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국 국회
원내 구성
[ 펼치기 · 접기 ]
아이자와 3기 내각
(2021 ~ )
여당

영화민주당
90석 · 218석
야당

영화사회당
61석 · 110석

자유혁진당
24석 · 42석

영화 퍼스트
10석 · 10석

신정 영화
4석 · 4석

신당 미도리
2석 · 3석

사민당
2석 · 3석

여명당
2석 · 2석
무소속 4석 · 6석
재적 199석 · 398석공석 1석 · 2석
왼쪽은 참의원(상원) 의석 수, 오른쪽은 민의원(하원) 의석 수
영화국의 보수주의 정당
신정공민회
(정치 단체)
영화민주당 영화민주당
보수당
민정단결당
농민당 자유당
(개별 합류)
인민당 신보수당
(보수파 본류계 일부)
영화민주당 영화민주당 영화민주당
신보수당
(흡수 합당)
개혁전진동맹
(개별 합류)
영화 퍼스트
(개별 합류)
영화민주당
永火民主党
영문 명칭
Democratic Party of Eika
약칭
民主党(민주당), 民主(민주), DPE
표어
国民と共にする政治
국민과 함께 하는 정치
창당일
1936년 3월 25일
통합한 정당
보수당, 민정단결당, 농민당, 인민당
(1936년 신설 합당)
신보수당
(1983년 흡수 합당)
전신
신정공민회(노나카파)
중앙 당사
영화국 가쿄도 주오구 히라미즈동 3구획 12-43
이념
보수주의

내부 계파:
사회보수주의[1]
신보수주의[2]
자유보수주의[3]
보수자유주의[4]
농본주의[5]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역사적 계파:
사회자유주의
진보주의[6]
협동조합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 우파
총재
아이자와 시노부 / 8선 (, 22-29)
부총재
카마도 스야코 / 12선 (, 18-29)
원내총무
나카에 히로무 / 10선 (, 20-29)
사무총장
마치무라 사야카 / 7선 (, 22-25·27-29)
정책심의위원장
하라 시게루 / 8선 (, 22-29)
참의원의원단장
마쓰다 다다히로 / 5선 (, 20-28)
참의원
90석 / 200석 (45%)
민의원
218석 / 400석 (54.5%)
광역행정단체장
석 / 석 (%)
광역자치의원
석 / 석 (%)
기초행정단체장
석 / 석 (%)
기초자치의원
석 / 석 (%)
당색
청색 (#000093)
당가
우리들의 목소리
국제 조직
국제민주연합
당원 수
1,349,687명
(2023년 1월 1일 기준)
청년 조직
청년 민주당
당보
민주신보
정책 연구소
민주정강연구원
홈페이지
(공식)

(SNS)

개요

영화민주당(영화어:永火民主党)은 영화국집권여당이자 보수주의 성향의 우익 정당이다. 공식 약칭은 민주당(民主党).

역사

창당

영화민주당의 기원은 1928년에 결성됐던 미국령 영화국의 최대 정치 결사 신정공민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정공민회는 당시 미국의 영향력 하에 놓인 영화국의 자치권 확대와 독립을 위해 아카미네 마사하루의 독립파 세력과 노나카 가오루의 강경 자치파 세력이 연합해서 결성한 정치 단체로 국내 우익 진영의 독립 여론을 주도하고 노동당과의 제휴 관계를 맺어 영화 독립 운동의 일익을 맡았었다. 이후 신민회와 노동당의 지도 아래 조직화된 영화국의 독립 물결은 1935년 성탄절 협정을 이끌어내며 미국 정부가 자국의 보호령이었던 영화의 독립국화를 약속하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신정공민회는 설립된 지 7년 만에 당초의 출범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민회는 조직 내 양대 계파인 노나카파아카미네파를 묶어왔던 유일한 원동력을 함께 상실한 것이기에 우익 진영의 통일된 정치 결사로서의 장래가 불투명해졌다. 게다가 이 양대 세력을 묶어온 아리카와 도모히코가 중립적인 신정부 구성을 위해 총리 취임과 동시에 신민회의 의장직을 사임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私はその時の野中議長を信じていました。 少なくとも, 私が何の異議もなく公民会の顧問職を自任したことで最小限の人情があることを願っていました。 しかし、議長は私ののぞみに対してわずかな配慮もなかったようです。 有餘の時間が経過した上で, 後日の結党の計画で私の同志たちが厳然たる「公認の排除」にあったことを知り、私の苦心が始まりました。 私の数多くの同僚が今まで永火の独立のために闘争してきたその歴史を否定される危機にあって、私に与えられたその時機の選択肢はあまりにも狭小かったです。
 
