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
독일국
Deutsches Reich
1871년 - 현재
국가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표어 Gott Mit Uns
( 신이 우리와 함께한다 )
100%
수도 베를린
최대 도시
면적 956,767 km²
(유럽 1위, 유럽의 11.96%)
황제
1871년 ~ 1888년 빌헬름 1세
1888년 프리드리히 3세
1888년 ~ 1941년 빌헬름 2세
1941년 ~ 1951년 빌헬름 3세
1951년 ~ 1970년 프리드리히 4세
1970년 ~ 199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5세
1993년 ~ 현재 빌헬름 4세
국가수상
1871년 ~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1900년 ~ 1909년 베른하르트 폰 뷜로
1909년 ~ 1921년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1929년 ~ 1935년 프란츠 폰 파펜
1935년 ~ 1952년 쿠르트 폰 슐라이허
국가부수상
통일 1871년 1월 18일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 1915년
제2차 세계 대전 1936년 ~ 1941년
제3차 세계 대전 19**년 ~ 19**년
인문 환경
인구 전체 인구 104,289,320명
민족 구성 게르만 민족 94.3%
슬라브 민족 3.7%
갈리아-게르만 민족 1.8%
기타 0.2%
인구 밀도 109명/km²
공용어 독일어
지역어 폴란드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체코어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 러시아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문해율 99.4
종교 무교 30.5%
루터교 31.2%
로마 카톨릭 28.6%
동방 정교회 2.6%
기타 7.1%
군대 독일군
세부 군대 육군 독일 육군
해군 독일 황립해군
공군 독일 황립공군
행정구역
정치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양원제) 연방 국가 다당제 소선거구제 정교분리 성문법주의(대륙법계)
입법부 독일 연방참의원
독일 국가의회
국가
원수
독일
황제
빌헬름 4세
정부
요인
국가수상 올리버 디터 뵈르너
국가부수상 하인츠 로트
연방참의원 의장 올리버 디터 뵈르너
연방참의원부의장 루돌프 에베레트 폰 베스코
국가의회 의장 요한 쿠르트 폰 지겐
국가의회 부의장 라리사 슈미트
프란츠 아이딩거
디트리히 폰 바이세
밀레나 슈나이더
국가대법원장 로베르트 빌헬름 볼프
국가부대법원장 니케 하이디 울
프리츠 에른스트 폰 슈넬
국가대법관 하인리히 폰 뮈헤
요한 볼프강 치머만
에르빈 괴츠
하이케 파울라 폰 하인츠
아돌프 사바츠키
예니퍼 페리히
국가외무부장관 한스 빌헬름 자프티히
국가내무부장관 루이제 사라빅토리아 폰 하겐나우
국가재무부장관 보리스 에른스트 폰 라스텐부르크
국가법무부장관 안드레아 비카리
국가군무부장관 루돌프 폰 폴커츠
국가교육부장관 카르스텐 오스카어 폰 빈다우
국가노동부장관 하이덴 슈라더
국가사회부장관 베르타 에바 폰 브래든
국가보건부장관 에릭 바이저
국가식량부장관 로빈 키텔
국가영토부장관 마그다 레아 트리벨조머
국가교통부장관 파트리키아 비안카 폰 슈로다
국가정보부장관 라인홀트 베어
국가환경부장관 이본 로타어
대장군참모장 리하르트 프리드리히 폰 외젤
대장군부참모장 이나미리암 아테프
육군사령관 모리츠 베르켈
해군사령관 루트 프랑카 폰 플뢴
공군사령관 카를 베르너
경제
경제 체제 혼합 경제
명목
GDP
전체 GDP 6조 2479억 M
1인당 GDP M 59,910
GDP
(PPP)
전체 GDP 6조 2479억 M
1인당 GDP M 59,910
화폐 공식 화폐 오이로파마르크 (EM, M)
코드와 단위
ccTLD .de
국가 코드 1 DE DEU
국제 전화 코드 1
단위 법정연호 서력 기원
시간대 +1
도량형 SI 단위
날짜형식 DD-MM-YYYY
운전석
(통행방향)
왼쪽
(우측 통행)
외교
연합 연합 가입
연합 회원국
승인 여부
창립국
자유협정 자유협정 가입
자유협정 회원국
승인 여부
창립국
수교국 139개국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북독일 연방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룩셈부르크  
  헤센  
  오스트리아  
  프랑스  
  폴란드-리투아니아  
  네덜란드  
  발트  


