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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름다운 나라 세계관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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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란 제국 문장.png
이란 제국
كشور شاهنشاهی ایران
Keshvar-e Shâhanshâhi-ye Irân
국기 국장
مرا داد فرمود و خود داور است
그가 나를 심판할 제, 나에게 정의를 행하라 하시리라
상징
국가 황례포
국화
수련[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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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년 건국
  • 1935년 이란으로 개칭
  • 1963년 1차 백색혁명
  • 1979년 PIOTA 창립
  • 1988년 2차 백색혁명
  • 2006년 OECD 가입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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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테헤란
최대 도시
테헤란
면적
1,648,195㎢
접경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튀르키예, 이라크, 쿠웨이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르차흐[2]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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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7,256만 명
밀도
44명/km2
인종
페르시아인 61%
아제르바이잔인 16%
쿠르드인 10%
기타 13%
공용어
페르시아어
지역어
아제르바이잔어, 쿠르드어
종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분포
시아파 이슬람교 56%, 조로아스터교 7%, 수니파 이슬람교 4%, 기독교 2%, 기타 9%, 무종교 22%
군대
이란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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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
429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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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다당제, 단원제, 단일 국가, 성문법주의(대륙법계), 지방자치제
민주주의 지수
6.65점(결함있는 민주주의)2022년
국가 원수 (황제 (샤한샤))
팔라비 3세
정부
요인
수상
아미르 파크라바르 ( 틀:자유당 (아나 이란) )
국회의장
하심 카메자르니
대법원장
알리 모흐네르
여당
틀:자유당 (아나 이란), 틀:입헌당 (아나 이란), 틀:녹색당 (아나 이란)
원내 야당
틀:이슬람 민주당, 틀:노동당 (아나 이란), 틀:무슬림 전선, 틀:아제리 민족당, 틀:쿠르드 동맹, 틀:이란 좌파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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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명목)
전체 GDP
$2조 310억
1인당 GDP
$28,000
화폐
공식 화폐
리알 (Rial)
ISO 4217
IRN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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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UTC +3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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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1962년
UN 가입
1945년
무비자 입국
한국인→이란: 90일
이란인→한국: 90일
주한대사관
서울수도시 노원구
ccTLD
.ir
국가 코드
IRN, IR
전화 코드
'
파일:이란 제국 문장.png
위치

작업 예정

개요

서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으로, 서아시아 최대의 강국이다.

국가 상징

국기

국장

국가

이란의 샤한샤를 찬양하라
سرود شاهنشاهی ایران
Sorude Šâhanšâhiye Irân

채택 1933년
이명 황례포

이란의 국가는 이란의 황제를 찬양하라이다. 1933년 작사 및 작곡돼 그 해에 레자 샤 팔라비에 의해 국가로 채택되었다. 한국에는 '황례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가사
페르시아 문자 라틴 문자 한국어 번역
شاهنشه ما زنده بادا

پايد کشور به فرش جاودان کز پهلوی شد ملک ایران صد ره بهتر ز عهد باستان از دشمنان بودی پریشان در سايه‌اش آسوده ایران ايرانیان پيوسته شادان همواره يزدان بود او را نگهبان

ای پرچم خورشید ایران پرتو افکن به روی این جهان یاد آور از آن روزگاری کآسود از برق تیغت بر کران در سایه‌ات جان می‌فشانیم از دشمنان جان می‌ستانیم ما وارث ملک کیانیم همیشه خواهیم وطن را از دل و جان

بودیم و هستیم پیرو حق جز حق هرگز نخواهیم از جهان با شه‌پرستی مملکت را داریم از دست دشمن در امان ما پیرو کردار نیکیم روشندل از پندار نیکیم رخشنده از گفتار نیکیم شد زین فضائل بلندآوازه ایران

Šâhanšahe mâ zende bâdâ

Pâyad kešvar be faraš jâvedân Kaz Pahlavi šod molke Irân Sad rah behtar ze ahde bâsetân Az došmanân budi parišân Dar sâye-aš âsude Irân Irâniyân peyvaste šâdân Hamvâre Yazdân bovad u râ negahbân

Ey parcame xoršide Irân Partow afkan be ruye in jahân Yâd âvar az ân ruzegâri Kâsud az barqe tiqat bar karân Dar sâye at jân mifešânim Az došmanân jân misetânim Mâ vârese molke kiyânim Hamiše xâhim vatan râ az del va jân

Budim va hastim peyrove haq Joz haq hargez naxâhim az jahân Bâ šâhparasti mamlekat râ Dârim az daste došman dar amân Mâ peyrove kerdâre nikim Rowšandel az pendâre nikim Raxšande az goftâre nikim Šod zin fazâyel bolandâvâze Irân

우리의 샤한샤 만세!

