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현재의 후소 열도 지역에 인류 자체가 도달한 것은 늦어도 8만년 전 경으로 추정되지만, 현생 인류가 도달한 것은 4만년 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후소 열도는 대륙과는 얕고 좁은 바다로 이어져 있었는데, 인류의 이동이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 것인지는 현재의 고고학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 다만 대형 포유 동물의 화석이 증가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은 이러한 동물을 쫓아 후소 열도 지역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가장 오래된 유물로서 확실히 인정받은 것은 약 4만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석기로, 내려쳐 깬 돌의 조각(박편)을 손질한 박편 석기나 나이프형 석기 등이 있다. 이것들은 동식물을 가공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유럽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이러한 석기는 구석기 후기의 유물이다. 그러나 8만년 전의 유물로 추정되는 것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후소 열도에 최초로 도달한 것은 현생 인류가 아니게 되는 셈이다.

이 시기에서 주목할 만한 유물로는 국부 마제 석부(局部磨製石斧)가 있다. 이 유물은 홋카이도에서 큐슈까지 후소 열도 전역에서 고루 발견되는 것으로, 돌을 어느정도 깨서 모양을 갖춘 후에 한쪽 좁은 끝의 일부분만 갈아 만든 것이다. 그 형태나 흔적으로 보아 나무로 만든 자루와 연결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벌채나 목재가공, 대형 동물의 해체 등의 설이 있지만, 농경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새로운 의견이다. 다만 한랭한 기후와 온란한 기후가 수십년 단위로 반복되었던 이 시기에는 한 곳에 정착하여 완전한 농경 생활을 이루는 것은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3만년 전을 전후로 하여 이 도구의 사용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이 역시 기후 변동이 격화됨에 따라 사람들이 식물을 관리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주로 일정한 영역 내를 이동하며 수렵/채집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드물게는 석기가 제작되거나 석기를 이용한 생활이 이루어진 장소를 주위에 일정 기간 거주했는데, 이러한 장소를 블록이라고 칭한다. 이 시기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블록들은 환상의 형태로 모여 블록군(群)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환형의 유적들 한 가운데의 공간에는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약한 소재로 간단하게 만들어진 시설이 수 기에서 수십 기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시설 안에서 사람들은 개인, 혹은 가족 단위의 생활을 영위했다. 다만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정주했다고 부를 수 있을만큼 오랜 시간 한 장소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환형 블록군의 형태로 생활하며 흔적을 남긴 것은 대형 동물을 사냥하고 해체하거나 모종의 중요한 행사 혹은 의식을 치룰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러한 유적의 출토 예가 적다는 것은 여전히 수렵/채집 생활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에는 동일한 종류의, 동일한 기능을 하는 석기가 지방별로 여러 형태로 나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석기의 형태와 그 제작법이 복잡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략적인 형태적 특징을 기준으로 도호쿠~츄부 북부, 칸토, 긴키~세토나이, 큐슈의 네 가지 부류로 석기들을 나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형태와 제작 기술의 발달은 소집단간의 교류와 지식의 축적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 역시 크게 이 네 가지 권역 내에서 각각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변화는 기후의 한랭화에 의하여 동물 자원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동물의 사냥과 가공을 보다 쉽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도구를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2만년 전부터 1만 7,8천년 사이의 기간에는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대형 동물들이 사라져가고, 이에 따라 주요한 동물 자원은 대형 동물에서 사슴, 멧돼지, 토끼 등의 작고 개체 수가 많은 동물로 바뀌어갔다. 이 때 석기의 변화의 특징으로는, 츄부, 칸토, 그리고 도호쿠에 이르는 첨두기(尖頭器)의 등장과 후소 열도의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나이프형 석기의 소형화 및 소멸이 있다. 이것은 드물어진 대형 동물을 확실히 사냥함과 동시에 주요 사냥 대상의 소형화에 대응하기 위한 변화이다. 이러한 첨두기는 목재와 연결해서 창의 형태로 사용하는 일이 많았으며, 후기 구석기 시대의 후반에 이르게 되면 운반 효율의 향상을 위하여 완제품이나 반쯤 완성된 형태로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일이 잦아진다.