그때의 노나카 의장을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무런 이의 없이 공민회의 고문직을 자처한 것으로써 최소한의 인심이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의장은 저의 희망에 대해 조금의 배려도 없었던 듯 싶습니다. 유여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후일의 결당 계획에서 저의 동지들이 엄연한 '공인의 배제'를 당했음을 알게 되었고, 고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수많은 동료들이 지금까지 영화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그 역사를 부정당할 위기에 있어서, 저에게 주어진 그 시기의 선택지는 너무나 협소했습니다.
아카미네 마사하루민의원 의장의 자서전 《영화독립투쟁사》 中

결국, 과도정부 체제 하의 첫 국회 총선거에 참여할 목적으로 신민회의 정당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두 계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걷게 되었다. 신민회 의장으로 새로 당선된 노나카 가오루와 명예직으로 밀려난 아카미네 마사하루 사이의 공천 갈등이 불거져 아카미네 마사하루의 파벌인 민정혁진클럽이 독자 노선을 걷기로 선언한 것이었다. 중간에 이 상황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아리카와 도모히코 총리가 이들을 중재하려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고 이후 2월 초에 이르러 아카미네 마사하루가 혁진동지회를 발족하며 신민회와의 결별을 고했다. 이에 노나카 가오루 역시 신민회의 정당화를 서두르면서 1936년 3월 25일, 신정공민회을 중심으로 보수당인민당을 비롯한 구 의회의 중도·우익 정당들을 모두 결집시킨 영화민주당이 창당된다.

장기집권

직후 4월 8일 전당대회에서 노나카 가오루를 당 총재로 선출하며[7] 결당 작업을 완전히 끝마친 영화민주당은 초대 민의원 총선거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신민회로부터 물려받은 월등한 조직력과 폭넓은 지지층, 경쟁 대상인 노동당의 자중지란과[8] 혁진동지회 지지층의 이반을[9] 토대로 대승을 거두며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섰다. 이것으로 무난히 정국 주도권을 획득한 민주당은 남부국민회, 민중협동당 등과 연정을 맺어 노나카 총재를 수반으로 하는 노나카 내각을 성립시켰다. 이를 통해 제2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노나카 수상은 신헌법 구상을 발표하고 군사 개혁과 경제 대책에 착수함으로써 영화국의 독립국가 전환을 준비하였지만 1929년 대공황 발생 이후 지속되고 있던 경기 침체 문제를 해결해내지 못하면서 위기에 봉착, 1940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혁진동지회자유당의 의석 확대를 허용하며 민의원 과반선을 내주게 되었다. 이에 노나카 총리와 민주당은 정적인 혁진동지회를 각외협력으로 끌어들여 가까스로 연립정권을 유지하였으나 그 대가로 정치적 운신의 폭이 대폭 좁아지고 혁진동지회가 요구한 소작제 개혁안을 수용하게 되어 당의 핵심 지지층인 지주 세력의 반발까지 사는 등 극심한 사면초가에 빠져버린 채 내각을 이끌어야만 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민주당의 모습을 본 대다수 사람들은 민주당 연정이 머지 않아 의회의 신임을 잃으며 실각할 것이라는 여론이 팽배했다.

그런데 정국의 혼란으로 몸살을 앓던 영화국과 민주당 정권에 뜻밖의 위기가 찾아오니 1941년에 별안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영화국이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일제 치하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5달 만에 영화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기존의 노나카 내각을 전복시키고 구로다 시게노리 중장을 수반으로 하는 군정을 실시, 영화국의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하며 국회를 해산시켰는데 이때 축출당한 영화민주당은 다나베 마사히로 부총재를 필두로 영화제도해방연맹을 조직함으로써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지하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으로 망명한 노나카 총리가 전시거국내각을 통해 분열된 영화국의 주류 정치권을 규합시켜 주도적으로 망명 정부을 이끌어나가면서 민주당 세력은 일거에 항일 운동의 전면을 차지하며 정국을 재장악하게 되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회의 불신임 압박에 정권이 수시로 흔들리던 상황과는 180도로 국면이 뒤바뀐 것이었다. 반면에 영화민주당과 함께 우익 세력의 항일 운동을 맡아야 했던 혁진동지회야마자키 도레와 같은 당내의 친일파 민족주의자들이 준동하여 항일 운동에 참여하기가 힘들었고 좌익 진영은 사회당노동당으로 조직력이 양분된 탓에 항일 운동에서의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결국 이 당시 민주당은 오히려 일치시기라는 위기 상황이 기회로 바뀐 덕분에 정계에서의 발언권을 회복하면서 실각당하기 직전 가까스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한 것이었다.