그리고 그의 영광이 우리 땅을 불멸케 하리
팔라비 황조가 이란을 과거보다 백배 발전시켰네
한때 적의 맹위에 포위되었지만 이제 그의 보호 아래 평화가 확립되었도다
우리 이란인은 언제나 행복하리니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도우시리라

오 이란 국기를 비추는 태양이여
아름답고 강하게 모든 나라를 비춰라
네 번쩍이는 칼이 만방에 평화를 주는 그 기억은 오래 남아있도다
네 그림자에 우리 목숨을 바치리니 적들의 목숨도 거두리라
우린 카야니아의 후예이니
사랑하는 대지여, 영원히 우리 것이길

우리는 언제나 진실의 승리자이니
진리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로다
임금을 섬기며 우린 언제나 적에게서 이 땅을 지키리라
제일의 미덕인 좋은 행동과
마음을 이끄는 좋은 생각과
모두를 비추는 좋은 말씀이
멀리 널리 퍼져나갈 이란의 미덕일지니

역사

팔라비 1세 치하

1925~1941

페르시아 쿠데타와 건국

페르시아(카자르 왕조)는 1910년대 러시아 적백내전과 소련과 영국의 개입 등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카자르 왕조의 권위는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했다. 이러한 혼란 상황에서 코자크 여단의 여단장이었던 레자 칸이 1921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수상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스스로는 전쟁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레자 칸은 1923년까지 페르시아 전역을 돌며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1923년, 수도로 돌아온 레자 칸은 수상에 임명되었고 국왕은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레자 칸은 이웃 국가인 터키(튀르키예)에서 무스타파 케말이 했던 것처럼 페르시아를 공화국으로 만드려고 했으나 내부의 반발로 인해 레자 칸의 페르시아는 군주국이 되었다. 1925년, 제헌의회가 레자 칸을 샤(왕)로 옹립하여 카자르 왕조가 멸망하고 팔라비 왕조가 수립됐다.

개혁 정책

파일:1930s 테헤란.jpg
1930년대 테헤란

팔라비 1세로 즉위한 레자 칸에 의해 급진적인 개혁이 시행되었다.

현대적인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테헤란에는 이란 최초의 대학인 테헤란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많은 이란 학생이 정부의 지원으로 적절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팔라비 1세의 16년 치세 동안 공장의 수는 17배, 고속도로의 길이는 7배가 늘어났으며 이란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다. 또한 결혼법을 개정하고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여성 출입을 막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는 등 여성의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됐으며 차도르 착용이 금지되었다.

강력한 세속화 정책 역시 시행되었다. 모스크에서 기도할 때 바닥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고[3] 종교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던 억압이 대부분 철폐되었다.[4]

정치 시스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과학기술적 발전과는 별개로 정치에서는 큰 혁신이 발생하지 않았다.

1905년 이래로 이란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정착되었으나 그리 민주적이지는 못했다. 내무부가 의원 후보의 명단을 작성하였으며 이 명단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전달되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주로 의원에 당선되었다. 고로 의회는 황제의 허수아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1935년에는 국호가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변경되었다.

영·소의 침공

틀:현대 이란의 대외 분쟁

파일:레자 칸 사열.jpg
근위대를 사열하는 팔라비 1세

이란은 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연합국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에 연합국은 이란이 은밀히 추축국에 동조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었고, 1941년 8월, 영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쪽과 북쪽에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침공했다. 이란군은 무능하게 붕괴하였다. 이란군 장교들은 비밀리에 영국군에 협조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란군 총사령관 아흐마드 나크자반은 영국에 항복하려 하기도 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팔라비 1세는 군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고 연합국과의 협상에 돌입했다. 당시 이란에는 상당한 수의 독일인들이 있었는데[5], 연합국은 이란 정부에 이들을 영국과 소련에 인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에게 인계되는 것은 곳 죽음을 의미한다고 본 독일인들은 이란 정부에 도움을 청했고 샤의 명령으로 이들은 대부분 무사히 이란을 탈출했다. 이에 소련은 반발하였고 영국은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황위 계승 지원을 조건으로 팔라비 1세에게 퇴위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 팔라비 1세는 퇴위하였고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점령하였다.