독일국(독일어: Deutsches Reich 도이체스 라이히[*]) 혹은 라이히(독일어: Reich 라이히[*])는 중앙 유럽에 위치하여 5개의 왕국, 8개의 대공국, 13개의 공국, 9개의 후국, 3개의 백국과 4개의 자유시로 구성된 입헌군주제 연방 국가이다. 북쪽으로 스칸디나비아 3개국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8개국이, 동쪽으로는 헝가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가, 서쪽으로는 저지대 2개국과 프랑스가 위치한다. 법적공용어는 독일어이며, 라이히의 극동과 극서에서 폴란드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이 소수의 제2국어로 사용된다. 게르만 민족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일부 슬라브 민족켈트-게르만 민족이 존재한다. 라이히의 수도는 프로이센의 수도이기도 한 베를린으로 라이히의 최대 도시이다. 북해 연안의 브레멘함부르크, 라인 강 유역의 프랑크푸르트암마인슈트라스부르크, 오데르 강 동쪽의 슈테틴단치히, 발트 지방리가 등의 대도시가 있다.

라이히는 1871년 1월 18일,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포되었다. 라이히의 정치 체제는 당시 권위주의적이던 프로이센의 영향을 크게 받아 권위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국가가 되었다. 비스마르크 시대라 불린 일련의 시대 동안 라이히는 유럽 외교의 중심으로써 평화를 수호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세계정치 시기에는 기존 패권국인 영국으로부터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빼앗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대공황으로 큰 위기를 겪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이했으나, 수 년간의 전쟁으로 복수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어난 쿠데타로 인해 독재 정치를 맞이한 라이히는 1952년, 자유화 혁명인 52혁명을 겪고 자유 정치를 이루었다. 제3차 세계 대전에서도 승전한 라이히는 팍스 게르마니카라 불린 평화시기 동안 그들의 패권과 자유 정치를 세계에 퍼트렸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서는 라이히에 대항하는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며 라이히의 패권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라이히는 의원내각제 입헌군주제 연방 국가이다. 라이히는 독일 연방참의원에 소속된 국가들로 이루어진 연방으로써 국가원수인 독일 황제는 연방의 의장을 겸한다. 또한 독일 황제프로이센 국왕이 겸한다. 독일 황제국가헌법에 따르면 모든 행정이 종속되며, 입법부를 소집 및 해산하며, 처벌을 경감할 수 있다. 그러나 슐라이허의 도당 이후 황제가 유명무실해진 이후 1일 혁명을 거치며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황제는 라이히를 대표하고, 인민통합의 주체가 되며, 국가수상을 임명 및 해임하며, 국가의회를 소집 및 해산하고, 행정부의 정책과 입법부의 입법안의 최종 결정자이다. 또한 전시 독일군의 최고 군통수권을 지니며, 라이히 내의 모든 공문서가 독일 황제의 이름으로 서명된다. 독일 황제 및 그의 가족들은 국가헌법에 의해 신체불가침권을 지닌다.

독일 국가수상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가 독일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 국가내각을 조직한다. 국가수상은 실질적인 최고 권력을 행사하며, 행정부의 최고 결정자이다. 국가내각은 14개의 국가부와 16명의 각료로 구성되어 행정부를 이룬다. 라이히는 양원제 국가로써 상원으로 독일 연방참의원을 하원으로 독일 국가의회을 지닌다. 독일 연방참의원은 라이히를 이루는 가입국들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국가수상의장으로 하여 90석으로 구성된다. 연방참의원국가의회에서 통과된 입법안을 표결할 뿐만 아니라 직접 입법안을 국가의회에 제출하기도하며, 연방 국가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행정력을 지니며, 심지어 80표 이상의 찬성 시 라이히를 해체할 수도 있는 등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연방참의원의 의원들은 국가헌법에 따라 일정 의석 만큼을 연방의 구성국들에 의해 선출된다. 독일 국가의회는 5년 마다 민주 선거로 선출된 ___명의 인민의 대표들이 구성한다. 국가의회는 법을 제정하고 국가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 또한 국제조약을 비준하고 국가정부의 예산안을 결정한다. 국가의회국가수상을 선출하고 국가내각 구성에 개입하며, 국가대법원국가대법원장, 국가부대법원장, 국가대법관 선출에 개입한다. 또한 내각불신임을 발의하여 국가내각을 해산시킬 수 있다. 독일 국가대법원은 라이히의 최고 사법기관으로써 1명의 국가대법원장과 2명의 국가부대법원장, 6명의 국가대법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국가정부에 의해 임명되 국가의회의 승인 하에 취임한다. 국가대법원장은 10년의 임기를 지니고, 국가부대법원장은 7년, 국가대법관은 5년의 임기를 지닌다. 국가대법원은 3심의 판결을 맡을 뿐 아니라 헌법재판소로써의 역할도 행한다. 라이히의 재판은 삼심제에 따라 1심은 주법원, 2심은 국가법원, 3심은 국가대법원에서 이루어진다.

