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령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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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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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식민지
필리핀 뉴기니 사할린[1] 팔라우[2]
현 식민지
피지 태평양 제도
1. 1949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하여 살합림현으로 내지에 편입.
2. 1970년 자치법 개정으로 부여령 태평양 제도에서 분리. 이후 1982년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
부여의 식민지
부여령 필리핀
扶餘領 比律賓 | Philippines under Korean rule
깃발 정부 문장
1898년 ~ 196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필리핀 도독부 필리핀 제1공화국
역사 • 황제직할령 필리핀 성립 1898년
• 필리핀 자치령 성립 1947년
• 독립, 해체 1968년
면적 343,448km2
수도 마닐라
인구 27,194,500명 (1963년)
인구밀도 79.18명/km2
민족 구성 필리핀계 79.8%[1], 부여계 10.5%, 화교 4.6%, 스페인계 2.4%, 기타 2.7%(1963년)
황제 신종 (1898~1914)
영종 (1914~1920)
세종 (1920~1968)
주요 총독 신형진 (제3대, 1904~1919)
김홍열 (제6대, 1930~1933)
박헌주 (제7대, 1933~1944)
김재준 (제12대, 1967~1968)
주요 총리 마누엘 케손 (초대, 1898~1904)
호세 라우렐 (제4대, 1937~1944)
라몬 막사이사이 (제6대, 1948~1956)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제10대, 1964~1968)
위치

개요

1898년부터 1968년까지 약 70년간 필리핀에 위치했던 부여의 식민지이다.

부여 식민제국이 거느리던 식민지중에서도 가장 그 규모가 거대하였다.

역사

여반전쟁과 부여령 필리핀의 성립

제1차 세계 대전

필리핀 자치령 시절

식민지 저항운동과 독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인도, 베트남 등 필리핀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이 속속 식민 열강으로부터 독립하자, 필리핀 내에서도 독립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던 와중에 1959년, 필리핀 주둔 부여황제군이 필리핀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필리핀 내에서 반여(反餘) 정서는 극대화된다. 결국 1960년 5월, 마닐라 등 필리핀 내 주요 도시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5.21 독립항쟁이 일어났다. 독립항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부여 내에서도 전세계적인 탈식민지화 기류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1964년 자치 의회 선거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이끄는 독립파 정당인 필리핀 인민당이 민선 의석 50석중 32석을 차지하며 승리를 거둬[2] 원내 다수당이 되었고 마르코스는 의회 투표를 통해 자치령 총리로 임명되었다. 결국 이런 추세에 부여 중앙 정부 역시 굴복해, 1966년 1월 2일 세종 황제가 필리핀 내의 주민투표를 통한 점진적 독립을 허가하였다.

부여령 필리핀 자치령 독립 주민투표
실시일: 1966년 8월 13일~8월 14일
입장 득표수 득표율 결과
찬성 11,840,584 60.27% 가결
반대 7,805,316 39.73% 부결
투표인 수 20,749,404 투표율
95.33%
총 투표 수 19,780,406
무효표 수 134,506

그렇게 치뤄진 1966년 독립 투표에서 찬성이 반대를 400만여표차로 눌러 필리핀의 독립이 허가되었다. 부여 정부는 필리핀에 독립준비위원회 기구를 설치하여 1968년 독립할때까지 행정권을 이양하였으며, 그렇게 1968년 12월 31일 부여령 필리핀은 필리핀 제1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여 해체되게 된다.

사회

사회 고위층은 부여인으로, 중산층들은 화교들과 스페인계로, 그리고 하류층은 주로 필리핀인들로 이뤄져있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이후 기존의 경제적인 질서가 필리핀 내에서는 많이 무너졌고, 귀족층이 아닌 평민층에서는 민족에 따른 계급 구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필리핀인들 중에서도 귀족 작위를 받을정도로 돈을 많이 번 기업인들이 다수 있었으며, 이들은 1968년 필리핀의 독립 이후 필리핀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재벌 기업인들이 되었다.

물론 부여의 전제군주적인 독재 정권은 부여인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였다. 필리핀으로 이주해온 부여인들은 주로 조선계와 일본계, 그리고 대만계 본도인들이 대다수였다. 반면 만주계 부여인들은 기후와 문화가 극명히 다르다는 이유로 이주를 꺼렸다.