팔라비 2세 치하

1941~1979

연합군 점령하 이란

1941년 팔라비 2세가 이란의 새 샤한샤로 즉위하였으나 영국과 소련이 이란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연합국은 이란을 보급품 운송의 주요 경로로 활용하였다. 1943년, 연합국은 1946년까지 이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였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영국군은 이란에서 철수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철수를 거부하였고 이란의 서북부에 2개의 친소 괴뢰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소련에 철군을 요구하였고 소련은 등 떠밀려 철군을 하게 되었다. 친소 정부는 붕괴했고 이란 서북부는 다시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모사데크 내각

파일:모사데크 내각.jpg
모사데크 내각(1951~1953). 오른쪽에서 넷째가 모사데크다.

1951년, 이전에 비해 공정하게 치루어진 총선에서 중도좌파 성향의 국민전선이 전체 의석 79석 중 30석을 확보하여 이란 국민의회 원내 1당이 되었고 국민전선 소속이자 중도좌파 세속주의 성향의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모사데크는 곧바로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펼치며 그의 내각의 시작을 알렸다.

모사데크는 국민의회의 국민전선과 함께 실업보상법과 토지개혁법 등을 통과시켜 복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샤의 권한이었던 전쟁상과 이란군 총사령관의 임명권을 수상에게 옮기려고 시도하는 등 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영국 측의 소유였던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유전들을 모조리 국유화했다. 원래는 영국-이란 석유회사와 이란 정부 간의 석유 양허는 과거 체결된 협정에 따라 1993년에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모사데크는 이를 취소하고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모든 자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모사데크는 1951년 6월 21일에 있었던 대국민 연설에서 이란을 "이란에 있는 모든 석유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말하며 그가 단행한 석유 국유화 정책이 합당한 일이었음을 주장했다.

우리의 외국과의 오랜 협상은 (...) 지금까지 아무 성과도 없었다. 석유 세입으로 우리는 예산 전액을 충당할 수 있고 우리 국민의 빈곤, 질병, 낙후와 싸울 수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고려사항은 영국 기업의 영향력을 제거함으로써 부패와 음모를 척결하고 (...)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리라는 것이다.
모하마드 모사데크

하지만 모사데크가 추진한 일련의 정책은 국내외에서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지주들과 기업가, 공장주들의 복지정책에 반발했고 팔라비 2세는 모사데크가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려 한 것을 괘씸히 여겼다. 이슬람 성직자들은 모사데크의 세속화 정책에 분노했고 또한 영국은 이란 정부가 자국의 주요 석유회사를 통으로 국유화한 것에 대해 이란 정부에 크게 항의했다. 더군다나 영국-이란 석유회사가 석유 관련 인력을 철수시키자 이란의 석유 생산량은 1/24배로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이란 정부의 세금 수입이 크게 감소했고 수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으며 불경기가 찾아왔다.

경제난과 영국의 압박이 심화되자 모사데크 내각은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첫 번째는 수상 귄력 강화이며 두 번째는 소련과의 우호였다. 모사데크는 국민의회를 압박하여 법률안 제정권 등을 포함한 비상대권을 6개월간 부여받았고 이 기간은 곧 12개월 연장되었다. 또한 모사데크 내각은 한 때 서북 이란 문제로 이란과 큰 분쟁을 겪었었던 소련에 접근했다. 소련의 힘을 빌려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비대해진 수상의 권한은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를 독재자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소련과의 접촉은 소련의 라이벌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결국 1953년, 팔라비 2세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친위쿠데타를 일으켰고 지지 기반을 잃고 분열된 상태였던 모사데크 내각은 허무하게 붕괴했다.

1차 백색혁명

모사데크를 실각시켜 권력을 장악한 팔라비 2세는 모사데크의 정책을 변형하여 백색혁명이라고 불리는 경제·사회적 개혁에 착수하였다.

