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탄생 그리고 몰락

제국의 탄생 그리고 몰락》(帝國의 誕生 그리고 沒落, 독일어: Die Geburt des Reiches und Untergang 다이 게부트 데스 라이히스 운트 운터강[*], 영어: Birth of Empire and Downfall)은 어나더어스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한스 로브펜이 137년 저술했고, 146년 3월 출간한 게르마스 왕국의 소설이다. 국제단위시 기준 1937년 5월 9일부터 1946년 3월 21일까지 저술을 시작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현실적으로 그려내 높은 고증과, 과거 게르마스를 떠나 독일에 약 9년 간 거주하여 나치 독일의 탄생과 몰락을 그린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출간 이후 게르마스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고 155년에는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동부 전선을 다루는 조국을 위하여, 혁명전쟁, 서부 전선을 다루는 노르망디의 어느 해변, 오퍼레이션 토치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구 소설 중 가장 고증이 뛰어니고 유명해진 소설로 불리고 있다. 한스가 사망한 후 196년부터 해당 소설은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나치 부역 의혹이 일은 후에는 일부 나라들이 판매와 출판을 금지하고 있다.

고증 및 줄거리

1933년 1월 30일부로 우리나라는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었다. 드디어 수년 간 이어져 온 의 투쟁은 비로소 목적을 달성했으니 말이다!
아돌프 히틀러
모든 폴란드 시민들, 그리고 폴란드에 남아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 알린다. 현 시간부로 폴란드라는 국가는 이제 사라졌음을 선언한다. 우리나라소비에트 러시아와 맺은 협정에 따라 서부에는 군정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우리 피를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서부의 모든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은 그 즉시 법에 따라 우리 혈통과의 접촉, 관계를 금지하며, 이를 어긴다면 강력한 처벌을 가할 것이다.
독일 국방군
그대들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엔 상상도 하지 못할 더욱 총력적이고 급진적인 전쟁을 원하는가?
요제프 괴벨스

고증이 매우 현실적이다 보니 작중에서는 1923년 뮌헨 폭동을 시작으로 히틀러의 집권, 라인란트 진주를 제1막, 그리고 저술이 시작된 1937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과정과 종전 등을 거치며 저술이 끝난 1946년 3월 21일까지를 제2막으로 보고 있다. 제1막에서는 1937년이다 보니 한스는 이를 모를 수 밖에 없었는데 대신 103년(1903년)부터 20년간 살아오면서 제1차 세계 대전과 나치당의 탄생, 뮌헨 폭동을 경험했던 이탈리아 출신 이세계인 알토그로 비달길로티의 증언과 사료를 통해 제1막을 저술하는 데 공을 들였다고 하며, 제2막에서는 본인이 능력을 통해 독일을 방문하며 나치당 당사까지 들어가 히틀러의 연설을 끝까지 듣는데 성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연설은 물론이고 히틀러의 삶, 그리고 장교들과 나치 소속 장관들의 활동 등을 꼼꼼히 살피며 노트에 적었다.

제1막의 줄거리는 1923년 히틀러가 돌격대를 이용해 뮌헨에서 폭동을 저지르다 구속 수감되었고, 수감되는 동안 로젠베르크가 나치당을 이끌고 있을 동안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한 생각을 토대로 《나의 투쟁》을 집필하고 석방되는데, 히틀러는 석방된 이후 다시 나치당의 당수가 되며 기존의 독일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국민들을 선동해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 선거에서 승리한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수상직으로 임명되지만 의석이 부족했었기에 독일 국가인민당과 손을 잡고 의회를 해산, 나치당은 후에 다수당으로 발전한다. 이후 히틀러는 자신이 총통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모든 독일 민족의 통합과 단결을 외쳤고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에 불복하여 라인란트에 재무장을 감행한다.

제2막의 줄거리는 라인란트 진주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며 아시아가 혼란에 빠진 사이, 히틀러는 만약 전 세계를 정복한다면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로 바꾸겠다는 계략을 세운다. 독일은 이미 파시스트 정권으로 돌아선 오스트리아와 합병 시 고립될 수 있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리고 있었는데 당연히 독일은 국방군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를 병합시키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뮌헨 협정에 따라 체코를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독일은 이탈리아와의 영구적 협력을 위해 강철 조약을 체결하고, 8월에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서쪽 지역을 점차 점령해가기 시작했고, 9월 17일에는 조약에 따라 소련도 동쪽을 공격해 분할을 개시하였다.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분할되고, 1940년에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북쪽부터,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의 서부까지 차지하게 되는데, 영국과의 전투에서 실패한 독일인의 생존권을 위해 영토가 더 필요했던 히틀러는 슬라브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을 침공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장교들은 이미 소련을 침공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고, 소련군은 이들에 비해 스탈린이 그제서야 방어 태세를 준비했기 때문에 또 다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추축군과 함께 이른바 바로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하기에 이른다.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처까지 돌파했지만 겨울이 다가오며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서부와 아프리카에서는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이 아프리카 지역을 차지하긴 했으나 곧 미국의 참전으로 이탈리아가 고립되었으며 동부에서는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거기다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상륙 작전을 개시하며 서부 전선은 거의 초토화됐다시피 했고 동부 전선 역시 집단군이 후퇴하며 연합군에 고립되었다. 거기다 히틀러는 검은 관현악단에 의한 암살 테러까지 당했음에도 위기를 넘기게 된다.

