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철통같은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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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고황제 이단
太祖 高皇帝 李旦

본명
이성계(李成桂)
종족
인류 사피엔스 계열
국적
대한제국
일본국
성별
남성
가족관계
태종 이방원 (5남)
세종 이도 (손자)
광무황제 이환 (후손)
융희황제 이척 (후손)
황태자 이강 (후손)
영친왕 이영 (후손)
금친왕 이휼 (후손)
이승만 (후손)
그 외 모든 한국인
생년월일
1335년 11월 4일
출생지
쌍성총관부 화령 준원전
직위
대한제국 태상황
미합중국 미스터 리 명예이사
대한-일본 이중제국 S급 히어로
대한-일본 이중제국 특수첩보요원
소속
대한제국 황실
특이사항
영속자
상태
생존


개요

태조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 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 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명장이자 조선을 건국한 조선왕조의 창업군주이다. 한민족 출신의 영속자이며, 현재 드러나있는 영속자 중 인류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존재이다. 또한 한민족의 조상 그 자체로, 대부분의 현대 한민족은 그의 핏줄을 물려받아 원거리 무기 사용에 어느정도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생애

고려시대

장막 속에서

고려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국왕인 이성계는 태생부터 비범하였다. 고대 환 제국 한씨 황실의 직계 남계 후예인 전주 이씨 가문, 그 중에서도 금나라에게 귀부한 이안사의 고손자로 출생하였다. 어릴 적, 그는 우연하게 온 세상이 보랏빛으로 가득 차 있는, 흔히 장막 너머라고 알려져있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괴이한 경험을 겪었고, 수상한 힘을 얻어서 나왔다.

그 이후로 이성계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보여서는 안 될 것이 보였고, 느껴져서는 안 될 것이 느껴지게 되었다. 운동으로 단련하며 마음을 다스리던 이성계는 홀린 듯이 가문의 가보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활을 꺼내들었고, 아버지 이자춘에게 활을 양도받은 후 운명을 깨닫고 무력을 수양, 고려의 장수로 출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괴이 토벌

이성계는 장막 속을 넘나들면서 자신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능력의 유용함을 알았으나, 또한 그 능력의 위험성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자들이 가끔씩 고려 곳곳에 나타나면서 해를 끼치자, 이러한 괴이 현상을 홀로 토벌하였다. 그리고 이런 이성계의 모습을 지켜본 반 괴이 세력, 흔히 유교 성리학자로 통칭하는 사대부들이 이성계와 접촉하여 괴이를 토벌하는 구마사라는 단체를 창립하면서 이성계는 점차 힘을 기르고, 정치적으로도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눈 여겨 본 공민왕이 직접 이성계를 등용하여 장수로 임명, 그의 무력으로 여러 외적을 토벌하게금 하였다.

고려의 장수로 출사한 후, 당시 국왕이던 공민왕의 명을 받아 이성계는 위로는 홍건적, 나하추, 여진족, 원나라와 맞붙었고, 아래로는 왜구와 수적들과 싸우면서 위엄을 떨쳤다. 공민왕의 요동정벌계획에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심양 땅을 밟은 적도 있으니, 그는 백전불태의 명장이었다. 내정은 신돈이 보좌하고, 반도는 최영이 지키며, 외적은 이성계가 무찌르니 고려는 다시금 부흥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고려를 멸망시킬 자