파일:이란 공장.jpg
케르만샤의 정유공장 (1970)

이란 정부는 '경제계획'이라 불리는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소련의 경제계획이나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유사하였다. 이란은 페르시아만의 막대한 석유를 활용해 대규모의 석유 수출을 하였으며 석유 수출을 통해 확보된 자금은 산업 개발, 교육, 교통 인프라 확충 등에 투자되었다. 하지만 석유에 국가경제를 의존하던 리비아나 사우디아라비아와는 달리 비석유산업이 이란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1963년부터 1978년까지 이란은 연평균 10%의 경저성장을 이룩했다. 이 시기 이란은 한국, 터키, 중화민국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서방 신흥국으로 분류되어 수십 년 내로 선진국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받았다.[6]

1차 백색혁명이 철저히 자본가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통념과는 달리 빈곤층을 위한 각종 정책 역시 도입되었다. 지주 중심의 토지 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정부는 모스크와 지주들에게 돈을 지급하고 땅을 강제로 매입하였으며 매입된 땅은 400만 명의 소작농들에게 분배되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줄 노동법이 팔라비 2세의 주도로 제정되기도 했다.

여성 인권 역시 서구권에 비견될 정도로 크게 향상었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는 등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며 여성의 사회 참여가 증가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부르카나 히잡을 쓸 의무가 없었고 남성 보호자 없이 외출할 수도 있었다. 정부공무원, 학교 교사, 의사 등 전문직종에도 많은 여성들이 진출하였으며[7] 1960년대 초에는 이란 최초의 여성 국무상이 탄생하기도 했다. 여성의 옷차림새도 자유로워져 이란 여성들의 패션은 당대의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와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었다.

교육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1967년부터 1977년까지 대학의 수는 7개에서 22개로, 고등학교의 수는 47개에서 200개로 증가하였다. 수많은 이란 대학생들이 팔라비 2세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 국가들로 유학을 떠났다. 농촌 지방에서는 초등학교들이 건설되었고 대규모 문맹 퇴치 운동이 벌어졌다. 문맹 퇴치 운동은 군대의 주도로 이루어졌기에(!!) 문맹 퇴치 강좌를 이수한 이들은 '지식의 군대'라고 불렸다.

파일:이란 도시.jpg
1970년대 테헤란

각 지역의 주요 도시는 현대적으로 정비되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곧은 포장도로가 닦였고 버스와 트램 등 대중교통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도시에는 공원, 극장, 병원, 마트 등 각종 편의시설과 생활필수시설들이 들어섰다. 기존의 대도시가 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역할을 분담할 신도시들도 지어졌다. 이 바둑판 모양의 신도시들은 황제의 도시(شهر شاهنشاهی:샤한샤이예 시데)라고 불렸다.

이란 경제당국과 팔라비 2세는 석유가 무한정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석유나 가스를 제외한 다른 에너지에 눈독을 들였는데, 바로 원자력 발전이었다. 1967년에는 테헤란 핵연구센터가, 1974년에는 이란 원자력기구가 설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란의 원전 연구는 탄력을 받게 되었다.  1975년, 이란 정부는 독일의 지멘스사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했고 1980년 원전 '부셰르 1호기'가 건설 완료되면서 이란은 중동 최초의 원전 보유 국가가 되었다.  이란 정부는 장기적으로 약 20개의 윈전을 운용할 계획이었다.

외교

냉전 시기 이란은 친미 반공을 외교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잡았다. 미국으로부터 전투기와 구축함 등의 무기를 구입했고 미국의 대외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이란은 소련과 완전히 척을 지지는 않아 팔라비 2세가 소련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3세계와의 외교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란은 서아시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 미국의 비호를 바탕으로 서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한 이란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반서방주의를 내세운 이라크, 시리아 등과 대립했다. 이란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73년에는 아프간 쿠데타에서 왕당파를 지원하여 공화국을 선포한 다우드 칸 정권을 붕괴시켰고 파키스탄과 아프간 사이의 영토 분쟁을 중재했다. 이후 1977년에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미국의 비호 아래 범인도양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남아시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팔라비 2세는 1967년 10월 26일, 기존 였던 자신의 칭호를 샤한샤, 즉 황제로 격상하고 성대한 대관식을 치렀다.  이 대관식에서 황후 파라는 1500개가 넘는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썼다.  또한 페르시아 건국 2500주년 행사를 매우 큰 규모로 거행해 자신이 페르시아의 적통을 계승한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했다.  또한 이 행사에는 또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란에 세속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1800년대 카자르 왕조 이란이 쇠퇴하면서 많은 이들이 이란 쇠락의 원인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아쿤자데, 케르마니 등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란의 세속적 정체성을 내세우며 이란 사회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있던 이슬람교가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있어 이슬람 시대 이전의 이란은 문명으로, 이슬람 시대 이후의 이란은 야만으로 받아들여졌다. 팔라비 2세는 그들의 의견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팔라비 2세는 이슬람 이전 시대의 명군인 키루스 대왕에 대한 우상화를 실시했다. 키루스의 무덤이 정비되어 국가적인 유적지가 되었으며 팔라비 2세의 자서전 '조국을 위한 임무'(영어: The Mission For My Country)에서 키루스는 '세계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사람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페르시아 건국 2500주년 기념 행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증폭되는 혼란

