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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주공화국(大韓民主共和國,영어: Korea Democratic Republic;KDR) 약칭으로 한국(韓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규슈, 만주(일부), 연해주(일부), 오키나와로 이루어진 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있으며 북쪽으로도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와 맞닿아 있다. 수도는 서울특별시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사용 문자는 한글, 인구는 약 1억 3200만명이다.

대한민주공화국
大韓民主共和國
Korea Democratic Republic
국기 국장
표어 다수로 부터 하나로
국가 애국가
수도 서울특별시 북위 37° 34′ 8″ 동경 126° 58′ 36″
최대 도시 서울특별시
정치
공용어 한국어, 영어, 한국 수어
국민어 한국어
대통령
부통령
상원의장
하원의장
대법원장
유승민
장동우
남우현
이성열
김명수
역사
건국 기원전 2333년(?)
지리
면적 567,327km² (50 위)
내수면 비율 3.7%
시간대 KST (UTC+9)
DST 없음
인구
2016년 어림 132,491,952명
2016년 조사 132,940,977명
인구 밀도 234.3명/km²
경제
GDP(PPP) 2017년 어림값
 • 전체 5,852,132,525,292억$
 • 일인당 44,021$
명목 5,901,426,811,886$
HDI 0.902 2016년 조사)
통화 대한민주공화국 원 (KDRW,₩)
기타
도메인 .kr/.한국
국제 전화 +82

4년 중임제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수도는 서울특별시다. 대한민주공화국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뛰어난 경제력과 기술력을 보유한 선진국이다. 또한 군사강국이기도 하며, 많은 대기업이 소재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통화는 대한민주공화국 원을 사용중이며, 약 1100 대한민주공화국 원이 1 미국 달러와 비슷한 수준의 환율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주공화국은 2017년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 총소득(GDP)은 44,021$로 세계은행에서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었고, 2016년 유엔의 인간 개발 지수(HDI) 조사에서 세계 8위로 '매우 높음'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국제 통화 기금(IMF)에서는 대한민국을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명목 국내 총생산(GDP)은 2017년 5조 9014억달러이다. 또한 대한민주공화국은 주요 8개국(G8), 주요 20개국(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개발 원조 위원회(DAC), 파리 클럽과 같은 기구에서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주공화국은 현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민주주의"(20위, 8.21) 지위에 오를 정도로 정치적으로 발달한 국가이다. 현재 대통령은 2016년 선거를 통해 선출된 공화당 소속의 유승민이다.

국호

'대한민주공화국'이란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복합적 의미가 있다.

대한 이후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 '조선'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 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고구려·백제·신라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

작가 겸 시인인 최남선은 자신의 책 《조선상식문답》에서 이를 해설하기를 "대한이라 함은 한(韓)은 한이지만 옛날 같은 작은 한이 아니라 지금은 커다란 한이라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대한'이란 것은 두 자가 다 합하여 나라 이름이 되는 것이요, 결코 대명(大明, 명나라)이나 대영(大英, 대영 제국)과 같이 높이는 뜻으로 대자를 붙인 것이 아니며 '한국' 이라 함은 실제 대한을 간단하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한민국 여기에 민국(民國)을 더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정한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임시 정부의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신석우 선생이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여운형 선생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 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며 대한제국의 '제국'을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제안하였고,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 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이나 '한국', '한(韓)'으로 대체되어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며,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해 한반도 남부에 있다 하여 '남한'으로도 불리는데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를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른다.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자 문화권 국가들은 현재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중국어 간체: 韩国, 정체: 韓國, 병음: hánguó 한궈[*], 일본어: 韓国 かんこく 간코쿠[*], 베트남어: Hàn Quốc한 꾸옥)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한반도 전체를 부를 때는 조선(중국어 간체: 朝鲜, 정체: 朝鮮, 병음: cháoxiǎn 차오시엔[*], 일본어: 朝鮮 ちょうせん 조센[*], 베트남어: Triều Tiên찌에우 띠엔)이라고 한다.

코리아(Korea)의 어원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 불리는 국호인 Korea의 시초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에 존재했던 고구려[Goguryeo]에서 전해온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 바 있으며,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그후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Corea로 음역되어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서, 약칭 'R.O.K.'로 사용한다.

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1910년까지)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가 점점 사용 빈도가 많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1905년 이전까지는 Corea로 한국을 표기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Corea나 Korea를 배격하고, Chosen이라는 알파벳 국호를 사용했다.

자연환경

대한민주공화국은 한반도, 만주, 연해주, 규슈, 오키나와에 걸쳐서 위치하며 좌표상으로는 북위26도~북위46도, 동경 117도~동경139도에 위치한다.

한반도

한반도는 냉대, 온대에 속하여 열대나 한대에 비하여 비교적 살기 좋은 여러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하는 반도이고 철에 따라 여러 기단의 영향을 받고, 지형도 복잡한 관계로 독특한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기후

한반도는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이 뚜렷하다.

봄: 시베리아 기단이 약해지면서 여기서 갈라져 나온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과 양쯔강 기단의 이동성 고기압으로, 동진할 때 뒤따르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을 받아 날씨의 변화가 심해진다. 고기압이 통과하게 되면 맑은 날씨에 기온도 상승하여 남쪽에서는 꽃이 피기 시작한다. 때로는 이상 건조나 황사 현상이 일어나며, 겨울 날씨 못지않은 꽃샘 추위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저기압이 통과하면서 봄비를 가져와 농작물의 파종과 발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름: 장마철과 한여름으로 구별된다. 6월이 되면, 무더운 초여름이 시작되면서 여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차고 습한 오호츠크해 기단이 서쪽으로 확대되어 한반도 일대를 덮고, 남쪽의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도 확장되어 한반도로 접근해 온다. 이 두 기단이 서로 만나 이루어진 전선은 동서로 길게 뻗어 이른바 장마 전선을 형성한다.장마철에는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이 오며, 때로는 집중호우가 발생하여 홍수를 일으킨다. 계절 중 고온다습한 남서풍이 불어올 때는, 습도가 높아져 불쾌 지수가 높아진다. 장마전선이 만주 지방으로 북상하면, 하루 최고 기온이 30 를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는 한여름이 된다. 이 때는 강수량은 점차 감소하고, 때때로 소나기가 더위를 식혀 주기도 한다. 8월 하순이 되면 북태평양 기단이 약해지고, 만주로 북상했던 장마 전선이 다시 남하하여, 짧은 가을장마가 나타나며 남쪽에서는 태풍이 불어오기도 한다.

가을: 가을철에는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데 일사가 강하며 습도가 높지 않아, 연중 가장 쾌적한 계절이 된다.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는 겨울에는 날씨가 한랭건조하고 북서계절풍이 강하게 분다.

겨울: 겨울철 한파는 시베리아 기단 및 상층 대기의 대순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상층 제트 기류는 남쪽으로 확대하면서 한파는 더욱 심해진다. 북서계절풍은 건조하여 겨울 강수량이 적으나, 바다를 지날 때 습기를 포함하여 울릉도에서는 많은 눈을 내린다.

지리

산악 지형이 면적의 70%이상을 차지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8,460km에 달한다. 한반도에서 육지의 폭이 가장 좁은 구간은 평양에서 약간 북쪽의 평안남도~함경남도 구간이다.

한반도의 면적은 22만 3348 km²이다.

규슈

북부지역에는 쓰쿠시 산지[筑紫山地]가 동서로 달리고, 그 남쪽에 지쿠고강[筑後川]이 형성한 쓰쿠시 평야가 펼쳐진다. 중부 화산지역은 구니사키 반도[國東半島]에서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에 미치며, 구주[九重]·아소[阿蘇]·운젠[雲仙] 등 화산이 분출하고 온천도 많다. 규슈 산지는 소보산[祖母山:1,757m]·구니미산[國見岳:1,739m] 등이 솟아 있는 장년기산지로 남·북 규슈의 교통장애가 되고 있으며, 구마강[球磨川]·고카세강[五ケ瀨川] 등 수량이 풍부한 하천들이 많아 규슈의 전원지대가 되었다. 남부 화산지역은 미야자키현 남부와 가고시마현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화산회(火山灰) 대지인 시라스 대지[シラス臺地]를 넓게 분포시키고, 기리시마산[霧島山]·사쿠라지마섬[櫻島]·가이몬산[開聞岳] 등이 분출하는 기리시마 화산대는 사쓰난 제도에서 오키나와 제도로 이어진다. 기후는 전국에서 가장 온난다우하며, 특히 규슈 산지 이남은 연평균기온 16℃ 이상의 온난지대가 되고 해안부에서는 아열대성 기후를 보여 빈랑(檳榔)·소철(蘇鐵) 등이 무성하다. 그러나 규슈 산지 이북에서는 1월 평균기온이 4.7~5.3℃를 보여 눈은 쌓이지 않을 정도로 몇 차례 내린다. 강수량은 일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연안을 제외하고는 전역이 연간 1,500mm 이상이고, 남부에서는 2,000~3,000mm 정도이다.