국명

라이히의 국명은 국가헌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독일국"(독일어: Deutsches Reich 도이체스 라이히[*])이며, 축약하여 "라이히"(독일어: Reich 라이히[*])로도 사용한다. 비공식적으로 "독일 황제국"(독일어: Deutsches Kaiserreich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로도 불린다. "라이히"의 어원은 "권력, 제국"을 뜻하는 고대 고지 독일어 rīhhi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라이히"는 게르만 민족의 민족 국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어 라이히 이전 신성로마제국(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하일리게스 뢰미셰스 라이히[*])에서 사용된 전적이 있다. "독일"(독일어: Deutsch 도이츠[*])의 어원은 마찬가지로 고대 고지 독일어 "종족에 속하다"의 의미를 지닌 "diutisc"에서 유래하였다.

역사

기원

현재 라이히가 위치하는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 경에는 아나톨리아에서 유입된 철기 문명으로 계급이 발달하였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에는 게르만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인들의 팽창을 막고 그들과 교류하여 문명을 받아들인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불리는 일련의 대이동으로 최종적으로 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그곳에는 수많은 게르만 왕국들이 세워졌다. 이들 중 프랑크족들은 현재의 프랑스, 옥시타니아,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라이히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로마 황제의 관을 받은 카를이 죽으며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분열되었고, 이들 중 동프랑크 왕국은 라이히의 기원이 된다. 동프랑크 왕국오토 1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되었으며, 900년 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30년 전쟁의 패배로 2천개가 넘는 영방국가로 분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후에도 신성 로마 황제를 겸하고 쥐트라이히에서 세력을 이루었으나, 노르트라이히에서 호엔촐레른가프로이센이 부상하였다.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어 프랑스의 종속국들로 이루어진 라인 연방이 창설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독일 연방이 탄생하였다. 1848년 독일 혁명 이후 프로이센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수상에 오르면서 철혈 정책이라 일컬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므로써 1871년 1월 18일, 파리 베르사유궁에서 "독일국"을 선포한다.

비스마르크 시대

라이히의 통일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하여 라이히의 기틀이 잡힌다. 비스마르크 헌법이라 불리는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연방참의원국가의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국가의회가 정부에 가하는 영향력을 적었으며, 독일 황제를 위한 연방참의원에게 막대한 권력이 지급되었다. 라이히는 관료와 장교가 중심이 되어 거대한 권력 집단을 유지했다.

국내정치적으로는 문화투쟁탄압법을 통해 카톨릭교와 사회주의를 탄압하였다. 문화투쟁프로이센에서 5월 입법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5월입법으로 인해 성직자는 프로이센 정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수도원이 해산되는 등 교황청에게까지도 큰 비난을 받았다. 교황청은 라이히의 성직자들에게 5월 입법을 거부할 것을 지시했고, 프로이센 정부는 이들을 체포하고 추방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은 보수주의자와 신교도에게서도 비난 받았고, 카톨릭 정당인 중앙당의 세력이 확대되는 등 실패로 종료되었다. 한편, 빌헬름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를 명목으로 사회주의 탄압을 위한 탄압법이 통과되었다. 여러 급진적 정당과 단체들이 금지되고, 이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탄압법은 2년의 유효기간을 지녔었으나 10년이 더 유지되었으며, 1878년 국가의회 선거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9석의 의석을 얻으며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이후 국가의회 의석이 증가된 중앙당오토 폰 비스마르크로부터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라이히는 지정학적으로 양면전선의 위협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라이히의 지정학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강대국 간의 외교 질서를 새로 재편하였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반-라이히 감정이 높아진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며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삼제 동맹을 맺는 등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발칸 반도에서의 충돌로 삼제 협상은 파기되었고, 대신 라이히는 러시아재보장 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팽창보다 평화가 목표였으며, 이 때문에 라이히는 제국주의의 시기에서도 적극적인 식민지 확보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소극적인 팽창 정책 하에서도 아프리카태평양 일대에서 식민회사에 의한 식민지가 개척되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토골란트, 독일령 카메룬, 독일령 노이기니아, 독일령 자모아 등 식민지가 세워졌고, 독일령 키아우초우와 같이 조차지도 건설되었다.