후기 구석기 시대 후반에도 상술한 바와 같이 생활의 특징을 블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블록이 환형군을 이루는 일이 드물어진 것으로 보아 비교적 대규모의 집단이 모여 일시적으로라도 한 곳에서 생활을 하는 일이 적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대형 동물의 감소와 그에 따른 노동력 결집에 대한 필요성의 감소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주지 유적만으로는 사람들이 얼마나 정착 생활을 했는지 혹은 장기간에 걸친 장거리의 이동 생활을 하며 살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석재의 출처 등을 바탕으로 하여 정보를 알아내려는 연구가 상당히 이루어졌지만, 자료가 부족한 탓에 통일된 결론이 도출되지는 못했다.

다만, 1만 7,8천년 전에 이르면 최소한의 석재와 도구로 가능한 많은 도구를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후의 온난화로 인해 계절의 변화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빈번하게 거주지를 옮기는 형태의 생활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면서 생활의 기동성과 유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경향과 기술은 유라시아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나아가, 오카야마 현의 유적에서 발굴된 도호쿠 이북에서 유래한 것으로 밝혀진 세공 기술로 만들어진 석기가 도호쿠 지방의 석재를 재료로 삼았다는 점에서 당 시기의 후소 열도의 사람들은 장기간, 원거리의 이동 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조몬 시대

조몬 시대(縄文時代)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이 시기의 것으로 밝혀진 토기들이 새끼줄 무늬, 즉 승문(縄文)을 가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토기는 채집한 식물의 보관이나 조리를 위하여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몬 시대에는 단순히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의 토기만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을 한 조몬 토우 (縄文 土偶)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모양이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대에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하여 후소 열도가 대륙과 완전히 분리되었고, 후소 열도는 네 개의 큰 섬으로 나누어졌으며, 해안선이 길어지고 내륙이었던 지역까지 바다가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로 활동이 증가하였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유적은 패총(貝塚)이다. 이러한 패총에서는 세계 다른 국가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뼈와 석기 등이 함께 발견되어 단순한 자연의 유적이 아닌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증명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5~6명 안팎의 소규모 가족 단위 생활을 했는데, 수혈 주거(竪穴住居)방식이 널리 보급되었다. 위와 같은 조몬 시대의 문화와 생활 방식은 후소 열도에서 고루 보이는 것이다. 또 후소 열도가 대륙과 고립되면서 점점 후소 열도만의 독특한 신석기 문화가 발달해갔다.

야요이 시대

보편적으로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약 600여 년 간을 야요이 시대(弥生 時代)라고 부르는데, 야요이라는 명칭은 최초로 이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를 나누는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논농사, 도구의 변화 (철기와 청동기의 도입), 환호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도입된 것은 후소 지역 내에서 일어난 자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조몬 시대 후기에 일어난 지구 규모의 기후 변화로 인한 인구 이동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주로 한반도, 특히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해류를 타고 큐슈 지방으로 건너온 농경민 집단에 의해 일본 사회에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실 조몬 시대에도 후소 열도에서 쌀이나 콩류가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화전 방식으로 작물이 경작되었던 것에서 탈피하여 점점 논농사 방식이 확산되어 갔는데, 논농사는 화전과 달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집단과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사적 흐름과 동일하게 강력한 지도자가 탄생하기도 했다. 지배집단은 과시적인 무덤을 짓거나 청동기 등을 사용함으로써 위세를 드러냈다.

