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시오의 역사
あきしお史
История Акисио

철검대 (鐵劍隊, 일본어: 鉄剣隊 (てっけんたい) 텟켄타이[*])는 센고쿠 시대 중이던 1586년부터 1884년 아키시오 제1공화국 건국 (정확히는 공화국 국회 개원일인 4월 1일) 때까지 존재한 아키시오의 정치·군사적 통치 기구이다.

철검대가 아키시오 일대를 통치하던 시대를 가리켜 철검대 시대라고 부르지만, 그 시점에 대해서는 일본 덴노가 철검대장에게 도슈 다이묘(東州大名)직을 내린 1601년이라는 설, 삼국의 난이 진압된 1603년이라는 설, 아니면 아예 철검대가 세워진 1586년부터를 그 시작이라고 본다.

철검대는 여태까지 일본의 식민지 내지는 영토 (아키시오의 율령국 항목 참조)로서 존재하던 이 지역에 '아키시오'라는 다른 정체성을 확립시킨 세력이다. 철검대는 신앙 전쟁에서의 정치적 승리를 통해 에도 막부와는 별도로 (명분 상일 뿐이었지만) 덴노와 조정의 지휘를 받는 군사 조직이 되었고, 1759년에는 아예 철검대장이 "아키시오 왕"(秋潮王, 아키시오노 키미)이라는 칙호를 하사받는다. 이로 인하여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거리도 멀고 누군지도 모르는 에도 막부와 조정에 대한 이질감이 싹텄다.

한편으로 철검대는 가톨릭 교회를 사실상의 국교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1] 아키시오에 가톨릭을 선교한 예수회와의 지속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에도 막부가 쇄국 정책을 펼친 것과는 달리 예수회의 주선으로 아키시오는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과 교류하였으며, 18세기 들어서는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 영국 등과도 무역을 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교류들은 아키시오의 그리스도교화와 서양 국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초 영국 상인이었던 가이 몽포르 (Guy Monfort)는 아키시오에 대해 다룬 자신의 책의 제목을 <프레스터 존의 후예>로 지으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는 아키시오를 극동의 예루살렘이라고 극찬하였다. (몽포르는 가톨릭 신자였다)

이름

철검대라는 이름은 후지시로 이케다 씨의 창업자 이케다 마사아키라가 자신의 군대 이름을 정할 때 "나는 녹슨 쇠칼로 시작하여 천하통일(=아키시오 통일) 목전까지 왔다. 녹슨 쇠칼을 들고 고전분투하던 시절을 잊지 않겠다"며 철검대라고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하였다. 그래서 깃발의 상징도 칼인데 녹슬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벌레가 파먹은듯한 자국이 송송 나있다. (..)

상징

아키시오의 국기인 해당화기, 정식 명칭 하마나스노 하타에 그려진 꽃무늬가 철검대의 문장에서 유래했다고 잘못 알려져있지만, 정확히는 후지시로 이케다 씨의 문장 (紋章)을 간소화한 것이다.[2]후지시로 시의 문장에는 간소화되지 않은 풀버전(?)이 들어가있다.

역사

철검대장

철검대장은 철검대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선출제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이케다 가문과 함께 철검대를 구성한 다이묘나 결혼 동맹으로 이어진 다이묘 (일명 고조쿠케 (豪族家))들이 모두 직접 입조하여 철검대장을 선출하였다. 물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장자상속으로 이케다 가문 내에서 철검대장을 뽑았다. 고조쿠케가 삼국의 난과 자하라의 난으로 유명무실해지고 세습 체제가 확립된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이러한 선출제도 유명무실해지고, 일단 세습 후보를 올려놓고 종친들의 승인을 얻는 형식으로 변모했다. 1884년 아키시오 제1공화국헌법 발효에 앞서, 이케다 테루히데가 철검대장직을 스스로 포기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선하면서 오늘날에는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갖고 있지 않은, 그저 후지시로 이케다 가문의 가문주를 가리키는 다른 칭호가 되었다.