이란 정부는 SAVAK 같은 비밀경찰을 동원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국민의 삶을 통제하고 감시했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이슬람주의자들이 탄압받았으며 각종 고문이 자행되었다. 도시 노동자들과 진보적 대학생들, 그리고 이슬람 성직자들은 정부에 큰 불만을 가졌다. 이들의 불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쌓여만 갔다.

다른 서아시아 산유국들에 비해 인구가 많았던 이란은 오일머니를 국민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지 못했않았다. 팔라비 2세는 페르시아 건국 축하대회와 자신의 대관식을 매우 호화롭고 성대하게 치렀고 고가의 자동차와 비행기를 수집하면서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다. 그에 더해 팔라비 황가와 고위 공직자들은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이는

1978년 8월 19일, 그동안 억눌려왔던 이란 국민의 분노를 터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렉스 영화관'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수 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SAVAK 요원들이 의도적으로 문을 막아 대피를 방해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란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으나 소문이 퍼지면서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반황정 봉기

렉스 영화관 화재 사건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팔라비 2세는 제국근위대와 SAVAK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으나 처음에는 학생들과 빈민로 시작된 시위에 자유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이슬람주의자들까지 합류하면서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점차 반황정의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늙고 병든 샤한샤는 제국근위대와 비(非)대학생 중산층, 그리고 농민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불리한 위치에 놓였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다급해진 이란 정부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 정부는 이란 정부에 시위대 중 '말이 통하는 타협적 계파'와 교섭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란 정부는 시위의 세 축 중 가장 온건한 이란 자유운동 측에 비밀스럽게 협상을 제안했다. 이에 자유운동 지도부가 응하면서 양측 실무진이 물밑 교섭을 시작했다. 자유운동은 이란 정부에 밑의 8개조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집회, 통신, 표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할 것
2.자유로운 정당활동과 공정한 선거를 보장할 것
3.샤한샤의 권력을 제한하고 내각의 역할을 강화할 것
4.고문을 금지하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5.수상 아미르아바스 호베이다를 해임하고 샤푸르 바크티아르를 수상에 임명할 것[8]
6.일부 집단에만 부여된 경제적 특권을 박탈하고 부의 재분배를 실행할 것.
7.지금까지의 정부의 과오를 인정, 사과할 것
8.위의 개혁안을 샤한샤가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할 것
파일:팔라비의 승복.jpg
개혁안을 발표하는 팔라비 2세

팔라비 2세는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자유운동 측의 요구조건이 탐탁치 않았다. 하지만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팔라비 2세는 자유운동의 요구조건을 따랐다. TV와 라디오에서 샤한샤가 개혁을 약속하자 요구사항이 이행된 것을 확인한 이란 자유운동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온건파 시위대는 시위를 멈추었으나 공산주의 진영과 이슬람주의 진영은 '팔라비와 기회주의자들 간의 더러운 뒷거래'라며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에 일부 군인들까지 동참하면서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충성파와 혁명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팔라비 2세는 개혁안을 받아들인 것 만으로도 아주 많은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혁안의 발표 이후에 오히려 테헤란에서 내전에 준하는 사태가 발어지자 팔라비는 격분했고 안 그래도 암으로 인해 골골대던 그는 화병으로 쓰러져버렸다. 팔라비 2세는 자신이 더이상 샤한샤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았다. 그는 신임 개혁파 수상 샤푸르 바크티아르와 황후 파라 팔라비에게 새 샤한샤를 지도하고 보호해줄 것을 당부한 뒤 맏아들 레자 키루스 팔라비에게 양위했다.