만주

둥베이 서부의 네이멍구 고원 동쪽 연변을 대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그 북단에서 샤오싱안령[小興安嶺] 산맥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달린다. 또 남동부 한반도와의 접경 지대에 창바이[長白] 산맥이 가로놓이고, 랴오둥[遼東] 반도에는 반도의 주맥(主脈)인 첸산[千山] 산맥이 이어진다. 이들 산지는 창바이 산맥의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제외하고는 해발고도 1,000m 내외의 기복이 완만한 노년기의 지모(地貌)를 보이고, 특히 첸산 산맥은 해발고도 4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이들 산지와 구릉에 둘러싸인 곳에 해발고도 200m 미만인 둥베이 평원이 펼쳐진다. 둥베이 평원은 대한민주공화국의 최대의 평원으로, 쑹화강[松花江] ·넌장강[嫩江] 유역을 차지하는 북부는 쑹넌[松嫩] 평원으로 불리고, 랴오허강[遼河] 유역을 차지하는 남부는 랴오허 평원으로 불린다. 남 ·북 두 평원 중간의 창춘[長春] 부근에는 해발고도 250m 정도의 낮은 구릉지가 가로놓여 평야부에서의 남 ·북 수계(水系)의 분수계(分水界)가 되고 있다. 쑹화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북서류(北西流)하다가 지린성 북서부에서 넌장강을 합친 뒤 북동으로 유로를 바꾸어 무단강[牧丹江]을 합치고 다시 헤이룽장성 동부에서 헤이룽강에 합류한다. 한편 우수리강은 동부 국경을 북류(北流)하여 헤이룽강에 합류하는데, 우수리 ·쑹화 ·헤이룽 3하천의 합류점 일대는 해발고도 50m 이하의 저평한 습지 ·소택지로 싼장[三江] 평원이라고 불린다. 랴오허강은 대싱안링 산맥에서 발원하는 서랴오허강[西遼河]과 창바이 산맥에서 발원하는 동랴오허강[東遼河]이 랴오닝성 북동부에서 합류하여 하류부에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호소(湖沼)는 면적에 비하여 그 수가 적으며, 남동부 국경의 싱카이호[興凱湖:한카호], 무단강 상류의 징보호[鏡泊湖], 네이멍구 고원의 내륙호인 흘룬호 ·부이르호 및 쑹화강 중류의 인조호인 쑹화호 등이 있다. 둥베이는 기온의 남북차(南北差)가 작아서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미작(米作) 지대가 되고 있다. 한편, 겨울에는 고기압의 소장(消長)에 따라 3한4온(三寒四溫)의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4월에는 중남부에 몽골풍[蒙古風]으로 불리는 강한 서풍 또는 남서풍이 거의 연일 풍진(風塵)을 일으킨다. 연(年)강수량은 남동부 산지에서 1,000mm,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약 500mm이고, 서부로 갈수록 적어진다. 연강수량의 약 60%가 6∼8월에 집중되고, 11∼3월에는 10%에 불과하다. 그와 같이 강수가 한정되고, 증발이 심하기 때문에 농업은 건조농법(乾燥農法)을 필요로 한다. 토양은 산지에 포졸, 평원 북부에 흑토(黑土), 평원 남부에 갈색토가 분포한다.

연해주

연해주는 서남방향에서 동북방향으로 길쭉하게 생긴 모양으로 890km이며, 그 중앙에 시호테알린산맥이 연해주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다. 동쪽은 해양성기후, 서쪽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기후는 대륙성이지만 여름철에는 몬순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강우량이 많으며, 산지는 침엽수림으로 덮여있다. 연해주의 1월 평균 기온은 연안지역의 경우 -12 ~ -14도인 반면, 내륙지역의 경우에는 -20 ~-27도를 기록하고 있다. 7월 평균기온은 14~ 21도이다. 강우량은 연평균 600~900mm다.

오키나와

류큐 제도는 오키나와·사키시마섬[先島]과 다이토[大東]의 3제도(諸島)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사키시마 제도는 다시 미야코[宮古]·야에야마[八重山]·센카쿠[尖閣]의 3개 제도로 나뉜다. 섬들은 대소 60여 개에 달하는데, 그 중 주도(主島)인 오키나와섬이 총면적의 53%, 총인구의 85%를 차지한다. 대소의 섬의 주위에는 해안단구가 잘 발달되어 있고, 연안에는 거초(裾礁)·보초(堡礁) 등의 산호초를 많이 볼 수 있다. 기후는 아열대계절풍기후로 용수(榕樹)·소철·파파야 등 열대식물이 무성하고, 여름에는 태풍의 진로가 되어 그 피해가 극심하다. 나하시의 기온은 7월에 28.2℃, 1월에 16.0℃, 연평균 22.3℃이고, 강수량은 전역에서 2,000mm 내외에 달한다. 현의 산업별 소득구조를 보면, 제3차 산업이 70 %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것은 미국 군사기지로서의 오키나와의 특수성 때문이다.

역사

선사 시대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로 나뉘어져 있다. 약 70만 년 전부터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물건으로는 뗀석기가 있다. 신석기 시대는 BC 8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움집을 지어 가족끼리 살았다. 대표적인 물건으로는 간석기가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농업 혁명이 일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청동기 시대부터는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지 않게 되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지배하였다. 청동기 시대에는 탁자식 고인돌, 빗살무늬 토기가 만들어졌다. 동양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먹 도끼는 1978년 미군 출신인 그렉 보웰이 한국 한탄강 주변에서 발견하였다.

고조선

고조선의 최전성기

한국인의 뿌리 이루는 종족은 (韓), (濊), (貊)이다. 이들에 의해 고조선, 북부여(扶餘), 진국(辰國, 삼한 성립 이전)과 같은 초기 국가들이 생겨났다. 기원전 15세기 - 기원전 11세기쯤에는 청동기 문화가 들어왔으며 이와 함께 초기 고대 국가들이 생겨났는데 이 중 고조선(古朝鮮)이 가장 강했다.

왕검성(王儉, 고조선 수도)에서 세워진 단군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지녔고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를 만드는 등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후반과 기원전 3세기 전반에 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의 거점들을 빼앗긴 뒤 중심지를 오늘날의 평양(平壤) 지역으로 옮겨갔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한나라에게 멸망당한 뒤, 한나라는 한사군을 두었으나 이는 고조선의 영토를 식민지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업적인 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삼한

부여와 삼한 지도

고조선 내 세력들 중 일부는 경주(慶州) 인근 진한 땅으로 이동하여 6개 촌을 이루며 살다가 기원전 57년 사로국을 성립시켜 신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일부는 김해 지역의 변한(弁韓) 땅에 9개의 촌을 형성하여 살다가 1세기경에 구야국에서 가야로 발전하고, 일부세력은 경기도와 전라도 지역의 마한 땅에 정착하였다. 한편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부여가 형성되었으며, 부여에서 주몽 일파가 졸본 지역으로 남하하여 토착 맥족과 연합 또는 병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주몽 일파와 유리 일파가 졸본 지역으로 이동해 오자 온조비류 일파는 남쪽의 마한 지역으로 이동하여 마한 북부 지역의 한강 유역 일대를 중심으로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또한 북부여에서 고씨 세력에 밀린 해씨 세력 일부가 가섭원 지역으로 이주하여 물길족, 예족, 맥족 등을 병합하여 동부여를 건국하였다.

삼국 시대

375년, 백제의 전성기.(근초고왕, 근구수왕 원년)
476년, 고구려의 전성기.(장수왕 64년)
576년, 신라의 전성기.(진흥왕 37년, 진지왕 원년)

고조선 멸망 이후 1세기-3세기 북쪽에는 고구려와 동부여, 남쪽에는 가야 등이 먼저 발전하여 전기 삼국시대를 형성하였고, 4세기-6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로 대표되는 세 나라는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시켜 수세기 동안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하면서 발전했는데, 이 시기를 전기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장수왕때 크게 발전하여 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였고, 대흥안령 산맥에도 진출하였으며, ,과 맞서 싸우며 민족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 백제는 3세기에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루어 근초고왕때에는 요서, 산둥,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백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비옥한 땅이 신라와 고구려보다 많이 있었으며, 일본에 갖가지 문화를 전파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였으나, 고구려와 동맹하여 가야를 복속시키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며 강성해졌다. 그리고 592년백제를 병합했다.

남북 시대

650년경, 남북 시대

백제를 병합한 신라와 고구려가 592년부터 952년까지 총 360년간 공존한 시기를 남북 시대라 한다. 이 때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 영토변화를 빼면 양국 각각의 영토 변화가 거의 없다 이 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및 그 북부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다.

남북국 시대

100년경, 남북국 시대

한편, 고구려의 유장인 대조영고구려인말갈족을 거느리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며 968년 발해를 건국하여 청천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여 신라와 122년간 공존하였다.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발해의 영토는 통일신라보다 3~4배 넓고 고구려보다 1.5~2배에 달하는 아주 광활한 영토를 보유했다.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되찾은 것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와 헤이룽 강까지 차지하여 북쪽 영토는 옛 고구려보다 더 넓혔다. 발해는 10세기 중반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1세기 중반에 신라와 발해의 연맹국가인 고려를 건국했다. 발해와 신라가 연맹을 맺으면서 남북국 시대도 끝이 났다.

