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의 역사
月本史
파일:월본사 이미지.png

월본 군사정권
月本 軍事政權 | Wubon Junta
국기 국장
1963년 2월 13일 ~ 1974년 9월 30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월본국 월본국
상징
국가 월령천가 (月令天歌)
국화 백일홍
표어 반공자유조국건설 (反共自由組國建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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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정변 | 1963년 2월 13일
강일한 총리 사망 | 1969년 4월 9일
1969년의 봄 | 1969년 4월 10일~5월 22일
도신설 7.17 항쟁 | 1969년 7월 17일
도유 9월 혁명 | 1974년 9월 1일
이도완 총리 사임 | 1974년 9월 30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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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도유수도시
최대도시
면적 365,457km²
내수면 2.8%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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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9600만명 (1963년)
1억 250만명 (1969년)
1억 1000만명 (1974년)
민족 월본인, 한국계 월본인, 중국계 월본인 등
공용어 월본어
공용문자 한글, 한자(정체자), 아카사 가나 문자
종교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
군대 국가군방위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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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군사독재체제, 단원제, 일당우위체제
국가원수 국황
역대 국황 44대 소류 국황 (1963 ~ 1974)
45대 헤이모리 국황 (1974)
행정수반 내각총리대신
역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강일한 (1963 ~ 1969)
2대 이도완 (1969 ~ 1974)
입법부 월본 국회
기타
연호 소류 (蘇流) | 1963.2.13~1974.7.2
헤이모리 (平盛) | 1974.7.2~1974.9.30
통화 월본 원
현재 국가 월본

개요

월본 군사 정권은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월본을 지배한 우익 군사 정부를 일컫는다. "별들의 12년"이라고도 한다. 1963년 2월 13일 아침에 육군의 강일한 소장을 위시로 한 군사세력이 군사 정변을 일으키면서 시작됐으며, 1974년 도유 9월 혁명이 일어난 뒤 9월 30일 종식됐다.

역사

초기 (1963~1969)

1963년 2월 13일 도유를 장악한 쿠데타군

1962년 월본 총선은 사회당 등 좌파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우익 세력은 월본의 좌경화와 보복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자 결국 미국, 서구세력의 묵인과 사주 아래 1963년 2월 13일 강일한 장군이 주도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발렌타인 쿠데타, 임인정변)가 발생했고 군사정권이 시작되어 약 30여년만에 군부내각이 부활하게 된다.

이후 강일한 소장이 총리가 되었고, 군부는 소류 국황(국황사)를 꼭두각시로 내세우며 민주주의 탄압과 국민 감시 등 비민주적 방법을 동원하여 집권을 해나간다. 대표적으로 비밀경찰들을 배치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반공 군사 독재를 강화시킨 일이 있으며,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해외로 추방하거나 고문, 사형을 시키는 등 인권유린을 저지르기도 했다. ​ 강일한 총리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고 통제시키기 위해 경제발전을 국시로 내세웠고, 실제로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월본의 경제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월본의 경제 성장률은 1960년대에 가장 높았으며, 연 10% 성장을 하는 일도 잦았다. 군부독재 기간 동안 월본의 경제는 연평균 8~10%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산업을 다시 부흥시켜 단청권(청하시-단이시)에 현재의 관서임해공업지대를 만들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백한 점은 군부는 민주주의를 크게 탄압하여 후퇴시켰으며, 국민들의 민주적인 선거 요구와 군부 퇴진 요구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독재 행위를 펼쳤다는 것이다.

물론 반발 역시 심했는데 이후 1967년 12월 13일 국황사를 지지하는 왕당파 군인들이 청하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공·해군과 육군일부를 지휘하여 수도 도유수도시로 진격하는 역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하였고 1968년 3월 13일에는 전직 군인이자 저항 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백한민이 강일한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을 구실로 강일한은 폐쇄적이고 강박적으로 변하였고, 의심이 심해졌다. 결국 이후 비밀 경찰에 의한 국민 감시와 검열 등에 의한 언론 통제를 강화했으며,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인이나 시민들을 공산주의자라고 체포해 국외로 추방하거나 태평양 군도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였다.

중기 (1969~1973)

