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태양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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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Erster Weltkrieg
날짜 1914년 7월 28일 - 1915년 7월 9일
장소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결과 동맹국의 승리
평화 조약
교전국
지휘관
병력
동맹국 협상국

약 4,500,000명
약 3,500,000명
22x20px 약 100,000명
총 8,100,000명

약 8,000,000명
약 6,000,000명
약 5,500,000명
약 950,000명
약 120,000명
약 65,000명
약 300,000명
총 21,000,000명

피해
동맹국 협상국

사먕자: 약 600,000명
부상자: 약 1,400,000명
실종자: 약 100,000명
: 약 2,100,000명

사망자: 약 720,000명
부상자: 약 2,800,000명
실종자: 약 80,000명
: 약 3,500,000명

제1차 세계 대전 전구

제1차 세계 대전(독일어: Erster Weltkrieg, 영어: World War I)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5년 7월 9일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 세계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세계 대전(독일어: Weltkrieg)이라 불렸으며, 미국에서는 유럽 전쟁(영어: European War)이라 불렀다. 약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양측 합하여 3천만명 가까이 되는 병력을 동원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이였으며, 사상자 또한 양측 합하여 5백만명에 달하였다.

약 1년 동안의 기간 동안 세계는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국영국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협상국으로 양분되었다.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된 유럽 지역 외의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가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또한 전쟁의 영향에 휩싸였다.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독일과 그 주변국들의 충돌이였으나, 직접적으로 전쟁을 발발시킨 것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라예보 사건이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빌헬름 2세 아래에서 팽창 정책을 실시하던 독일과 기존 강대국들 간의 충돌이 전쟁으로 도출되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발발하였다. 독일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침공, 영국이 참전하였으며,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동프로이센갈리치아-로도메리아를 공격하였다.

국경 전투에서 프랑스영국의 군대를 격파한 독일대후퇴에서 적은 피해로 지속해서 협상국에게 피해를 누적시켰고, 마른 전투에서 승리 후 파리를 포위, 영국 대륙 원정군5군을 전멸시킨다. 영국 대륙 원정군의 전멸 이후 영국은 항복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또한 보르도 시위우익 공세로 인해 마찬가지로 항복 논의가 시작되 영국의 항복 이후 뒤를 이어 항복하였다. 서부 전선이 종료됨에 따라 독일의 5개 육군단이 모두 동부 전선으로 향해 실레지아 공세, 로도메리아 공세, 백루테니아 공세, 드네르프 공세을 통해 민스크키예프까지 진군 함에 따라 러시아 또한 항복하게 된다.

전쟁 이후 독일9월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여 벨기에와 동유럽 신생국들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경제 공동체인 중앙유럽 동맹을 설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이탈리아는 적은 피해로 많은 이득을 취했으나, 정작 그들이 원하던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아 동맹국과의 갈등을 낳았다. 프랑스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와 같이 잠시동안 혁명에 휩싸였으며, 러시아 또한 제2차 러일전쟁을 계획하던 중 반란으로 인해 내전에 휩싸였다. 영국의 범세계적 헤게모니는 무너졌으며, 일본은 동아시아의 헤게모니에 대한 팽창이 잠시 수그러들었다.

배경

정치 및 군사적 동맹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독일 통일 이후 유럽은 독일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평화를 맞이한다.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삼제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발칸 반도 문제로 삼제 동맹이 해체되었음에도 러시아와는 재보장 조약을 맺어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의 분쟁에서 개입하지 않으며 상호 불가침을 이루었다. 삼제 동맹의 해체 이후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독오 동맹을 이루었으며, 이탈리아가 합류하면서 삼국 동맹이 되었다.

빌헬름 2세독일의 황제로 즉위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해임하면서 독일은 팽창주의적 외교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빌헬름 2세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거부하였고, 러시아독일의 견제를 위해 프랑스러불 동맹을 체결하였다. 영국 또한 독일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 견재하며 프랑스영불 협상을 맺었으며, 이후 러시아와의 영러 협상이 체결되었다.