빌헬름 1세가 붕어하고 1888년,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당시 후두암을 앓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자유주의 사상과 별게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계속 수상의 직위에 머물게 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99일만에 붕어하였으며, 이후 빌헬름 2세가 즉위한다. 빌헬름 2세는 황자 시절부터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악감정이 존재했으며, 불과 며칠 전에는 그에게서 여러 경고를 담은 편지를 받았었다. 빌헬름 2세탄압법 연장에 대해 반대하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반기를 든다. 국가의회빌헬름 2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탄압법 연장은 부결되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를 사회복지법에 제동을 걸며 충돌이 계속된다. 그러나 1890년 독일 국가의회 선거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큰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많은 반대에 부딫치며 결국 1890년 3월 18일, 국가수상의 직위를 내려놓으며 비스마르크 시대는 종료된다.

세계정치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뒤를 이어 군인 출신의 레오 폰 카프리비가 2대 수상으로 취임한다. 그는 사회민주당과 협업할 생각이였으나, 당시 사회민주당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바닥을 기는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프랑스의 군사동맹으로 인해 러시아와 갈등에 빠졌고, 러시아가 라이히의 보복 정책으로 타격을 입자 라이히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레오 폰 카프리비는 대외 팽창 정책에 대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결을 달리하지 않았으나, 라이히 내에서 독일 식민협회가 조직되며 식민지 건설을 요구했다. 결국 수많은 반대파들로 인해 레오 폰 카프리비는 실각하고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가 차기 수상으로 취임한다.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는 옥수수 관세 인하 계획으로 인해 반대에 부딪치며 해임당했으나, 그는 빌헬름 2세에게 수상감으로 베른하르트 폰 뷜로를 적극 추전했다. 따라서 차기 수상은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임명되었으며, 그는 빌헬름 2세의 총애를 얻었다. 그가 국가외무청차관이던 시절 그는 국가의회에서 대외 팽창 정책에 관한 연설을 펼쳤다. 그의 의견은 빌헬름 2세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세계정치의 근원이 되었다. 그는 정치 세력의 의견에 편승하여 복지 개혁 정책과 비밀 투표를 이루었으며, 농업자동맹의 요구에 순응해 1902년 관세법을 통과하였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 시기, 라이히는 세계정치라 불리는 일련의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실시했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국가해군청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라이히 내에서 해군 증강 여론을 조정하여 수 차례의 함대건조법을 통과시켰다. 함대건조법으로 라이히의 해군력이 증강하자 영국은 이에 불안감을 느끼며 마찬가지로 해군을 증강하면서 독일-영국 해군력 경쟁이 이루어진다. 함대건조법을 통해 라이히는 영국의 뒤를 이은 세계 2위의 해군력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세계정치에서 "양지"는 중국과 중동으로써 오스만에게서 철도 부설권을 얻어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그를 잇는 3B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모로코 위기를 일으키는 등 영국프랑스의 위기감을 일으킨다. 세계정치로 인해 유럽 내 정치 지형이 재편되어 영국-프랑스-러시아삼제협상과 라이히-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삼국동맹이 조직되었다.

1907년, 라이히 정치에 한바탕 거대한 스캔이 발생한다. 하르덴-오이렌부르크 사건이라 불린 동성애와 관련된 스캔은 라이히 역사상 가장 거대한 스캔을 이루었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를 포함한 수많은 정치 인사들이 동성애 혐의를 받는 등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베른하르트 폰 뷜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혐의자들이 무혐의 판결을 받으며 종료되었다. 이후 빌헬름 2세데일리 텔레그레프의 인터뷰 도중 빌헬름 2세의 실언이 공개되면서 데일리 텔레그레프 사건이 발생한다. 데일리 텔레그레프 사건으로 인해 빌헬름 2세의 국내외적인 명예가 실추되었으며, 영국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해당 사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며 국가수상직을 사임하면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가 차기 수상으로 취암한다.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영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에드워드 그레이와 함께 관개를 개선하기를 원했고, 해군경쟁을 종식하고자 협상하였다. 그러나 함대경쟁종식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제2차 할데인 미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완전히 실패하였다. 1914년, 보스니아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럽은 긴장 상태에 들어섰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의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승전 시 협상국에게 요구할 사항을 담은 9월 계획을 계획하고 입안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라이히가 전쟁에서 승전하고 국가의회가 이를 승인하면서 파리 조약리가 조약으로 현실화되는데 성공한다. 9월 계획의 실현으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승전의 대표자 중 한명이 되었다.

