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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클리우스 혁명
Icliusian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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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와 진압군 (이클리우스 시티에서 촬영)
날짜
145년 2월 ~ 6월
장소
이클리우스
배경과 원인
프랑수아가의 영구 집권
자본가·지주 의존 등으로 인한 사회 문제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불법화
결과
공화파 및 반정부 세력의 승리
프랑수아가의 몰락
영향
공화국 체제 수립
당사자
정부 및 왕당파
공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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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클리우스 왕국

지지층:

  • 자본가 및 지주
  • 보수주의자
  • 왕정 옹호자
  • 우파 지식인
  • 온건 파시오이스트
  • 전통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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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클리우스 민주수호원탁회의

지지층:

  • 노동자 및 농민
  • 학생
  • 공화주의자
  • 자유주의자
  • 진보주의자
  • 사회주의자
  • 공산주의자
  • 반자본주의자
  • 민주주의자
  • 좌파 지식인
  • 왕정 반대자
  • 반파시오이스트
지휘관
정부 및 왕당파
공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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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인원
정부 및 왕당파
공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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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인원 약 4,200명
군인 투입 약 970명
지지자 1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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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약 800,000명
피해 규모
정부 및 왕당파
공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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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2,800여명 부상 및 사망
군인 48명 부상
지지자 6,000여명 부상 및 사망
프랑수아가 관계자 8명 부상
왕국 고위 공직자 2명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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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14,000여명 부상 및 사망
시위대 5,800여명 연행 및 구금
각주


개요

이클리우스 혁명(Icliusian Revolution)은 145년 2월부터 145년 6월까지 약 4개월 간 이클리우스 전 지역에서 벌어진 반왕정 투쟁이자 혁명을 말한다.

기존 왕가가 물러나고 약 70년 동안 장기 집권한 프랑수아가는 자본 의존적, 반사회주의적인 정책과 사회적 탄압, 비리와 유흥 문제 등으로 많은 국민들이 자유권, 개혁과 중립을 요구하면서 왕정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44년 11월 이클리우스 광장에서 왕정 타도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국민들이 죽고나 다쳤고, 이로 인해 국민적 여론이 악화되며 왕정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커졌다.

결국 145년 2월 재야 운동가인 루이 록텔러를 포함한 여러 정치인들과 청년 지도자, 정치 세력들과 단체들이 뭉치며 민주수호원탁회의를 결성하였고 대규모 저항 운동을 시작으로 145년 4월 약 6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혁명으로 발전하였으며 145년 4월 궁전을 점령하였다. 그 후 국왕과 프랑수아가의 가족이 있는 궁전에서 협상을 가진 끝에 145년 5월 국왕은 끝내 폐위를 선언, 공화파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45년 6월, 왕정은 133년 만에 붕괴되었고 공화국 헌법을 채택함과 동시에 공화정이 출범하게 된다.

배경

프랑수아가의 집권

이전 왕조인 데이비드가가 물러나고 프랑수아가의 통치로 즉위하게 된 프랑수아 1세는 국력 강화, 경제 개발, 사회 질서를 통해 안전된 왕국의 유지를 약속하며 국민의 지지와 함께 기대를 한껏 받았다. 프랑수아 1세는 각종 정책들을 쏟아내며 국가를 안정시켰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2세의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으로 인해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은 스스로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프랑수아 2세로 즉위한다.

그러나 아들인 프랑수아 2세를 시작으로 왕국은 갈수록 자본가와 지주에 의존하기 시작하였고, 후에 일어난 사회주의, 자유주의 운동을 공권력을 동원해 탄압시키는 등 강력한 반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는 한편 일부 자본가들이 욕구 해소를 위해 국내외 여성이나 엘프인들을 대거 포섭하여 대노예시장(Great Slave Market)을 열며 무고한 여성들을 사고 파는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시장은 유로아스피아 전쟁 직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의 여성들이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었다.