도신설 7.17 항쟁 당시 진압군의 모습

이후 1969년 4월 강일한 총리가 병사하였고 그로 인해 월본에서는 민주화 열기가 생겼으나(1969년의 봄) 그의 후계자였던 이도완이 최고권력자 지위를 물려받으며 국민들의 민주화 기대와는 다르게 군사정권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도신설 지역에서 군부를 반대하는 7.17 항쟁이 발생하게 된다. 자세히는 1969년 7월 도신설군에서 반군부 시위가 일어나자 군부가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는데, 시민들과 일부 경찰, 군인들이 이에 맞서 시민군을 조직하여 대항한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강경하게 진압하여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였고 도신설군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후 1969년 7월 기부사대학교도유대학교, 경당대학교, 선화대학교의 학생회가 주도하여 대학생 13만명이 군부내각의 7.17 항쟁 무력진압을 규탄하며 도유수도시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항쟁시위를 벌였다. 이는 신설지역에만 국한되었던 7.17 항쟁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해당 시위에서 기부사대학교 경영학과 학생 조창도 열사는 기부사 대의선언이라는 군부 타도 선언문을 낭독하게 되는데, 선언문이 발표된 직후 조창도 열사는 선언문 낭독 3시간 이후 체포되어 즉결 총살당한다. 격앙된 기부사대학교를 비롯한 도유 5대학의 학생회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나 시가를 행진하며 도유도청을 점거하였다. 당시 도유시장 신세웅은 격앙된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도청에서 학생들과 협상하던 중 군부가 다시 난입해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는 등 신세웅 역시 군부에 가담했다는 낭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신세웅은 이 일로 돌팔매질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으나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다. 당시는 소류 국황이 시위의 양상이 점점 잔혹해짐에 직접 군부를 비판하는 교지를 하달함으로서 무력 진압은 8월 초 즈음 완전히 중단되었으나,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고 고문하는 등의 비겁한 공작은 1971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1971년 3월에 군부가 다시 무력 진압을 감행하였는데 대신 이번에는 민주화 운동가 학생들을 사고사로 포장시킨 의문사가 줄을 이었으며, 당시 고문에 피해를 입은 학생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 살아남아 71년 3월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화 요구들을 무력 진압한 이도완 총리는 언론검열을 넘어 언론사와 결탁해서 사실상의 선전기관으로 변질시키고 민주화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함으로서 독재권력을 공고히 했고 그럼으로 수반되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각종 노력을 해왔다. 이도완은 억압정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각종 규제를 풀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 하였으며,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1978년 도유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다. 이렇게 군부는 경제개발과 반공을 내세워 집권을 이어가는데, 1960년대 초부터 추진된 경제성장 계획으로 연평균 8~10%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게 되며 1963~1974년에는 초고도경제성장을 이뤄내었다.

말기 (1973~1974)

도유 9월 혁명

그러나 그 이후 오일 쇼크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뒤 군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민주화의 바람이 불게 되며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점차 싹트기 시작하였다. 1973년 11월 17일 도유과학기술대학교에서 이도완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항쟁을 일으켜서 군사 독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기부사대학교, 도유대학교, 선화대학교, 경당대학교 등의 대학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9월 1일, 500여명의 학생권 운동가들을 따라 도유 시민들이 합류해 50만명이 운집하게 되는 도유 9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도유 9월 혁명은 타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청하시, 북양주, 산원부, 도본특별행정구, 서번시, 수정시 등 월본의 전역으로 번져 국민들이 군부정권의 종식을 촉구하게 되었다. 특히 보수의 성지라고 불리던 서월 지역에서도 군부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반군부 감정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군부와 이도완은 끝끝내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시위대를 탄압하고 붙잡았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군부의 하야를 외쳤다. 군부는 점진적으로 개혁을 한다는 교섭안을 제안했으나 국민들은 교섭안 대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였으며, 시위가 거세지며 전세계가 주목하고 국황사까지도 정치 불간섭 원칙을 깨고 개입하여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게 된다.

1974년 새로 즉위한 뒤 도유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군부의 추악한 사주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고 대노한 헤이모리 국황은 군부의 주요인사를 기피인물로 지정하고 교지에서 괘씸하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확인사살 즉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불경죄를 즉결으로 처분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군부 대부분이 스스로 직을 내려놓고 사임하였다. 이후 결국 외국과 국황사의 압력까지 받게 된 군부는 하야하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1974년 9월 30일 이도완 총리도 정식으로 사임하면서 12년에 걸친 군부 정권은 종식되었고, 1974년 11월 민주적인 총선거가 다시 열려 월본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게 된다.

정치

명목상으로는 국황사가 국가 최고원수이자 군주로서 우대받았으나, 실질적으로는 군부와 군인들이 권력을 독점했었다. 또한 군부는 중선거구제를 통해 군부 정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선거 제도를 만들어 의회 역시 장악하였다. 당시의 국황이던 소류 국황은 군부의 꼭두각시였으며, 군부에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 이후 1967년 12월 13일 국황사를 지지하는 왕당파 군인들이 청하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공·해군과 육군일부를 지휘하여 수도 도유수도시로 진격하는 역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금세 진압당하여 그나마 있던 왕당파 군부세력마저 소멸되어 국황사는 완전한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린다.

하지만 이후 1974년 즉위한 젊은 국황이던 헤이모리 국황은 반군부 성향이였으며, 도유 9월 혁명이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군부에게 물러나라는 명령을 하였다. 즉 군부가 권력을 독점한 것은 맞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권력이였지 국황사의 역사적 및 범국민적 권위를 손상시키거나 거역할수는 없었던 것이였다.

평가

월본 현대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대 중 하나이자 생전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가장 극심하게 엇갈리는 시대이기도 하다. 경제가 크게 발전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하지만 민주주의가 크게 탄압받은 시대였다는 평가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지금의 현대 월본을 만든 시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여담

이 시기의 월본이 어떤 느낌인지는 박승운 감독의 영화 <Why?>에 나온다. 독재시기 월본을 배경으로 군사정권이 유력 야당정치인을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져 이것을 추적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