군비 경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통해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한다. 빌헬름 2세 이전 독일은 식민지 개척 대신 국내 산업 육성을 선택하면서 높은 기술력과 공업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높은 기술력과 경제력, 공업력을 통해 빌헬름 2세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던 독일 황립해군의 육성을 목표로 한다. 총 5차례의 함대법을 통해 해군력을 늘려나가 영국과 군비 경쟁에 돌입하였다. 독일-영국 해군력 경쟁은 주변 유럽 국가들의 군비 증강에도 영향을 주어 1908년부터 1913년 사이 유럽 국가들의 군비는 50%가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 반도 문제

오스만이 몰락함에 따라 발칸 반도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 간의 패권 경쟁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1878년의 베를린 조약으로 공동통치령이 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여 보스니아 위기가 발생한다.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하며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시켜나가던 러시아세르비아 등은 크게 반발하였다. 1912년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의 영향으로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전후 영토 분할을 두고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다. 세르비아는 두차례의 발칸 전쟁의 승리로 인해 더욱 공격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게 된다.

서막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세르비아의 과격 민족주의 단체인 흑수단의 지원을 받는 청년 보스니아의 6명의 암살자들은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갈때 폭탄을 투척하였다. 수류탄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이 탄 차량을 터트리지 못하고 주변 군중이 부상이 입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이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도중 암살자 중 한명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폭력 사태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 보스니아인들을 부추겨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 사건을 발생시켰다.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심지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대도시에서도 발생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하였으며,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던 지역에서는 민병대가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폭력을 발생시켰다.

7월 위기

사라예보 사건 이후 한달 동안 유럽은 전쟁의 위협에 긴장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과의 논의 끝에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을 최후통첩에 담았으며, 이는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시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의 의도에 따라 세르비아는 최후통첩을 거절하였으며, 이에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에게 전쟁을 선포하자, 러시아는 부분 동원령을 내리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독일은 이를 해제할 것을 최후통첩으로 보냈다. 러시아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고, 8월 1일, 독일러시아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독일프랑스에 대해서도 어떠한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최후통첩으로 보냈으나, 프랑스는 이에 대답하지 않았고, 8월 3일, 프랑스에게도 전쟁을 선포한다.

진행 과정

서부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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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앞서 독일프랑스 양국은 서로를 향한 군사 계획을 각각 1905년1912년에 계획하였다. 독일슐리펜 계획대장군참모장이던 알프레드 폰 슐리펜이 계획하여, 벨기에를 경우하여 우익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크게 돌아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여 전쟁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와 같이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계획이였다. 반면 프랑스제17 계획은 두 가지 경우를 상정했는데, 하나는 독일알자스-로트링겐으로 공격을 감행한다는 경우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공격의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국경 지대에 위치한 요새와 장애물을 통하여 독일의 공격을 격퇴하고 반격한다는 내용이며, 후자는 독일의 우회 작전으로 인해 알자스-로트링겐의 병력이 빠질 것을 예상하고 이를 공격하여 라인 강까지 진격한다는 내용이다. 양국의 계획 모두 벨기에를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보았고, 이는 특히 독일의 경우가 심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양국은 모두 서로의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벨기에에게 군사통행권을 요구한다. 그러나 벨기에는 그들의 중립에 따라 둘의 요구를 모두 거절한다. 그 이전인 1912년영국독일의 침공에 대한 지원에 대한 제안 또한 거절하였다. 빌헬름 2세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의 먼 친척인 알베르 1세에게 침공의 핑계로 '시간 부족'을 운운하자 알베르 1세는 화를 내며 국경의 철도와 터널의 폭파를 명령했다.