또 이 시기에 여성들은 노동자로 취급해 남성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을 정도로 심각했으며, 경제적으로는 국고 확보를 위해 농민의 재산을 지령에 따라 뺏은 후 국가의 재산으로 저장시키며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수아 3세의 후임인 프랑수아 4세는 그나마 내부적인 문제에는 신경을 쓰긴 했지만 오히려 자본가와 지주, 귀족들의 이득을 얻어 저소득층과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왕가와 귀족들은 이들을 사회주의자로 간주하여 탄압시키면서도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프랑수아 5세부터 프랑수아 6세 후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우민화 정책을 펼치며 국정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의 등장

프랑수아 3세 당시 낮은 임금과 23시간 노동, 그리고 질 나쁜 노동 환경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이 불만을 가지자 자본가들이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이 노동자들을 전부 공산주의자로 취급하며 강제 해고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노동 복직과 노동시간 단축, 노동 환경 개선 등을 위해 노동조합 설립을 결의했고 끝내 이클리우스 노동조합를 결성하고야 만다.

설립 이후 노동조합은 노동 복직과 임금 인상 등을 촉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당시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20명이었지만, 점점 조합원이 늘어나 104년에는 약 2,000여명까지 참여하며 대형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정부의 탄압으로 법외단체로 규정되어 국왕의 승인을 받는 이상 집회를 허가할 수 있고, 최대 200명까지 집회의 참여가 가능한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120년 노동조합 내 좌파 세력들이 장악함에 따라 민주노동자연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부의 탄압에 맞서 활발한 노동 운동을 이어갔다. 124년에는 반사회주의법의 연장선인 정당관리법이 통과되며 사회주의 정당들을 창당하려는 시도를 막았지만 야당인 자유당의 반발에 부딫혔고, 결국 127년 6월 폐지되면서 사회주의 정당의 설립을 허용시켰다. 그리고 128년 7월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당이 창당된다. 사회당은 이클리우스의 유일한 좌파 정당이자 반왕정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불렸지만, 130년대 중반부터 우파연합의 등장으로 사회당은 제3세력에 머무르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회당은 제3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을 적극 지원해주며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가능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민주노동자연맹 소속 노동정치협의회을 계승한 노동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141년, 사클레치아를 주축으로 유로아 지역의 나라들을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유로아스피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클리우스는 중립국 지위를 유지한 상태였다.

그러다 143년 11월 프랑수아 7세는 유로아스피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앞서 프랑수아 7세는 144년 2월까지 남성 580,000명을 대상으로 예비 전시 징병을 실시하며 현역의 경우 전쟁에 대비한 특수 훈련을 진행하겠다고 설명했다. 144년 3월 유로아스피아 전쟁에 참여한 이클리우스는 약 6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전투에 임하였고 144년 12월이 되어서야 일리오스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이 종료되었다.

144년 11월 시위

144년 11월(1944년 11월 8일), 프랑수아가의 사치와 탄압에 분노한 약 6,000명의 시민들은 이클리우스 광장에 모이면서 왕정 타도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민주정의 수립과 프랑수아가 재산의 몰수, 토지 개혁 추진, 사회주의 활동 합법화 등이었지만 그 중 민주정 수립과 프랑수아가 재산 몰수를 핵심 요구안으로 삼고 시위를 진행시켰다.

국왕은 이들의 시위를 반란이라고 주장하며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강제 진압을 명령시켰다. 이후 시위가 시작된 지 9시 58분이 되어서야 경찰과 군인 약 700명이 이클리우스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10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최루탄과 실탄으로 시위대를 향해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지상에는 헬리콥터 8기가 현장을 순찰하며 최루 가스를 투하해 쌍방 공격을 가했다. 광장은 순식간에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대부분 최루탄의 공격으로 많은 시위대들이 죽어나갔다. 한편 살아남은 시위대들은 공권력을 뚫고 광장을 벗어나 경찰의 노출이 잘 되지 않은 골목으로 피신했지만 이들이 대피한 골목은 곧 경찰의 추적으로 포위망이 좁혀지게 될 위기에 처하다 결국 약 78명의 시위대가 발견되어 강제 연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은 정부의 강경 탄압에 분노했고, 이에 많은 시민들은 왕정 타도를 위해 범국민적이고 민주적인 시위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전개