그러나, 공민왕이 총애하던 신돈이 고대 조선을 멸망시킨 어둠의 일족, 기자였다. 그는 공민왕의 육신을 빼앗아 성녀 반야와의 사이에서 '우왕'이라는 존재를 낳고 그 몸으로 혼을 옮겨 가짜 국왕 행세를 하며 완전생물로 진화하기 위해 한반도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최영을 지배시킨 후 이성계를 제거시키기 위해 '2차 요동정벌'을 실시하게금 하자, 사해용왕 왕건의 적통 중 한 명이자 사돈, 친구 왕요와 함께 구국의 결단인 우왕을 몰아내고 임시로 '우왕'의 분신체를 '창왕'으로 옹립하였고, 시간이 지난 후에 왕요를 고려의 국왕으로 옹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기자에게 참살당한 공민왕의 제사를 지내주고, 강제로 기자에게 임신당한 성녀 반야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허나 이성계에게 닥친 시련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친우 왕요가 권력을 잡은 후, 왕씨 집안에서 왕권을 잡으면 간혈적으로 나타난다는 광증을 보이며[1] 측근과 태자까지 죽이려하자 결국 이성계는 왕요를 제압하고, 대신에게 추대를 받아 왕으로 즉위한다. 이 과정에서 왕씨 일가의 훗날 처분에 대해 갑론을박을 나누었고, 끝내 신진사대부의 강경파(급진사대부)들은 온건파(온건사대부)들이 왕씨의 피를 잇고 있다 생각하여 온건파를 대학살하는 '선죽교 학살 사건'[2]이 일어나게 되며 조선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무인정사

1392년, 환 제국의 적통 겸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국호를 대조선국으로 해 국왕으로 즉위한 이성계는 정도전과 여러 신하들을 이용하여 고려, 이제는 조선으로 불리울 나라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최우선으로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고려 말 있었던 수 많은 폐단을 없애기 시작하였다. 정도전과 정안공(태종) 이방원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 개혁은 신생 조선에 대한 지지를 높여주는데 일조하였고, 이씨 왕조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후계자를 정하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성계의 이방원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였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이방석에 대한 총애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이 계속 조선을 통치하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혹시나 대비하려는 부분에서 이방석을 태자로 삼았다. 이방원은 분하였으나, 자신보다 젊고 강한 아버지의 뜻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1398년 이방원이 형 영안공(정종)을 방문하러 가는 길목에, 우연히 동생 이방석의 처소를 지나치게 되었다. 이방석의 처소에서 은밀하게 소리가 나고 있었기에, 그곳을 몰래 엿보았고, 이방원은 곧 이방석이 이성계를 영원불멸할 조선의 통치자로 만들겠으나, 소위 '황금옥좌'라고 불리우는 곳에 앉혀만 두고, 이방석이 태자로서 대리청정을 하는 섭정체제를 정도전과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음을 듣게 되었다.

결국 이방원은 효심과 애국심으로, 그리하여 만들어질 체제는 언젠가 붕괴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 사병을 꾸려 이방석과 정도전 일파를 급습, 곧 그들을 처치하였다. 이성계는 이에 크게 노하여 이방원에게 호통을 쳤으나, 이방석이 준비한 계획과 자신의 생각을 이성계에게 피력하고, 이성계의 불멸통치는 궁극적으로 조선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논파하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아 살아있던 차남 영안공에게 양위하여 고향인 회령으로 돌아갔다.

회령으로 돌아간 후 이성계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나, 자신의 충신이었던 조사의가 이성계의 뜻을 지레짐작하여 조정을 공격하는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나, 이성계는 이를 직접 저지하였다. 이후 함흥에 머물면서 자신을 복귀시키러 찾아오는 차사들에게 친히 술을 대접하고 그냥 돌려보내는, 소위 말하는 '함흥차사'라는 고사를 직접 만들었다.

고뇌를 하던 끝에 이방원은 자신이 조선에서 살아있으면 아들 이방원이 말하였던 것처럼 추종자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토록 혐오하던 불교의 폐단처럼 굴러갈지도 모른다는 악몽을 꾸게 되었고, 결국 1408년 정종과 태종에게 자신의 미래 향방을 알려주고는, 홀연히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향하였다. 공식적으로 이 시기에 이성계는 사망했다 처리되었고, 국장도 성대하게 치뤄졌다. 물론 안에는 시신이 들어있지 않고, 이성계가 입던 옷가지와 아버지 이자춘의 모피만이 들어있었다.