8월 4일, 독일벨기에 침공이 시작된다. 8월 5일, 독일벨기에 국경의 리에지를 공격한다. 독일리에지에 위치한 요새를 포위하고 벨기에 내부로 진격한다. 요새의 포위는 8월 8일까지 지속되었다. 8월 14일, 파죽지세로 벨기에 내부로 진격하던 독일군은 할렌에서 벨기에군에 의해 패배한다. 그러나 할렌 전투는 양측 합하여 11개 연대가 충돌한 소규모의 전투로써 독일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고, 8월 20일, 뫼즈 강까지 진격하여 나무르의 요새를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프랑스군은 포위된 벨기에군을 지원하기 위해 5군을 진격시켰으나, 샤를루아 전투에서 독일의 급습으로 인해 몽스까지 잃고 퇴각하였다. 나무르의 벨기에군은 독일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8월 23일 항복하였고, 독일군은 프랑스 내부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한편 알자스-로트링겐프랑스 1·2군은 제17 계획에 따라 알자스-로트링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공격 하루만인 8월 8일, 프랑스군은 뮐하우젠을 점령하였으나, 이틀 뒤 독일 7군의 반격으로 인해 탈환당한다. 잠시 후퇴한 프랑스군은 재정비를 취한 후 8월 14일, 알자스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진행하였고, 디우레를 점령하고 뮐하우젠을 재점령, 자르부르크 근방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독일군 또한 후퇴한 다음 재정비를 갖고 8월 20일, 공격을 진행하여 이전 공세로 인해 점령한 지역을 모두 내주고는 난치히(낭시) 근방의 륀슈타트까지 점령당한다. 새로 조직되었던 알자스군 역시 8월 23일 뮐하우젠에서 퇴각하여 후방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로트링겐에서는 8월 21일, 독일군 5군이 프랑스 3군에게 공격을 개시한다. 프랑스군은 독일의 공세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여 무방비 상태에 해당하였고, 8월 22일, 독일군의 포격으로 인해 한 개 사단이 해체된다. 십여 시간이 지난 저녁에서야 해체된 사단은 재집결하였으며, 4군 또한 비르텐 근처에서 패주한다. 8월 23일, 독일군은 몽스의 운하를 점령하고 철도를 점령하였으나, 곧바로 영국 원정군의 저항에 퇴각하였다. 이후 독일군은 기병대를 통해 몽스를 수비하는 영국 원정군 17사단의 포위를 시도하였고, 결국 17사단은 포위 후 섬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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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의 전투에서 계속된 패배를 거듭한 협상국은 대후퇴라 불리는 전방위적인 후퇴작전을 실시한다. 협상국은 후퇴함과 동시에 후위대를 통해 독일군에게 지속적인 공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르카토 전투, 세인트 쿠엔틴 전투 등의 반격에서 바땅한 전과는 올리지 못하고, 그랜드파이트 사건, 에테르 사건, 네리 사건을 통해서 독일군에게 잘못된 정보를 보고하게끔하였다. 한편 프랑스-벨기에 국경의 모뵈주에서는 5만에 달하는 병력이 독일에 저항하였으나, 9일만에 항복하여 5만의 병력이 포로로 붙잡힌다.

8월 31일, 1군과 2군은 파리 돌입을 멈추고 제5군을 우회하여 포위하기 위해 진격로를 틀어 마른 강을 건넜다. 9월 7일, 연합군은 퇴각을 중지하고 마른 강을 건넌 1군과 2군에 대해 반격을 개시한다. 독일군은 오랜 강행으로 인해 지쳐있었으나, 대후퇴 기간 동안 연합군의 공격을 저지해내고 몇배에 달하는 피해를 준 덕분에 연합군의 반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군은 2군과 3군의 사이를 집중 공격하는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해내었고 1군은 계획대로 프랑스 5군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프랑스 5군은 9월 12일 항복하였다. 마른 전투에서 양측은 40만 명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으나, 연합군은 10만 명이 사망하고 영국 원정군이 사실상 전멸에 이름으로써 반격의 기회는 사라졌다. 독일 또한 1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한동안의 휴식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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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영국 원정군프랑스 5군 패잔병 및 9군 일부는 파리에서 시가전을 벌인다. 파리가 포위됨으로써 독일 수뇌부는 이들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연합군은 파리에 남아있는 민간인을 징병하고 징발함으로써 계속해서 저항해나갔다. 포격을 동원한 공격에도 수비대는 지속해서 저항했고, 이는 제14 예비군단에게 큰 피해로 돌아온다. 하지만 계속해서 포위된 채 어떠한 식량 보급도 없이 몰려들어오는 군대를 막을 수 없었고, 결국 10일 만인 9월 22일, 파리는 함략된다.

