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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커피와 사탕의 틀, 국가 연습장입니다.

아침해의 원유관

벚꽃이 질때까지

일본령 태평양주
日本領太平洋州 | Japanese Pacific State
국기 휘장
국가통합이 미덕이다
(国家統合美徳)
미주해방 이전 서부독립전쟁 이후
미합중국 태평양 연안 공화국
상징
국기
일장기, 화미협화기
국화
국화꽃, 벚꽃
국조
국가
기미가요, 태평양 협화의 샛별(준 국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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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봉기 1944년
미 태평양 연합 건국 1945년
미일합방 1947년
문화통치 시작 1968년
금문교 민주화 운동 1987년
총독제 개편 2000년
독립 및 태평양 연안 공화국 출범 2008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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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상항(桑港)
최대도시
상항(桑港)
위치
아메리카 대륙 서부, 알래스카 및 캐나다 일부
주변국
대독일국 오스트아메리카 국가판무관부, 아즈틀란 제국, 하와이 왕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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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5000만
공용어
영어, 일본어
공용 문자
한자, 가나 문자, 영어
민족
일본인, 미국인 등
국교
국가신토
종교 분포
30% 신토, 20% 불교, 25% 무종교, 25% 기타
군대
대일본제국군 태평양 연방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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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군사독재, 전제군주제, 식민지형 양원제, 파시즘
정부 수반
아미리가 총독
국가 원수
아키히토 덴노
행정 수반
쓰키야마 아키히로 아미리가 총독
여당
화합당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통화
일본제국 엔 (円), 태평양 달러 (dollar)
구 상항 거리


개요

드디어 우리 황국이 백인들을 지배하게 되었소!! 공영권이 비로소 완성된것이오!!!

 
— 도조 히데키, 샌프란시스코 상륙 성공소식을 듣고 나서

일본령 태평양주(日本太平洋州, Japanese pacific state, JPS)는 1945년부터 2008년까지 미 서부 일대를 통치했던 일본의 괴뢰국 내지 외지 행정부이다. 일본의 영향력이 닿는 기관들 중 인도, 중국과 함께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 꼽혔으며, 쓰키야마 아키히로 총독의 임기 중 일어난 해방전쟁으로 인해 아키히토 덴노가 태평양주의 독립을 인정하는 옥음방송을 송출, 3개월 후 일본 연합함대 북미 주둔군이 철수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됬다.

역사

1944년 하와이가 넘어가고 알래스카도 일본군 기지가 건설되며 전황이 악화되자, 극단적인 조치로 미국 정부는 서부 해안에 거주하는 아시아인,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일본인에게 동조할만한 모든 인종들을 격리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조치는 대규모 봉기를 발생시켰고, 이 사태로 서부 해안의 행정이 마비되면서 미 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일본제국 정부는 이를 이용하여 봉기한 황인 및 아시아인 반란자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통해 서부 해안을 통한 급파로를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1945년 초, 미국의 심장부인 동부에 나치 독일의 손길이 닿기 시작하자 미 정부는 대항하기 위해, 이미 진주만 공습에서 대부분 박살난 함대를 제외한 육상 병력을 대거 동부로 빼돌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군에게 빈틈을 주는 선택이었고, 곧이어 해군 항공대 선발대가 샌프란시스코를 공습, 이어서 일본 전함이 해상을 포위하고 병력이 상륙하면서, 서부주 공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상륙한 샌프란시스코를 위시한 서부주에는 문자 그대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오랜 전쟁 끝에 궁극적 목표인 미국에 도달한 일본군들은 마치 중일전쟁을 방불케 하는 보복을 시작했으며,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등의 미 서부 주지사에게 일본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는 방송을 강요하고 스스로 미국의 역사를 까내리는 억지방송을 시킨 뒤, 일본 본국으로 송환시켜 조롱용 가두행진을 시켰다.

