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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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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부여의 소수민족 독립 운동을 다루는 문서.

부여조선을 중심으로 대만, 일본, 만주 등의 지역을 정벌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배 계층이 몰려있는 조선 반도를 제외한 다른 국가는 크든 작든 소수민족 독립 운동이 있어왔다. 다만 합법적인 단체들은 횡빈사태이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몰락하였고, 100여년에 달하는 부여의 지배를 당하다보니 원주민들도 대부분 동화되어 현재는

각 지역별 상황

일본

부여 내에서 가장 독립 운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가 거의 천여년에 달하는데다가, 문화와 언어, 풍습 등이 부여 본토와는 매우 달라서 1910년대 이후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일본 내의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자, 일본 내에서는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된 형태의 민족주의 운동이 부상했다. 특히나 일본 내에서 가장 개발이 뒤쳐져있고 소작농의 비율이 80%가 넘어가던 도호쿠(동북)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가장 치열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도호쿠 농민공쟁회의와 같은 소작농 민권 조직이 일본 독립 사상을 받아들여 열렬히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호쿠 농민공쟁회의는 4.30 선태 집단 항쟁 사건 이후, 부여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무너졌다. 농공회의 붕괴 이후인 1940~50년대부터의 일본 독립 운동은 중도파 일본해방전선, 좌파 일본 공산당, 우파 대일본제국 임시정부로 대표된다. 우선 일본 임시정부는 192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1940년대 농공회를 비롯한 각 지역의 유지들, 그리고 우익 성향의 군인들을 받아들이면서 대대적으로 성장하였다. 공산당은 그 외의 소작농 조직들을 대부분 흡수했고 해방전선은 이 두 조직을 이어주는 일종의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였다.

이 세 조직은 정치적인 문제로 서로 반목을 겪으면서도, 반황실 친독립 노선에 있어서 힘을 합치며 힘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일본 내의 야당들, 민주화 운동 세력과도 결합하면서 그 힘은 1980년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세 단체가 사활을 걸고 참여한 횡빈사태가 황제군의 대학살극으로 끝나면서 일본의 민족주의 운동도 위축되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일본 내에서 자치권을 보장받자는 자치파와 투쟁을 계속하자는 항전파가 나뉘었다. 자치파는 일본 내에 남아서 자민당, 동아사회당 등의 야권으로 흡수된다.

만주

만주 지역의 경우 그 역사가 일본과 맞먹음에도 불구하고, 부여 정부에서 만주 지역의 청나라 황실을 지배 계층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일본에 비하여 항전을 외치는 과격한 독립론자들의 수가 매우 적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은 소련과 국경을 맞댄 최전방인데다가, 인구도 많아 부여 정부에서 1920년대부터 집중적인 경공업, 중공업 산업 투자와 대대적인 철도 공사를 해줬기 때문에 내부 여론도 황실에 긍정적이었다.

따라서 만주 지역 내에서의 소수민족 운동은 만주의 고유 문자와 문화를 보존하자는 비교적 온건한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 황실이 자연스럽게 부여의 지배 계층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만주의 소수민족 운동은 부여에 온건한 정도가 아니라 지배 체제를 긍정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 이후 더더욱 강화되어, 지금은 거의 소수민족 운동이라고 볼만한 것이 없는 상태이다. 부여 정부에서 만주 문자와 만주어, 티베트불교 등 만주의 고유한 요소들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다가 더이상 만주족을 소수민족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부여 민족이 사회 지배 계층 곳곳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대만

유구

일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이 꽤나 활발한 지역.

한화계 민권 운동

부여의 만주 지역 및 대만 지역에는 한화계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은 거의 2등 국민 취급을 당하면서 소외되어있었다. 게다가 제1차 중국 내전, 제2차 중국 내전에 휘말린 중국 본토에서는 부여 내의 한화계 주민들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1930년대 이후 부여 내 한화계들은 조국에 기댈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리를 찾자는 화계 자주자치운동을 벌이게 되고, 한화계 최대의 민권 조직인 중화민권동맹이 세워진다.

한화계중 급진적인 일부는 중소공이나 중국 정부로 망명을 하였기 때문에, 만주의 민권 운동과 마찬가지로 한화계 민권 운동은 비교적 온건한 자치권 운동으로 이어졌다. 물론 부여 정부에서는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한화계에게 제한되었던 몇가지 권리들을 보장하고 시민권 역시 보장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그럼에도 아직도 다수의 한화계들이 부여 내에서 차별을 당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여전히 화계 민권 운동은 소수민족의 민권 운동 내에서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다. 공안정보청에서는 이들이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정도로 화계 민권 운동을 제한하고 있다.

식민지 독립 운동

부여령 필리핀, 부여령 태평양 제도, 부여령 뉴기니 등지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한 편이었고, 이중 뉴기니 섬은 실제로 전쟁까지 겪으며 독립을 쟁취했다. 이에 대해서는 부여 식민제국 문서를 참조.

관련 조직

일본해방전선

대일본제국 임시정부

도호쿠 농민공쟁회의

대만 민주진보당

사회대중운동

중화민권동맹

소수민족동맹

이름과는 달리 제정당부여 황실어용 단체이다.

여담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