나아가 집단 의식이 확산되면서 자신의 집단을 위해 헌신하되 타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보편적인 사고관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이전의 전체적으로 둥근 무기와 달리 끝과 옆에 날이 서있는 무기가 발굴되는 점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또한 이러한 살상 무기를 가진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마을 주변에 환호를 파기도 했는데,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에서 복원된 마을의 모습에서도 주변에 빙 둘러진 환호를 볼 수 있다.

고훈 시대

고훈 시대 (古墳 時代)는 보통 3세기 중반부터 7세기까지를 가리키는 말로, 이러한 명칭이 붙은 이유는 각지에 전방후원분이라는 거대한 고분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중앙의 야마토 정권이 고대 중앙 집권 정권으로 성장해가는 시기였으며, 도호쿠 지방에서 큐슈 지방까지 전방후원분이 고루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각지의 호족들이 이러한 무덤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에는 외부와의 교류가 돋보이는데,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에 전란이 잇따르자 백제와 신라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각종 기술과 선진 문화가 전해졌는데 이 유민들을 도래인(渡来人)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 사회에서 강력한 권력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시대부터 백제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교류했으며, 5세기에는 야마토 오왕(倭五王)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자와 유교가 전래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일본 내의 변화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의 극히 적은 내용을 제외하고는 신뢰할만한 자료가 없으며, 이 시기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일본서기의 신뢰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고 있다. 다만 야마토 정권이 일본 내의 여러 호족이나 유력 씨족이 오오키미(大王)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성립된 일본 최초의 통일 왕권 조직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아스카-하쿠호 시대

아스카-하쿠호 시대 (飛鳥-白鳳時代)는 보편적으로 6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걸친 시기를 이르는 말이며, 아스카 문화와 하쿠호 문화가 번성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명칭이 붙여졌다. 6세기 말에 조선 반도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어 불교 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시기에 불교 문화와 함께 전래된 한자 발음을 오음(吳音)이라고 한다. 현재도 불경이나 불교 용어를 읽을 때에는 이 시기의 한자 발음이 사용되고 있다.

아스카-하쿠호 시대 초반에는 도래인 계열의 씨족이었던 소가 씨가 다른 씨족들을 제압하고 정치적인 실세가 되었으며, 황실의 외척으로서 그 권위를 떨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유명한 황족으로는 쇼토쿠 태자가 있는데, 쇼토쿠 태자는 백제로부터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불교를 후원했으며, 12게의 관위를 제정하고 십칠조헌법을 만드는 등 고대 후소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가 씨의 세력은 645년 을사의 변을 거쳐 나카노오에 황태자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이후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덴지 천황으로 즉위하고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 관한 조칙을 발표했다.

646년에 이루어진 다이카 개신은 율령체제와 문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개혁조치로, 공지공민제, 국군제, 반전수수법, 조용조 세제 등의 도입을 골자로 한다. 그 외에도 관위 제도를 개정하거나 신분을 가리지 않는 예법이 제정되는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으로부터 전래된 관료제와 유교적 사회 제도를 수용하여 일본식으로 변형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지고 단시간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7세기 중후반부터 8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일련의 개혁적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학계의 주류이다.

이후 덴지 천황의 후계를 둘러싸고 672년에 임신의 난이 벌어졌으며, 이를 통해 덴무 천황이 즉위했다. 덴무 천황의 후계자인 지토 천황을 합쳐 덴무-지토조라고 부를 정도로 덴무 천황과 지토 천황의 치세는 후소의 사회, 역사, 그리고 문화의 원형이 만들진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움직임은 덴무 천황의 통치 방향을 계승하여 완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천황'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것이 덴무 천황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 이 시기는 겐무 신정 이전까지의 시기에서 천황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라 시대