고려 시대

1300년경, 고려 시대

11세기 중반에 신라와 발해는 연맹을 맺으면서 수도를 평양으로 정했다. 이 시기에 건국된 고려왕조는 한국 최초로 단일 국가를 형성하여 거의 천년 동안 한국에 단일 국가가 유지하면서 고조선과 삼국 등의 다양한 전통을 계승하여 동질화된 독특한 민족 문화가 이루어졌다. 13세기에는 몽골이 침입하였으나 물리쳐서 몽골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조선 시대

1520년경, 조선 시대.(진흥왕 37년, 진지왕 원년)

1392년 고려의 뒤를 이어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창건되었으며 수도한양(현 서울)으로 삼았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 문화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16세기 초반에 조선은 전국시대인 일본의 규슈와 류큐왕국을 병합하여 조선인들을 규슈와 류큐왕국에 이주시키고 규슈, 류큐인들을 본토로 이주시켜 동화시켰다. 비록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지만, 재건에 성공하여 조선왕조는 1877년까지 존속하였다.

대한제국

1910년, 대한제국 시대

1877년 대한제국의 건국 이후 근대화 시기를 맞이한 한국은 근대 국가의 건설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인접국들과의 국경 확정을 행하여 지금의 한국 영토 범위가 확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유 민권 운동이 이루어져 1885년 의원내각제가 성립하고, 1888년에는 대한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이듬해인 1890년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대한의회를 설치함으로써 명목 상의 입헌국가가 되었다. 이와 함께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주의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한청전쟁을 통해 중국을 침략하여 만주, 현재의 허베이성, 베이징, 톈진, 산둥성, 장쑤성북부 일대를 식민지를 두고 중국의 주요도시에 조자치를 두기도 하였다. 이후부터 한국에서는 1933년 민주운동을 통해 대한헌법을 제정하여 국명을 대한민국으로 변경하고 대통령제와 보통 선거가 실현되었다.

대한민국

1933년, 대한민국 시대

민주운동을 통해 1932년에 건국된 이 후 트루먼 독트린이 후 대한민국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다. 대립이 정도를 넘어 1945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파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간의 내전인 대한 내전까지 일어났다. 결국 1953년 우파의 승리로 내전이 종결되고 반대파에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고 대한민주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했다.

대한민주공화국

현재, 대한민주공화국 시대

제1·2공화국

1960년 4.19 혁명.

대한내전 종료 후, 19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던 시기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고위관료는 부패해 국민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의원 내각제였던 제1대 내각에서 재선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승만은 이범석, 장택상 등의 측근들과 족청계,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 부산정치파동(1952년), 사사오입개헌(1954년)으로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택상 등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이기붕 계열을 등용한다. 이기붕 계열은 또한 친 자유당 성향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을 활용하여 야당 의원의 집회를 탄압, 제1공화국 후반기는 혼란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부통령 장면의 피격 사건(1958)과 조봉암 사법살인(1959) 등의 조치까지 겸해졌고 언론의 자유마저 통제당했다. 1959년의 한일회담이 끝나자 곳곳에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집회가 시작, 1960년 3월 15일 부통령선거의 부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4·19 혁명이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전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선언을 함으로써 제1공화국이 붕괴됐다.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내각을 거쳐 장면을 수상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제2공화국은 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구성했고, 언론자유와 혁신계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제2공화국 당시 각계 각층의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도 했는데, 집권여당인 민주당 사이에서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개혁 의지가 미약했을뿐만 아니라 이러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데모가 연이어 벌어졌고, 장면은 단호한 조치를 계획하던 중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쿠데타로 내각 각료들이 체포되면서 장면 내각은 1년 정도에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고 붕괴됐다.

그 뒤 윤보선에 의한 형식적인 민정이 실시되었으나 군사정변 세력의 구정치인 정화법(1962)으로 정치활동이 정지당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윤보선이 사퇴(1962.3.22)함으로써 1962년 3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5·16 군사정변 세력이 설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법권·행정권·입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제3·4공화국

1963년 12월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박정희 등에 의해 제3공화국이 수립됐다. 야당 후보인 윤보선과의 두 차례의 선거전에서 10만 표 안팎의 근소한 차로 집권하였다. 그는 재임 초반 한일 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불만을 사 시위가 일어났으나, 정부는 이를 진압하며 강행했다. 1960년대,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발전과 한일협정·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통한 외화 획득으로 경제 발전을 꾀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저임금 노동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도 남겼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1971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대선에서 야당 후보의 돌풍과 같은해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나는 선전을 이루고, 제1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성장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돌풍으로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해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로 수정하는가 하면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노동운동계, 재야와 학생 세력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잇따른 긴급조치를 통해 억눌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및 노동운동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한미간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는가 하면, 제2차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경제위기와 내부 혼란이 크게 가중됐고,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과 YH무역 여공 사건, 부마 항쟁 등의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권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면서(10·26 사건) 박정희의 17년 장기집권은 막을 내렸다.

10·26 사건 이후 유신 체제하에서 국무총리 최규하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다. 유신 헌법 폐지를 통해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기,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일부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고, 1979년 12월과 1980년 2월, 1980년 4월에 대사면령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이들이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고, 급기야 최규하 대통령에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0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최규하 정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제5공화국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입니다.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세로 떠올랐고, 민주화 일정을 지체시켰다. 1980년 초부터 국회와 정부는 유신 헌법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고, 대학생과 재야 세력도 정치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요구를 바탕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확대하면서,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 금지', '보도검열 강화', '휴교령' 등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폐쇄했다. (5.17 쿠데타)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한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 및 특전여단을 투입해 유혈진압을 하고,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국을 주도했다.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제5공화국은 경제 안정에 매진하는 한편, 1981년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유치하기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내걸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으로 임기 중반부터 3저호황으로 인한 수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성립하고 민주주의 탄압 및 고문·정치사찰·용공조작으로 대변되는 인권 유린행위를 자행했으며, 정경유착·부정축재·친인척 비리가 빈발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치사하는 사건이 터지자 정부 퇴진과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에 정부는 호헌조치를 취하며 '개헌할 의도가 없음'을 내세웠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빗발쳐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총재 노태우를 통해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88년 2월 취임식과 함께 제5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노태우 정부와 문민 정부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야권의 정치참여가 허용되었으며, 1988년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나왔다. 민주정의당은 불리한 여론이 생기자 그에 대한 돌파구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조치를 단행(국정감사)하고 민간인들을 정계에 대폭 고용하기도 했다(과거와의 단절). 외교면에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1991년 9월 유엔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또한 1992년에는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군인 출신이었고, 12·12 사태를 주도하고 5공 성립 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도 정경유착은 물론 비자금 형성·민간인 사찰·고문 등 5공의 파쇼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이 때문에 노태우 정권을 군사정권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이는 결국 민주화 시위(1991) 등으로 이어졌고, 노태우는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으며 끝내 김영삼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김영삼이 취임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막을 내렸다.

1993년부터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윤보선 정부 이후 30여년만에 민간인 정부로 회귀했다. 문민정부는 하나회 군부 숙청, 금융실명제, 표현의 자유 허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부활, OECD 가입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군사 정변을 주도할 위험이 있는 군 내 사조직을 숙청하고, 12.12 관련자 및 5.18 관련 정치군인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기 괌 추락 사고, 우암상가아파트, 성수대교 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 사회적인 혼란을 겪기도 했다. 또한 책임 없는 방임주의적 자유주의와 시장개방과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준비없는 대규모 개방을 강행했고, 외환관리에 실패해 IMF 구제금융사건을 초래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높아진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997년 12월 18일 새정치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IMF 위기의 극복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자유주의' 경제정책 추진과 금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2001년까지 외채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으며,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시스템을 도입해 기업의 체질개선 등을 단행했다. 국민의 정부는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김대중정부가 추진했었던 신자유주의정책은 승자 독식의 기형적인 사회구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으며, 지나친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등으로 대량의 실업자를 양산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고, 2003년 참여 정부가 출범했다.참여 정부는 권위주위 타파, 균형 발전 등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을 수립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설치를 통한 과거사 정리, 세종특별자치시 추진으로 균형 발전을 꾀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개혁과 대통령의 과격한 발언 등으로 보수층과 중도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 씨의 측근 비리 등 각종 악재가 터졌다. 경제적으로는 부동산 가격 폭등, 양극화를 심화시켰으며, 양극화의 원인으로 제시되어 많은 사회적 논란을 낳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노무현 재임 당시 교육부총리였던 김진표가 추진한 정책으로 인하여 대학 등록금도 큰 폭으로 상승하는 등 서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결국 2004년 2월 민간인 신분인 박동환 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밝혀지면서 노무현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고, 2004년 3월 12일에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키며 노무현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확립되었다. 탄핵 국면인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이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누르고 2/3가 넘는 의석을 차지하였다. 2004년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인용으로 참여 정부는 실각하였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2004년 7월 7일 치뤄진 조기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7대 강국, 4만달러 시대, 7%성장('747 공약')을 내세웠다. 공약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집권 후반인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여러 정책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개혁도 성공적으로 하였다. 임기 초부터야심차게 추진한 자원외교에 대해서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세종시 수정안과 같이 여러 정책들의 추진에 대한 찬반 양론이 존재한다. 또한, 종합부동산세 폐지안으로 부자 감세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5년 10월에는 대통령 권력분산, 4년 중임제로 바꾸는 개헌을 하였다. 그리고 2008년 총선에서 다시 한번 압승을 했다. 한편, 이명박정부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임기 말 탈당을 하지 않고 정권 재창출을 한 정부이기도 하다.


