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상륙전 (푸른 오얏꽃2)


여순 상륙전
날짜 1914년 10월 6일 ~ 1914년 11월 18일
장소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
러시아 제국 조차항 포트 아르투르(뤼순)
결과 대한제국군의 승리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전면전 발발
교전국
러시아 제국 대한제국
지휘관
아나톨리 스테셀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로만 콘트라첸코†
스테판 마카로프†
오스카 빅토로비치 스탁
권중현
박승환
정석용
신순성
유항렬
병력 42만 명
노급 전함 3척
전노급 전함 5척
38만 명
노급 전함 6척
전노급 전함 3척
피해 규모 19만 명 전사
15만 명 부상
전함 4척 대파
10만 명 전사
17만 명 부상
전함 일부 소파


개요

여순 상륙전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한 대한제국이 협상국 진영의 러시아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뤼순에 상륙하여 벌인 전투이다. 러시아 제국의 전술적 오판으로 대한제국군이 상륙에 성공하고, 만주로 진격을 시작하며 아시아 전선에 발동을 걸기도 한 전투이다.

배경

전쟁 이전

한청전쟁에서 승리한 대한제국은 청나라로부터 남만주 일대를 얻는데, 만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은 만주에서 대한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대한제국의 팽창을 경계하는 일본 제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을 끌어들여 대한제국 외무차관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대한제국이 어쩔 수 없이 간도를 제외한 영토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했고, 대한 대중과 대한제국 황립군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일본 제국에게 반감과 분노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1898년에 러시아 제국이 여순, 대련을 점령하여 군항으로 활용하게 되자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대한제국은 한독동맹을 근거하여 동맹국 진영으로 참전한다. 러시아 제국도 범슬라브주의 세력권 안에 있던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전쟁에 뛰어들었고, 결국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공식적인 적국이 된다.

대한의 전투 준비

대한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지리적 거리 탓에 연계하는 전략을 펼칠 순 없었다. 러시아 제국과 육상으로, 일본 제국과 해상으로 맞닿는 대한제국의 지리적 특성은 개전 초반 대한제국을 고립 상태로 만들었다. 개전 후 2개월간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김승규 육군 참장은 해군과 연계하여 일본의 해상을 봉쇄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하자는 백두산 계획을 입안했다. 백두산 계획은 제주도와 대한제국령 대마도에 최소한의 신예 도급 전함을 배치해 일본 제국의 행동반경을 축소하고, 남은 해군 전함과 육군으로 뤼순에 상륙해 재빨리 적군의 주력 부대를 괴멸시켜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과 협상을 하자는 내용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바로 입안되었고, 대한 황립육군은 뤼순 공략을 위해 권중현 대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제2야전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9월 말 편성을 마친 제2야전군은 뤼순 공략을 위해 제물포와 평택항을 떠났다.

진행

여순항 해전

대한제국 황립육군이 여순 공략을 위해 본토를 떠나자, 해군도 육군 부대를 호위하기 위해 행동을 시작했다. 뒤이어 해군은 수십 척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여순항을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10월 2일 아침 대한의 신순성 제독이 진해에서 육군 제2야전군의 여순 상륙 호위와 여순항의 공격을 목표로 함대를 발진시켰다.

신순성 제독의 계획은 6척의 제1전대 노급 전함 충무, 문성, 전주, 창녕, 양평, 금안이 주도하여 진해함대 제2전대 전노급 전함 양무, 현익, 장현과 함께 여순항을 급습하는 것으로, 이 작전을 위해 15척의 구축함과 순양함이 준비되었고 20척의 어뢰정, 예비순양함 건곤, 감리, 홍익, 배달이 대기했다.

한편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일찍이 대한 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노급 전함 시노프, 표트르 벨리키, 임페라트리차 마리야, 전노급 전함 페트로파블브스크, 퍼레스비트, 포베다, 체사레비치, 레트비잔이 있었고 이를 지원하는 방호순양함 팔라다, 다이나, 아스콜드, 노비크, 보야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여순항의 방어 함대가 다롄 시 근처로 우회해 있었고 대부분의 수비대가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상태였다.

1차 야간 공격

10월 6일 새벽 10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대한군 함대가 러시아의 구축함과 맞닥드렸고 어뢰정들이 전함 임페라트리차 마리야, 방호순양함 팔라다를 공격했다. 하지만 뒤이어 온 전함 시노프와 체사레비치의 반격으로 물러났고 대한군은 기습 공격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전함 임페라트리차 마리야와 팔라다, 체사레비치가 손상되었다.

2차 야간 공격

야간 공격에 따라 신순성 제독은 여순항의 피해를 알아보기 위해 부제독 유항렬이 지휘하는 순양함을 보냈고, 러시아 함대는 전투를 준비했다.

여순항에 접근하던 대한군이 러시아의 순양함 보야린을 발견했고 보야린은 도주하다가 신순성 제독의 기함 충무의 공격으로 대파당했다. 이후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러시아군은 노비크, 페트로파브로브스크, 폴타바, 다이나, 아스콜드가 손상되었다.

충무는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고 신순성 제독은 러시아 함대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3차 공격 · 여순항 해전

10월 11일 러시아의 기뢰 부설함 예니세이가 기뢰밭에서 폭발해 기뢰의 위치를 나타낸 유일한 지도와 함께 침몰했고 이를 조사하러 간 보야린도 10월 13일 침몰했다.

10월 14일 오전 11시, 신순성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여순항 공격에 나섰다. 야간 공격으로 전력이 와해된 러시아 함대를 확실하게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였다.

10월 14일 오후 1시, 러시아 해군 제독인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아스콜드를 수리하고 시노프, 표트르 벨리키, 체사레비치, 페트로파브로브스크, 레트비잔과 함께 대한군 함대를 선제 포격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0월 14일 오후 4시, 대한 함대와 러시아 함대가 포화을 주고받은 결과, 신순성 제독의 대한 함대는 문성 중파, 양평 중파, 금안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고, 마카로프 제독의 러시아 함대는 시노프, 표트르 벨리키, 페트로파브로브스크가 침몰했다. 러시아는 이 해전에서 마카로프 제독을 잃었다.

남은 러시아 군함들 역시 기뢰에 피해를 입어 항구로 견인되었고 10월 15일 신순성 제독은 다시 여순항 봉쇄를 명령했다. 비슷한 시기 신순성 제독을 따라 요동 반도에 상륙한 대한제국 육군의 제2야전군이 상륙에 성공했다.

10월 20일, 이후 대한 함대는 다시 1915년 여름 동안 여순항을 봉쇄했으며 전투는 육군의 만주에서의 싸움으로 이어져 치열한 공방이 일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