1759년에는 덴노로부터 아키시오 왕 (일본어: 秋潮王 (あきしおのきみ))[3]으로 책봉되어, 이 때부터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일본 왕실의 일부로서 덴노의 책봉을 받으면서 쇼군과 맞먹는 존재로 공인된다. 또한 스페인과의 지속적인 우호 관계로 인해 스페인 국왕의 호감을 사, 1719년 하퐁 백작 (El Conde de Japon)[4][5]에 책봉되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에 화족 (華族) 제도가 도입된 이후, 이 백작 직위를 일본 정부도 처음에는 유효하다고 보아 1871년 백작 직위를 인정하였고, 1879년에는 메이지 덴노로부터 공작 직위를 하사받는다. 물론 얼마 뒤 독립하면서 아키시오 왕 직위와 일본 제국의 공작 직위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퐁 백작 직위 하사로부터 200주년을 맞은 1919년에 알폰소 13세가 다시 이케다 테루히데에게 "하퐁 공작" (El Duque de Japon) 직위를 하사한다. 물론 공화국 헌법에서는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상징적인 개념이었지만. 그리고 백작 직위이던걸 공작으로 레벨 업 시켜준 것일 뿐이라서 다른 나라에서도 특별히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1836년 분세이·덴포의 난에서 승리한(?) 뒤 철검대의 지원을 받아 쇼군이 된 카미가와 요시노부를 조종하기 위하여 집권직 (執權職 = 카마쿠라 막부의 '싯켄' 직책)을 겸하였다. 이 직책은 1875년 침례정사단의 막부 폐지와 함께 무효화되었다. 물론 그 때는 이미 돈으로 침례정사단을 지배하고 있었다[6]

즉, 오늘날 이케다 씨의 당주는 정식으로 부를 때 "후지시로 이케다 씨의 당주이며 철검대의 장, 하퐁과 아키시오의 공작이신 OOO[7] 이케다의 XXXX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사적으로 격식 차릴 때 이렇게 부른다는 것이고 정부, 언론 등 공적인 장소에서는 그냥 "이케다 XXXX 씨 (氏 혹은 さん)" 혹은 "후지시로 이케다 씨 당주"라고 부른다.

역대 철검대장에 관해서는 아래 #역대 철검대장 문단을 참조.

역대 철검대장

이름, 재임기간, 간단한 설명순이다.