2월: 혁명의 시작

145년 2월(1945년 2월 9일), 이클리우스 민주수호원탁회의 의장인 루이 록텔러를 중심으로 약 56,000명의 시위대가 이클리우스 광장에 모이며 왕정 타도를 외쳤다. 이어 록텔러는 연설에서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리고 모든 인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며 더 많은 국민들이 혁명에 동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후 이 집회는 약 열흘 간 지속되었다.

IST 기준 2월 15일, 정부는 뒤늦게 반정부 세력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즉시 경찰 2개 대대를 투입해 진압할 것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집회는 약 80,000명이 참여하여 왕정 타도를 촉구하고 있었기에 만약 강경한 진압 작전을 펼치게 된다면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약 4시간에 걸친 비폭력적 대치 끝에 진압 경찰들은 전부 철수했다.

IST 기준 2월 23일에는 이클리우스 동남부에 위치한 루케티아에서 약 70,000명의 시위대가 봉기하였고 루케티아의 주도인 알락시아 시청과 경찰서를 무혈 점령한 후, 무기 저장고를 습격해 자체적으로 시민방위군을 조직했다. 이후 경찰과 군인을 포함한 약 500명이 투입되어 진압 작전에 나섰는데 시민방위군은 3월 초까지 방어와 시가전을 벌인 끝에 경찰이 물러나 첫 승리를 거둔다. 이 과정에서 경찰 97명과 군인 99명이 부상을 입었고 사망자는 26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시민방위군은 고작 8명이 부상을 당하고 1명이 사망하였다.

3월: 수도권에서의 대규모 시위, 그리고 루크제베리 학살

145년 3월(1945년 3월 2일), 민주수호원탁회의에 참여한 전학생연대회의(All-Students Solidarity Council)의 회장인 프랑수아 장마리엘, 알렉스 델리크, 그리고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제이슨 데이즈가 이끄는 시위대 약 140,000명이 이클리우스 시티에서 대규모 시위와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이 시위에서 자유당 소속 의원이던 데이비드 레이넨스를 포함해 정치인들과 연예인, 가수 등이 대거 참여하였고 휴고 스타, 하이디 블레어 등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진행하는 등 많은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 때부터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과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는가 하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반자본주의자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또 노동자나 하층민, 농민들도 이에 가세하며 왕정을 향해 국민의 요구에 따르라는 외침은 점차 커져만 갔다.

IST 기준 3월 9일에는 베이크스랜드루크제베리에서 약 2,000명의 시위대가 참여하여 왕정 타도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는데, 이 때 군인들이 전차를 몰고 투입하며 실탄은 물론 군인의 사격을 피해 도망치는 시위대를 향해 포탄을 쏘는 등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다. 이 학살 사건은 당일 오후 9시 DPRT 본부에 알려졌고, 록텔러 의장은 대국민 사과를 촉구하는 성명문을 정부에 보냈다. 하지만 정부는 성명문과 학살을 묵인하면서 만일 시위를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진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경고를 보내자 록텔러 의장은 "비폭력적 행동을 총으로 막아선 안된다"며 앞으로 3월 중에 열릴 대규모 비폭력 시위를 예고했다.

IST 기준 3월 15일, 그가 예고했던대로 이클리우스 시티에서 약 3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 참여한 시위로 불리고 있으며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위대들과 이에 동조하는 국민들의 높은 지지로 점차 시위대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정부는 결국 경찰과 군대의 인원을 모아 시위 진압을 요구했고, 시위가 진행 중이던 오전 8시 경 경찰 인원 3,000명과 군인 620명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면서 강경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으로 인해 약 9,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4,500명의 연행자가 발생했다. 또 진압 과정에서 가수 지미 녹터스와 자유와 평등회의 케빈 페치가 사망하며 시위대들의 안타까움을 남겼다. 반대편에서는 왕정 지지자들과 우파 지식인, 그리고 왕당파들의 지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IST 기준 3월 21일에는 약 25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열리며 루크제베리 학살과 이클리우스 시티에서의 폭력적 진압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약 5시간에 걸친 행진 시위 끝에 해산되었고, 3월 25일에는 자유당 소속 의원 95명을 포함하여 민주수호원탁회의 지도부가 헌법 개정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4월: 이클리우스 시티 진격, 국왕과의 협상