마른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인 9월 7일, 독일쿠르트 리츨러는 전후 종전협정에서 독일이 취할 이권 등을 정리한 9월 계획의 초안을 작성한다. 해당 계획은 이후 파리가 함략당하고 승기를 완전히 잡음으로 인해 그 개정안이 독일 국가의회를 통과하였고, 이후 종전 협정에서의 이정표가 된다. 한편,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센 강 전투, 샤르트르 전투, 트루아 전투에서의 패배와 파리의 함략으로 인해 프랑스 내부에서는 항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간다. 그러나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예시로 들며 항전을 호소했다. 영국영국 원정군파리 전투로 인해 완벽하게 소멸됨에 따라 본토에서 새로운 원정군을 조직하기를 계획하였으나, 영국 또한 징병을 거부하며 종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100%
항복 직전 독일 진격

파리 함략 이후 독일10월 3일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치루며 계속해서 진격하였다. 주로 3군, 4군, 5군 등이 이에 해당했으며, 트루아를 점령하고 알자스-로트링겐에서 프랑스를 밀어내는 등 프랑스 1군, 2군, 3군을 압박했다. 반면 북서쪽의 1군과 2군은 파리 함략까지 주력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었었기 때문에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그럼에도 샤르트르 전투를 치뤄 승리하기도 하였다. 양군의 재정비가 끝나가자 항전을 주장하는 프랑스를 완전히 끝내기 위한 새 공세를 준비한다. 우익 공세라 명명한 공세는 센 강을 따라 북상하여 다시 한번 우측으로 크게 돌아 브르타뉴까지 진격하여 북부를 모두 잃은 프랑스를 항복시켜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을 지니었다.

그렇게 10월 2일, 센 강 하구 전투를 시작으로 우익 공세가 개시된다. 연합군은 영국 원정군이 재편성되어 전선에 배치되고 프랑스군 또한 새로운 군을 편성하는 등 전력을 강화했음에도 추풍낙엽처럼 무너져내렸다. 당장 이전에 벌어진 수많은 패배로 인해 사기는 곤두박질을 치고 파리를 포함한 북부를 잃은 탓에 보급조차 장애를 가지니 공세를 막아낼 기력이 없었다. 10월 10일 르아브르까지 점령한 독일군은 이후 노르망디브르타뉴를 향해 진격했다. 10월 12일부터 10월 15일 동안 프랑스군은 시가전이라는 우위를 가지고도 을 지켜내지 못하고 다시 한번 패퇴하였다. 캉 전투 이후 브르타뉴 전투까지의 3일 동안 독일군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노르망디를 점령하였고, 이후 렌 전투낭트 전투에서도 빠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3주가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연합군 측은 루아르 강 이북을 잃었고 영국 원정군은 다시 한번 해체의 위협이 드리웠다.

10월 22일, 독일군이 루아르 강을 넘자 보르도에 위치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휴전 협정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미 9월 24일 벌어진 보르도 시위에서 반전파가 내각에 등용되면서 계속해서 논의되던 휴전 협정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그러던 10월 26일, 영국이 항복을 선언하고 독일과 협정에 들어선다. 프랑스 본토의 영국 원정군독일에게 항복하여 무장해제되어 본국으로 수송되었다. 10월 26일, 영국이 공식적으로 휴전 협정에 사인을 하였고, 결국 그 다음날인 10월 27일, 프랑스 또한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서부 전선은 마무리 되었다.

동부 전선

독일러시아가 동원을 완전히 마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하고 슐리펜 계획을 실시하여 빠른 속도로 벨기에를 넘을때, 러시아독일의 예상과 달리 고작 8일만인 8월 7일에 국경을 넘어 동프로이센을 침공한다.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으로 진입한지 10일 후인 8월 17일부터 동프로이센 침공이 실시된다. 동프로이센 침공러시아는 2개 군을 투입한 반면, 독일은 단지 제8군 소속 10개 사단만이 동프로이센을 지키고 있었다. 동프로이센 침공의 첫 전투인 슈탈루푀넨 전투에서 독일 1개 사단은 러시아 4개 사단을 상대로 승리하였으나, 그 효과는 미미하였고, 러시아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8월 20일, 독일의 선공으로 굼비넨 전투가 발생하였으나, 독일의 성급한 공격으로 인해 패배하고 마주리아호로 후퇴했다. 독일은 패퇴 후 상징적인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비해야 했고, 이 때문에 헬무트 폰 몰트케서부 전선의 2개 사단을 동부로 급파할 계획을 짜놓기도 했다. 8월 23일, 헬무트 폰 몰트케가 8군의 사령관을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교체한다. 가위와 같이 진격하던 남부의 러시아군은 잠시 진격을 중지했는데, 이때를 틈타 독일군은 재정비에 성공하고, 이후 탄넨베르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어서 제1차 마주리아호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면서 러시아 제국동프로이센 침공독일의 승리로 종료된다.

