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국의 역사
灣華史
선사시대
先史時代
B.C 115,000~ B.C 500
구석기시대
舊石器時代, B.C 115,000 ~ B.C 6,000
환문시대
丸紋時代, B.C 6,000 ~ B.C 1,000
가로시대
城國時代, B.C 1,000 ~ B.C 500
제 1차 통일왕조시대
第一次統一王朝時代
B.C 500 ~ 302
이비광
理非廣, B.C 500 ~ 302
전도시대
戰島時代代
305 ~ 531
전도6수국
戰島六秀國, 305 ~ 531
다마, 운사, 후이비광, , ,
전도소국
戰島小國, 305 ~ 531
정, 호,횡, 한, 필, 각청, 천축, 감경, 백식, 조보달, 훈앵, 봉릉
행경, 골평, 동주, 지산, 홍, 여, 악, 숭, 정궁, 경내궁, 한악, 채기, 월견
제 2차 통일왕조시대
第二次統一王朝時代
531 ~ 722
다마국
성산씨 정권

多麻國, 531 ~ 722
운사국
云私國, 305 ~ 1441
동서시대
東西時代
722 ~ 1332
다마국
대군집정

大君執政, 722 ~ 740
경도의 변 (740년)
몽야마
夢野馬, 722 ~ 1080
방서국
邦瑞國, 740 ~ 894
호락의 변 (894년)
개령국
凱領國, 740 ~ 894
이씨반정 (928년)
성사명
城師命, 929 ~ 1328
기해민란(950년 ~ 990년)
마원전쟁 (1287년 ~ 1288년)
동서전쟁 (1319~1328년)
아사모
亞射毛, 1080 ~ 1332
동서전쟁 (1319~1328년)
제 3차 통일왕조시대
第三次統一王朝時代
1332 ~ 1920
만화국
灣華國, 1332 ~ 1701
만화국
양씨정권

洋氏 政權, 1701 ~ 1873
대만화제국
大灣華帝國, 1873 ~ 1920
왜제습침(1920년)
호국전쟁시대
護國戰爭時代
1920 ~ 1945
만화국 출궁조정
灣華國 出宮朝廷, 1920 ~ 1945
만화국 유신정부
灣華國 維新政府, 1921 ~ 1945
만화공산당
灣華共産黨, 1925 ~ 1945
조국공민군
祖國公民軍, 1925 ~ 1945
건국내전시대
建國內戰時代
1945 ~ 1952
만화국 복궁조정
灣華國 復宮朝廷, 1945 ~ 1952
만화공산정부
灣華共産政府, 1945 ~ 1950
만화항결전군
灣華抗結戰軍, 1945 ~ 1952
현대시대
現代時代
1952 ~ 현재
만화국
灣華國, 1952 ~ 1960
4.4 군사정변 (1960년)
만화공화국
灣華共和國, 1960 ~ 1969
만화국
灣華國, 1969 ~ 현재
이비광/니일관
理非廣/尼逸冠
기원전 500년(?)3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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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세력도
수도 이미타(? ~ 100)
요해진타
정치
공용어 만화조어
정부 형태 제정일치
기원전 500년(?)
171년 ~ 204년
251년 ~ 306년
왜칠문필랑(?)
시태왕
몽종왕(말대)
역사
 • 추정 건국 기원전 500년
 • 한풍(漢風) 170년대
 • 5장의 반란 302년
기타
국교 무속신앙
(고대 에리스교)
현재 국가 만화국 만화국


이비광(理非廣, 기원전 500년(?) ~ 306년)은 왜칠문필랑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만화국 최초의 국가이다. 사학계는 탐라와 쿠마소 계통이 남하하면서 만들어진 만화국 북부지역의 지배세력일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문헌상의 기록에 따라 실존했던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전해내려오는 관련 문헌이 밖에 없는데다가 한풍 이전의 기록방식에도 문제가 있어 그 실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호