파리 체제 기간 동안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비교적 소극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9월 계획에서 영국의 권리를 인정한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라이히의 패권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민족주의자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영국의 기존 식민지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의 정책은 대부분 유럽 대륙과 동아시아에 치중했다. 일본 제국도쿄 조약을 맺어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을 저지했고, 동프랑스 독일군 전병력 최고지휘관의 독단적인 플로레알 27일의 쿠데타 진압을 방관했다. 또한 제3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를 지원했고, 캅카스 내전에 개입해 동유럽의 평화를 유지했다.

1919년, 이집트 케디프국수에즈 운하 점거로 영국이 무력 시위를 감행한다. 라이히는 영국의 무력 시위에 대해 파리 조약 위반을 명분으로 수에즈 사태에 개입한다. 영국은 물러났으며, 라이히는 수에즈 운하의 30% 지분을 차지하는 등 큰 이익을 얻었다. 수에즈 사태에서 영국이 물러나면서 영국의 해양 패권 종식이 의미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국령 식민지에서 독립 요구가 증가했다. 이러한 가운데 영국령 인도 정부가 붕괴되면서 대영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라이히는 이러한 대영제국 분할을 선두하며 전 세계의 영국령 식민지를 점거하였으며, 기존 영국 패권을 완전히 대체하는데 성공한다.

영국의 붕괴로 인해 전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일시적인 무주공산이 되었으며, 중동도 그러한 지역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제국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음에도 무주공산이 된 중동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아르메니아를 지원하며 오스만 전쟁을 일으킨다. 기타 다른 국가들까지 오스만 전쟁에 참전하면서 오스만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라이히는 러시아의 중동 영향력 증가를 견제하며 해당 사태에 개입한다. 세바스토폴 조약을 통한 중재의 결과로 라이히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무주공산이 된 "양지" 중동의 패권을 확보한다. 몇년 뒤에는 러시아가 내전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동유럽과 중동에서의 위협이 소멸하면서 패권을 확고히하는데 성공하였다.

대공황

1921년 1월 1일,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가 사망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차기 수상은 그의 우군이던 아르투어 침머만이 이었다. 기존 베트만 홀베크의 반대파들은 그의 지지도 때문에 마땅한 정치적 공격을 하지 못했더라면, 반면에 마땅한 지지자가 없던 아르투어 침머만은 그들에게 있어 공격하기 쉬운 목표였다. 그에 걸맞게 갓 취임한 아르투어 침머만을 향해 반대파들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그 시기 라이히의 서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좋은 구색의 명분 또한 갖춰졌다. 그러나 여전히 인민의 여론은 베트만 홀베크의 후임인 아르투어 침머만의 편이였고, 초기 반대파들의 공격을 실패로 돌아갔다. 1925년, 세르비아 전쟁에서 패퇴를 거듭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된다. 아르투어 침머만의 행정부는 빠르게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에 개입하였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데 성공한다.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라이히가 잠시간의 혼란에 빠졌을때, 대공황이 발생한다. 이득으로 보였던 오스트리아 합병은 혼돈을 불러왔고, 라이히의 경제는 붕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르투어 침머만은 마땅한 대처를 하질 못했고, 취임 초기의 여론은 반전되었다. 반대파들은 이러한 기회를 잡고 아르투어 침머만을 공격하였고, 그는 곧 사태의 책임을 지며 사퇴하였다.