동부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초기 계획은 독일슐리펜 계획과 같이 러시아가 동원령을 완료하기 전까지 남부 전선을 정리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동원령은 생각보다 빨리 완료되어 동프로이센 침공으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동프로이센러시아의 시선이 집중된 틈을 타 러시아령 폴란드에 대해 공세를 가하기 시작한다. 8월 23일부터 8월 25일까지 이루어진 크라슈니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1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4군 또한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지속된 코마로프 전투에서 비록 4군은 러시아군에 대한 포위 작전을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북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3군이 러시아의 3군과 8군에게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1군과 4군 또한 북진을 저지당하고 돈좌되어 러시아군의 공세에 의해 계속해서 후퇴하게 된다. 이후 이어진 라바 전투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패배하였고, 갈리치아-로도메리아러시아에게 빼앗긴 채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후퇴하여야 하였다.

한편 동프로이센 침공을 저지하고 동프로이센을 회복한 독일바르샤바를 향해 동진한다. 독일의 제17군단은 바르샤바 9km 앞까지 전진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측면 공격으로 인해 돈좌되어 후퇴한다. 비록 동맹국이 바르샤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그닐라 리파 전투라바 전투 이후 프레미셀의 요새에 포위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11만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고, 바르샤바 전투 이후 독일러시아슐레지엔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우치를 목표로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여 목표를 달성하며 승리를 거둔다. 우치 전투 이후 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갈리치아를 향해 수 차례 공격을 진행하였으나, 모두 격퇴당하여 패배하였다.

1915년 1월 31일 이루어진 제2차 마주리안호 전투의 전초전인 볼리모프 전투에서 독일은 승리한다. 독일은 곧바로 동프로이센에서의 공세를 개시하였고, 러시아 제국의 10군을 포위하려 들었다. 그러나 10군은 20만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였으나, 네만 강까지 전선을 후퇴하게 된다. 이후 독일은 갈리치아에 대한 러시아의 압박을 제거하기 위해 소규모 공세를 개시한다. 그러나 서부 전선의 부대가 동부 전선에 재배치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또한 공세에 가담하면서 대규모 공세로 변화하였다. 러시아는 압도적인 독일의 화포의 화력으로 인해 거대한 피해를 입어 후퇴하여, 단 한달 동안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당한 것 뿐만 아니라 라트비아민스크까지 점령당한다. 그 이후로도 독일은 잉여 사단을 이용하여 6월 24일, 탈린을 점령하고, 7월 4일에는 키예프까지 도달한다. 동맹국이 드네르프 강까지 진격하면서 러시아군 수뇌부에서는 항복에 대한 여론이 증가한다. 이러한 여론은 볼로소보 전투에서 패배하고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 50km까지 진격하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1915년 7월 9일, 항복을 선언한다.

남부 전선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에게 전쟁을 선포한 다음날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를 포격하기 시작하여 남부 전선이 개전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8월 12일, 드리나 강을 넘어 베오그라드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초기 오스트리아-헝가리남부 전선에 3개 군을 투입하였으나, 러시아 제국의 빠른 재무장과 그로 인해 갈리치아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 1개 군은 동부 전선으로 재배치되었다. 8월 15일 오후 11시, 세르 언덕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가 충돌한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평야 지역 대신 구릉 지대를 절반의 병력으로 공격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세르비아는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협상국에게 첫 승리를 주고 드리나 강을 건너 후퇴한다.