리비광(理非廣)이라는 국명은 기원전 500년경 탄생한 왜(矮)씨통일왕조의 국명이다. 정확한 발음과 유래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지금은 사멸된 만화조어(灣華祖語)의 어휘 중 하나인 '나라'라는 뜻에서 비롯된 걸로 추정된다. 음차된 '理非廣'은 이비광의 유이한 고사인 '역지(歷紙)'에서 나오는 단어로, 중국 '한서(漢書)'에선 니일관(尼逸冠)국 이라고 표기되었다. 이 표기는 이후 운사도에서 계속 정착되어 현재도 만화본토를 부르는 '니히루쾅'이란 명칭으로 남았다.

역사

건국

기원전 500년경, 만화도에 청동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족통합으로 인해 여러 소국이 생겨났으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다마도 남부와 만화도 북부에 걸쳐서 일어난 '이비광'이라는 국가였다. 이비광은 가장 선진화된 청동기 기술로 만화국 전역을 정복해나갔으며, 초기에는 대표적인 지도자가 아닌 그저 여러 소국의 연합체였으나, 정복국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왕조국가로서 변모하였다. 이비광국은 800년 동안 유지되어오며 전쟁이나 반란, 외란없이 통일왕조를 유지 해 왔는데, 이 통일왕조는 뒤이어 발생하는 다마국 왕조만화국 통일황조와 더불어 만화사 3대 통일왕조로 불리운다. 이비광국의 왕조는 제 1차 통일왕조로 불리운다.

초기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비광국이 탄생 할 때 까지만 하여도 일본계가 주류였다고 한다. 대부분이 큐슈의 쿠마소와 비슷한 계통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비광국의 왕은 '타카마웨(茶加馬艾)'로 불리었으며, 이후 이어지는 제 2, 3차 통일왕조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 한다. 이비광은 성립 이후 6대 타카마웨인 왜촌찰(矮忖察) 대왕 이전까지 주변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해당 소국의 세력가를 봉건영주로 앉히는 등 초기엔 봉건국가로서 주변을 통일하였으나, 이후 왜촌찰 대왕의 왕권강화 정책을 통해 스스로가 세운 봉건제를 타파하고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이비광국은 주변국과의 교류가 극히 드물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11대 타카마웨 왜팽칠(矮澎漆)은 제주도를 침공하여 이비광령으로 삼고 탐라 나을(羅乙)을 영주로 임명하여 '탐모라나을방'을 세우고 관리하였으며, 9대 타카마웨인 왜즐미무칭(矮櫛未巫秤)은 규슈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서진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말이 통하지 않던 관계로 별 소득은 없었다. 서진은 이비광을 '남만(南蠻)'으로 분류하였으며, 국가 형태가 갖춰졌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모를 정도로 이비광에 무관심 하였다.

이비광에 관련된 정보는 사학계에서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서적이나 유물의 부재에 기인하는데, 다마국이나 전도시대의 유물과 서적은 차고 넘치는데 비해 이비광에 관련된 서적은 성산씨 정권 때 유물로서 발견된 이비광의 역사를 기록한 '역지(歷紙)'와 이비광의 대외 활동 기록을 기록한 '교부(交簿)'가 전부인데다가 유물은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역지와 교부 마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문법적으로 너무나도 이상한 한문으로 작성되어있기 때문에 암호해독 수준으로 해석이 어려운 것도 문제이다. 이에 대한 원인은 바로 이비광의 한자사용방법에서 기인한다. 이비광에 한자가 전해진 것은 기원후 100년 전후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초기 이비광은 한자가 한 글자마다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그저 중국에서 전래되어오던 때의 음과 형태만이 전해져 내려와 200년대 이후로 한풍이 전해지기 전 까지는 그저 고대 만화어를 한자음을 빌려 음차하여 쓰는 형태로 한자를 활용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70년대 이후부터 한풍(漢風)을 받아들이면서 한자의 사용방법, 이름의 형태, 복식의 형태, 관직, 정치, 예법의 형태등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으며, 한풍의 전래과정에서 다마도로 한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다마도로 유입된 한족들은 현재는 다마민족에 완벽히 동화 되었으나, 사학계는 이들의 유입을 이래한인의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후기