아르투어 침머만의 사임 이후 빌헬름 2세빌헬름 쿠노를 차기 국가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전에 재무청차관을 맡은 만큼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붕괴에 알맞는 수상으로 보였다. 빌헬름 쿠노빌헬름 그뢰너국가재무청차관을 임명하였고, 빌헬름 그뢰너는 구조조정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자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며 라이히는 점차 대공황에서 빠져나왔고, 경제는 점차 복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해 라이히의 동쪽과 서쪽에서 여러 문제들이 터져나왔다. 폴란드프랑스 제3공화국모두 군부 쿠데타로 정부가 전복되고 군국주의적이고 반라이히적인 정부가 들어섰다. 폴란드피우수트스키 쿠데타 당시 쿠노 내각은 프리에드리히 1세의 신변을 위해 쿠데타군과 협상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리에드리히 1세의 신변을 보장하였으나 인민적 지지를 잃는다. 거기에 더해 벨기에가 내전으로 붕괴되면서 결국 반대파들의 공격에 의해 빌헬름 쿠노는 해임당한다.

빌헬름 쿠노 이후 중앙당프란츠 폰 파펜독일 국가수상에 오른다. 그러나 파펜 국가내각 시기 동안 라이히를 둘러싼 유럽 정세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프랑스이탈리아강철 조약을 맺었으며, 발칸 반도에서는 제4차 발칸 전쟁이 발발해 라이히의 우방국인 불가리아가 몰락한다. 한편 프란츠 폰 파펜벨기에 내전에 소극적으로 개입하여 브뤼셀을 중립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경고성 차원의 소극적인 대응은 국내적으로 큰 불만 여론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소극적인 개입은 프랑스나 사회주의의 확장을 막지 못했으며, 벨기에 내전벨기에를 분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한다. 동쪽에서도 폴란드의 위협이 계속되었으며,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 코뮌튀르키스탄을 침공하였다. 이러한 파펜 국가내각의 외교적 무대응으로 인해 라이히 내부에서는 급진정당들이 세를 얻어 1934년 국가의회 선거에서 중앙당이 몰락하고 독일 조국당 등 급진 정당들이 의석을 확보했다. 결국 인민적 여론 악화로 빌헬름 2세프란츠 폰 파펜을 해임하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차기 독일 국가수상으로 임명한다.

슐라이허의 도당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취임과 동시에 프랑스, 폴란드-리투아니아, 포르투갈-브라질, 이탈리아, -갓 내전이 종식된-스페인 왕국으로 이루어진 군부동맹의 형성 소식을 듣게된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던 라이히에 대항하는 세력이 수면위로 드러난 것이였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이러한 반-라이히 동맹에 대해 새로운 전쟁이 임박했음을 선전했다. 이러한 선전은 독일 조국당과 같이 소극적인 기존 내각에 대한 불만을 지녔던 사람들을 만족시켰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 수상은 1934년의 선거에서 많은 의석을 차지한 찬전론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열성적인 지지층을 바탕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라이히 내에서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한편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의도와 다르게 리가에서 이루어지던 라이히 건국 65주년 기념 행사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의 주동자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을 알아낸 쿠르트 폰 슐라이허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사실이 대중에 알려지자 전쟁을 요구하는 여론이 증가하였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이러한 여론에 응답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선전포고하니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발발 이전부터 제1차 세계 대전과 달리 장기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은 라이히가 세 개의 길다란 전선을 가지면서 본격화되었다. 라이히는 사방으로 둘러싸인 적으로 인해 난관에 봉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7년 1월 18일, 국가 수호를 명분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의 사조직은 베를린의 주요 국가기관을 점거했으며, 성공적으로 라이히의 전권을 장악한다. 라이히의 전권을 장악한 그는 연방참의원국가의회를 모두 해산했으며, 그의 입맛대로 내각이 조직되었다. 슐라이허의 도당이라 불린 그의 국가내각은 오직 융커 게급으로 구성된 귀족과두정으로써 빌헬름 2세는 그들의 허수아비가 되었다. 슐라이허의 도당은 강력한 권한과 통일된 이해관계로 신속하게 라이히를 전시체제로 변화시켰다. 슐라이허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을 지닌 전시 게획은 라이히로 하여금 세개의 길다란 전선을 가지고도 이를 유지하고 혹은 되려 전진할 수 있게 하였다. 5년간의 제2차 세계 대전제3인터네셔널이 개입하면서 종전되었다.

