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ΒΑΣΙΛΕΙΑ ΤΩΝ ΡΩΜΑΙΩΝ IMPERIVM ROMANV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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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
황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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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국기 | 국장 | |||||||||||||||||||||||||||||||||||||||||||||
국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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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ασιλεύς Βασιλέων,
Βασιλεύων Βασιλευόντων | ||||||||||||||||||||||||||||||||||||||||||||||
국가 | 없음(공식) 콘스탄티노스의 행진(관습적) | |||||||||||||||||||||||||||||||||||||||||||||
국조 | 자주색 바탕의 황금색 쌍두 독수리 | |||||||||||||||||||||||||||||||||||||||||||||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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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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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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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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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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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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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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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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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코드 | ||||||||||||||||||||||||||||||||||||||||||||||
ROM, RM, 300 | ||||||||||||||||||||||||||||||||||||||||||||||
전화 코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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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바실레아 로마이온[*],(라틴어: Imperium Romanum 임페리움 로마눔[*]은 발칸 반도 남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에 위치한 로마식 군주정 국가이다. 유럽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로마 제국이 395년 분할된 이후 콘스탄티누폴리스, 혹은 (라틴어: Nova Roma 노바 로마[*]를 수도로 한 동방의 제국을 일컫기도 한다. 서부 유럽의 교황을 위시한 가톨릭 국가들은 과거 노바 로마의 이름이었던 비잔티움(그리스어: Βυζάντιον 뷔잔티온, 비잔티온[*], 라틴어: Byzantium 비잔티움[*])으로 하여금 서유럽 중심의 역사 사관을 위해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국은 서쪽으로 불가리아를,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접하고 있다.
제국의 정치체제는 옛 로마 공화정의 공화주의적 면모와 6세기 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이후 발전한 황제의 전제정이 절충된 로마적 군주제에 기반하고 있다.
역사
- 자세한 부분은 로마 제국/역사를 살펴보십시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서거 직후 로마 제국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분리되었으며, 두 형제는 각각 서방 황제, 동방 황제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두 제국을 물려받았다. 4세기 이래 제정의 권위와 부를 독점하였던 동방 제위는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물려받았다. 아르카디우스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제국은 무너져가는 서방의 제국을 뒤로 하고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그의 이름을 딴 삼중성벽을 건설하는 등 다시 한번 제국의 강건성세를 약속할 수 있었으며, 6세기경의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제국은 전 왕조 황제들의 공헌으로 하여금, 충분한 재정을 활용하여 유럽과 소아시아, 서 아라비아 일대와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강대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방 재정복 활동 당시 제국의 부는 과도하게 소비되었으며, 당대 발병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인해 백여년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대제의 붕어 후 100년도 되지 않아 그가 정복한 영토는 거의 소실됐다. 이로써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야망은 사실상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정복을 위해 소비된 부는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나 신흥 강자인 이슬람 제국의 침략같은 연이은 혼란으로 인해 회복되지 못하면서 제국의 국운은 기울어갔지만, 7세기의 황제 이라클리오스[2]가 약화된 제국에 맞는 효율적 행정체계를 개편하고 국력의 약화를 막아 제국은 유지될 수 있었으며 그가 만든 새 체계의 근본적인 부분 역시 현재까지 어느정도 이어온다.
11세기에 이르러 제국은 마케돈 왕조의 정복활동에 힘입어 제국은 7세기 이후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지만 제국 내의 연이은 내란과 셀주크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한때 제국은 아나톨리아 전역에서의 지배력을 잃었지만,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중후반까지 군림한 콤니노스 왕조와 13-15세기의 앙겔로스 왕조 때 튀르크 부족들에 유화적인 외교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친로마 성향의 부족의 수장들을 국경의 군사 요직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이들과 함께 모든 튀르크 귀족들을 제국에 복속시킨 뒤 로마인으로 동화시킴으로써, 점진적으로 아나톨리아 전역을 수복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콤니노스 왕조와 앙겔로스 왕조의 중간기, 1204년에는 서방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제국이 멸망당할 뻔 하였으나 콤니노스 왕조 말대에 구축한 군사적 효율과 앙겔로스 왕조의 노력, 소아시아와 주변 도시에 있던 로마 함대의 지원으로 공성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5세기의 끝을 장식한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콤니노스 왕조가 시행하였던 족벌화 정책을 해소하고 강한 황제권과 로마의 공화주의적 전통이 공존하는 체제를 형성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잦은 재난과 말대 황제의 중대한 실책으로 인해 성립 68년만에 붕괴했다. 15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까지 군림한 마크렘볼리티스 왕조는 다시금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군림하였던 한 세기 반 동안 서유럽에 대한 의존을 대폭 감소시켰으며 아나톨리아 재복속과 함께 더 커진 영토를 위한 적합한 행정 및 경제 개혁(테마 제도 복구[3] 및 정치적 근대화와 신대륙 탐험[4])을 완성하여 제국의 위엄을 11세기 중후반의 "만지케르트 전투" 이전으로 되돌렸다. 또한 콤니노스 왕조의 족벌정책을 완전히 해소하여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미완되었던 목표를 달성했다. 근세 제국의 군사령관과 원로원의원, 아나톨리콘의 세습 통치자가 여럿 배출되었던 명문가, 마브로예니스 왕조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와 마크렘볼리티스 왕조의 황제들이 시행한 족벌화 해소 정책의 성과를 이어 받아 11세기 중후반 두카스 왕조 이후 처음으로 콤니노스 왕조의 피가 섞이지 않은 첫 왕조가 되었다. 1765년에는 마브로예니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앙겔로스 왕조 중기부터 그리스 지역의 토주와 둑스 출신의 귀족가문 카라카시스의 수장 요안니스가 후임 황제로 선포되었다. 카라카시스 왕조의 황통은 현재에까지 이어오며, 現 로마 황가 역시 카라카시스다.