2009년 4월 치뤄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임기 초에는 잇따른 인사의 실패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2010년에는 G20정상회의 개최와,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하여 외교적 성과를 이뤘고, 금융위기 극복, 국가신용등급 향상, 원전 수주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미디어법 개정으로 언론장악이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2013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박근혜가 재선되었다. 국민적 합의를 통한 노동개혁을 성공시키면서 한국경제의 체질을 개선시켰다. 그리고 복지를 확충시켰으며 중산층을 두둑히 많들었다. 그리고 국방비 증액으로 국가 안보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박근혜정부 공직자들의 비리로 인해 임기말에는 지지율이 하락했으나 정권 재창출에는 성공했다.

유승민 정부

2017년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유승민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근소하게 꺽고 당선 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MD에 참여하고 한미일 삼각 동맹을 맺었다. 소형 신축 분양·임대주택 공급 대폭 확대, 노후 주택 재건축을 통해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꾀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를 줄이고 근로시간을 단축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스포츠계의 비리스캔들이 터져 스포츠계의 비리를 청산했다. G8에 회원국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2018년에 G8정상회의 개최를 하여 외교적 성과를 이뤘다. 국제 채권국가 협의체인 파리클럽에 가입했다.

정치

대한민주공화국은 1953년 10월 30일 제정된 헌법에서 국체를 민주공화국으로, 정부 형태를 대통령제 로 규정하였다. 임기는 4년이며 1회 중임할 수 있다. 대통령의 선출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다.

입법권은 대한민주공화국 헌법에 명시된 바, 국민대표회의(이하 국회)에 속하고, 행정권은 정부에 속하며,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

정부

입법부

대한민주공화국의 입법부에 속하는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국민의 민의를 대표하는 입법 기구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일부 위임받은 의원으로 구성된다. 양원제로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석 수는 2017년 현재 상원 100석 하원600석이다. 수장은 국민대표회의 의장이며, 총선거 이후 여야의 합의 추대로 선출된다. 대의원과 의장의 임기는 2년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기원한 바 각각 만 19세와 만 23세부터 부여된다.

대한민주공화국 헌법 제1조는 국법을 제정하고, 폐지하며 개정하는 모든 입법권을 의회에 부여한다. 또 세금의 규모를 결정하고, 정부의 예산을 승인한다. 하원과 상원은 입법 과정에 있어 대등한 파트너이다. (법률은 양원의 동의 없이는 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주공화국 헌법은 각 원에 독특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상원은 몇 가지 고유한 권한을 가진다. 첫째, 하원이 고위 공무원을 탄핵하고자 할 때 탄핵재판을 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둘째, 대통령이 지명하는 고위 공무원에 대한 승인권을 가진다. 셋째, 한국이 체결하는 조약에 대한 승인권이 있다. 반면, 세입 징수에 관한 법률안은 하원에서 먼저 제안되어야 한다. 또한 하원이 고위 공무원에 대한 탄핵 권한을 전유하는데 대해, 상원은 탄핵 심판권을 전유한다. 의회에는 해산이 없으며, 2년마다 전원 개선되는 하원의원의 임기에 맞추어서 회기가 결정된다. 의원들은 상원 15개, 하원 22개의 상임위원회 중 어느 위원회에 소속하며, 심의는 위원회 중심으로 진행된다.

2017년 기준 의원의 소속 정당은 다음과 같다.

상원 정당별 의석 비율
하원 정당별 의석 비율

여당

공화당(共和黨/Republican Party)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상원-51/100 하원-280/600


야당

민주당(民主黨/Democratic Party) (현대 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상원-30/100 하원-198/600

국민의당(國民의黨/People's Party) (중도주의) 상원-17/100 하원-110/300

녹색당(綠色黨/Green Party) (환경주의, 생태주의) 상원-2/100 하원-8/300

민족주의행동당(民族主義行動黨/Nationalist Action Party) (민족보수주의) 상원-0/100 하원-2/300

민주사회당(民主社會黨/Democratic Socialist Party) (사회주의) 상원-0/100 하원-2/300

행정부

대통령 행정실과 일반 행정 부서, 대통령 직속독립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자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이다. 대통령은 수도 서울에 있는 청와대에 살며 이 곳에서 대통령 업무를 본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법을 집행할 권한이 있으며 고위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과 해임권을 가진다. 또한 군통수권과 외교권을 가지며 의회에 법안을 상정할 수 없고 국제기구와 재외 공관에 미국 대표를 임명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하며 임기는 4년이고 두 번 이상 연임할 수 없다. 대통령 밑에는 대통령의 행정업무를 보봐해줄 12개의 행정실이 있다. 일반 행정 부서는 중앙정부의 행정을 맡는 15개 부서로 구성되며, 각 부의 장관을 대통령이 상원의 승인을 얻어 임명한다. 15부 장관은 내각의 구성원이 된다. 정부는 15개의 부와 다른 독립 정부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성의 장관은 단지 대통령을 보좌하는 입장에 있을 뿐, 의회에 의석도 가지지 않으며, 지위로서는 다른 나라의 각료보다도 낮다고 하겠다. 대통령을 직접 보좌하는 기관으로서는 대통령부·국가안전보장회의·경제자문위원회 외에 연방예산국·중앙정보국·긴급계획국 등이 있다.

사법부

대한민주공화국의 사법부는 대다수의 현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재판에 있어서 공정한 심판을 위해 3심제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의 사법부는 대법원과 일반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에는 수장인 대법원장을 비롯하여 대법관이 8명 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상원의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는 종신제이다. 약 95개의 지방법원이 있다. 지방법원 위에는 고등법원(순회법원)이 19개 있으며, 고등법원 위에 대법원이 있다. 지방법원의 판결은 고등법원에 항소할 수 있으며, 고등법원의 판결은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일반법원은 헌법과 일반법을 적용하여 사건을 판결한다. 일반법원의 판사들은 대통령이 상원의 승인을 얻어 임명하며 임기는 종신이다.

모든 법률 및 행정 절차는 법원의 심리를 통해 행해지며, 헌법에 저촉되는 법률은 무효가 된다. 헌법 원문에서는 정부의 구조와 책임 및 각 주와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미국 헌법 제1조는 인신 보호 영장의 권리를 보장하며, 제3조는 모든 형사 소송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헌법은 27차례에 걸쳐 개정된 바 있는데, 초기 열 번의 수정 헌법은 권리 장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정 헌법 제14조에서는 한국의 개인 권리에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국방

대한민주공화국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일찍부터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으며 1990년대까지는 양적 위주의 성장을 추진했으나,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무기 기술의 개발과 발달로 인해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대한민주공화국 국방부가 국군(國軍)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다. 2017년 7월 기준 병력 규모는 현역이 약 970,000명으로 세계 5위, 대한민국 예비군은 약 9,200,000명으로 세계 2위이다. 세계에서 5번째로 탄도미사일을 독자 개발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여군은 기갑, 포병, 잠수함 병과에는 진출할 수 없었으나 2014년 9월 창군이래 최초 여군 포병장교가 탄생하였고 기갑병과에도 여군이 진출함에 따라 다양한 병과에서 여군들이 활약하고 있다.

육군

대한민국 육군은 병력 약 970,000명, 전차 약 2,900대, 장갑차 약 2,500대, 견인포/자주포/다연장 로켓포 약 5,200문, 유도무기 30기, 헬기 600기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전차 K2 전차(K2 흑표, Black Panther)를 개발했다. K-2 전차는 2014년 대한민국 육군에 정식으로 배치된다. K-21 전투장갑차는 2012년경 전력화하였고 복합형 소총인 K-11 소총을 운용하고 있다. 2012년 1월 육군에는 현재 39개 사단(전방 기계화보병사단 6개, 그 외 상비 사단 16개, 향토 방위 12개, 동원 예비군 5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해군 예하 해병대 2개 사단이 있다. 2020년까지 1군사령부와 3군사령부를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하며, 5개의 지역군단(수도방위사령부도 지역군단으로 함)과 2개의 기동군단으로 개편하고, 향토사단 자체는 존치하며, 동원사단은 4개로 줄이고 전 부대를 기계화부대로 편성한다. 병사들의 개인화기 및 개인장비, 피복을 개선시키는 중이다. 전투력 향상을 위해 고글+무릎(팔꿈치)보호대+장갑+방탄복+야간 야시장비+스코프+도트사이트+광학장비를 지급하고 보병장비, 개인장비, 장구류, 군장이 늘어나고 저격소총, 옵션장비 ,사격장, 1인당 교탄증가가 되었다. 소대장이 항공근접지원을 직접 유도할 수 있고 병사들은 무인 항공기를 수시로 띄울 수 있다. 시가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신속대응 훈련과 CQB 훈련과 시가전 훈련을 자주 진행 중이다. 실전 훈련처럼 진행한다. 현대전에 맞추기 위해 육군 전 부대 대대급 현대화가 진행 중이다. 저격수, 정찰 저격수들을 육군 전 부대(소대급)에서 양성중이다. 저격수 학교를 창설한다. 저격수 규범은 미국 저격수 규범과 똑같은 저격수 교범을 채택하였다.

