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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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kje

軍旗군기
滅亡멸망以前이전 復興부흥以後이후
百濟백제 後百濟후백제

槪要(개요)

百濟(백제)復興運動(부흥운동)660年滅亡(멸망)百濟(백제)(다시)復興(부흥)시키려했던運動(운동)으로、朝鮮(아사달)古代史(고대사)()에서比重(비중)있게(다루)어지는部分(부분)이다。

背景(배경)

皇山原戰鬪(황산벌전투)에서新羅軍(신라군)()하자唐軍(당군)新羅(신라)와의約條(약조)()고、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中心(중심)으로5都督府(도독부)百濟(백제)設置(설치)하며、百濟地域(백제지역)唐國(당나라)羈縻州(기미주)製乙(만들)고자하였다。이로()羅唐聯合(나당연합)()졌고、이는復興軍(부흥군)에게有利(유리)하게作用(작용)했다。

展開(전개)

百濟復興運動의始作(백제부흥운동의시작)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정무 등이 새벌성 인근의 산성에서 농성하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도 주변 지역의 백제부흥군은 신라무열왕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서면서 정리되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신라의 무열왕은 일부의 병력을 남겨두고 쇠벌(경주)로 돌아갔으며, 얼마 후 당군이 5도독부를 설치하며 새벌과 곰나루(공주) 인근을 당나라의 영향권에 두게 되었다.

唐軍(당군)占領地域(점령지역)()에서掠奪(약탈)虐殺(학살)같은蠻行(만행)犯乙(저질)렀는데、겨우脫出(탈출)難民(난민)들의所聞(소문)(퍼지)게된게蜂起(봉기)直接的(직접적)原因(원인)으로推定(추정)된다。이런所聞(소문)百濟遺民(백제유민)들이團結(단결)契機(계기)가 되었으며 각지의 농민들의 민병 활동으로 이어졌다。一便(한편)百濟(백제)地方軍(지방군)如前(여전)健在(건재)하였는데、地方軍(지방군)을 중심으로 각지의 民兵(민병)들이 모이면서 어느정도 규모가 갖춰진 百濟復興軍(백제부흥군)(이루)었다。이()鬼室福信(귀실복신)道琛(도침)扶餘自信(부여자신)正武(정무)()人物(인물)들이 백제부흥운동의 中心(중심)이되었다。군의 체계가 정비되고 규모가 커진 百濟復興軍(백제부흥군)은 10日만에無慮(무려)()200()奪還(탈환)하는氣焰(기염)()여주었다。또、당나라의 영향력이 부족했던 백제 영토의 남부 지역을 확고히 한 이후에는 百濟(백제)首都(수도)였던東原城(새벌(사비)성)包圍(포위)하였다。연개소문이 통치하던 高麗(고려)또한大江(한강)以北(이북)地方(지방)에서新羅軍(신라군)唐軍(당군)攻擊(공격)했고、이런狀況(상황)復興軍(부흥군)에게有利(유리)하게 작용하였다。

進廣帝의歸還(진광제(부여풍)의귀환)

鬼室福信(귀실복신)道琛(도침)當時(당시)()()進廣帝(진광제(부여풍))百濟(백제)()로운()으로擁立(옹립)하여正統性(정통성)確保(확보)하고자했고、倭王(왜왕)要請(요청)()해、마침내661年9月、進廣帝(진광제(부여풍))倭國(왜국)將帥(장수)들、그리고倭軍(왜군)()5,000의兵力(병력)(함께)百濟(백제)歸國(귀국)한다。以後(이후)復興運動(부흥운동)(하나)國家(국가)로서의體制(체제)(갖추)고、勢力(세력)擴張(확장)()갔다。

危機와再整備(위기와재정비)

그러나都邑(도읍)()하는過程(과정)에서부터鬼室福信(귀실복신)道琛(도침)과의葛藤(갈등)으로內紛(내분)發生(발생)하였고、道琛(도침)處刑(처형)당했다。게다가1年만에()整備(정비)新羅(신라)攻擊(공격)하였고、只今(지금)大田(한밭(대전))地域(지역)(빼앗)겼다。一便(한편)駐屯(주둔)中이던唐軍(당군)新羅軍(신라군)이661年12月부터662年1月까지(이루)어진平壤城戰鬪(평양성전투)에서大敗(대패)하면서、이()狙仒(노려)()아있는唐軍(당군)(모두)包圍殲滅(포위섬멸)했다。또、進廣帝(진광제(부여풍))金馬(금마(익산))遷都(천도)하며(다시)一番(한번)安定(안정)(이루)었다。

東進(동진)

662년10月、3()倭軍(왜군)追加派兵(추가파병)되었다。663年1月에는王子(왕자)一名(한명)新羅(신라)와의戰鬪(전투)途中(도중)戰死(전사)했다。이에激怒(격노)進廣帝(진광제)直接(직접)5()大軍(대군)(이끌)金原(쇠벌(경주))()했다。

管山城戰鬪(관산성전투)

 仔細자세內容내용663년 관산성 전투 文書문서參考참고하십시오。

金原戰鬪(쇠벌(경주)전투)

 仔細자세內容내용쇠벌 전투 文書문서參考참고하십시오。

結果(결과)

663年陰歷(음력)5月8日、新羅(신라)結局(결국)滅亡(멸망)했다。結果的(결과적)으로百濟(백제)는668年滅亡(멸망)高麗(고려(고구려))까지包含(포함)統一國家(통일국가)成仒(이뤄)냈으며、新羅(신라)滅亡(멸망)以後(이후)百濟(백제)普通(보통)後百濟(후백제)라고()한다。一便(한편)新羅(신라)末代(말대)()法敏王(법민왕(문무왕))은671年金原(쇠벌(경주))에서死亡(사망)했으며、그의屍身(시신)火葬(화장)되어東海上(동해상)()(바위)播仒(뿌려)졌다。

같이見기(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