행정구역
로마 제국의 행정구역은 최상위 광역지방으로 관구, 이하 지방자치단체로 주를 두고 있다.
관구
관구(διοίκησις)는 테마들과 에파르히아(속주)[5]의 후신으로, 1837년 설치되어 현재 25개의 관구에 이른다. 관구의 장인 에파르호스(ἔξαρχος)는 지방에서의 황제 대리인으로 명목상 민정을 통솔하지만 전통적인 지방의 결합을 대표하고 황제의 권위를 대표할 뿐 지방에 대한 행정 실권은 없다.
주
주 또는 지방(περιφέρειες)은 1822년 제헌헌법에서 규정된 지방들의 자치 행정체로, 명목상으로는 관구 밑의 행정구역이지만 사실상 독립되어 있다. 역시 주지사(περιφερειάρχης)가 지방 행정부를 통솔한다. 주지사는 각 주민들이 5년마다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하며, 페리페리아 내에는 수도의 원로원과 평민회와 분리된 페리페리아 의회(περιφερειακό)가 입법을 관할한다.
정치
바실레프스(Βασιλεύς)라 불리우는 로마 황제는 제국의 국가 원수로, 제국민과 군대, 원로원의 지지가 동반된 전제 하에 제국을 통치할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일 뿐인데 그 이유는 6세기에 재위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전차 경주에서 비롯된 청색당과 녹색당이 둘로 나뉘어 정치세력화하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청색당을 지지하자 녹색당의 가속화된 불만으로 인해 경주가 끝나자 폭동이 일어났고, 황제는 그들을 철저히 탄압하였으며 이 사건을 니카 반란 혹은 니카 폭동이라 부른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6세기 니카 반란을 통하여 황제의 불가침적인 전제권을 확립하였고 후대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전제권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공화적 전통의 산실인 로마에서 시민, 원로원, 군대의 권위가 사라지지는 않아 명목상의 권위는 여전히 남았고, 이후에도 로마를 상징하는 그 자체로 남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원로원이 재부흥하여 19세기 즈음에는 영국과 유사한 입헌 의회로 변모하기 시작하였고, 1822년 제헌 헌법 제정 이후에는 사실상의 입헌군주정 정치 형태가 되었다. 현대 원로원은 중세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황제에 대한 보편적인 우호와 동의를 주요 기준으로 유지하고 있고, 황제 역시 원로원을 존중해주고 있다.
로마군 역시 로마 제국의 정치에서 뺄 수 없는 주요 상징이다.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 로마군은 황제도 폐위시키고 군인 황제도 여럿 나온 만큼 막강한 정치적 기관이었다. 일례로 1059년부터 1067년까지 재위한 두카스 왕조의 콘스탄티노스 10세는 파플라고니아의 유력한 군사 귀족이었으며, 그가 황제가 될 시점에서 로마군은 그의 손 아래에 있었다. 또한 두카스 왕조 이래 로마노스 4세와 니키포로스 3세 등의 황제는 모두 군인 황제였고, 앙겔로스 왕조 초기 아우구스타를 여럿 배출한 명문가인 바타치스와 라스카리스 가문 역시 제국군 총사령관을 여럿 배출하였다. 그러나 팔레올로고스 왕조 이래 황제들이 로마군에 대한 전격적인 견제에 들어감에 따라 로마군은 다른 유럽국들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군주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여전히 로마 제국의 원로원과 로마군은 고대 말에서 중근세 시대에 정립된 정치적 질서에 따라 황제의 산하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적 기관으로 유지되고 있다.