팔라비 3세 치하

1979~

봉기 진압과 국가 재건

2차 백색혁명

탈냉전과 신냉전

정치

샤한샤와 황가

틀:역대 이란의 샤한샤 페르시아어에서 는 왕이라는 뜻으로 샤한샤는 왕중앙, 즉 황제를 의미한다. 샤한샤는 이란 헌법상 이란의 국가원수로, 막대한 권한을 보장받는다. 샤한샤는 이란군 육해공군을 통솔하고 국민의회를 해산할 수 있으며 수상과 국민의회가 비준, 동의한 외교조약이나 국민의회에서 가결한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수 있다. 또한 내각 각료와 대법원 대법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임명하거나 파면할 수 있으며 범죄자를 사면, 복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막강한 권한은 팔라비 3세의 2차 백색혁명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샤한샤와 황가는 사실상의 얼굴마담으로 국민의 구심점 역할을 맡고있다.

국민의회

틀:이란 국민의회 원내 구성 이란 국민의회(National Iranian Congress)는 이란의 입법기관이다. 국민의회의 뿌리는 1906년에 설립된 국민협의회의(National Consultative Assembly)이며, 팔라비 3세의 제2차 백색혁명 당시 현재와 같은 구조로 재편되었고 명칭도 변경되었다.

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지역구 의원 280명과 광역비례대표 280명으로 구성된다. 총선은 4년마다 치러지는 것이 원칙이나, 샤한샤의 명령이나 의회 혹은 내각의 의결로 예정보다 빨리 총선이 치러질 수도 있다.

국민의회는 수상을 선출하거나 불신임을 제청할 수 있으며[9] 수상이 지명한 내각 각료에 대한 임명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당연하게도 법률의 제정, 개정, 폐지를 의결할 수 있고[10] 필요시 내각에 대한 감사를 시행할 수 있다. 일반 법률안의 경우 제정, 개정, 폐지를 의결하기 위해서는 재적 인원 과반수 이상의 출석과 출석 인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며 헌법 개정을 의결하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의 2/3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특정 정당이 과반을 달성한 적이 없어 항상 연립내각 체제로 운영된다.

의장은 여당 혹은 연립여당의 최대 정당의 최다선 의원이 맡는 것이 관례이며 부의장은 각각 여당측 의원과 야당측 의원이 맡는다. 의장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의장직이 공석일 경우 여당측 부의장이 의장의 권한을 대행한다.

과거에는 상원도 존재해 양원제로 운영되었으나 상원이 2차 백색혁명으로 폐지되어 단원제의 형태가 되었다.

정당

현대 이란에는 정치를 좌우하는 4개의 정당이 있다. 자유당, 이슬람 민주당, 노동당, 입헌당이 바로 그들이다. 이외에도 원내에 몇 개 정당이 있기는 하지만 이 4대 정당만큼 영향력이 크지는 않다.

틀:자유당 (아나 이란)보수자유주의, 입헌군주주의 성향의 정당. 주요 정당들 중에는 가장 자유주의적이다. 틀:이슬람 민주당이슬람 민주주의 성향의 정당. 경제문제에서는 좌파, 사회문제에서는 우파다. 틀:노동당 (아나 이란)사회민주주의 정당. 입헌군주정파가 주류이지만 공화주의자도 소수 있다. 틀:입헌당 (아나 이란)국민보수주의, 입헌군주주의 정당. 황정 유지에 가장 열성적이다.

수상과 내각

틀:역대 이란 제국 수상 이란의 수상은 이란 내각의 1인자로, 이란의 행정부 수반이다. 명목상으로는 샤한샤의 임명을 받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의회에서 선출된다. 임기는 4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이란 제국 내각은 이란의 행정부다. 내각은 수상 1인, 부수상 1인, 내각사무장[11] 1인, 그리고 국무상들로 구성된다. 과거에는 수상이 국무상을 겸하기도 했으나[12] 현재는 부수상만이 국무상 자리를 하나까지 겸할 수 있고 수상과 내각사무장은 국무상을 겸할 수 없다.

경제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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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부셰르의 정유공장

이란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산업은 에너지 산업이다. 석유 산업과 가스 산업이 이란에서 가장 큰 두 가지 산업이며 에너지 산업은 이란 GDP의 18%를 차지한다. 추가 매장지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란에는 약 1,600억 배럴의 원유와 약 34조 입방미터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세계 4위의 매장량이다. 석유 매장지는 이란 서남부에, 천연가스 매장지는 남부와 페르시아만에 집중되어있다.