나라 시대(奈良時代)는 제 43대 겐메이 천황이 710년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한 때부터 794년에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기에 조정은 율령체제를 바탕으로 한 전제적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며 고대 국가로서의 모습을 대부분 완성했다. 또한 후지와라 가문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견당사와 견신라사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크게 유행한 문화를 '당풍 문화'라고 한다. 헤이조쿄 역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하여 건설한 계획 도시로, 공무원과 그 가족이 거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당과 서역의 문화 요소와 불교 문화가 후소의 고유 문화와 융합하여 형성된 문화를 덴표 문화라고 하는데, 그 배경에는 국가의 부가 집중되며 황족과 귀족의 부가 급격하게 증대된 시대 상황이 있다. 때문에 덴표 문화는 귀족적이고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또한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 등의 사서와 문학 서적이 발간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호쿠 지방의 아이누 민족(에미시)과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었으며, 귀족 세력의 발전과 사원 및 신사 세력의 발달로 인해 황권이 위협받는 일이 잦았다. 간무 천황인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천도를 추진하여, 헤이안쿄를 건설하여 794년에 천도하였고 헤이안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平安 時代)는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로 천도한 794년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된 1185년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간무 천황은 나라 시대의 정치적 불안과 잦은 내분을 일소하고 황권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헤이안쿄로 천도하였으나, 헤이안쿄로 천도한 이후 귀족과 승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황권은 약화되었다. 또한 후지와라씨는 부패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또한 후지와라씨의 독단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생활고로 도적이 된 백성들이 치안을 불안정하게 하는 등, 헤이안 시대 말기로 가면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전반을 안정시켜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이들이 무사 계급이다.

나라 시대의 중앙집권적 율령 정치를 계승한 것은 헤이안 시대 전기 뿐이었다. 율령제의 핵심 기반인 공지공민제는 이미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장원제가 확산되었고 토지 지배 체제도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지방의 유력자에게 토지에 대한 권한 전반을 위임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국사(國司)가 이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렇게 지방분권적 경향이 확대되면서 중앙 정부의 부담이 줄어들고 정치는 안정되었지만, 후지와라씨가 실권을 장악하고 고위직을 세습하면서 섭관정치(摂関政治)를 펼쳤다.

이후 11세기 후반에 이르면 태상천황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무를 돌보는 원정(院政)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황가가 어느 정도의 권력을 회복하지만, 이들은 대규모의 장원을 소유하였으며 혈연 관계로 엮인 후지와라씨와 유착하여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국사가 징세권을 행사하는 공령(公領)과 특정 가문이 독점적으로 징세권을 행사하는 장원(荘園)이 분리되며 장원공령제로 불리는 토지 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반란이나 불안정한 치안,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무사 씨족이나 하급 무사들이 자주 동원되었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하게 상승하게 된다. 나아가 토지 소유자인 지방의 무사들과 지방의 권력을 쥐게 된 무사 씨족이 유착하여 초보적인 봉건 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르고, 이러한 지방의 토지 소유자들은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또한 국사들 역시 이들과 엮어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며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1세기 말, 고산조 천황에 의한 일련의 개혁 조치에 의해 위와 같은 폐단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으나, 그의 손자인 토바 상황은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고 장원을 확대하는 데 집착하여 이를 무위로 돌렸고, 사회의 불안과 지방 분권화를 촉진시켰다. 이에 동반하여 황실의 권위과 약화되고 중앙 정부가 정당성을 잃어갔는데, 상황은 무사들에게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불만을 억누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타이라 씨는 최초의 무가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시기 타이라 일족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 사후에 미나모토 씨가 반기를 들었고, 이들 사이의 싸움에서 미나모토 씨가 승리했다. 그리고 미나토모노 요리토모가 무가 정권을 수립하면서 헤이안 시대가 막을 내리고 가마쿠라 막부가 열리게 된다.