여정

중국

조선에서 나온 이성계는 중국 북경으로 향하였다. 중국으로 향한 이성계는 북경의 신문물에 감탄하고는, 중화의 곳곳을 둘러보기로 결심하였다. 돌아다니면서 수 차례 나온 괴이들과 도적들을 깨부수며 진격한 이성계는 여러 현상들을 목격하고,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거란이 원정을 나갔다는 저 멀리 서쪽으로의 여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이성계는 조선으로 돌아가 상황이 어찌되었는지 확인하였다. 1422년 새해 귀국한 이성계는 아끼던 손자 이도와 죽기 직전인 아들 이방원과 재회하게 되었다. 노쇠한 이방원과 젊디 젊은 이성계, 두 부자는 수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가 가지고 있던 앙금을 풀었다. 이방원은 죽기 전 이도와 제 후손을 부탁하였고, 이성계는 그들을 보우하겠다고 답해주었다.

이방원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 이성계는 이도에게 자신은 서쪽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이도는 화들짝 놀라며 반대하였으나, 이성계의 고집을 막지는 못하고 동의하였다[3]. 1422년 가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를 밟으며 서쪽으로 향하였다.

명나라 경사를 관람하기도 하였고, 저 멀리 북쪽의 몽골이라는 초원을 관람하기도 하였고, 그가 믿는 불교의 성지인 천축까지도 가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쪽 땅은 남아있었다. 이성계는 서쪽으로 더 나아갔다. 때는 1428년이었다.

서정

처음 이성계가 유럽이라는 땅을 밟았을 때는, 그러한 자각도 없었다. 그저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르는 도시에서 강을 건넜다는 자각만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더욱 서쪽 깊이 들어갔을 때 감상은 사뭇 달랐다. 조선과 완전히 다른 지방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서양의 의복과 의관, 언어를 익히면서 이성계는 더 멀리 서쪽으로,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 나아갔다.

그러나 시대는 혼란하기 그지 없었다. 1431년, 이성계가 콘스탄티노플에 발을 디딘 그 당시에는 튜튼 기사단이 검은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였을 때였다. 이성계 또한 검은마법사의 군세의 사이함을 꿰뚫고는, 이 또한 괴력난신임이라 여겨 구마사를 운용하던 당시처럼 이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를 이뤄내기 위해 이성계는 검은마법사와 대적하는 영웅들과 협력하게 되었고, 아르크의 성녀 잔 다르크, 왈로니아에서 무쇠 손의 괴츠, 베르세르크, 코치야 사나에 등과 우정을 나누면서 토벌을 개시하였다.

1439년, 기나 긴 격전 끝에 연합군은 아카이럼과의 결전을 통해 프랑스에서 검은마법사의 군세를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성계도 연합군의 편에 서게 되면서 세상의 서쪽 끝, 프랑스 보르도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목표를 이룬 셈이 되었다. 이성계는 이를 끝으로 십자군 연합과의 결별을 택하면서 조선으로의 귀환을 택하였다.

1456년, 17년이라는 여정 끝에 프랑스에서 이성계는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성계는 기억 상 살아있을 손자 이도를 만나러 갔으나, 안타깝게도 이도는 1450년 이미 붕어한지 오래였다. 이성계는 찢어지는 마음을 달래고는, 당시 왕이었던 증손자 세조에게 위로를 받은 후 1457년 4월 고손자 단종의 얼굴을 잠시 본 후에 또 다른 여정을 이어갔다[4].

해정

이번에는 세상의 서쪽 끝을 보았으니, 바다의 끝을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해금령으로 인해 바닷길이 막히자 어쩔 수 없이 이성계는 가장 인맥이 많고 언어도 배워서 통하는 저 멀리, 유럽으로 향하였다. 1487년, 천천히 관광을 하면서 늦게 유럽에 도달하였다. 빈, 파리, 마드리드를 거치면서 대도시에 수 년간 머물며 여독을 풀은 이성계는 옛 영웅들과 인사도 나누고, 해후도 풀 겸 여러가지 담화를 나누었다. 이성계가 바닷길을 찾아 나선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한 남자가 신항로를 탐색하러 간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성계는 이에 흥미가 돋아, 콜럼버스와 함께 여정에 나섰었다. 항해의 짜릿함을 알게 된 이성계는 이후 1498년에 또 다른 뱃사람, 바스쿠 다 가마의 함선에도 탑승하여 자신이 여행을 했던 인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이성계를 알아본 몇 인물들이 있어 소란이 일기도 했었지만, 다른 사람 행세를 한 끝에 들키지는 않고 넘어갔다.

