도 조선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제국 정부가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각종 혜택을 부여하고 열정적으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한 결과 현재는 소수 언어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또한 193~40년대에 시행된 일본식 이름 사용 정책 때문에 대부분의 민족들은 별다른 탈 없이 일본에 동화된 상태이다.

공용 문자는 일본 특유의 문자인 가나와 한자이다. 한자는 구자체를 사용하며 중국의 번체자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중국어와 일본어는 다른 언어이지만 필담이 가능하다. 1960년대 획 수를 줄인 신자체가 개발되었지만 구자체를 읽고 쓰는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과의 교류에 차질을 겪을 수 있다는 여론 속에서 현재는 거의 상용되지 않고 있다.

문화

196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중국과 더불어 동아시아 최대의 문화 대국이다. 동양의 전통 문화와 서구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할복 자살 등 서양인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힘든 문화도 많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의 문화는 서구의 시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친숙한 동양 문화로 인식되고 있고, 심하게는 일본 문화가 곧 동아시아의 문화인것으로 아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1959년 타니자키 준이치로가 <세설>로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만엔원년의 풋볼>의 오에 겐자부로, <흙>의 가야마 미츠로, <우국>의 미시마 유키오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서양권에서도 일본 문학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로는 미야자키 하야오, 구로사와 아키라 등 거장들이 꾸준히 활약하고 있고 특히 1970년대 이후 일본 영화계를 주목하는 시선도 늘어났다.

현대의 일본 뿐만 아니라 센코쿠 시대 등 과거의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가 출간된 이래 일본의 고유 정신은 서구의 여러 사회학, 문화학자들에게 연구의 대상이 되고 국민적으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 등의 과거 영걸들이 TV 드라마의 소재가 되면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무라이 등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으로만 일본을 해석하는 서양인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를 바로잡고 일본 문화를 될 수 있는 한 온전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군사

미국, 소련과 함께 세계 1위를 다투며 특히 대동아연맹과 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군사력은 미군이나 소련군 못지 않게 강력하다.

1947년까지 징병제를 시행했으며 이후 1947년부터는 모병제를 시행중에 있다.

기술

전세계에서 우주 기술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는 나라중 하나이다. 1965년 1월 사쿠라 1호를 우주로 쏘아올리면서 소련, 미국에 이어 3번째로 독자적인 기술력을 통해 우주로 발사체를 발사시킨 나라가 되었으며, 현재도 소련,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의 우주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1981년 발사된 유키구니 3호가 일본의 4번째이자 현재까지 우주 궤도에서 공전하는 유일한 우주 정거장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중에 있다.

전자 기기 용품이 기술에 있어서 두각을 보이고 있으며, 값도 싼데다가 성능도 좋아서 일본산 전자 기기는 세계 시장에서 8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 역시 일본에서 가장 빠르게 상용화되었다.

외교

상술하였듯이 주변에는 동맹국밖에 없고 그나마 주변국중 적대관계라고 할만한 나라는 소련밖에 없어 외교적으로 안정된 상태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진영인 소련과, 자본주의 진영인 미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왔고 1940년대 소련과 전쟁을 한번 치룬 것을 제외하면 이 두 열강과 직접적으로 충돌한적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미국과 소련이 연합하여 일본을 견제할 때도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연합체인 대동아연맹의 실질적인 종주국이다. 대동아연맹의 의장국은 의장국중 가장 경제 규모가 거대한 나라가 맡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1953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31년간 단 한번도 의장 직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일미관계

사실상 일본의 최대 적국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미국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며 미국이 나치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일본은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태생적으로 국가사회주의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을 잠재적인 위협 국가로 간주하고 꾸준히 일본을 견제해오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 역시 미국과 일단은 연합하지만 이시와라 간지 국무경이 주장한 세계최종전론에 따라 먼 미래에는 굴복시켜야할 나라라고 여겼고, 따라서 일본과 미국은 겉으로는 평화 관계를 유지하지만 뒤로는 경쟁하는 냉전을 겪었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률을 기록하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연합하는 이른바 데탕트 체제라는 것을 구상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을 추월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소련과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연합하는 구도를 보임으로서 1960년대에 비해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된 상태이다.