한편 영화섬을 강점한 일본군의 지배는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1944년부터 영화섬 탈환전이 이루어져 영화섬의 대다수 지역이 해방되었고 1946년에 진행된 연합군의 몰락 작전으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영화 제도 곳곳에서 항전을 이어간 일본군 잔당들도 항복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본이 영화섬에 수립한 괴뢰국인 영화공화국 역시 붕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공화국 정부의 붕괴와 함께 1945년 초 가쿄로 귀환한 노나카 내각과 민주당은 전시 상황으로 연기했던 일련의 선거 일정들을 재개하며 1945년에 열린 여러 국정 선거와 지방 선거에서 야권이 지리멸렬한 가운데 영화제도해방연맹의 압도적인 인지도를 내세워 압승을 거두었고 야당의 거국적인 지지가 필요없을 정도로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이 순간부터 사실상 영화민주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이 깔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민주당 내각의 주도 하에 미국과 제3차 아리에 조약이 체결되어 영화국의 완전한 독립이 성사되고 다이코 호황으로 대표되는 전후 고도경제성장이 이어지자 민주당의 지지율은 더욱 고공상승을 거듭, 야권의 혁진동지회자유당이 합동하여 자유혁진당을 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민주당의 절대 우위 구도가 견고하게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사회당의 정권교대

테라다 총리의 정권 탈환

6년 간의 실각

아이자와 총리의 집권

이념 및 정책

지지기반

영화민주당의 대표적인 핵심 지지층은 농민, 기업가, 중장년층으로 요약될 수 있다.

파벌

영화민주당의 계파 분류
[ 펼치기 · 접기 ]
청류계 보수파 본류계 보수파 온건파 무파벌
슈에이 데모크라시
아이자와 시노부
나카에 히로무
마치무라 사야카
경세회
이가라시 노조무
카마도 스야코
마쓰다 다다히로
신정치구상연구회
하시비라 요시코
보수 성향 무파벌
정경개혁연구소
와카바야시 미쓰노리
온건 성향 무파벌
하라 시게루
정당별 계파 (영화사회당 · 자유혁진당)
  • 신보수주의 내지 사회보수주의를 내세우는 당내 보수파

    아이자와 시노부 총리 중심의 청류계 보수파 슈에이 데모크라시
    이가라시 노조무 전 원내총무 중심의 본류계 보수파 경세회

  • 자유보수주의부터 보수자유주의까지 온건보수를 추구하는 당내 온건파

    하시비라 요시코 전 정책심의위원장 중심의 신정치구상연구회
    와카바야시 미쓰노리개혁전진동맹 상임간사 중심의 구 동맹계 세력 정경개혁연구소

  • 아무 파벌에도 속하지 않거나 군소 의원모임에 소속된 무파벌

    농본주의를 지향 중인 구 농민당계 출신
    하라 시게루 정책심의위원장 중심의 국정쇄신의원그룹

소속 의원

역대 집행부 임원

역대 총재

영화민주당 역대 총재
[ 펼치기 · 접기 ]

집행부 구성

역대 포스터

역대 선거 결과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민의원 의원 총선거

전국통합지방선거

여담

둘러보기

  1. 당내 보수파 본류계
  2. 당내 보수파 청류계
  3. 당내 온건파
  4. 개혁전진동맹에서 합류한 탈당파 세력
  5. (구)농민당 계열 출신
  6. 영화민주당은 사상과 이념 보다는 노나카 가오루 초대 총리의 포용적인 인연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당이었기에 진보주의적 성향의 정치인들도 당에 있었다. 그러나 점차 민주당의 정체성이 보수우익으로 확립되어가자 이들은 대부분 자유당으로 이탈하거나 정계 은퇴를 택했다.
  7. 사실 이때 민주당은 3월 25일 창당 대회 때부터 범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던 아리카와 도모히코 총리를 자당의 총재로 추대하려 시도했었다. 허나, 아리카와 총리가 총재직을 수락하는 전제 조건으로 혁진동지회와의 무조건 합동을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민주당 측은 2주 정도의 시간만 날려먹고 해당 구상을 단념시킬 수밖에 없었다.
  8. 1935년 중후반부터 노동당은 야나무라-모리타 논쟁을 계기로 성탄절 협정에 기반한 영화국의 점진적인 독립 과정과 의회 투쟁 노선을 옹호하며 선거 참여를 주장했던 예정파와 이에 반대하는 급진파의 대립이 심해져 결국 예정파가 단독으로라도 선거를 치루고자 영화사회당으로의 분당을 강행하는 등 선거 기간 내내 내부적으로 극심한 혼란상에 빠진 상태였다.
  9. 이는 영화국의 독립이 확정됨에 따라 아카미네파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독립파 민족 운동이 위축되며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대중의 여론도 흩어진 것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아카미네 마사하루는 영화국의 독립을 이룩해냈다는 성과에만 기대어 독립 이후의 정치적 비전을 제대로 구상하지 못한 채 자신의 지지층을 규합시키는데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