이 시기에는 견당사의 파견이 중지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당풍 문화와는 다른 문화가 발전하는데 이것을 국풍(国風) 문화라고 부른다. 이는 비단 정치와 관복과 같은 공적 영역 뿐만 아니라 생활과 관련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모노노케(物怪)나 음양도와 같은 미신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불교가 융성하여 대사원이 건립되었고 이들은 장원을 소유하고 자체적인 군사력으로 승병을 보유하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마쿠라노소시(枕草子)와 같은 수필 문학이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같은 모노가타리(物語) 문학이 발달하여 유행하였고, 귀족들은 31자 내외의 단가인 와카(和歌)를 지어 불렀다. 9세기에는 와카를 수집하여 기록한 서적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중세-근세

신성 후소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와 근세는 가마쿠라에 막부가 설립된 시기로부터 메이지 신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기간이라고 여기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인 의견이다. 세분화하여 에도로 천도한 이후의 시기를 따로 근세로 구분하기도 한다.

가마쿠라 막부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타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이 무사 가문으로 쌍벽을 이루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1159년에 일어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 의해 미나모토 가문의 수장이었던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처형당하며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위시로 한 타이라 가문이 최고의 권세를 가진 가문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타이라 가문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아있었다. 1177년에 발생한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이나 1180년에 일어난 왕자 모치히토의 난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시기가 되면, 미나모토 가문은 여전히 타이라 가문에 비해서는 열세에 있었지만 충분히 세를 회복하여 타이라 가문에 반기를 들게 된다. 미나모토 가문은 모치히토 왕자의 봉기에 동참하여 군세를 일으켜 본격적으로 타이라 가문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양 가문의 성씨를 따서, 이 전쟁을 겐페이갓센(源平合戦)이라고 부른다. 1183년에 이르면,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간토 지방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한편 타이라 씨를 몰살시키기에 이른다. 이 때 삼종의 신기 역시 수몰될 뻔 했으나, 기적적으로 수몰만은 면하였다. 이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던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기에 이른다.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조정은 여전히 조정 소속의 장원에 대해서 확실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한편 가마쿠라 막부 역시 슈고와 지토를 통하여 막부 소속의 쿠니와 무사들에 대해서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이원적인 지배 체제는 죠쿄의 난 이후에 막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며 막을 내리게 된다. 죠쿄의 난으로 교토의 조정이 실권을 잃게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미나모토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었던 호죠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고 싯켄 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미나모토 가문은 실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내부의 권력 투쟁과 원나라의 침입 등이 원인이 되어 멸망하기에 이른다.

겐무 신정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가 약화되어가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헤이안 시대의 천황 중심 국가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1324년과 1331년에 난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당했고, 자신은 오키 섬으로 유폐되고 말았다. 그러나 곧 반막부세력은 고다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규합했으며, 1333년에는 그를 오키 섬에서 탈출시켜 거병하기에 이른다. 막부는 이를 진압하고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파견하였으나 그 역시 막부를 배신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서게 되었다.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등의 연합군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와 호죠 씨 세력은 멸망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가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일련의 개혁 조치를 취하는데, 이 개혁 조치들을 묶어 겐무 신정이라고 부른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막부・관백・인세이・섭정의 폐지, 구 군국령의 회복, 사원 토지 몰수, 오판 재심령 등의 발효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무사들이 기존에 가졌던 토지 소유권을 일단 무효로 하고 조정의 인정을 받아야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으며, 조정의 행정력이 무사들의 쇄도하는 소유권 인정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이 이외에도 무츠 쇼군부(陸奥将軍府)와 가마쿠라 쇼군부(鎌倉将軍府)의 성립을 통한 도호쿠 지방에 대한 지배권 확립 노력, 새로운 토지 조사의 실시, 지폐와 화폐 발행 계획 등이 있었다.

겐무 신정의 위기

그러나 급격한 계획에 따른 혼란과 겐무 신정 참여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 차이, 가마쿠라 막부 잔당 세력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신정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우선 가마쿠라 막부를 없애는 데 큰 공을 세운 모리요시 친왕과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서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반목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경우, 호죠 씨의 영지를 받고 동생인 타다요시가 가마쿠라 쇼군이 되었고, 모리요시 친왕의 경우에는 군사적 시위 끝에 정이대장군 직을 얻었다. 모리요시 친왕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이것이 실패하고 오히려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죄를 쓰고 가마쿠라에 유폐된다.