제1야당인 일본 사회민주당과 여당인 유신제국당, 그리고 제3야당인 일본사회당 모두 반미 기조를 강하게 띄고 있다. 이중에서는 그나마 일본 사회민주당이 미국과의 교류에 긍정적이며 사회당은 친소, 제국당은 반미 반소 친중 성향이다.

일소관계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극동사변으로 일본이 소련을 침공하여 소련의 극동 영토들을 빼앗았기 때문에 소련 정부와 국민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나쁘다. 그나마 나치와의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소련이 일본의 유상 전쟁 원조를 받았지만, 소련과 일본의 관계는 1940년대 이후 개선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60년대 미일 관계가 나빠지고 미국이 소련과 일시적으로 연대하면서 더욱 안좋아졌다.

일본 내에서 소련과의 화친을 통한 미국 견제를 주장했던 나리타 도모미 국무경이 수개월만에 쫓겨나고, 이후 제도권 정당인 일본 사회민주당 내부에 있던 친소파들이 전부 군소 정당인 일본사회당을 창당함과 동시에 몰락해버림에 따라 그나마 존재하던 일본과 소련의 연결 고리도 사라졌다. 일본 내부의 정치 세력중에서는 일본사회당노농결사가 친소파 정당으로 분류되나 그 세력은 크지 않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소련과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일중관계

본래 중국과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중국인들도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빴다. 하지만 1937년 2.26 혁명이 터지고 들어선 신정부는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하며 소련, 미국으로부터 모든 대동아시아의 민족들이 친구가 되어 함께 싸울 것을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 1938년 1월 7일 신징 조약을 통하여 중화민국과 일본은 동맹 관계를 맺게 된다. 이 동맹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일시적인 동맹이었으나 양국이 서로 신뢰를 쌓아감에 따라 1984년 현재까지 약 4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중국과 일본은 친밀한 동맹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 국민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결국 청나라를 무너트리고 만주와 몽강, 몽골을 뺏어간 강도라는 시각부터 일단 강대국이니 함께 힘을 합쳐야한다는 이용론적인 시각, 그리고 혈맹이자 함께해야할 군사동맹국이라는 친일적인 시각이 비등하게 공존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일본은 타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1938년 신징 조약을 통해 일본이 국민당군을 도와 공산당군을 궤멸시키는데 일조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81년 허가를 받고 활동이 다시 허락된 중국 공산당은 일본을 쫓아내고 진정한 동아시아의 연합을 이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동남아 관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베트남 독립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등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독립 이후에는 대동아연맹에 가입시켜 경제적인 발전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대부분은 시민이나 정부나 일본에 아주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일본의 대기업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결국 동남아인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수탈할 뿐이라는 여론도 존재한다.

일호 관계

호주와의 관계는 일단은 적국이지만 애매하다. 호주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지만,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호주의 모든 외부 공급망을 차단하고 점령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에 호주 정부도 대놓고 일본 정부를 자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일본을 견제한답시고 호주에 수많은 병력을 배치해 정부 및 현지 주민들과 마찰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정서도 강하다.

호주 내에서는 친일파인 노동당과 반일파인 자유당이 양당제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당이 집권하냐에 따라 일본에 대한 태도 역시 바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렇게 호주 안에서 친일과 반일이 정권에 따라 바뀌는 점은 일본과 미국 양국에게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각주

  1. 히로히토 천황의 60세 탄신일을 맞아 새로이 지정된 공식적인 국가 표어이다.
  2. 세계 경제 규모 3위인 중화민국은 1930년대 후반 이후 일본과 40년 가까이 동맹을 맺고 있는 혈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