세르 전투에서 승리한 세르비아군은 드리나 강을 건너 소규모 공세를 펼친다. 해당 공격은 동부 전선으로 수송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2군단을 막기 위함이였는데, 이미 수송은 이루어지고 있어 공세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9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5군단과 6군단은 드리나 강을 건너 다시 공격을 시도한다. 5군단은 초기 세르비아 2군단에 의해 돈좌되어 잠시 후퇴하였으나, 6군단은 3군단을 기습 공격하여 교두보를 마련한다. 세르비아 2군단이 3군단을 지원하러 일부 병력을 지원하는 사이 오스트리아-헝가리 5군단이 2군단으로부터 승리를 거두어 마찬가지로 교두보를 마련한다. 이후 자고드냐 산에서의 4일 간의 전투로 양측 모두 만 명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 세르비아군은 자고드냐 산에서 후퇴하였고, 참호를 건설한다. 한달 동안 양측은 참호전을 벌였는데, 세르비아는 부족한 탄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병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는다.

한달 동안 세르비아군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힌 오스트리아-헝가리11월 5일, 대규모 공세를 개시한다. 세르비아콜루바라 강에서 저항하며 단계적으로 후퇴하였으나 부족한 포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이때 지보인 미시치세르비아 1군의 사령관이 되면서 휴식이 필요한 부대에게 휴식을 주고 국토 내부 깊숙히 후퇴를 함으로써 베오그라드를 잃는 대신 재편성의 시간을 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2월 2일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이후 계속해서 공세를 감행했고, 프랑스로부터 지원 받을 예정이였던 탄약과 포탄은 이미 10월 27일, 프랑스가 항복함으로써 그리스의 지원만으로 버텨야했다. 세르비아군은 있는 힘껏 저항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세를 저지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베오그라드를 탈환하기에는 피해가 막심했다.

1915년 1월 12일, 재편성을 완료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였다. 세르비아 또한 같은 기간 동안의 휴식으로 조직력을 갖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부족한 포탄으로 인해 드리나 강에서의 양상이 다시 전개되었고,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1만 5천 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다. 크루셰바츠에서의 전투로 세르비아군은 와해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공세는 계속해서 진행되어 6월 3일에는 마케도니아까지 진격한다. 6월 이후 세르비아 정부는 전 국토에 대한 행정력을 상실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였으며, 와해된체 해체된 세르비아군 일부가 산지에서 게릴라전을 이어나갔다. 세르비아를 점령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게릴라군에 맞서고 점령을 유지할 일부 주둔군을 제외하고 모두 몬테네그로 전선으로 차출되어 총공세를 가한다. 수와 화력 등 모든 부분에서 열세이던 몬테네그로는 침공 1주일 만에 항복하였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대한 점령은 리가 조약이 체결되고 발효된 1916년까지 지속된다.

아프리카 전선

토골란트 전역

동아프리카 전역

카메룬 전역

남서아프리카 전역

기타 전선

캅카스 전역

오세아니아 전역

대서양 해전

지중해 해전

인도양

결과

파리 조약으로 독일9월 계획이 실현됨에 따라 세계는 빌헬름 2세세계정치에 따라 재편되었다. 서쪽의 칼레부터 동쪽의 바쿠까지 유럽은 독일이 설립하고 주축이 된 중앙유럽 동맹에 소속되었다. 발칸 반도를 휩쓸었던 범슬라브주의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사장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넓힌다. 이후 친독 국가인 불가리아제4차 발칸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대불가리아를 이루었다. 러시아 서부의 우크라이나 등의 국가들은 리가 조약에 의해 독립하며 중앙유럽 동맹에 합류하였고, 이후 러시아제2차 러일전쟁을 계획하던 도중 혁명에 휩싸여 재정이 붕괴되고 내전에 휩싸인다. 프랑스모젤 강 동쪽과 중앙아프리카, 인도양-태평양 지역의 식민지를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으며 반독감정은 더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요새의 건설이 금지당하고 군대 증강을 제한받으며 군사적으로 거세된다. 그럼에도 군부의 쿠데타는 계속되었고, 민중 봉기 또한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결국 제3공화국은 군부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고, 군부와 극우주의자가 중심이 된 프랑스 제4공화국이 성립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된다. 독일은 기존 영국의 범세계적 패권을 대신하였고,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 대해 영향력을 펼칠 수 있었다. 일본칭다오 전투에 대해 소량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영일 동맹이 해체되며 종전하였으나,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 확보와 중국에 대한 영향력 증대로 인해 갈등은 계속되었다.

전후

사상자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