또,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시나노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키타죠 씨의 잔당 세력이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乱) 등이 있다. 나카센다이의 난에서는 가마쿠라가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가마쿠라가 점령당한 혼란의 와중에 모리요시 친왕이 살해당한다. 한편,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정이대장군 겸 총추포사(総追捕使)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경계하여 요구를 거절하고 나리요시 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결국 고다이고 천황의 칙령 없이 반군과의 싸움에 나서게 되고, 조정으로부터 뒤늦게 정동장군의 직책을 받게 된다.

이후 다카우지는 성공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였지만, 고다이고 천황의 귀경 명령을 거부한 채로 가마쿠라에서 천황의 칙령이 없이 논공행상을 실시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카우지는 당시 교토의 경비를 담당하던 무사소(武者所)의 장관이자 천황 측의 무사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장인 닛타 요시사다를 간신으로 몰아 제거할 것을 천황에게 요청한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오히려 요시사다로 하여금 다카우지를 공격하여 토벌할 것을 명하게 되고, 북쪽에서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이 이에 응하여 일부 세력이 가마쿠라로 남하하기에 이른다.

다카우지는 군사를 보내어 이들 세력과 맞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기에 이르고 결국에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결국 다카우지는 교토 조정에 맞서서 공식적으로 반기를 들기에 이른다.

다카우지의 패배

이후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군을 격파한 다카우지는 그 기세를 몰아 교토를 점령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의 공격에 의해 다카우지는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그는 다시금 교토를 점령하기 위하여 교토에 보다 가까운 셋츠에 진을 치는데, 요시타다와 아키이에 등이 이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다. 이들은 테지마가와라(豊島河原) 지역에서 맞붙었는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군이 다카우지 군을 격파하고 다카우지 군은 패주하게 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하리마의 아카마츠 노리무라, 히젠의 쇼니 요리히사 등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규슈의 많은 슈고들은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서 있었고, 키쿠치 타케토시 등이 이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후 요리히사는 영토를 빼앗기고 자살하였으며, 다카우지는 타케토시가 이끄는 군대와 타타라하마(多々良浜)에서 맞서게 된다. 이 때, 타케토시의 휘하에는 약 2만여 기, 다카우지의 휘하에는 약 2천여 기의 군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상세한 숫자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다카우지가 몹시 불리했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카우지는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 가운데 몇몇 무장이 타케토시를 배신하여 다카우지 군에 합류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다카우지가 싸움에서 패배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할복 자살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교토 시대

근대

현대

~1949년

아가냐 조약

헐 노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미국 국무부의 비공식적 제안은 제국 정부 내에서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제안의 내용이 후소 제국에 극히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제안은 조건 없이 부중전쟁 이전으로 국경선을 회복시키는 것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제안의 내용이 몹시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제국 정부는 이를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았고, 어전회의에서 이를 논의하게 되었다. 회의록에 따르면 군은 쇼와 천황에게 무례하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격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외무성을 비롯한 민간 정부 측에서는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국 쇼와 천황이 제안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측을 강력하게 지지함에 따라 결국 1942년 미합중국의 괌에서 양국의 공동 제안 형식을 취하여 제 1차 괌 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이 조약은 괌의 아가냐 지역에서 서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가냐 조약이라는 별칭으로도 부른다.

