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의 황자 문조 ~ 숭영제 |
[ 펼치기 · 접기 ]
|
대한국 광종의 황자 석읍공 | 石邑公 | ||||
---|---|---|---|---|
출생 | 1877년 2월 11일 | |||
한성부 창경궁 | ||||
사망 | 1915년 8월 9일 (향년 38세) | |||
경기도 양주군 은화의원 | ||||
능묘 | 석읍소도공묘(石邑昭悼公墓)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대한국의 황족.
생애
초년기
저는 능력과 심성이 부족하고 형님이 네 분이나 계십니다. 제가 무얼할 수 있겠습니까?
조현병 발병
살인과 사망
승평왕의 조현병이 점점 악화되던 와중 결국 1908년 2월 3일 집에서 여성 사용인 김희정(金喜貞, 1888~1908)을 살해하고 만다. 다른 사용인이 현장을 목격하고 신고하였고 출동한 경관이 승평왕을 구인했다. 사건 닷새 후 부황 광종 열황제는 승평왕을 석읍공으로 강등하고 황족 특혜를 박탈했다. 한 달 후 한성재판소에서 재판이 개시되었고 9월 책임능력이 인정되지 않아 치료감호 판결이 내려졌다. 이는 한국 최초의 치료감호 판결 사례로 남았다.
판결 직후 양주에 위치한 은화의원에 입원해 조현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부인 장씨가 간호했다. 그러나 석읍공은 입원 7년만인 1915년 폐결핵으로 훙했다. 묘소는 양주군 진접읍에 마련됐다.
1922년 세조 무황제는 석읍공에게 소도공(昭悼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독남 이준우에게 석읍왕 봉작을 내리고 황족 특혜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석읍공 본인이 왕작으로 복원되지는 못했다. 사실 세조 황제는 석읍공에 대한 안타까움을 공공연하게 표했다. 젊은 시절 자신의 치기로 인한 행동 때문에 태자 지위가 흔들렸고, 그로인해 궁중 권력투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석읍공의 섬세한 성격은 이러한 권력투쟁과 어울리지 않았고 끝내 정신질환과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