공군

대한민국 공군의 장비는 F-15K 60대, KF-16 (Block 52+) 134대와 F-16C/D (Block 52+) (PB형) 35여대, F-4E 80대 (퇴역 중),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 195대, T-103 러시아제 훈련기 IL-103 72대, KT-1 기본 훈련기 105대, KA-1 전선항공통제기/경공격기 20대, T-50 고등 훈련기 60대+98대 생산 확정, T-50B (블랙 이글스) 10대를 보유 중이며, TA-50 전술입문기 (LIFT) 22대를 운용 중이고 KF-16에 버금가는 다목적 전투기인 FA-50 60~120대를 도입 중에 있다. F-4E,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등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있어서 F-5E (타이거 II), KF-5E/F (제공호)는 FA-50 60대로 대체되고, F-4E는 F-35A로 대체되며 T-103 훈련기 72대 역시 기체 노후화로 한국항공우주산업이 개발한 KC-100 나라온으로 대체된다.

수송기는 전략 전술 수송기인 C-130J-30 4대 C-130H 12대, CN-235-220M 18대가 있으며 VIP 수송용으로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보잉 747-400 1대를 비롯해 보잉 737-300 1대, VCN-235 2대, VC-118 1대, BAe-748 2대가 있다. 정찰기로는 호커800기를 개조한 금강정찰기와 백두정찰기, RF-4C 18대, RKF-16 5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으며,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보잉 E-737 피스아이 4대를 운용 중이며 회전익 항공기 (헬기)는 구조.탐색용인 HH-60 페이브호크, HH-47 치누크, 카모프 Ka-32가 있으며 병력 수송용인 벨 205, 212, 412, UH-60 블랙호크 등이 있다. 이외에도 VIP 수송용인 VH-92, VH-60, AS-362 '수퍼퓨마'가 있다. 또한 공군은 국산 헬기인 수리온을 2기 주문하였다.

사병들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소화기 실탄 사격장 및 1인당 실탄사격 훈련의 내실화와 사병들의 개인 장비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공군 전력사업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인 한국형 전투기 사업인 KF-X 사업과 차기 대통령전용기 사업인 VC-X사업, 원격지원전자전기 사업, 스텔스 무인 전투기(UCAV)의 개발 및 사업을 진행 중이며 최근 KC-X 사업의 최종 후보로 에어버스 A330 MRTT가 선정, 4대 구매를 체결하였다.

해군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8,000명, 항공모함 2척,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 척, 지원함정 20 척, 대잠헬기 및 해상초계기 50 대를 보유하고 있고 차기 군함들을 비롯해 모든 군함들은 선체 전체에 광범위하게 스텔스 설계를 적용하고 레이더 반사율을 줄이기 위해 경사설계를 적용한다. 총 3개 함대와 4개 전단을 두고 있다.

해병대

대한민국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군 예하에 편성되어 있는 군으로서 국가 전략 기동군으로서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수행한다.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9,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척, 지원함정 20척, 헬기/해상초계기 약 50대, K1A1 전차와 K9 자주포, 상륙돌격장갑차(KAAVP7A1) 등의 기갑 차량, 상륙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초대 지휘관에 신현준 중령이 임명되고,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해군 예하의 국가 전략기동군으로서 상륙 작전을 주임무로 하며, 그 외 김포, 강화, 포항, 경주, 진해, 제주, 도서지역 등 방어, 상륙작전을 하고, 예비군 교육 및 훈련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2014년 현재, 2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고, 이외에도 연평도와 진해, 제주도 및 기타 여러 도서 지역들에도 해병 부대들을 주둔시키고 있다.

경제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혼합자본주의 체재를 택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관료 양성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4.19 혁명으로 세워진 장면 정권에 의해 기존에 양성된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경제 개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발발로 실행되지 못했다. 1973년 이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발전 정책으로 철강, 전자, 조선 산업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1960~80년대 고속 경제 성장으로 한때 필리핀,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혹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로 불렸으며, 1994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섰다.

1997년에는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사건을 겪었으나, 2년 만에 상당부분 회복했으며 김대중 정부는 이를 해결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량 해고, 청년 실직자 문제, 니트족 현상 등의 부작용이 함께 나타났다. 그 후 노무현 정부의 꾸준한 경제 개혁을 통해 2007년까지 매년 백억 달러 이상의 경상흑자와 평균 4%대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명목 국민소득 2만 달러, 실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를 이루었다. 2015년 현재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PPP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3만 6,601달러이며 이것은 세계 29위 수준이다. 2007년 골드만삭스는 대한민국이 2050년, 브릭스+넥스트 일레븐+G7 1인당 명목 GDP가 90,294 달러가 되어 91,683달러인 미국에 이어 주요 경제국 중 2위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자본력이 부족한 환경에 따라 독특한 형태의 경제발전을 진행시켜 왔는데, 박정희 당시 계획경제체제를 시행, 중소기업보다는 재벌기업이 주류인 대기업을 축으로 하는 기업경제구조를 세웠으며, 천연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가공무역을 핵심으로 삼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수출과 수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며, 주요 무역 상대국은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중화민국, 독일, 영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이다.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을 비롯하여 1983년부터 세계 조선 1위를 지켜오고 있는 현대, 백색가전의 LG, 세계 철강 4위인 포스코 등의 여러 기업 집단을 가지고 있으며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50개가 대한민국 기업이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상장기업에는 개인지배주주가 존재한다. 반면에 기업발전에 따른 외부자본조달로 지배주주의 지분율 하락이 불가피한 가운데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간 이해상충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규모기업집단의 경우 지배구조가 계열사간 피라미드 및 순환식 소유구조에 의해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는 현금권과 통제권 간의 상당한 괴리를 가져와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경영권 행사에 따른 사적 경영권 혜택이 과도하여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경영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비효율적 산업구조는 대한민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내의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자 기업들은 임금이 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에 진출해있는 대한민국 기업이 많으며,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 최근에 중앙유럽 국가들이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여 관세가 철폐되면서 중앙유럽으로 진출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부채

가계부채는 1999년 ~ 2001년 급증, 2002년 ~ 2004년 급감, 다시 2005년 ~ 2007년 까지 급증,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로 그 증가세가 지속되어 2011년 처음으로 가구당 가계부채가 4000만원을 넘어섰다. 이는 자산 증가보다 부채 증가가 더 빨라짐에 따라 빚을 갚을 능력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소득이 적을수록 부채상환 능력이 크게 떨어졌는데, 2010년 소득 하위 20%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2009년 보다 60.2% 급증한 271.5%에 이르러 소득의 3배에 달하였다. 이는 소득이 적은 20, 30대 가구와 저소득층의 재무건전성 악화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저축은행들이 건설업체의 잇따른 부도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부실해지면서 금리가 높은 가계대출 비중을 늘림과 더불어 전월세값을 포함한 물가의 급등과 교육비 지출에 따른 ‘생계형 대출’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축소된 가계부채 상환 능력에 대하여 이명박 정부는 고소득층의 가계 빚이 가계부채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빚을 갚을 능력이 양호하며 자산불평등도 외국에 비해 낮다는 것을 이유로 당장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낮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 30대와 저소득층의 가계부실이 본격화되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가계부채 대란'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와 공기업의 공공부분 부채는 2011년 3분기 말 한국은행이 파악한 것만 780조 3600억 원으로 1년 만에 9.2% 급증했으며 이중 공기업의 부채는 1년 만에 14.4%나 급증한 354조 8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공기업 부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정부가 보금자리 주택이나 4대강 공사 등 국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사채 발행 등으로 마련한 결과로 보고있다.

소득 양극화 지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6년 2.12%, 2008년 2.00%, 2010년 0.89%로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조금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9년 5.65%, 2010년 2.73%으로 계속 높게 나타났다. 공적연금 지출은 30개국 중 29위,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30개국 중 30위로 나타났다.