일본계 부여인들이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한때는 일본 독립운동의 핵심 지역으로 꼽히기도 했다.

문화

부여의 문화는 스페인, 부여 그리고 필리핀 고유의 문화가 모두 합쳐진 독특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화교들의 문화까지 더해져, 부여령 필리핀은 아시아 다문화의 장으로 불렸다.

필리핀은 부여의 영향을 받아 아직까지 부여의 문화가 사회의 이곳 저곳에 남아있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식문화가 그러한데 부여의 음식인 냉면은 변형된 형태로[3] 현지에서도 즐기는 음식이 되어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부여의 영향으로 필리핀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강압적인 군사, 귀족 문화는 필리핀의 사회적 병폐로 꼽히기도 한다.

비율빈국 논의

세종 황제는 치세 말기, 전공을 세운 귀족중 한명을 필리핀의 왕작으로 임명하고 비율빈국이라는 책봉국을 만들어 필리핀을 영구히 자국의 영토로 귀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필리핀 내부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반발 여론이 일어났고 결국 1954년 세종 황제는 비율빈국 구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일단 동북아시아의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비율빈국의 책봉왕 문제도 있었는데, 비교적 한지인데다가 가헌초의 업적이 명백하여 가씨 가문이 세습 왕작이 되는 것에 거의 반대가 없었던 북이국의 성립과는 달리, 필리핀은 정치, 경제, 안보적으로 모두 부여에게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누가 세습 왕이 될지에 대하여 추밀원 내부에서 큰 세력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예 세종 황제는 비율빈을 책봉국이 아닌, 자신의 직할지로 하려고도 하였지만 이는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을 방불케한다며 추밀원 내부에서도 반발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문제들로 인하여 비율빈국은 성립될 수 없었고, 필리핀은 알려진대로 1960년대 후반 여러 투쟁을 통해 독립하게 된다.

평가

2019년 7월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필리핀인들의 49.8%는 부여의 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32.3%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7.9%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거의 같다고 응답했다. 연령대별로 청년층들은 긍정 77.2%, 부정 5.3%로 긍정이 압도적이었으며, 중장년층의 경우 56.3% 대 21.1%로 역시 긍정이 앞섰다. 반면 노년층에서는 19.5%대 57.4%로 부정적인 여론이 더 높았다.

긍정적 평가

부여가 필리핀을 지배하면서 좋든 나쁘든 필리핀의 경제가 근대화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부여의 지배 기간동안 근대적인 자치 의회 제도가 자리잡기도 하였고, 부여가 남기고 간 경제 기반 시설들은 필리핀이 독립한 이후 경제 발전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을 불허하며 전쟁까지 벌인 프랑스, 네덜란드에 비해 부여는 민주적인 정차로 필리핀을 독립시켜주었기 때문에, 부여 당국의 만행을 직접 겪어본 노년층이 아니라면 필리핀인들은 현재 부여의 필리핀 지배 시기를 억압적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경제가 발전되었던 나름의 황금기로 인식하고 있다.

게다가 독립 이후 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독재자로 돌변하여 1980년대까지 장기집권한 역사도 있기 때문에 마르코스를 싫어하는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부여에 대한 긍정 여론이 더 높은 편이다.

최근에는 필리핀의 장기화되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청년층들 사이에서 부여로 돌아가야한다는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당연히 반대하고 있으나, 부여 정부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국민 여론도 약 재합병 찬성 35.3%대 반대 62.1%로 생각만큼 부정적이지는 않다.

부정적 평가

대중매체에서

여담

  1. 비사야족 29.4%, 타갈로그족 26.8%, 일로카족 7.6%, 비콜라노족 5.0%, 모로족 3.3%, 기타 7.7%
  2. 최대 반독립파 정당인 총의당은 11석에 그쳤다. 관선 의석 35석중 총의당의 몫으로 배정된 20석을 합쳐도 31석으로 인민당에 1석 밀렸다.
  3. 메밀이 주 재료가 되는 부여의 냉면과 달리 필리핀의 냉면은 현지에서 많이 나는 재료인 쌀과 밀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