1945년이 되자 연합군과 소련군은 각각 베를린을 향해 서·동쪽을 진군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을 피해 총통엄폐호에 들어간 히틀러는 끝내 패전이 확실함을 직감하며 네로 명령을 통해 독일의 자본을 모조리 파괴하기로 했다. 하지만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진정되었으며, 연합군은 독일의 도시를 하나둘씩 점령하던 시기에 56번째 생일을 맞는다. 독일군은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을 막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였지만 결국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소련군은 라이히스탁 의사당에 소련 국기를 꽂으며 승리를 선언했다. 히틀러는 끝내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했고, 에바 브라운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카를 되니츠가 대신되며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지만 곧 항복했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전쟁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8월 8일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고, 전쟁범죄자들은 사형을 선고하거나 징역형을 받아야만 했으며 그동안 포로가 된 독일군들은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다만 고증 오류 또한 적지 않은데, 제2막에서 방공 협정 부분에서 소련의 지도자를 이오시프 스탈린이 아닌 라브렌티 베리야로 서술되어 있다. 베리야는 당시 내무인민위원회장이었고, 스탈린이 소련의 지도자였지만 이 둘을 헷갈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부분에서 소련의 지도자를 스탈린으로 제대로 서술했다.

시대별 고증도 문제가 있는데, 오스트리아 합병 시기를 1938년이 아닌 1937년 12월로 되어 있으며,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을 시도했을 때의 날짜는 1942년 8월 21일이 아닌 8월 25일이라 되어 있다.

미디어화

이 소설이 출간한지 25년이 지난 1971년에는 게르마스에서만 라디오 CD로 제작되었고, 183년 3월에는 영어판 라디오 CD가 출시되었다.

비판 및 논란

나치 부역 의혹

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저의 고향을 떠나 다른 세계의 독일에서 8년 간 있었는데, 그땐 제 능력을 통해서 안전하게 독일에 있었죠. 저는 같은 독일 사람이라 의 삶과 나치의 이야기, 그리고 연합군이 독일을 퇴치하는 것을 노트에 적었었고 그가 죽은 최후까지 남기긴 했는데, 연합군이 프랑스를 어느 정도 해방시켰을 쯤에 검은 관현악단이란 단체가 그를 암살하려 할 때 폭탄이 터져서 저도 다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투명화가 풀리면서 곧장 독일군한테 끌려가 죽을 운명이었으니 말이죠.
한스 로브펜, 게르마스 제1방송 인터뷰 中
저는 나치에 대해 아무런 충성따윈 없습니다. 나중에 내가 죽어서라도 이 소설 쓰려고 나치에 부역했다는 것은 거짓임이 분명합니다.
한스 로브펜, 게르마스 제1방송 인터뷰 中

한스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204년, 게르마스 왕립경찰의 조사 결과 한스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나치를 부역했다는 것이 드러나 독자들의 큰 충격을 받았다.

한스의 아버지인 루퍼트 로브펜은 "한스는 다른 행성에서 벌어진 전쟁을 소설로 쓰기 위해 독일로 갔지만 이미 나치가 장악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부역해야만 했다"고 증언했고, 어머니인 제너 로브펜 역시 한스가 과거 나치에 부역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206년에는 일부 공산당원들이 로브펜의 자택에 돌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로브펜을 편향적인 극우파 소설가라며 비판했기 때문이다.

또 한스의 고향인 작소네에서는 이 소설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는데, 작소네 국립미술도서관에서는 212년부터 해당 소설을 금서로 지정했고, 기민당에서도 반민주적이라는 이유로 작소네 지방정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루퍼트는 이 소설이 금서가 아니라고 주장해 국립미술도서관을 상대로 고소를 진행했고, 게르마스 왕립대법원에서는 이 소설을 금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며 국립미술도서관 측의 손을 들어줬다. 아버지 루퍼트는 패소되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216년 8월 EGF의 인터뷰가 공개되며 이러한 상황은 반전되었다. 한스는 171년 인터뷰에서 나치에 아무런 충성이 없고, 1944년 7월 20일 벌어진 히틀러 암살 시도에서 폭발물이 터져 투명화가 풀리자 독일군에 포위될 뻔한 일이 있었다고 증언해 결론적으로 이 소설을 만들려고 나치를 추종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