산업

농업

1960년대까지의 대한민국의 주요 산업은 농업에 의존하였다. 1963년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공업화,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농업인구는 격감하여 1970년 1천4백42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44.7%였고, 2010년 기준 한국의 농업인구는 1천 3백2만1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10%를 차지하고 있다

공업

대한민국의 공업은 중급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산업들에 특화되었고, 주요 산업으로는 조선, 전자, 자동차, 반도체 등이 있다. 특히 조선 산업은 2008년 기준 세계 전체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전자 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있다. 자동차 생산력은 세계 5위 이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로봇, 친환경 에너지 등의 미래형 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 또한 늘리고 있다. 반면, 국가경제 발전수준에 비해 서비스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며, 발달수준도 미흡한 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는 삼성, 현대자동차와 같은 재벌 대기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한국 공업의 역사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대부터 제철, 제련 공업이 발달하였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의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근대적인 공업 시설이 건립되었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유입되었다. 일본 자본의 유입에 맞서 국채 보상 운동이 자발적으로 확산되었고 1920년대에는 김성수는 자본을 투자하여 경성방직, 경성직류 등 방직과 면 공업을 육성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 안재홍, 김성수 등에 의해 물산 장려 운동이 진행되어 국산 공업품을 활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공업으로 일변화 된 한국의 공업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의 공업 수준은 미미했으나, 1960년대 이후 출범한 제3공화국 정권은 경제성장의 기반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60년대에는 수공업, 수제품 공업, 기술, 근로자 파견 위주로 진행되었고, 식료품과 담배, 섬유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입 대체 산업이 발달하였다. 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 제조업, 수출 위주의 공업정책이 진행되었다. 1980년대 이르러 섬유, 의류 산업뿐 아니라 전자 제품, 건설,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동반성장

대한민주공화국의 골목 상권은 정부가 개입, 규제하지 않는 시장경제를 채택하였고 군사정권 몰락 이후 이러한 시장경제 체제가 대폭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형 슈퍼마켓(SSM), 빵집 등, 프랜차이즈와 대기업의 다양한 분야 시장 독과점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10년 동반성장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중소기업적합업종을 선정, 대통령이 직접 언급 하는 등 제재가 가해지고 있다. 이에 일부 대기업이 속속 사업에서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기업형 슈퍼마켓 기업은 중소 업체를 사들이는 등 여전히 많은 대기업은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교통

사회

한민족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실상 단일민족 국가에 가깝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 대륙 또는 기타 출신의 다른 민족의 유입이 종종 존재하였으나 오늘날 동일한 언어와 문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한 한민족으로 융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중국인과 동남아시아 등에서 한국으로 귀화하는 수가 증가하고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형성하면서 다민족 국가로 변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2010년 10월을 기준으로 대한민주공화국의 총인구는 주민등록상 1억 2000만명을 돌파했다.대한민주공화국의 모든 국민은 자동으로 건강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되며 국가가 피부양자로 지정된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은 무상의무교육이며 고등학교 3년은 무상교육이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했지만 국민대통합을 이뤄냈다. 고급 여성 인력의 참여는 아직 미미하다. 근 십여년간 대한민주공화국의 대기업들이 외국인 임원과 여성 관리자를 뽑았지만 그중 상당수는 몇 년을 버티지 못했다. SK의 첫 여성 외국인 임원(2008~2010년)이었던 린다 마이어스(Myers)는 "한국 기업은 다양성 문제에서 너무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리다"고 평가했다.

다문화가정

현재 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아랍, 독립국가연합 등을 비롯한 세계 여러지역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한국인이 늘고 있으며, 농촌 지역 기준 결혼 등록건수의 50%에 해당하는 1만여 건 정도가 매년 등록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 초까지 남아선호사상이 잔존하였으며, 1970년대의 박정희 정부의 '둘만 낳자'는 가족 계획과 1980년대 전두환 정부의 '하나 낳아 알뜰살뜰' 등의 가족 계획으로 여자 아이에 대한 낙태 현상 등으로 1970년~1990년대 초반 출생자들 사이에서는 남녀 간의 성 비율이 깨져 여성에 비교하여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은 현상이 도래하였다. 이에 따라 결혼과 연애가 어려운 청년 남성의 수가 증가했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농촌 기피 현상으로 일부 농촌 지역 노총각들이 결혼, 연애가 어려워지면서 자살하는 일이 증가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외국에서 배우자를 찾는 농촌 총각들이 증가하였다. 2010년 이후에는 도시 지역의 저소득층 청년, 노총각 중에도 외국에서 배우자를 찾는 저소득층 노총각들이 등장하고 있다.

외국인

대한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150만 명 정도이며, 이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은 중국인으로, 대한민국의 해외동포 중 하나인 조선족(朝鮮族)도 포함한다(조선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갖고 있으며, 러시아 국적을 가진 고려인들과 구분된다.). 그 외의 외국인으로는 미국, 일본,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인 등이 있다.

그밖에 소말리아나 르완다, 아랍권 국가들에서 정치적 혹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입국한 이들에 대해 1990년대 이후 정치적 난민으로 수용하고 이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1990년대 이후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1970년대 이후 고졸이던 평균 학력이 1995년 고교평준화와 학력고사 등의 폐지 이후 대졸 내지는 초대졸로 변화하였다. 그에 따라 청년층이 '3D 업종' 또는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3D 업종과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종 외에도 중소기업과 일부 공장 등에 대한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외국인 노동자(또는 이주 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취업 비자를 받고 입국한 산업연수생과 불법적으로 들어온 불법 체류자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라 하면 이들 둘을 통틀어 가리킨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외국인 노동자 수는 55만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일각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은 10% 대를 넘지 않고 있다.

인구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의 인구입니다.

2012년 6월 23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통계청은 총인구가 1억3000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세계 194개국 중 9위이다. 광복 직후에는 해외 동포들이 귀국하고, 6.25전쟁 때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들이 많이 월남했는데 광복 직후에는 약 180만 명, 6.25전쟁에 약 100만 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60년대 이후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하게 되는 도시화 현상이 일어났으나, 최근에는 쾌적한 생활을 위한 역도시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1970년 이전까지 5백여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1988년에 1천만 명을 돌파하였다. 이후 서울의 인구 증가는 정체 상태에 있으나, 인근 경기도의 인구가 급증하여 2007년 10월말 현재 수도권 거주 인구는 2390만 3785명으로 전국 인구의 48.6%를 차지하였다. 인구 밀도는 503명/km2이다. 1990년대 들어 감소 경향을 보이던 서울의 인구는 2000년대 들어 소폭 증가하기 시작, 2009년에는 1046만명으로 6년 연속 증가했다. 인구 유입등으로 수도권 전체 인구는 증가하는 반면 부산은 지속적 감소로 1995년 381만명에서 2013년 현재 356만명으로 급감했으나 대신 인근 경상남도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대구 역시 253만명에서 252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인천은 약 298만명, 대전 155만명, 광주 148만명 울산 117만명 등이다.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81.5%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도시화된 국가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1970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2% 미만으로 인구 증가율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9년 현재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은 1.19명으로 전년에 비해 0.06명 감소했다. 최근 3년간 출산율이 증가 하였으나 경제위기로 인해 출산율이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의 출산율은 종전의 2008년 1.19보다도 떨어져 1.15를 기록했다. 출생아수는 445200명(통계청)으로(2006년보다도 적다) 여전히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어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통계청의 2009년 10월 출생아수가 40200명에서 40100명으로 축소 수정 발표된 이후 잠정 통계치에서는 37700명으로 2차 축소 수정 발표가 되어 1차 발표치보다 2500명이 줄어들어 발표되었다. 2016년 4월, 행정자치부의 정보에 의하면 현재 대한민국의 인구는 약 51,584,349이고 2017년 2월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51,712,221명 이다.

도시의 인구 순위

교육과 문화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의 교육입니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이 의무교육이다. 고등학교는 3년 과정이며, 일반계(인문계, 자연계)·전문계(실업계)·특수 목적 고등학교(특목고)로 분리되어 있다. 고등교육에는 4~6년제 대학교와 2~3년제 전문대학이 있다.

2005 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교육을 받는 정규학교 재학자는 1089만 명(24.7%), 졸업자는 2987만(67.8%), 중퇴자는 96만 명(2.2%)이고, 졸업자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 졸업자는 750만 명(24.5%), 고등학교 졸업자는 1263만 명 (41.2%), 대학 졸업 이상은 1050만 명(34.3%)을 나타내는데, 이는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높은 교육수준은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기인된 현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현재에는 오히려 학력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청년실업의 증가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대학교 진학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르게 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혹은 고등학교 졸업에 상응하는 학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치를 수 있다. 이 외에도 각 대학에서는 수시입학전형, 특별전형 등을 통하여 개별 대학의 요구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은 사교육 시장이 크게 발달되어있어,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각 가정마다 월평균 70여만원을 웃돌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관점

대한민국에서는 유교 사상과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동성애자 혐오와 공포, 거부감 등이 존재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홍석천, 하리수, 이시연 등의 등장 이전에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따돌림, 학교 폭력에 노출되거나 취업 등에 불이익 등을 받아왔다. 동성애자들은 1992년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 동성애자 단체 초동회가 처음 결성되고 1년 뒤에는 남자 동성애자인 게이, 트랜스젠더 모임인 친구사이와 레즈비언 단체인 끼리끼리로 분리되었다. 1997년에는 대학생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이 결성되고 이듬해 동성애자인권연대로 개편, 회원 자격 및 상담 대상의 범위를 확장했다.

1998년 5월 17일에는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 오세인이 1997년 자신이 게이임을 가족에게 밝혔다가 추방당한 후, 활동하던 단체 사무실에서 자살하였고, 2003년 4월 26일에는 동성애자를 악마, 사탄 등으로 비판하는 개신교계의 공격과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 단어, 음란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한 시인 겸 작가 육우당이 성 소수자 혐오에 반대하며 자살하였다.