4월 초(1944년 4월 6일) 군경을 피해 남부 지역으로 도망간 루이 록텔러는 기존의 시위로는 왕정 타도를 하기엔 어렵다는 것으로 판단되어 지도부들과 구상하던 중, 레이넨스에 의해 대규모 진격 작전을 짜기로 하며 이클리우스 시티의 중앙부에 진격하여 궁전을 장악하는 방법으로 가닥을 잡았다. 본래는 IST 기준 4월 20일에 정하기로 했으나, 록텔러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한 후 시위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4월 22일로 정했다.

그리고 IST 기준 4월 22일, 약 기존 시위대인 250,000명과 새로 참여한 시위대 약 350,000명을 포함해 약 600,000명이 이클리우스 시티 근처에 모여들었고 그 과정에서 진격 루트를 이클리우스 광장에서 국왕이 위치해 있는 궁전으로 확정지었다. 오전 6시가 되자, 이클리우스 광장에서 행진하기 시작한 시위대들은 경찰이 설치한 저지선을 뚫고 중앙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앙부에 진격한 시위대들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궁전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달했고 경찰들이 이를 막아서 보지만 시위대들은 궁전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달라며 항의했다. 결국 경찰은 궁전으로 향하는 문을 개방하자 시위대들은 궁전 입구에 무혈 입성하고 그 자리에서 국왕인 프랑수아 7세와 그 가족들을 발견하였다. 오후 5시, 국왕인 록텔러 의장은 궁전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국왕과 5월 초까지 협상을 가진 후 왕정을 해체시킬 수 있다고 발표했고, 항복을 선언했다.

IST 기준 4월 24일, 국왕과 의장은 이클리우스 광장 지하에서 1차 협상에 돌입하였으며 록텔러는 왕정 해체, 국민 주권, 가혹 탄압에 대한 금지, 국민의 자유권 보장 등을 요구했고 반대로 국왕은 왕정을 유지하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프랑수아가 재산 환수라는 요구안이 포함되어 있어 프랑수아가의 구성원 중 일부가 반발해 공화파와 충돌하였고 결국 1차 협상은 결렬된다.

한편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 합법화를 내걸고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며 노동자들도 이에 가세한 상태이다.

IST 기준 4월 28일, 두 지도자는 이번에도 같은 곳에서 2차 협상에 돌입하였다. 국왕은 왕정 해체는 찬성하지만 프랑수아가의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가문에 대한 탄압이라며 거부했지만, 록텔러는 단호하게 환수와 처벌을 주장했고 여기에 대노예시장을 주도했던 자본가들에 대한 엄중 처벌도 담겨있었다.

5~6월: 왕정 해체와 공화정 출범

5월(1945년 5월 2일) 학생 운동을 주도했던 프랑수아 장마리엘이 극우 성향의 지지자들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학생연대회의는 폴로이스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인 멜리다에서 추모 집회가 열리며 추가로 많은 학생들이 모이며 학생 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IST 기준 5월 4일, 2차 협상은 결국 국왕의 굴복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다음 날 프랑수아 7세는 폐위 선언과 함께 공화파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프랑수아 7세가 폐위되자 국민들은 환호성과 함께 국민의 나라를 되찾았다는 승리에 도취되었고, 록텔러도 민중의 승리를 축하하며 "국민들이 원하는 공화정 수립은 최대한 빠른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국가수상이었던 한나 베이들리는 공화파의 승리를 인정하며 조기 사퇴했고, 케빈 크리스티카 외무장관이 수상 권한대행을 맡았다.