251년부터 즉위한 제 15대 타카마웨 몽종왕의 시대에 있어서 북부쪽에서 '랑다우'라 불리는 전무후무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이비광은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농지가 파괴되고 수만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등 그 피해가 엄청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지진은 이후 '신의 계시'로 까지 신격화 되어 랑다우의 신을 섬기고 이비광국의 멸망을 외치며 서부에서부터 일어난 '판파무라야의 난'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몽종왕은 이를 요해진타 성의 영기(靈氣)가 다하였기에 악재가 나는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가며 새 궁성을 지어 하늘의 노여움을 잠재우겠다며 나섰고, 이에 따라 새 궁성을 짓기 위해 노동력의 징발과 가렴주구한 세금정책을 통해 백성을 고통받게 하였다.

몽종왕은 신 요해진타 성의 착공에 앞서서 성을 지을 땅에 대한 신의 허락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3000여명을 순장하고, 신에게 공양한다는 명목으로 신하 혹은 장군들의 아내를 삶아 조장하는 등 정신나간 짓거리들을 일삼으며 민심을 잃었다. 신 요해진타 성의 건설이 진행되면 진행 될 수록, 신하들의 반감은 날이 갈 수록 커져갔으며 사정은 더욱더 쇠퇴하여갔다.

이 상황 속에서 반란을 모의하던 세력이 '오장(五將)'이었다. 오장은 판파무라야의 반란을 진압하여 몽종왕으로부터 전 이비광을 5곳으로 나누어 방어와 세력진압을 명받고 군벌을 형성하던 세력들로, 노무군(盧務君), 진새나리(辰塞羅吏), 흑범돌(黑凡突), 양학래(陽鶴崍), 오패천(吾覇薦) 5인의 무관 세력들은 몽종왕의 압제에 대해 계속하여 벼르고 있었으며, 각자의 군벌을 기반삼아 힘을 합쳐 왜씨 왕조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다 301년 몽종왕이 시국을 바로잡아달라며 간청을 온 20인의 의환(義宦)을 궁 내에서 무참히 참하는 사건 (왜씨궁의 변) 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5장의 반란이 일어났다.

멸망

5장의 반란을 계기로 몽종왕과 그를 비롯한 왕실은 척살당했으며, '왜(矮)'씨 성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참을 당하였다. 살아남은 왜씨는 중국으로 넘어가 숨을 부지하였으며, 이로서 이비광은 멸망하였다.

이비광의 멸망이후 5장은 새로운 국가를 새우고자 하였다. 동부의 진새나리 장군이 주축이 되어 연합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다마국을 본거지로 두고 있던 오패천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오패천 장군은 축출되어 다마도의 독립국가인 다마국을 세웠으며, 나머지 4장은 합께 연합하여 '운사국'을 세웠다.

도읍지

초기 이비광의 도읍지는 북도의 이미타시였으나, 이후 전국을 통일하게 되면서 만경 지역에 요해진타성을 짓고 천도하게 되었다. 이는 비단 도읍 뿐만 아니라 중심지역의 변화도 가져왔는데, 기존의 이비광의 중심지역은 큐슈와 가까운 지역인 다마도의 북동부 쪽이었으나, 이후 현재 이비광현과 만경이 위치한 관동평야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만경도 위치설을 주장해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만경도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이비광현요해진타시가 더 가까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기존에 요해진타성의 위치로서 거론되어온 곳은 만경의 나카이시였으나, 나카이시의 요해진타성 유적지보다 더 이비광과 가까운 시대에 존재했던 유적지가 2007년 이비광현 마요가라시(現요해진타시)에서 발견 된 것이다.

같이 보기

주요 인물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