2000년 이후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한 홍석천을 시작으로 트랜스젠더인 하리수, 이시연 등의 공개적 활동 등으로 성 소수자들에 대한 맹목적 공포감과 거부감이 사회적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부 단체와 일부 사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성 소수자들의 활동을 지지, 성 소수자 문화제 개최 등의 행사가 본격 등장하였다.

복지

사회 갈등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우파와 좌파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

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갈등은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여론에 기반한 전국적인 규모의 촛불 집회로 종종 표출되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대규모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는 이념 진영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촛불 집회에 대하여 좌파진영은 시민들의 민주 의식 신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 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냈다는 점, 인터넷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에 다가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우파진영은 선동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왜곡과 특정 정파 이해집단의 욕구를 위한 창구로 활용된다는 점을 들어 사회 혼란,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한국의 노사갈등에 대하여 상당수의 국민들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국제경영개발원에 의하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57개국 중 56위로 선정되어 시급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

이념 대립의 연장선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방식에서 국가주도의 사회운영과 성장을 주장하는 국가주의세력과 개인의 자유에 따른 사회운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분배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간 논리의 충돌도 있다. 이는 서방세계와 같은 좌우대립의 이념지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데서 기인한 사회 갈등인데 그 원인으로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반공반북을 중요시하여 좌파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환경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 진영에 의해 만들어진 좌우대립의 이념지형도 1990년대 초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사라져 서방세계와 같은 이념지형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갈등·소통 지수

대한민국의 갈등 지수는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OECD 회원국 중 4위에 해당하였으며, 이 같이 높은 사회 갈등에 따른 비용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7%인 약 300조원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소통 지수는 2011년 아시아포럼21이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 중 이명박 정부의 소통 지수는 45.8점, 한나라당의 소통 지수는 42.6점,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 소통 지수는 36.2점으로 모두 50점 이하인 걸로 나타났다.

사회 지표

  • '삶의 질

삶의 질은 2011년 8월 21일 기획재정부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해 순위를 매긴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39개국 가운데 27위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삶의 질은 지난 2000년과 2008년 모두 27위로 하위권에 머물렀었다.

  • 행복 지수

행복지수는 OECD 평가 국민 행복도에서는 34개 나라 중 26위, 영국 NEF재단의 행복도 조사 결과에서는 68위, 미국 포브스의 행복순위 조사 결과에서는 56위, MBN과 매일경제신문의 국민 행복지수 조사에서는 5점 만점에, 3.4점으로 해외 평가선 낙제점을 겨우 면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11년 3월 ~ 4월 간 조사한 결과 OECD 23개 회원국 중 23위로 최하위에 해당하였다.

  • 이혼율

이혼율은 OECD 국가 중 2000년 8위, 2001년 4위,

  • 자살률
대한민국의 자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전 세계 6위이다.

  • 그 외

사회복지 지출은 34개국 중 33위이나 사회복지 지출 증가율은 34개국 중 4위로 나타났다. 부패지수는 30개국 중 22위(부패지수가 높을 수록 청렴하다.), 공동체 구성원 간 신뢰도는 19개국 중 13위, 법치에 대한 인식은 34개국 중 25위로 나타났다.

심리

인종 차별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유독 심하며, 백인은 차별이 거의 없으나, 흑인 및 황인은 오히려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어를 모르는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경우가 있으며, 유럽 같은 경우에는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경쟁 심리도 심각하다. 대한민국은 어려서 부터 성적, 경쟁 위주의 교육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게 함으로써 경쟁과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에 따라 남과 나를 비교하며 오직 높은 곳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성인이 되어서 학력위주 경쟁, 스펙위주 경쟁, 실적위주 경쟁,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으로 획일화 된다.

SBS와 한국갤럽이 2011년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우리 사회의 경쟁 수준은 평균 76점으로 10년 전보다 20점 가까이 높아져 경쟁이 계속 가속화 됨을 보여주었으며, 국민 10명중 8명이 "과도한 경쟁에 부담을 느낀다"고 대답하여 상당수가 부담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은 모두를 스트레스 속에 놓이게 하며, 장기간 스트레스는 매우 예민해지게 만들고, 분노, 불면증, 우울증 등의 신체·정신적 증상을 동반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담당하는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 치료의 횟수가 늘어나고 있으나, 여전히 언덕위의 하얀집으로 불리는 등 차별의 대상이 되고있어 상당수가 기피하는 실정이다. 또 경쟁은 다수의 패배자를 생산하게되는데, 이는 다수의 자존감 저하와 수치심, 분노심 상승의 원인이 되고있다.

결국 사회 전반의 동질성 추구와 이질성 거부 심리, 경쟁 심리는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외국인 차별, 왕따, 학교 폭력, 인터넷 악플 등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피해로 정신 이상자의 수를 늘리거나, 그런 정신 이상자를 방치하게 되어 자살자를 늘리거나, 사회에 불만을 품고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는 묻지마범죄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고있다.

이에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1년 10월 '대한민국 3, 4차 정부보고서에 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최종 견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학생의 성적에 따른 차별과 경쟁적인 교육체제에 대해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하였다.

대응

학력 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라디오 연설에서 '학력차별 없는 사회'를 강조하였으며, 고용노동부가 고등학교 직업 교육에 지원을 강화하는 등 능력 중심의 열린 고용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백혈병이 생겨 산업 재해로 인정 받는 학생이 나오는 등 고등학교 현장 실습이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2011년 정부에 의해 명칭을 '정신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 변경하는 등 다양한 진료를 하는 분야임을 알리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남녀 심리,치료,범죄 심리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 주제로 사용하거나, 교수가 직접 매체로 나와 강의를 하는 등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과거 대학교의 비인기 학과였던 '심리학과'가 상위 경쟁률을 기록하고, 관련 주제의 책이 대거 출간되고,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여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 중 게임이 29.9%로 가장 높았다. 연령별 연령별로는 30대 미만의 경우 역시 게임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30대 이상 연령층은 영화와 TV 시청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크린 다이제스트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2013년 4.12편으로 미국의 3.88편을 제치고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여가생활에 대한 불만족 이유들로는 ‘시간 부족’ 비율이 45.9% 였고, 그 다음으로는 ‘경제적 부담’이라는 이유가 45.6%로 나타났다.

대외관계

대한민주공화국은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글은 대한민주공화국의 대외 관계를 다룬다.

대한민주공화국은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과는 1905년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러시아(구 소비에트 연방), 중화인민공화국과는 탈냉전 이후에야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4국과의 관계는 지정학적·역사적 중요성을 바탕으로 한국외교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아 왔다. 한국의 독립과 정부 수립, 대한내전,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진 세계적인 냉전 구조의 형성과 와해 과정은 한국과 이들 4국과의 관계에 그대로 투영되어 왔다.

대한민주공화국 정부는 2018년 기준으로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 마케도니아, 시리아, 쿠바 4개국과 외교관계가 없다. 따라서 190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유엔 비회원국인 서사하라, 팔레스타인도 외교 관계가 없는데, 정부는 이들 2개 국가를 승인하지 않는다. 또, 대한민주공화국은 2008년에 독립한 코소보를 승인했으나 아직 외교관계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2011년에 독립한 남수단은 승인과 함께 현재 외교관계가 수립된 상태이며, 2013년 2월에는 쿡 제도와 수교했지만, 니우에와는 아직 수교하지 않았다.

유엔에는 1950년에. 대한민주공화국 정부에서 외무에 관한 업무는 외교부가, 통상에 관한 업무는 산업통상자원부가 관장하고 있다.

한미 관계

이 부분의 본문은 한미 관계입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는 19세기 중반인 1871년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완강히버티자 얼마버티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 뒤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풀고 일본을 비롯한 세계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게되자 미국은 1882년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때 미국은 특사를 파견하여 축하해주기도했다.

1948년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이래로 매우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왔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휴전 이후에도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에 의한 군사적 보호속에서 매우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제5공화국 때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도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서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등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된 이후 한미 관계가 상당히 강화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군사, 외교, 경제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한일 관계

이 부분의 본문은 한일 관계입니다.

양국은 1877년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양국 간에 역사 인식에 대한 갈등이 존재했으나 한일역사공동교과서를 통해 해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범죄를 사죄했다. 2002년에는 양국이 공동주관하여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한류 열풍'이 불어 양국간 교류가 많이 증진되었다. 2017년 군사동맹을 맺었다.

한중 관계

이 부분의 본문은 한중 관계 (1948년), 한중 관계 (1992년)입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 관계가 되었으며, 1992년까지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1992년 공식 수교하면서, 기존의 중화민국과 단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여러 문제가 있는 와중에도 양국은 외교 관계를 이루고 있다. 2016년 주한 미군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THAAD)' 배치 추진으로 인하여 한중 관계과 악화되고 있다.

한러 관계

이 부분의 본문은 한러 관계입니다.

러시아는 구 소비에트 연방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라로,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대한민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탈냉전 이후에 한소수교가 199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와 경제, 문화, 우주기술협력, 군사(불곰사업) 등에서 밀접한 관계를 추진해나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위성인 나로호 발사도 러시아의 협조 하에 발사했다. 현재 12만 5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아에로플로트 등 여러 항공사가 매일 운항하고 있다.

