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조선국의 핵개발 역사 (푸른 오얏꽃2)

초창기

조선의 핵개발은 태화 23년(1949년) 미국에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오규삼 박사가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오규삼 박사는 이화제국대학 출신으로, 항공 공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이범석의 칙령으로 미국에 보내져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오규삼은 핵무기의 위력을 직접 보았고, 미국에서 어떻게든 대한조선국으로 귀국해 핵무기의 중요성을 알리려 했다. 그리고 미국의 거센 회유를 끝까지 거절한 오규삼은 태화 21년(1947년) 조선 땅을 밟는다. 태화 22년(1948년) 봄 오규삼은 원수부중추원에 핵무기의 중요성을 설득시켰고, 태화 23년 이승만에게 ‘조선원자력물리연구소’의 설립을 인가받으며 오규삼은 연구소장이 되었다. 이후 익문사의 보안 아래 극비리에 핵무기 연구를 시작했다. 태화 26년(1952년) 조선은 설계안을 완성했지만, 우라늄 부족으로 인해 실험에 사용할 시제품 생산을 하지 못했다.

중국의 위협, 핵실험 성공

그러나 태화 28년(1954년) 한중 국경 분쟁[1]으로 조선의 독자 핵무기 개발 의지는 다시 굳혀진다. 당시 조선은 한일전쟁 시기의 군사적 영향이 남아 있어서 건국한 지 얼마 안 된 중공 쪽이 조심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소련이 개입[2]해 조선이 역으로 긴장하게 되면서 공산 세력과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에 조바심이 난 조선은 비슷한 시기 핵 개발을 천명하고 안보리의 제재를 받은 프랑스에 핵무기 공동 개발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계약의 내용은 프랑스가 조선에 비밀리 일부 우라늄을 제공해 준다면 프랑스의 핵 개발을 지지한다는 내용이었지만,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반대로 계약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태화 32년(1958년) 충청도에서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고, 조선은 태화 35년(1961년)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산골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작전 암호명은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조선의 비핵화

조선이 핵실험을 성황리에 끝내자 미국, 소련 등이 반발하며 안보리에서 조선의 전후 복구 사업에 관한 지원을 중단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는 데 급급했던 조선은 급히 핵무기의 해체와 우라늄 폐기를 선언하고 상임이사국과 비핵화협정을 맺었다. 이후 조선은 1990년대까지 걸쳐 모든 핵탄두와 우라늄을 폐기[3]하고 건양 5년(1969년), 미국의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대량 배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미국의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은 건양 13년(1976년), 조선이 자체 개발한 현무 미사일로 대체된다.

  1. 대한제국 시절부터 중국과 간도 일대의 영토 문제로 분쟁을 앓고 있었다. 한중 국경 분쟁 당시, 양국이 국경 지대에 야전군을 배치하며 전쟁 직전까지 상황이 치달았었다.
  2. 중소결렬 5년 전
  3. 1995년에 마지막 핵탄두가 폐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