  1. 이케다 마사아키라 (池田正斌, 1539~1589): 1586년 ~ 1589년 - 철검대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지만 얼마 못 해먹고 천연두로 사망. 마지막 저항세력이었던 무라노 씨 평정을 앞두고 그만... 가문의 선조로 추앙받는 이케다 도키치는 이 사람의 증조할아버지.
  2. 이케다 요시나가 (池田吉長, 1563~1611): 1589년 ~ 1611년 - 본명 나리무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나가를 존경한 나머지 두 사람의 이름을 따 개명했다. 가독을 이어받아 삼국의 난을 비롯한 자잘한 난을 평정하고 통일 대업을 완수했다.
  3. 이케다 아키자네 (池田章実, 1606~1679): 1611년 ~ 1660년 - 5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8], 고조쿠케 우마도 히로미치의 음모로 비교적 수월히 즉위하였다. 장성하기 전까지 쥐죽은 듯 책에만 파묻혀 지내다 18세의 나이 (1624년)로 친정을 선언한다. 전 섭정이었던 우마도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간계를 활용해 진압하고, 이어 시치케의 난 (일곱 가문의 난, 1629), 오토주쿠의 난 (농민 잇키, 1640), 신앙 전쟁 (1646~1650), 자하라의 난 (1653) 등 굵직한 전란을 모두 이기며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다. 아키시오판 대동법이라 할 수 있는 조세 균일화 정책도 아키자네 대에 도입된 것. 섭정을 받던 시기를 포함해 50년 가까이를 통치하다 아들 츠구아키에게 양위하고 예수회에 입회해 극기, 기도와 봉사를 하며 여생을 보낸다. 가톨릭 교회에 깊이 심취하여 디아즈와 함께 가톨릭 선교에 힘썼다.
  4. 이케다 츠구아키 (池田従章, 1630~1721): 1660년 ~ 1693년 - 전란의 위협이 희미해지고 서양과의 직접 무역으로 태평성대를 연 쇼켄케이겐 (章兼慶元) 치세의 시작을 알렸다. 나이들어서는 고조쿠케에게 선동당해 유능한 행보관 행정관이었던 쿠사노 마사오키를 교통이 불편하고 감시가 어려운 한지(?) 엔카이 번으로 쫓아내 반란을 초래하는 병크를 일으켰지만 뭐. 아버지와 똑같이 자진 퇴위한다. 스페인산 술을 너무 즐긴 나머지 비만에 시달렸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뎀푸라를 먹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훈을 얻어 (..) 오래 살겠다는 일념 하에 각지의 등산로 개발[9]과 의학기술 개발에 힘썼다. 그 결과 본인도 당대에 아흔살 넘도록 장수하였고 난학, 아랍 의학의 도입으로 국민들의 평균 수명도 상승하였다. 불로초 찾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있는 일이 되었다.
  5. 이케다 카네츠구[10] (池田兼従, 1657~1730): 1693년 ~ 1730년 - 카네츠구 시대에 들어서는 30~40대에 들어 철검대장 임기를 물려받는 것이 가풍이 되었다. 크게 의미있는 일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타치바나의 난이 일어나 엔카이 국 일대가 따로 놀기 시작했다. 사실상 별도의 왕국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타치바나의 난 때부터 분세이의 난 시기까지를 연안 삼국 시대로 따로 보기도 할 정도이다. 다른 하나는 가톨릭에서 현지인 출신 주교가 착좌했다는 점으로, 이 시기 들어 성당 수가 급증하고 후지시로 주민의 77%가 영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가 되는 등 가톨릭이 국민 종교로서 정착한다. 가톨릭에 대한 면세 정책은 카네츠구 대에 들어 재정적 문제를 들어 감세 정책으로 바뀌어갔지만. 그리고 유학자들과 승려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종교의 자유를 명문화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겸종칙령>)
  6. 이케다 노부츠네 (池田慶恒, 1707 ~ 1769): 1730년 ~ 1769년.
  7. 이케다 츠네모토 (池田恒元, 1745 ~ 1795): 1769년 ~ 1795년.
  8. 이케다 모토아키 (池田元明, 1770 ~ 1839): 1795년 ~ 1839년 - 별명은 여우 대장으로, 별명에 걸맞게 여우처럼 교활한 정치꾼이었다. 분세이의 난의 흑막으로, 타치바나 씨를 멸망시키고 나카야마 막부도 꼭두각시로 조종하였다.
  9. 이케다 아키테루 (池田明輝, 1793 ~ 1871): 1839년 ~ 1870년 - 아서 빌링슬리 제독의 미군을 받아들이고 적극 개항했다.[11] 예수회의 지도를 받아 유창했던 그의 스페인어 실력에 오히려 놀란건 빌링슬리 일행이라고 (...)
  10. 이케다 테루노부 (池田輝宣, 1827 ~ 1883): 1870년 ~ 1883년. - 식민지로 깔고 들어가 미국이 맺어놓은 불평등 조약의 독소 조항을 제거하는데 힘썼다. 한편으로 미국의 공화정 체제를 동경하여 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사절단으로 누차 보내며 독립을 준비했다.
  11. 이케다 테루히데 (池田輝秀, 1860 ~ 1964): 1883년 ~ 1884년 - 아키시오 독립 전쟁을 선봉에서 이끌었다. 1년만 재임하고 바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하면서 아키시오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더 유명. 신생 아키시오 공화국의 서양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힘썼으며 임기 이후에도 국가 원로로서 여러 위기의 순간마다 연설을 비롯한 여러 방법을 통해 물심양면으로 아키시오를 지원하였다. 그 후로 컬러 TV가 나오는 것을 보시며 100살이 넘도록 정정하게 잘 사시다가 (...) 110살을 일기로 자연사.[12] 8년 동안 단임으로 대통령을 지낸뒤 재선 욕심 없이 깨끗이 물러나,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조언하는 것 외에는 사진을 찍으러 다니거나 히로히토 일왕처럼 생물연구 활동을 하는 등 평생 소박하게 살아서 국부(國父)로서 공경받았고, 후지시로의 관문이 되는 국제공항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주석

