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문서는 여시아문 세계관 문서입니다.
주의. 문서를 동의없이 함부로 수정할 경우 반달 사용자로 지목되어 불이익을 수 있습니다.
수정할 것이 있으다면 문서 작성자의 동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응오득후이
Ngô Đức Hui
吳德灰 (오덕회)
생전 처음이자 유일했던 1980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
생전 처음이자 유일했던 1980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
뚱람의 제2대 입승주직
임기 1977년 9월 2일 ~ 1991년 5월 21일
전임 응우옌푸언 (초대)
후임 리찌꽁 (대행)
뚱람의 초대 호국부 장관[1]
임기 1960년 10월 20일 ~ 1974년 12월 31일
전임 직위 신설
후임 응우옌후언아인 (제2대)
뚱람의 제4대 원주도감
임기 1975년 5월 20일 ~ 1977년 9월 1일
전임 쩐쑤런 (제3대)
후임 레득탕 (제5대)
신상 정보
국적 프랑스 (1919~1946)
베트남 공화국 (1946~1960)
뚱람 (1960~1991)
출생일 1919년 12월 17일
출생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통킹 보호령 하노이
사망일 1991년 5월 21일 (향년 72세)
사망지 인도 타밀나두 스리페룸부두르
학력 소련 프룬제 군사 대학교
정당 베트남 공산당 (1937~1951)
무소속 (1951~1965)
뚱람 도반당 (1965~1992)
배우자 호앙띠엔
자녀 슬하 2남
별명 알렉산드르 응오 (Александр Нго)[2]
종교 무종교 (무신론) → 불교 (대승)
신체정보
신장 156cm
체중 58kg
서훈 조국방위대훈장 (1974년 수여)
호국훈장 (1980년 수여)
군사 경력
복무기간 1939년~1974년
소속 소련 육군 (1941~1945)
베트민 (1945~1951)
뚱람 호국군 (1960~1974)
최종계급 원수
참전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
베트남 불법 혁명
베트남 전쟁
뚱람-중국 전쟁
뚱람-캄보디아 전쟁
스리랑카 내전

응오득후이(베트남어: Ngô Đức Hui)는 뚱람의 정치인, 군인이다. 1977년부터 1991년까지 뚱람의 대통령 격인 입승주직을 맡았다.

프룬제를 졸업한 군인 출신의 정치가로, 독소 전쟁에도 참전하였을 정도로 군사적인 경력이 풍부하였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였으나 이후 베트남의 독립과 자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공산당보다는 불교 운동이 더 맞다고 생각하여 공산주의를 버리고 베트남 불법 혁명을 일으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부터 1974년까지 무려 14년간 국방을 책임지는 호국부장관직을 역임,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뚱람의 전쟁 영웅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입승주직 취임 이후에는 보수적인 사회 정책으로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시켜나갔으나, 잔혹한 대숙청으로 서방에서 "인도차이나의 도살자" "불교를 믿는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말년에 스리랑카 내전에 개입하였다가 분노한 타밀족 테러리스트에 의해 폭탄 테러를 당하여 사망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생전에도 유명했으며 사후 그의 신격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뚱람의 보수적인 사회 정책에 관해 뚱람 내에서도 말이 많지만, 비판 여론이 우세한 외국과 달리 뚱람에서 그는 전쟁 영웅이자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강해 그의 정책은 비판하더라도 응오라는 인물 자체를 비판하는 여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소련 시절 사용하였던 이름인 알렉산드르 응오(Александр Нго) 혹은 영어식으로 읽은 알렉산더 응오(Alexander Ngo)로도 잘 알려져있다.

생애

유복했던 유년기

응오득후이는 통킹 보호령에서 프랑스 총독부의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였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구 응우옌 왕조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의 집은 매우 유복하였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집에 연못 딸린 정원이 있고 정원사까지 부릴 정도였다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베트남인이었지만 그들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가톨릭적 전통을 따랐고, 엄격한 귀족적 교육을 자식들에게 강요하였다. 응오는 마치 프랑스의 상류층 귀족처럼 자라났지만, 정작 부모의 억압적인 교육에 응오는 크게 반발하였다.

그럼에도 성적은 매우 일취월장하여 부모를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군사였다. 나폴레옹, 프리드리히 2세, 메흐메트 2세 등 유럽의 명장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부모는 이러한 응오의 모습을 나쁘지 않게 보았고, 그가 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프랑스인이 다니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한 이후, 군사 교육을 위해 프랑스의 군사관 학교에 입학하려하였지만, 입학이 불허되었다. 외국인에게 프랑스 장교 자리를 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그는 여러군데 잡히는대로 입학 원서를 써서 보냈는데, 유일하게 소련의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이 허가되었다. 소련을 좋지 않게 보았던 부모는 소련 유학을 반대했지만 응오는 떼를 써서 프룬제에 입학하게 된다.

프룬제의 이방인

귀국, 그리고 전향

조국을 승리로 이끌다

입승주직 시절

사망

평가

성격

그의 성격은 매우 호탕하고 유쾌하였다. 상류층 자제 출신 다운 기품 역시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마치 프랑스의 귀족 가문 출신 군인처럼 행동하였고, 절도 있는 행동으로 그의 정적에게서도 호감을 샀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응오득후이는 매일 4시에 일어난 후, 자신의 집무실 뒤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로 올라가 부처님에게 절을 드린 후, 그곳에 앉아 조용히 6시까지 불경을 탐독했다. 집무실로 내려온 후에는 7시까지 간단한 죽이나 쌀국수로 아침을 때웠고 하루에 10시간 이상 쉼 없이 일했다. 그가 쉬었던 것은 일년에 오직 이틀, 부처님 오신 날항미 승전기념일 뿐이었다.

소련 시절에는 고기를 즐기고, 술과 담배도 마음껏 하였으나 불교에 귀의한 이후에는 자기를 통제하기 위하여 술과 담배를 끊었고 평생 소식, 채식의 습관을 지켰다. 어떤 기쁜 일이 있어도 사치스러운 식단을 하는 일은 멀리했고 밥은 한 공기 이상 먹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불교를 동경하던 서구 지식인들, 그리고 뚱람의 선전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비판이 존재하나, 그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응우옌푸언과 마찬가지로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여담

둘러보기

전임
응우옌푸언
제2대 뚱람입승주직
1977년 9월 2일 ~ 1991년 5월 21일
후임
리찌꽁
전임
쩐쑤런
제4대 뚱람원주도감
1975년 5월 20일 ~ 1977년 9월 1일
후임
레득탕
  1. 현재의 혁명방위부 장관.
  2. 소련 시절 사용하였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