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

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내용은 산티아나 공식 설정입니다.
이 문서는 리반이 작성한 가공 국가인 산티아나와 관련된 공식 설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편집을 시도하시면 반달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꼭 수정여부를 설정자에게 물어봐주십시오. 다만 오류 및 오타 교정은 반달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
Louis Vázquez De Sanguinetti
말년의 모습
말년의 모습
산티아나제2대 국가의장
임기 1844년 2월 5일~1857년 10월 11일
신상정보
출생일 1788년 3월 5일
출생지 스페인 (동음이의) 스페인 시스살레라테
사망일 1857년 10월 11일
사망지 산티아나 베아시운
정당 리베라 당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스페인어: Louis Vázquez De Sanguinetti)는 산티아나의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의 뒤를 이어 국가의장직을 역임하였다. 우루과이-산티아나 독립 전쟁(Cisplatine-Ciscalerate War) 당시에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를 따라서 독립 의용병들을 이끌고 사란디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일생

스페인시스살레라테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페르난도 대학교(Universidad de Fernando)에서 기초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법률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뒤, 애국 연대(Patriot Solidarity)에서 활동하면서 스페인브라질 제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목표로 하던 독립 연맹(de la Independencia)의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를 비롯한 주요 독립 혁명가들과의 만남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역시 군주주의를 지지하게 되면서 리베라 당(王政黨)에 가입하기도 했다.

우루과이-산티아나 독립 전쟁에서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의 지휘 아래 약 150명에 달하는 의용병들을 이끌고 사란디 전투에서 브라질 제국군을 몰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산티아나 독립 이후에는 니콜라스 안토니오 히로(Nicolás Antonio Hiro)와 함께 산티아나 독립 수훈자로서 선정되기도 했다. 법률학 학위를 취득한 인물인 만큼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를 도와 초안 헌법을 작성하는데 큰 도움과 조언을 주기도 했다. 또, 리베라 당에서도 온건 노선을 걷던 인물로서 시스에르타 당(聯邦黨)과의 충돌을 조율하던 역할을 행하기도 했다.

1844년에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국가의장의 직책이 공석이 되자, 과도 위원회에 따라 후임 국가의장으로서 추대되었다. 온건 노선을 채택했던 인물로서 대충돌(Estupendo Conflicto)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이념적 대립을 최소화 하는 한편, 위원회의 구성 인원들의 평등 분배를 추구했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대중들의 시선은 과도 공화정에 대해 싸늘해져 갔으며, "하루 빨리 연방 공화정을 받아들여 공식적인 독립국을 수립할 것"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면직물 산업의 발전을 꾀하여 작물 생산 및 재배를 장려하였다.[1]

1857년, 국가의장직을 수행하던 중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쓰러짐에 따라 운명을 달리하였다. 후임 국가의장은 시스에르타 당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가 선출되었으나, 1년만에 헤르티가스 쿠데타 모의 사건으로 인하여 대대적인 문책을 받고 사임하면서 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가 4대 국가의장에 선출된다.

각주

  1. 브라질이 지나친 커피 재배 및 생산에 의존으로 인하여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겪은 것과는 달리 막시밀리아노 1세 즉위 이후에는 육류 산업의 발전을 꾀하였고, 경공업 및 중공업 발전을 통해 남미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전임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
산티아나의 국가의장
1844년 2월 5일 ~ 1857년 10월 11일
후임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

산티아나의 국가의장
Jefe de Estado de San Tiana
과도 공화정 시기
1대 2대 3대 4대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 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
막시밀리아노 1세 시대 총리
Período Maximiliano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