  1. 종래에 존재하던 불교와 신토, 토속신앙을 믿을 자유도 있었지만, 세례를 받으면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으로 신자들을 빼앗아오는 바람에 종교 간의 사이가 험악했다. 역대 철검대장의 정책으로 항상 떠오르는 떡밥이 바로 종교 간의 화해였다.
  2. 정작 아키시오의 해당화는 근대기에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옮겨심어서 정착한 것이다. 해당화를 상징으로 삼은 것은 가문의 시조 이케다 도키치가 고향 초시 (정확히는 구주쿠리 해안 일대인 것으로 추정)을 그리며 해당화를 심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작 그 해당화는 얼어서 죽었지만. 해당화가 정착한 시기는 상술한 대로다.
  3. 추국왕 (일본어: 秋国王 (しゅうこくおう))이라고도 한다.
  4. 당시 스페인이 일본과 아키시오를 같은 곳으로 착각(내지는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대 예수회 선교사의 기록에는 "하퐁 (Japon) 백작은 변덕스러운 자이다. 1년 전에는 상단을 내쫓았는데 올해는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주었다. "는 기록이 있다. 네덜란드 상인 외에는 철저히 쇄국으로 일관하던 에도 막부와,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 상인 빼고 모든 외국 상인들을 적극 환영하던 아키시오를 착각한듯.
  5. 당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는 왕위 계승 전쟁을 막 치른 상황이었다. 가톨릭을 믿으며 스페인과 예수회의 꾸준한 우방이었던 아키시오와의 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해 이러한 제스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6. 애초에 꿈만 크고 돈은 없는 하급 사무라이들의 모임이었던 침례정사단에게 철검대가 뒷돈을 대주면서 맘껏 날뛰도록 부추겼다. 이때 단원 하나하나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채무를 갚겠습니다라는 각서를 쓰게 하는 치밀함도 보여주었고 결과적으로 침례정사단도 철검대의 채권을 계승한 아키시오의 눈치를 철저히 보다 토사구팽당한다.
  7. 수계를 받은 불교 신자이면 법명이, 가톨릭이나 정교회 신자이면 세례명이 붙는다.
  8. 왜냐면 요시나가의 손자이고 3대 독자이기 때문이다. 요시나가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히데노부 (이 이름도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에서 딴 것)가 삼국의 난 당시 츠카모토의 군세와 싸우다 전사했다.
  9. 아닌게 아니라 링크된 순례길과 반차도는 츠구아키가 운동(..)과 성지순례를 겸해서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도성과도 멀지 않았고. 심지어 미야카네 매괴동산은 뒷산이었다!
  10. 뭔가 이름들이 서로 닮은 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는 아들들, 손자들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한 글자씩 돌려쓰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11. 단, 일방적 개항에 대해서는 아우이자 외무상을 맡았던 이케다 노부히로의 단독 행동이라는 설도 있다.
  12. 여느 때처럼 증손자들과 놀아준 뒤 정원에서 낮잠을 잤는데 몇시간 뒤에도 일어나지 않아 가정부가 확인했더니 자연사했다. 나라를 여러번 구하신 덕분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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