의외로 이란에서 발달된 산업은 자동차 산업이다. 자동차 산업은 이란 GDP의 10%와 전체 고용의 4%를 담당하고있다. 이란의 자동차 생산 기업인 이란 호드로는 매년 백만 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한다.

농업

이란은 땅이 척박하여 전체 국토의 12%만이 농지로 쓰이고 있으며, 이중에서 1/3은 관개시설에 의존한다. 식량작물로는 주로 밀과 보리가 재배되지만 북부 카스피해 연안 일부지역에서는 쌀이 재배되기도 한다. 지난 30여 년 간 상업적 농업의 도입과 대규모 투자로 농업이 나름 크게 성장했다. 농업은 이란 GDP의 약 13%를 차지한다. 하지만 상업적 농업 하에서 재배되는 작물이 대부분 환금작물이다보니 식량 자급율은 오히려 감소했다.

서비스업

이란은 서아시아 국가 중 가장 튼튼한 3차 산업 인프라를 가지고있다. 금융업과 유통업이 매우 발달해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4차 산업 역시 활황 중에 있다.

무역

이란의 최대 수출 품목은 석유와 천연가스다. 경공업품과 화학제품 역시 주요 수출품목이다. 대신 이란은 반도체, 전자기기, 농산물 등을 수입한다. 주요 교역대상으로는 유럽연합, 아태연합, 파키스탄, 미국, 러시아 등이 있다.

교통

이란은 선진적인 교통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전국에 고속도로와 철도가 거미줄처럼 깔려있다. 고속철도 역시 조요 도시들을 연결하고있으나 인구가 적은 동부 지역에는 교통 인프라가 비교적 부족하다.

대도시들에는 모두 지하철이 있으며 수도 테헤란에는 7개의 노선이 운영되고있다. 과거에는 트램이 시내를 돌아다녔으나 2000년대 들어서 대부분 사라졌다. 2013년, 테헤란을 필두로 이란 전국에서 지하철, 버스 환승제가 도입되었다.

이란 남부의 항구도시 부셰르와 반다르아바스에는 대규모의 항만시설이 있어 이란의 무역항 역할을 수행하고있다.

사회

종교

문화

교육

외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이라크와의 관계

1990년대 이전까지 양국은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80년대 이란은 반황정 반란을 진압하고 국가를 재건하기에 바빴고 당시 이라크 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은 세속주의 강대국인 이란과 굳이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1990년 걸프전이 발발하자 이란은 미국을 위시로 한 다국적군에 협력했고 이 때부터 이라크 후세인 정권과 이란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2003년에 미국과 영국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를 찾겠다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자 치안유지부대를 파병했다. 2011년 공식적인 종전과 함께 모든 이란군 부대가 철군하려 했으나 이라크 정부가 요청으로 여전히 소수의 병력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다.

현재 이라크 정부가 시아파 정부인지라 양국은 나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있다.

이란은 이라크와의 무역에서 대규모의 흑자를 유지하고있다. 이라크의 수출액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게 석유인데, 이미 이란에 석유는 넘쳐나기에 이란이 이라크로부터 수입할 것은 거의 없는 데에 반해 이라크는 이란으로부터 사올 공산품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이란 정부는 이라크에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라크에 약간의 무역 특혜를 부여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아태연합과의 관계

아프가니스탄과의 관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은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상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 전복을 시도했을 때 이란이 개입하여 쿠데타를 좌절시켰기에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이란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양국은 PIOTA 창립국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에 주로 크롬, 코발트, 금, 구리, 철 등의 광물자원을 원석 형태로 수출하며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에 주로 전자기기, 기계장치, 자동차 등의 공산품을 수출한다. 아프간산 광물은 이란 공업을 뒷받침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튀르키예와의 관계

군사

틀:현대 이란의 대외 분쟁 이란 제국군(Imperial Forces of Iran)은 이란의 국군으로, 약 15만 명의 상비군과 10만 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고있다. 원래는 상비군이 더 많았으나 군사지원 분야를 외주에 맡기는 경우가 늘면서 전반적인 군 규모는 줄었다.

명목상 통수권자는 샤한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수상이 통수권을 행사한다. 감독권자는 국방상, 군령권자는 합동참모의장, 군정권자는 육군ㆍ해군ㆍ공군 참모총장이다.