문화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고대의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 등 이웃 나라에서 들어온 외래 문화와 한국 고유의 독자적 문화와 융합하여 발전했다.

언어

관습적인 공용어이자 법적인 공용어는 한국어로, 그 계통이 학계에서 확증되지 않은 고립된 언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알타이어족과 연관성 있음을 주장한 바 있고, 특히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으로 1446년 반포하였다. 한글은 각 자음과 모음이 하나의 기호로 표시되고, 그 자음과 모음을 모아써서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이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하늘:ㆍ),지(땅:ㅡ),인(사람:ㅣ)을 나타내는 각 부호의 조합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창제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써왔던 한자와 이를 당시의 한국인이 쓰던 입말에 맞는 한자의 소리만 따서 문자로 표기한 향찰, 구결, 이두 등이 한국어 기록 수단이었다.

한자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양반층 및 관공서에서 계속 써왔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글의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한글 대신 한자로 직접 표기하기도 한다. 1962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면서 표기문자의 주류로 등장했고, 현재 한자 표기는 중의적 표현을 막기 위해 부수적으로 쓰고 있다.(한글맞춤법 참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의무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교육하는 영어는 미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중학교에서부터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2외국어로는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의 7개 언어가 있다. 고등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를 배울 수 있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때 수험생이 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다. 특히 일본어와 중국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이기도 하다.

언론

대한민주공화국 헌법에 의하면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대한민주공화국의 일간 신문은 크게 전국지와 지방지로 나뉜다. 전국지는 대한민국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되며, 지방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 지면을 할애한다. 지방지는 특정 지역에 연고를 둔 신문으로 전국적인 뉴스를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해당 지역의 뉴스를 다룬다. 전국지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보수적인 신문, 이른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신문 등의 진보적인 신문, 이른바 '한경오'으로 분류되고 있다. 2008년 한국언론재단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시장점유율은 조선일보 11.9%, 중앙일보 9.1%, 동아일보 7.7%, 경향신문 1.7%, 한겨레신문 1.6% 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지들도 있으며, 크게 경제에 관련된 소식을 다루는 경제지와,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스포츠지를 들 수 있다. 한편 주요 도시의 공공시설에서 출근 시간대에 무료로 배포되는 무가지가 존재하며, 인터넷 매체를 통한 인터넷 신문도 존재한다. 2008년 기준 대한민국 일간지의 수는 약 288종, 주간지의 수는 약 2,896종, 월간지의 수는 약 3,293종, 격월간지의 수는 약 459종, 계간지의 수는 약 981종, 년 2회의 수는 약 325종, 인터넷 신문의 수는 약 1,040종 정도가 있다.

방송의 경우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FM라디오 방송, AM라디오 방송, 단파 라디오 방송, 케이블 방송, 디지털위성방송, 지상파 DMB 방송 등이 있다. 현재 전국 단위 지상파 방송으로 국공영 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와 준공영방송인 문화방송(MBC)이 있다. 지역 단위 지상파 민영 방송으로는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MBC)을 중심으로 한 계열과 서울지역의 지역민영방송인 에스비에스(SBS)를 중심으로 한 SBS 네트워크 계열이 있으며, 그외 독자적인 지방 민영방송인 경인지역의 경인TV가 있다. 그외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 따른 공영방송인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이 지상파 방송으로 있다. 종합편성채널 4사로는(JTBC, MBN, 채널A, TV조선)와 보도 채널인 연합뉴스TV와 YTN 등 2개의 보도 채널이 존재하며, 케이블TV 최대 PP사업자인 CJ E&M과 티캐스트도 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인 KBS, MBC, SBS, EBS가 점유하는 주파수와 기타 기독교방송(CBS), 극동방송(FEBC), 불교방송(BBS), 평화방송(PBC), 원음방송(WBS) 등 종교방송의 주파수, 교통안내 전문 방송인 교통방송(서울은 TBS, 기타 지역은 TBN 한국교통방송), 국악 전문의 국악방송, 그리고 국방홍보 목적의 국군방송 등의 여러 방송사가 존재한다.

대한민주공화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이 연결된 나라이며, 세계 최고 속도의 인터넷 속도를 보유하고 있다. 높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인터넷 이용률을 보이는 대한민국은 2000년 초중반 인터넷 신문을 표방한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 신문과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언론 매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인터넷 언론 매체들은 인터넷 매체 특유의 신속성과 높은 접근성 등을 강점으로 대한민주공화국 사회에서 여론 형성에 상당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단순 뉴스 전달자에 불과했던 포털사이트가 하나의 언론세력으로 성장하는 변화를 보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인터넷 신문사, 포털사이트를 언론 기관으로 보고 법적 규제를 마련했다.

종교

음악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전통 민요로는 아리랑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지방마다 다른 민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많은 가수들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권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시장(K-POP)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K-POP가수로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비스트 , 티아라, 인피니트 등이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싸이(박재상)의 '강남스타일(Gangnam Style)'로 세계에 강남스타일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노래는 원더걸스의 Nobody 이후, 미국 빌보드 차트에 2위까지 올랐다.

얼터너티브 록, 헤비 메탈, 록 음악 시장이 크게 성장중이다.

한류

한류(韓流, Korean wave)는 대한민주공화국의 대중문화가 주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외국에서 대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97년 무렵부터, 문화 수출국을 목표로 대한민주공화국의 국의 국책을 배경으로, 2000년 전후부터 대한민주공화국 드라마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방송되었다. 그 후 중화권이나 일본에서도 한국의 대중 문화가 널리 유입되어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문학

한국 문학(韓國文學)은 한국인 또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한국의 사상과 감정, 정서 등의 가치 있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 시대의 표현 방식을 빌려 형상화한 문학의 총칭이다.

한국 문학이 오늘날 문학이라는 낱말 밑에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 이르른 것은 서양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이다. 근대 문학 혹은 현대 문학이라는 시대에 따른 문학사 구분은 바로 서양 문학을 받아들여 한국어로 쓰인 문학 양식의 밑바탕을 닦고 발전시켜온 19세기 말에서 현대에 이르는 약 100여 년간 생겨나 존속되어 온 개념이다.

미술

한국 미술은 약 기원전 7천여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조선 시기에는 제의를 위해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 동경 (거울), 방울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을 위한 예술이 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 백제의 금동대향로, 신라의 금관이 대표적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도자기의 일종인 고려 청자와 먹으로 그리는 문인화가 발달했다. 조선 시대 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을 성리학에 기반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들은 문인화와 백자를 선호하였다. 이들 문화는 다분히 사대주의적이었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원들이 나타나 특색 있는 미술을 만들었다. 동시에 조선시대에는 서민적인 미술인 민화가 발달했다.

그 후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서양 고전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이 도입되었고, 해방 이후 미국, 프랑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유학생들이 현대 미술을 시도하였다. 현대 한국 미술은 서양적 기술과 재료를 바탕으로한 혼합된 서양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서예, 동양화와 같은 전통미술 역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백남준은 독창적인 비디오 아트를 선보여 한국 출신 작가 중 가장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순수미술 분야는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건축, 그래픽디자인, 산업디자인, 게임 같은 상업미술 분야에서는 점차 주목받고 있다.

스포츠

한국의 스포츠는 고대부터 무술에 근거한 체육 활동이 발달했으며, 특히 대한민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기도 하였다. 태권도 이외에도 한국 전통 무술(스포츠)인 궁술(국궁), 택견, 씨름이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참가했다. 또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였으며,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종합 4위를 기록하였다.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강세를 보이는 종목으로는 양궁, 사격, 탁구, 배드민턴, 쇼트트랙, 핸드볼, 유도, 태권도, 역도가 있으며, 최근 20년간 하계 올림픽의 경우 시드니 올림픽을 제외하면 메달 종합 10위 이내의 성적을 올렸다. 특히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은 또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2002년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2018년 동계 올림픽을 평창 일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5위를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세웠다. 종합 1위는 1995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200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차지한 적이 있다.

실제로 즐겨하는 생활스포츠 그리고 국가대표팀 경기와 프로 경기 포함 TV로 가장 즐겨보는 스포츠 등 각종 부분에서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로 선정되고 있으며 축구, 야구, 농구, 배구, e스포츠, 바둑의 6개의 종목이 프로 리그를 갖추고 있다. 프로 리그에서 인기 종목으로는 야구와 축구 등이 꼽히며, 한국의 발전에 밑거름에 이어 근래에는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 축구는 2002년 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며 대회 4위에 오른 적이 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원정 16강에 성공하였으며, 2018년 대회까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에서는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야구는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우승의 경력이 있다.

1990년대 말 게임 및 전자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e스포츠는 2001년 '한국e스포츠협회' 창립 후 선수 관리, 경기 규칙, 대회 방식이 체계화 되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대중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았다.

2004년부터 파트 3 경마국으로 지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의 서러브레드 경주마 생산은 1000여 마리였다. 경기도 과천시, 경상남도 김해시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제주도에 경마공원이 있고 32개의 KRA 플라자(장외 마권 발매소)가 있다.

한편 대한민주공화국이 개최했거나 개최 예정인 스포츠 대회는 다음과 같다.

관련 항목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