수 차례의 바닷길을 탐사하면서 이성계는 직접 상단을 꾸려 운영하였다. 신출귀몰한 활 실력으로 해적의 배들은 격침하였고, 백 수십살이 넘은 세월 동안의 훈련으로 다져진 몸은 그야말로 호랑이도 골로 보낼 위세였다. 그러면서 이성계는 수 십년간,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면서 고향 조선 땅과는 동떨어진 채 살아갔다.

임진왜변

1586년, 문득 조선 땅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진 이성계는 가지고 있던 상단을 잉글랜드 출신 현지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 리[5]에게 물려준 후, 함선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1588년 익숙해진 뱃멀미를 이끌고 조선 강화도 땅에 도착한 이성계는 자신을 해적이라 오해한 조선 병사들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당시 국왕이었던 선조 이연을 만나게 된다. 이연은 잡혀온 이가 자신의 조상인 태조임을 깨닫게 되자 은밀하게 그를 풀어주었고, 한성에 자택을 마련하여 그곳에 머물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눈치빠른 후손의 대응 덕에 기분이 풀린 이성계는 먼 후손에게 지구본이라는 물건을 주었고, 자신이 그동안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간단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편히 조선에 머물던 이성계는, 1592년 동래에 왜적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별 일이 아니겠거니 하던 이성계는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이윽고 알게 되었고, 다이묘의 대대적인 폭주로 일어난 임진왜변을 막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순신이라는 신분으로 위장하여 후에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다이묘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임진왜변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후, 이성계는 선조의 부탁을 받아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다 막부의 칼춤이 막 이뤄지고 있을 무렵에 조선에서 사신단이 오니, 오다 막부는 이들을 정성것 맞이하였다. 이성계는 통신사 인원들과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풍경을 목격하였고, 통일된 일본에 매력을 느끼면서 이곳에 수년간 머물었다.

근대

다시 들어간 장막

1608년 조선 선조가 갑자기 실종되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이성계는 광해군과 협조해 조선구마사를 동원하여 선조의 행방을 조사하게 되었다. 사건을 조사하던 중, 본관인 전주로 향하게 되었을 때, 이성계 일행에게 급작스럽게 괴이가 덮쳐왔고, 이를 무찌르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괴이가 죽으면서 이성계 일행을 죄다 흩어놓은 탓에 이성계는 길을 한참 헤매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길을 찾으면 찾을 수록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 한번 경험한 곳인 장막 안의 세상이, 이성계가 떨어진 곳이었다. 탈출로, 퇴로를 이성계는 끝 모를 세월 동안 찾았다. 장막 속에서 자신을 노리는 괴이들과 혈투를 벌이고, 없는 식량을 만들어내면서 버티고 버텼다.

장막 속에서 궁지에 몰려 죽을 위기에 쳐한 끝에, 빛을 찾아낸 이성계는 그곳으로 몸을 던져 장막을 빠저나오는데 성공하였다. 나온 후에 이성계는 시간을 알아보았으나, 자신이 장막 속으로 들어간 후 정확히 100년 뒤라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곧 상황을 받아들이고, 조선의 상황과 마지막으로 흩어졌던 구마사,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임무를 당대 임금에게 보고하러 갔다.

장막 밖의 세계

이성계가 다시 본 조선은 충격적이었다. 1620년 조선구마사는 자신이 한 때 무찔러 만주로 패주시킨 '금태양'의 후손, 애신각라 씨족의 청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 사실상 해체당하였고 광해군은 재정을 낭비하면서 자신이 원하는데로 국정을 운영하다 조카 능양군(인조)에게 축출, 그렇게 왕위에 오른 인조는 사방으로 조선의 재정상황을 복구시키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결국 애신각라의 청나라에게 굴복하는 수치를 겪게 되었다.