보복이 잠잠해진 이후에는 본격적인 인종간 서열 나누기가 시작되었다. 일본인 이민자들이 최상위[1],기타 아시아인들이 2순위였으며, 백인들은 최하위 신분인 히닌(非人)으로서 황인들을 위해 봉사할것을 강요받았다[2].

점령 석 달 이후, 야마구치 다몬을 임시적인 지도자로 하는 공식적으로 새로운 정부인 미 태평양 연합이 수립되었고, 그해 7월 워싱턴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전후의 협상에서 미 태평양 연합은 지금까지 확보한 영토를 두개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일본이 점령한 멕시코 영토로 아즈틀란 제국이 수립되었고, 나머지 영토에는 일본의 자치구 겸 속국인 일본령 태평양주가 로키 산맥의 경계 뒤로 수립되었다.

점령 첫 해이자, 일미 합방이 이루어진 바로 다음 해인 1946년에는 야마구치 다몬의 의견대로 강경한 헌병경찰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백인들은 수상하다고 판단될 시 문답무용으로 진압, 경우에 따라서는 사살하는것이 허용되었다. 또한, 기존 미국의 정체성이나 문화를 담은 건축물들은 허물어지거나 일본식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서부의 넓은 농지는 본토의 일본인들을 먹여살릴 쌀을 재배할것이 강요되었다. 이 외에도 1948년에는 대본영에서 전달된 행정명령 3577호를 통해 인종간 계급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일명 '백인구제(白人救済)'법률로 불리던 이 법률은 버스 등의 교통수단에서 동양인들의 승차권을 우선시하고 교육에서 우위를 보장하는 반면에, 백인들에게는 직장 내 진급에 한계를 두고 동양인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도록 유도하는 등, 백인을 차별하겠다는 일본제국의 강력한 의지가 보이는 악법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불만 탓에 1949년 7월 15일 임기중이던 야마구치 다몬이 총독부 청사에 던져진 폭탄의 화마에 휩싸이는 일이 발생했고, 때마침 미국 내 행정을 얼추 정리한 독일이 10월 27일 세계 신질서 회의(WNO)에서 일본제국에게도 뉘른베르크 법을 요구하게 되자, 제국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아예 미국 점령지에서의 기존 체제를한 번 갈아엎을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 이듬해인 1950년에 헌병의 규칙을 일부 수정하여 평상시에는 총기가 아닌 몽둥이 등의 둔기로 대응하도록 바꾸었다. 그러는 한편, 다시 총독이 암살당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기존 계획에 더 가깝게 총독부를 설치하기로 결정, 기존 총독부로 쓰였던 건물은 새로 출범한 무역대표청의 청사로 쓰고, 알래스카 해안가에 유럽식 건물을 새로 건설해 총독부로 삼았다.

이 무렵 종전 이후 문민세력의 입김이 어느정도 커지자, 이들의 눈치를 아예 무시하기는 힘들었던 대본영은 자신들의 유화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식견이 풍부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급하게 임시 총독직을 수행하던 나구모 주이치 대신 공식적으로 제 2대 아미리가 총독으로서 파견됬다. 당시 그는 일본령 태평양주에서 이어지던, 그의 시각에서 보기엔 자존심 강한 미국인들을 재결집시키고 분열을 가속화시킬뿐인 인종 차별 정책을 약화시켰으며[3], 대신 문화적으로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일본어 교육을 학교에서 자연적으로 장려하는 등의 정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유화책만 시행됬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도입했던 정책에는 히스패닉,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일본화시킨 뒤 등용하여 백인을 견제하는 정책이나 천황의 생일인 천창절에는 백인들에게는 특별히 기모노 착용을 강요하는 등, 태평양주 내 백인의 견제 및 일본화에 대한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행동 또한 취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시간이 지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임기를 끝냈을 무렵엔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였던 테러 및 반란시도가 어느정도 평준화되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백인들은 서서히 절망감을 느끼거나 허무함을 느껴 저항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리고 1962년에는 아미리가 회의(Council of Pacific Amiriga)라 불리는 체제가 새로히 출범했다. 쉽게 말해 총독부 내 친일 백인들의 의회로 이들 중 조기 협력의 대가로 작위[4]를 받은 이들은 상원을, 일반 부역자들과 중급 일본인 관료들이 하원을 맡는 식으로 시스템이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보통 백인들을 대상으로 선전방송 채널을 운영하거나 백인 교육의 일본화를 맡는 등, 백인이라는 인종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대가로 같은 국민들을 일본화시켜 궁극적으로 일본의 입맛대로 인종의 성격 밑 문화 자체를 개조시키는것을 임무로 삼았다. 일본은 이에 대해 '우리 일본은 자비로운 제국이어서 원수인 백인들, 심지어 외지에 사는 이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한다'며 자화자찬했다.