IST 기준 5월 8일, 민주수호원탁회의는 민주공화정수립준비위원회(Arrangement Committee of Establishment of Democratic Republic)으로 개칭되어 공화정 수립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ACEDR은 공화정 수립을 위한 헌법 초안에서 국민의 요구를 담은 내용이 담긴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였으며, 의원내각제, 내각책임제와 100% 비례대표제로 구성된 지역구를 통해 총리를 선출하는 방식(록텔러-레이넨스안)과 대통령과 총리로 분리시키고 의회는 양원제로 하는 대신 상원을 지역구, 하원을 비례대표제로 하자는 방식(길포드안)이 제시되었으나 록텔러를 포함한 혁명 지도자들은 대통령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길포드안은 부결되었고 록텔러-레이넨스안은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되었다.

IST 기준 5월 28일, 록텔러는 궁전에서 공화국 선언문을 발표했고, 국영방송과 각종 언론들의 보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선언문이 발표된 이후 IST 기준 6월 1일 이클리우스는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공화국 헌법를 공식적인 헌법으로 채택되어 공화국 선언문에 따라 133년 만에 왕정이 몰락함과 동시에 이클리우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약 4개월 간 이어져 온 혁명은 종료되었고 프랑수아가는 재산 환수를 거부하겠단 이유로 해외로 망명을 가게 된다.

반응

정치권

야당인 자유당은 "왕정에 짓눌려져 있던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며 왕정 타도를 위해 시위를 연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혁명을 지지했고, 자유당도 혁명에 참여하며 왕정 타도를 촉구했다. 또 자유당은 IST 기준 3월 21일 소속 의원 95명과 민주수호원탁회의 지도부와 함께 헌법 개정 촉구 시위를 열었는데 그 중 헨리 미셸, 조스팽 라도, 빌리 오스턴 등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제명당하자 이들은 의회에서의 정치 탄압이라며 의원직을 복귀시켜달라며 호소했다. 그리고 혁명을 주도했던 루이 록텔러 역시 자유당 내에서 엄청난 호응을 받았고 자유당 보좌관들에 의하면 "루이는 왕정에 대해 불만이 많고 왕당파들의 야유를 받았지만, 어떻게 4개월이란 시간 동안 혁명을 성공시켰단 말인가"라며 그를 치켜세우는 반응도 나오기도 했다.

사회당노동당 등 좌파정당들은 이클리우스의 시민 혁명을 환영하며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어주길 간절히 부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IST 기준 3월 15일 사회당과 노동당 소속 정치인들이 군인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일부가 목숨을 잃자 두 당은 "정부의 폭력적 진압으로 인해 비폭력을 추구하던 국민의 목숨을 짓밟아버렸다"며 정부와 왕실을 비판했다.

우파정당 격으로 불리는 이클리우스 내 왕당파, 우파연합은 공통적으로 혁명을 공산주의자들의 시위로 인식하며 각기 다른 입장을 냈는데, 왕당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시위"라고 규정했고, 우파연합은 "왕실이 부패했다는 말에 선동당해 쿠데타를 벌이고 있다"며 시위대들을 비난했다. 또 우파연합 지도자인 세르보 마르비치는 왕정 지지 시위에서 "빨갱이(Commies)들로부터 왕국을 지켜야 한다", "국왕 폐하를 지키지 않는다면 카르치아처럼 비슷한 꼴을 보게 된다"며 혁명을 비난했는데 이후 궁전 습격으로 왕당파와 우파연합은 큰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농민당 등 농업계 정당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대신, 혁명에 성공한다면 공화정은 앞으로 농업인들의 발전과 농민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토지 균등론(均本論)[1]을 통해 토지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며 공화파 세력에게 호소했다.

시민사회계

노동계

농업계

법조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언론계

정부 및 왕실

국제 사회

각주

  1. 농민이 토지를 무상적인 방법으로 동등하게 분배하고, 토지 문서나 소유권 등은 그 토지를 소유한 농민이 가진다라는 자체적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