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 유대인 연합회 회장 | ||||
국적 | 대독일제국 | |||
출생 | 1889 4월 20일 | |||
대독일제국 브라우나우암인 | ||||
거주지 | 대독일제국 빈 | |||
직업 | 사회운동가, 화가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정당 | 무소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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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유대인의 보호자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현 시대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이를 꼽으라면 아돌프 히틀러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순 없을 것 입니다. 브라우나우암인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 어머니 아래서 자랐습니다. 세관원인 아버지는 존경 받는 이였으나 집에서는 난폭하게 굴기 일쑤였고, 그는 히틀러가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화가가 되고 싶어했던 히틀러는 공부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학교 내에서의 성적도 하위권이었습니다. 그는 중등학교를 자퇴하고 무작정 빈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제국의 수도 빈에서 웅장한 건물들의 위엄과 예술의 향기를 느꼇습니다. 그는 빈 미술대학에 지원했으나 계속해서 낙방을 반복했습니다. 유대인 교장은 그의 그림을 보고 건축학에 재능이 있다 느껴 건축학교 진학을 권유했지만 부진했던 평소 성적 때문에 건축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엽서 등을 그려 간간히 용돈을 벌어 나갔고 그만큼 노숙자들과 지내게 되는 일도 잦았습니다. 노숙자들로부터 반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히틀러는 어느샌가 확고한 반유대주의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제국 내 민족 갈등의 원인이 유대인에게 있다 생각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혐오도 사람들 사이에 간간히 표출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입대하게 됩니다. 전쟁으로부터 일상에 대한 탈출을 찾은 그는 연락병으로서 상당한 전공을 세우고 훈장까지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전쟁터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참호 사이에서 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때, 그가 열등한 민족이라 무시하던 유대인 병사로부터 구출 되고 자신의 상관 후고 구트만이라는 유대인에게서도 위험천만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을 인정 받아 상관이 상부에 훈장을 건의했을때, 그의 가치관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히틀러는 유대인 연합이라는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단체를 설립해 제국 내에서 박해 받던 유대인들을 돕기 시작했고 뛰어난 연설로 제국에서 반유대주의를 지워내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독일인으로부터도 지지를 받기 시작한 히틀러는 뛰어난 연설가로서 그 성과를 쌓아나갔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은 제국 내에서 상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