한편, 미 서부와 동아시아 식민지들을 통해 막대한 자원을 얻은 일본 내에선 성공신화와 신나리킨들의 출현이 등불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이 여파인지 '아미리가 낭만'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 일면서, 미국으로 가 돈을 벌어 제도 도쿄로 위풍당당하게 금의환향하고픈 청년들과 일본인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이주한 일본인과 동양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태평양 주 곳곳에 퍼트리면서, 미 서부는 주류 인종만 백인이지 사실상 동아시아권의 국가로 서서히 변해갔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의 도입은 택도 없는 상황이었고, 일본인 우선주의 정책은 그 양상이 바뀌어 그나마 일본인에게만 제대로 된 정치 참정권이 있도록 하는 체제로 변모했다.게다가 1970년대부터 역설적으로 독일의 유화책이 강화되자 일본 본토는 '서구 정신오염적 제도로부터 동아혼을 보호하여 인류의 선함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대동아공영권 전체에 독일과 민주주의적 열풍을 적대하는 풍조를 퍼트렸고, 이로 인해 태평양주의 민주주의 또한 전보다 더 수축되게 되었다.

대일본제국의 식민지

대동아공영권 (大東亜共栄圏)

직속총독령 (直屬総督令)
조선 (朝鮮)
타이완 (台湾)
가라후토 (樺太)
제국령 (帝国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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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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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슈
타이헤이요슈
치시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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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
카이난슈 유키하라 타이요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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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주
난요쿤토 홍콩슈 쇼난슈
행정부 (行政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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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요교세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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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산교세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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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교세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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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이부
제국제후령 (帝国提侯領)왕정 괴뢰국
대만주제국
토번 왕국
아르즈틀란 제국
페루 제국
월남 제국
캄푸치아 왕국
라오스 왕국
네팔 왕국
하와이 왕국
사우디 아라비아 술탄국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술탄국
제국보호령 (帝国保護領)기타 체제 괴뢰국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중화민국 북경 유신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
상하이 자유시
광동국
필리핀 제 2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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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자유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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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국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지둥자치정부
둥가니스탄
칠레 공화국
방글라데시
에콰도르국
콜롬비아국
자유 인도
파키스탄
버마국
동인도 공화국

대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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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국계 일본인들은 진작에 적의 사상에 물든 비국민이라는 명목으로 2등 신민 취급을 받았다.
  2. 협력자 백인들의 경우, 명예 황인으로 대우하기는 했다.
  3. 당연히 이에 대한 불만이 속출하기는 했으나, 일본 본토도 아닌 외지, 그것도 샌프란시스코 함락의 일등공신이 직접 총독으로 군림하는 상황에서 대놓고 이소로쿠의 정책에 반대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정책 시행 당시 이소로쿠는 이 행위를 내미일체로 귀축영미의 천성을 교정함으로서 장기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안정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운지라, 명분상에서도 군부 내 반대파, 그중에서도 점령지 내 인종차별을 적극 도입했던 육군이 열세였다.
  4. 주로 친일 인사나 서서히 사라져가는 백인의 입지 확보를 위해 일본에 허리를 굽힌 이들, 혹은 기회주의자들이 선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