로마 제국의 원로원은 옛 이탈리아에 있었던 로마 원로원(Senatus)와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현존하는 원로원(Σύγκλητος)이 있는데 이 문서에서는 후자를 다룬다. 제국 분할 직후 서방 제국의 본토에 있었던 로마 원로원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당하면서 점차 그 실권과 형태를 잃어 갔다. 비록 동방에 건재하던 동로마 제국과 교류를 하거나 축전을 보내는 등의 사료가 남아 있으나 단지 그 뿐이며 그마저도 몇세기 못가 603년 포카스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문서를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보낸 이후 기록이 끊겼다. 630년에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구 원로원 건물(쿠리아 율리아)을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이미 이 시대에 로마 원로원은 소멸했다. 1145년에 시민들의 코뮌 산하 조직으로 추인받았다고는 하나 로마 제국에서는 이미 7세기 초중반에 로마 시의 원로원이 불가역적으로 소멸했다고 판단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원로원은 현재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현대의 원로원은 두 개의 의회로 나뉘어 운영되는데, 이는 '원로원'과 '상원'이다. 이러한 이원화 체제는 11세기 콘스탄티노스 9세 황제의 개혁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대중의 의견을 더욱 폭넓게 수렴하고 원로원의 기능을 개선하고자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전통적인 원로원은 특정 품계 이상의 인물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반면, 새로 설립된 상원은 이러한 제한이 없었다. 상원에서는 황제가 지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13세기 앙겔로스 왕조 이후,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니케아 제국의 라스카리스 왕조는 니케아에서도 원로원 제도를 유지했다. 이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시작된 원로원 전통이 제국의 변천과 혼란 가운데서도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와 초기 암피클리토스 왕조를 기점으로 원로원의 문호가 크게 확대되었다. 니케아 원로원 구성원들과 도시 귀족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대거 이주하면서, 불과 사반세기 만에 원로원의 규모가 11세기 중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로마 행정원
경제
사회
제국의 역사적 사회는 고대(Αρχαίος), 즉 A.D.27년부터 A.D.395년 제국 분할까지, 그리고 동서분할사후(Μετά το διαχωριστικό Ανατολής-Δύσης), A.D.395년부터 A.D.476년까지, 그리고 중세(Μεσαίωνας), A.D.476년부터 A.D.1204년, 회복(Ανακτήσεις), A.D.1204년부터 A.D.1489년, 불안정(Ασταθής), A.D.1489년부터 A.D.1497년, 준근세(ένας ημιμοντέρνος), A.D.1497년~A.D.1688년, 마지막 혼란(Τελικά μπερδέματα), A.D.1688년부터 A.D.1694년, 근세(Ημιμοντέρνος), A.D.1694년부터 A.D.1803년, 현대(Μοντέρνοι), A.D.1803년부터 현재까지 내려온다.
800년경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에게 대관받아 서로마의 참칭 황제로 등극하였을 때 유럽은 두명의 황제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교황의 독단에 즉각 반발한 로마 제국은 "서쪽의 비정통 황제 참칭 왕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황제의 칭호에 "로마인의 황제"를 붙였고, 11세기경에는 "및 전제자"를 추가하여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1806년에 허울뿐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역대 황제들은 다시 공통의 하나가 된(기존에도 로마 제국 황제는 신성 로마를 로마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로마 제위의 주인으로써 제호를 원래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던 고대 제국의 전통에 걸맞게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천 년간 이 칭호를 사용하였기에 제국 내의 반발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
교육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고등 교육 기관인 판디다크테리온(Πανδιδακτήριον)이 자리하고 있다. 마그나우라 궁정 대학으로도 알려진 이 콘스탄티누폴리스 대학교는 425년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창립한 동명의 기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설립 당시 판디다크테리온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법 각 10개, 법학 2개, 철학 1개, 수사학은 그리스어 5개와 라틴어 3개 등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이 학문의 전당에서는 법학, 철학, 수사학, 의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망라하는 폭넓은 학문을 가르치는 39명의 석학들이 교편을 잡고 있었다. 더불어 언어 교육에도 힘을 쏟아, 라틴어 교수 13명과 그리스어 교수 15명이 별도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교육은 당대 로마 최고의 지성들을 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9세기경 판디다크테리온 내에 마그나우라 스콜레가 설립되었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노미케 스콜레(법학)와 필로소피케 스콜레(철학) 등의 케팔라이아이 스콜라이(중심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의 각 단과대학으로 이어진다. 여러 혼란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던 판디다크테리온을 바실레프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가 개혁하여 1046년경 재개교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형태의 노미케 스콜레(법학부)와 필로소피케 스콜레(철학부)를 부설하였다.
역대 로마 황제 일람
- ↑ Politeia tōn Rhōmaíōn(그리스어)
- ↑ Ἡράκλειος, Φλάβιος Ἡράκλειος Αὔγουστος. 그의 치세 도중에 제국의 공식 국어가 모두 그리스어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에 라틴어로는 에라클리우스 (Flavius Heraclius Augustus)라고도 부른다.
- ↑ 이 때 도입된 것이 현재까지 제국의 기본적 행정구역으로 기능하고 있는 신 테마 (Νέος Θέμα)이다.
- ↑ 원로원의 영향력 증대, 카리브해 식민지 신설
- ↑ 1504년에 테마 및 프로니아를 철폐한 후 대체하여 제정한 제국의 행정구역 제도. 1822년까지 황제가 파견하는 속주 지사에 의해 실질적으로 운영되었으나 제헌헌법에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