전시 국가수호 명목으로 구축된 슐라이허의 도당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존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슐라이허슐라이허 프로그램으로 개편된 라이히의 전시 경제 체제를 다시금 민간 경제로 회귀시켜 전쟁 이전 경제로 라이히의 경제를 되돌려 놓기 위해 슐라이허의 도당 체제를 지속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의 말대로 5년 동안 슐라이허 프로그램은 전쟁 지속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으나, 대신 민간 경제로 하여금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이 종전되자 경제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경제 붕괴 이전에 다시금 라이히의 경제를 민간 경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슐라이허의 도당의 권력이 필요할 터였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제3인터네셔널의 세력이 비대해져갔다. 그들의 이념은 라이히의 인민으로 하여금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국가수호의 명분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인민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였다. 결국 라이히의 경제적-정치적 문제들로 인해 인민으로 하여금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정권이 해당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적합하다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슐라이허의 도당 체제는 황제가 다시금 바뀔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1일 혁명

슐라이허의 도당 체제는 오직 쿠르트 폰 슐라이허에 라이히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체제였다. 빌헬름 3세는 라이히를 위하는 것이라는 슐라이허의 말에 그의 독재를 방관했다. 국가헌법에 따르면 라이히의 모든 군권은 황제에게 있었기에 빌헬름 3세는 얼마든지 그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그를 몰아낼 수 있었다. 빌헬름 3세의 방관에 아르미의 장군들은 1947년에 일부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된 청년단 사건 외에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1951년 7월 20일, 빌헬름 3세가 붕어하고 프리드리히 4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던 7월 27일, 사회민주당 당원이 슐라이허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미수로 그친다. 슐라이허는 총상을 입었으나 생존하였고, 이윽고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반슐라이허 성향의 정당들에 대해 조사를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저항하는 당원 110명이 체포되었고, 사회민주당은 암살 미수 사건에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모든 의원들이 자격을 정지당한다. 그러면서 이를 기회로 1952년의 예산안을 통과시킨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이러한 날치기 같은 예산안 통과는 국가헌법에 위배되는 내용이었다. 국가헌법에 따르면 국가의회 정원의 과반수 이상이 출석하여야 회를 열고 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데, 사회민주당은 마지막 선거인 1935년 선거에서 의석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결국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정당들과 여론의 반발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에 슐라이허는 계엄령을 이용해 이러한 반대 의견을 묵살하였다.

새로이 독일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4세슐라이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가 황태자이던 시절부터 여러차례 슐라이허와 갈등을 겪고 빌헬름 3세에게 슐라이허를 해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라이히를 위해선 슐라이허가 필요하다 생각한 빌헬름 3세에 의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슐라이허는 그의 즉위에 큰 위기감을 느낀다. 7월 사건 당시 프리드리히 4세슐라이허를 호출하여 그의 행동에 대해 꾸짖었다. 그러나 이는 황태자 시절 그를 해임하려는 행동과 달리 너무나 유순했다. 이에 슐라이허는 안심한다.

1952년 7월 20일, 갑자기 프리드리히 4세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해임을 발표한다. 갑작스러웠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이 소식에 놀라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베를린 궁성으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제1근위보병사단 소속 근위대이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슐라이허를 체포한다. 비슷한 시각 슐라이허 국가내각의 내각 구성원들 모두 근위대에 체포되었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라이히의 수상이 해임되고 더군나 체포되었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체포는 전국에 생중계 되었고, 몇 시간 뒤 슐라이허 국가내각 소속의 국가재무부장관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는 다시 한번 쿠르트 폰 슐라이허독일 국가수상직 해임과 민간으로의 정권 이양을 발표한다. 다음날 1937년에 계엄령이 선포된지 15년만에 계엄령이 해제된다.

민정

세계 전쟁

팍스 게르마니카

자연 환경

지리

기후

정치

독일 황제

Deutscher Kaiser
Seine Majestät der Kaiser
Wilhelm I
빌헬름 1세

Wilhelm Friedrich Ludwig
Friedrich III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Wilhelm Nikolaus Karl Hohenzollern
Wilhelm II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Victor Albert
재위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재위
1888년 3월 9일 ~ 1888년 6월 15일
재위
1888년 6월 15일 ~ 1941년 6월 4일
Seine Majestät der Kaiser
Wilhelm III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Victor Augustus Ernst
Friedrich IV
프리드리히 4세

Wilhelm Friedrich Franz Joseph Christian Olaf
Friedrich Wilhelm V
프리드리히 빌헬름 5세

Wilhelm Karl Franz Ludwig
재위
1941년 6월 4일 ~ 1951년 7월 20일
재위
1951년 7월 20일 ~ 1970년 2월 6일
재위
1970년 2월 6일 ~ 1993년 7월 28일
Seine Majestät der Kaiser
Wilhelm IV
빌헬름 4세

Wilhelm Ernst Joachim
재위
1993년 7월 28일 ~ 현재

독일 황제는 라이히의 국가원수로 프로이센의 국왕이 이를 겸한다. 1871년 1월 18일, 라이히 선포와 함께 프로이센의 국왕빌헬름 1세가 즉위한 이후 150년 가량 이어지고 있다. 빌헬름 1세 이후 7명의 황제가 즉위했으며, 현재 빌헬름 1세의 6세손인 빌헬름 4세가 통치하고 있다.