군사사

이란 제국군은 카자르 왕조 이란군을 승계한 조직이다. 팔라비 1세는 개혁을 통해 군 역량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1941년 영국과 소련이라는 슈퍼파워가 침공하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1941년 즉위한 팔라비 2세는 막대한 오일머니와 경제성장으로 벌어들인 돈을 통해 본격적으로 군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또한 미국 군사고문단을 초청하여 현대적인 훈련을 지원받았다. 그 덕에 이란은 영ㆍ소 침공 당시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대를 건설할 수 있었다.

1973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우드 칸이 이끄는 공화파 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란 정부는 이란에 우호적인 아프간 국왕 모하마드 자히르 샤를 돕고 소련의 영향력을 축출하기 위해 개입을 결정했다. 이란 공군의 F-4 전폭기가 쿠데타군의 거점을 공습했고 아프간으로 진입한 기갑부대는 왕당파 부대와 함께 카불로 진격했다. 몇몇 방어거점에서 쿠데타군이 저항하였으나 진압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쿠데타군을 갈아버렸다. 결국 다우드 칸이 소련으로 망명하고 진압군이 카불에 입성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왕정이 복고되었다.

이라크전 당시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치안 유지 작전에 1개 여단과 기타 부대 등 약 5천 명을 파병했고 2011년공식적인 종전 후에는 1개 해병대대 등만을 남겨두고 철군했다. 2014년 경부터 IS의 세력이 커지며 이란의 우방국인 이라크의 영토를 잠식하자 다시 대규모 파병을 단행했고 2015년 2월에는 3개 전투 여단 등 약 1만 4천 명의 병력이 이라크 북부에서 IS 격퇴전에 투입됐다.

장비

이란군 전차 보유 수량
기종 용도 제조국 보유 비고
M1A1SA 주력전차 미국 300
M1A2 주력전차 미국 240
M60A3 주력전차 미국 600 [13]
M48 주력전차 미국 600 [14][15]
이란군 장갑차 보유 수량
기종 용도 제조국 보유 비고
M2 브래들리 IFV[16] 미국 780
라텔 90 IFV[16] 남아공 50
M113 APC[17] 미국 940
VAB APC[17] 프랑스 360
라텔 20 APC[17] 남아공 300
이란군 전술기 보유 수량
기종 용도 제조국 보유 비고
F-16[18] 다목적 전투기 미국 197(+50) [19]
F-15[20] 전투폭격기 미국 59(+30) [21]
F/A-18 함재전투기 미국 234 [22]
F-4 전폭기 미국 192 [23][24]
F-5 경전투기 미국 143 [25][26]

여담

파일:적사자태양기.svg
이란판 적십자기인 적사자태양기
  • 의료 면에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적십자가 아닌, 적사자태양기를 사용한다. 엄연히 제네바 제 I협약 제38조 2항에 따른 공식 적십자사 문양이다.

각주

  1. 출처
  2. 미승인국
  3. 대신 의자를 사용토록 했다.
  4. 다만 일련의 세속화 정책은 이슬람 성직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5. 독일 외교공관 직원들과 그 가족들
  6.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7. 그 예로, 1968년 당시 이란의 원자력 과학자 네 명 중 한 명이 여성이었다.
  8. 자유운동 측은 마음 같아서는 자유운동 소속 인물을 수상에 임명할 것을 요구하고는 싶었으나 그렇게 된다면 양측 간의 밀약을 만천하에 공개해버리는 것이기에 개혁파이지만 자신들과 접점이 없는 바크티아르를 수상에 추천했다.
  9. 제청하는 대상은 당연히 샤한샤
  10. 이 의결이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역시 샤한샤의 수결이 필요하다.
  11. 내각의 일상적 사무를 처리하고 부서 간 갈등을 조정하는 직책
  12. 모사데크가 2기 내각 시절 수상과 국방상을 겸임했다.
  13. 2035년까지 전량 비축
  14. 전량 비축
  15. 2035년까지 전략 퇴역
  16. 16.0 16.1 보병전투차
  17. 17.0 17.1 17.2 보병수송장갑차
  18. C/V
  19. 3기 손실
  20. E/EX
  21. 1기 손실
  22. 6기 손실
  23. 8기 손실
  24. 2030년까지 전량 퇴역 예정
  25. 7기 손실
  26. 2035년까지 전량 퇴역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