제 1차 괌 조약의 체결은 후소 제국 국내에서 강한 반발과 논란을 촉발했으며, 나아가 정국의 불안을 가져오게 된다. 육군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이미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진행중인 상태였고, 특히 그 주축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군국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통제파였던 만큼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육군은 조약 체결 직후 고노에 후미마로를 압박하여 그의 내각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2차 고노에 내각 붕괴 이후, 쇼와 천황은 폭주 직전인 육군을 제어하기 위해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군부의 압박에 의해 이전 내각의 육군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를 다시 육군대신으로 기용하였다. 도조는 부중전쟁 승리 이후에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후소 육군은 전면적인 전투 행위를 멈추었으나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여전히 점령지를 유지한 상태로 철수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한편 제국 정부 역시

6구의 변

제 1차 괌 조약의 체결은 후소 제국이 미국 등과의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을 피하게 해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방면에서 전투가 중단되고 모든 병력이 철수함에 따라 전시 경제 체제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으며, 이는 급격하게 이루어진 군축, 자원의 부족 등과 맞물려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 때문에 만주와 조선, 타이완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여전했으며, 특히 조선과 타이완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커지며 이후 타이호쿠 항쟁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혼란과 더불어 미국에게 굴복했다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사회 전반에 만연했으며, 군부 세력, 특히 육군은 여전히 큰 불만을 가지고 민간 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쇼와 천황과 황가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섬에 따라

1946년 12월 9일, 이리자키 타카시로 대좌를 지도자로 하는 반란 세력이 4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치요다 구를 비롯한 도쿄 내 6개 구의 주요 지점에 병력을 전개하였는데, 이를 6구의 변이라고 부른다. 또 주모자인 이리자키 대좌의 이름을 따 이리자키 반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후소 황군이 미처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 중의원과 대장성을 비롯한 일부 국가 주요 시설과 대로를 점거하고 제 1차 괌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였으나, 천황이 직접 나서 이들을 역적으로 규정하자 기세가 크게 꺾이게 되었다. 결국 황거 수비대와 본토 각지의 부대가 소탕 작전을 펼쳐 반란 개시 13일 만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리자키 대좌를 비롯한 좌관급 주모자 10여 명은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1950년 12월 30일에 모두 처형되었다.

쇼와 유신

결국 1947년 10월 28일에 쇼와 천황과 내각총리대신 사쿠라자카 타케히토의 주도 하에 신성 후소 제국 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시무슈 조약

제 1차 괌 조약의 영향으로 정국 불안과 경제난이 계속해서 이어짐에 따라, 후소 제국은 1949년에 시무슈 조약을 통하여 그다지 큰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던 사할린 남부(카라후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당시 남사할린에 거주하던 후소 국적자 중 대다수가 조약의 내용에 의하여 후소 영내로 추방당하였다. 이 조약의 결과로 후소 제국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각종 자원을 제공받게 되었고, 카라후토청이 폐지되며 치시마 열도는 치시마 현으로 재편되었다.

1950~1968년

타이호쿠 항쟁

결국 1956년에 타이완 독립 민주시민회와 그 지도자인 리쉬치엔(李世权, 리세권, リ•セゴン)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 시민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를 타이호쿠 항쟁이라고 부른다. 신성 후소 제국 내에서는 8월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다.

타이호쿠 항쟁은 1956년 8월 6일에 시작되었다. 8월 6일 오전 8시 경, 미리

타이호쿠 항쟁에는 30만여 명에 달하는 시민이 참가했는데, 메이지 거리 사건에서 육군 병력이 비무장 시민들을 대상으로 발포함에 따라 시위가 격화되었고, 시민들은 자위적 조직을 구성하는 한편 시내 일부를 점령하며 무장 항쟁에 나섰다.

제 2차 괌 조약
블라디보스토크 사건

국경 분쟁은 점점 확대되어 만주국군과 만주 주둔 후소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코앞까지 진격하기에 이르고, 일시적으로 후퇴하였던 소련군 역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가 핵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던 후소, 소련, 미국 정부는

1969~

부산 조약

부산 조약의 결과, 원산 군항과 청진 군항 및 청진 육군 기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조선 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원산 군항과 청진 군항, 청진 육군 기지는 신성 후소 제국에게 99년간 임차하는 형식으로 모든 권리를 위임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