1710년 자신의 후손인 숙종을 만나 최후의 조선구마사 일원으로 선조 이연 조사결과를 보고한 이성계는 숙종의 부탁을 받아 조선구마사의 재설립과 왕권 강화계획에 동조해달라는 청을 받게 되었다. 괴이를 빠르게 토벌하지 못해 조선이 굴욕을 겪게 되었다 죄책감을 느낀 이성계는 구 조선구마사를 이은 신 조선구마사를 창설하여 새로이 조직을 만들고, 괴력난신을 토벌할 인재들을 직접 채용하였다[6].

이후 할 만큼 자신의 역할을 다 해주었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유럽으로 향하였다. 백 하고 오십여년만에 다시 보는 유럽은,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이성계는 찬란히 빛나는 전기와 기계문명을 보았고, 이러한 문명의 발전에 감탄하면서 이를 향유하기 위해 돈을 만지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이름난 생 제르맹 백작의 행세를 하면서 큰 돈을 벌게 되었다.

이후 유럽을 떠나 새로 개발되고 있다던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새로이 땅을 개척하고 땅 주인으로 자리잡았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 때 13개주 군의 장교로 참전하여 대륙군 승리에 큰 공을 끼쳤다. 노예 플랜테이션을 통해 달달하게 남부에서 목화를 재배하기도 하였고, 아들인 제임스 리의 후손을 남부로 불러들여 리(Lee) 가문 집성촌을 만들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수 십년간 머물면서 금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853년 USS 미시시피 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는데 성공,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젊은 군주 이환의 치세 초반을 뒷받침 해주었다. 조청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선봉에 서서 심양을 함락시키는데 공훈을 세웠고, 미국 재벌이던 후손 리 가문의 재력을 동원하여 조선 근대화 자금으로 후원해주기까지 하였다.

현대

일상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에 이성계는, 유럽으로 가는 개성공 이왕을 따라가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 당시의 무지막지한 핵무기에 제 한몸 간수하는 것만 겨우 성공하여 이왕을 지키는데 실패하였다. 실의에 빠진 이척의 원망을 듣고, 이성계는 한동안 공무에서 손을 때고 유유자적 삶을 즐기기 위해 한성에 600년 전통 맛집 성계탕을 세워 수 백년간의 세월동안 취미로 쌓인 요리실력을 뽐내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으며, 가끔씩 제국익문사의 요청 하에 이명인 올마이트 (All Might 成桂)를 쓰면서 S급 히어로로 괴이들을 퇴치하고 있다.

가족

이성계의 적통으로 할 것이라면, 그의 친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실상 1952년까지 내려오면서 한국인 그 자체가 이성계의 가족이 되었다. 길 가던 아무나 잡아서 DNA 검사를 해도 하나 쯤은 이성계와 맞는다.

  1. 이 광증은 현대 과학기술로 분석한 결과, 용혈은 광증과 강한 힘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용혈이 근친으로 누적된 왕씨는 특히 더 광증이 나올 확률이 높은 것 때문이라 밝혀졌다.
  2. 태종 이방원의 주도로 일어난 사건이며, 이성계는 이러한 학살에 매우 부정적이여서 후계자로 이방석을 임명했다. 후대에 DNA 분석 결과, 상당수의 온건사대부들이 왕씨의 핏줄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3. 이는 사실 연기고, 이성계를 원하는데로 부려먹고 싶었던 이도의 연기라고도 한다.
  4. 그리고 이성계가 사라진 후인 1457년 11월, 세조는 단종을 살해한다.
  5. 훗날 제임스 리의 후손이 미국으로 넘어가 로버트 E. 리 장군까지 이어지게 된다.
  6. 연암 박지원의 아버지 박사유 등의 인물이 대표적인 신구마사 일원이다. 이후 신 구마사는 현대 공안 9과로 이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