독일 황제국가헌법에 의해 여러 권력이 보장되었다. 국가헌법에 따르면 독일 황제는 신체 불가침권이 보장되었다. 행정적으로는 모든 문서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서명되었으며, 대신 서명한 각료들은 이에 책임을 졌다. 또한 행정부의 모든 이들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 입법적으로는 황제국가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할 수 있으며, 휴회할 수도 있다. 사법적으로는 죄인의 처벌을 경감하고 사면할 수 있으며, 특별법에 따라 수사를 억제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는 황제독일군의 최고 군통수권자로써 군대 인사를 감행하며, 장교 및 부사관을 임명한다. 또한 라이히의 모든 공문서와 법령은 황제의 최종 승인을 거쳐야 하며, 화폐나 여권 등을 황제의 이름으로 발행한다. 국제적으로 황제는 라이히를 대표하고, 전쟁을 선포하며, 조약을 체결한다. 독일 황제는 양원의 동의 하에 해외 영지의 통치자가 될 수 있다.

국가헌법에서 독일 황제의 권력은 슐라이허의 도당을 거치며 명목상으로써만 존재하게 되었다. 52혁명을 거치며 인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독일 국가의회의 권한이 강해짐에 따라 기존에 독일 황제가 직접 임명한 독일 국가수상은 여당의 당수가 맡게 되었고, 그 외 다른 권력들 또한 유명무실해진체 명목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독일 황제의 역할은 라이히를 대표하며 인민을 통합하는 것이 유일하다.

독일 황제의 직위는 프로이센의 국왕이 겸하며, 황제는 라이히의 의장을 맡는다. 기존에는 남성이 계승하였으나, 52혁명 이후 계승 대상에서 여성도 포함되었고, 제3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남녀의 상관 없이 나이에 따라 후계 순위가 정해졌다. 만약 황제가 미성년일 경우 의회를 소집하여 섭정을 선출한다. 섭정은 황제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의 권한을 대리하여 통치하며, 헌법을 준수하고 법에 따라 통치하여야 한다. 섭정이 임명되기 전까지 의회는 그 사이에 이루어진 정부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후사 없이 붕어하여 프로이센의 국왕이 된 빌헬름 1세오토 폰 비스마르크철혈정책에 영향으로 파리 베르사유궁에서 라이히를 선포하고 초대 독일 황제로 즉위한다.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였으나 99일만에 붕어하고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여 세계정치를 이룩하였으나, 슐라이허의 도당으로 인해 권력을 잃고 꼭두각시가 되어 붕어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빌헬름 3세 또한 10년의 즉위 기간 동안 어떠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 슐라이허는 황제와 같은 권한을 휘둘렀다. 1952년, 프리드리히 4세에 의해 슐라이허 도당이 붕괴되고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면서 황제의 권한은 이전보다 축소되었다.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5세를 거쳐 빌헬름 4세독일 황제로써 통치하고 있다.

행정

국가수상

국가내각

Reichskabinett

입법

연방참의원

Bundesrat
의장 부의장
 올리버 디터 베르너   루돌프 에베레트 폰 베스코 
의원

 프로이센 17석   ·   오스트리아 6석  ·    바이에른 6석   ·    작센 4석   ·    뷔르템베르크 4석   ·    바덴 3석   ·    올덴부르크 1석   ·    룩셈부르크 3석   ·    엘자스로트링겐 3석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2석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2석   ·    헤센 3석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1석   ·    주데텐란트 2석   ·    림부르크 1석   ·    부르군트 1석   ·    잘츠부르크 1석   ·    쿠를란트 1석   ·    노르트리프란트 1석   ·    쥐트리프란트 1석   ·    에스틀란트 1석   ·    리타우엔 1석   ·    안할트 1석   ·    브라운슈바이크 2석   ·    작센알텐부르크 1석   ·    작센마이닝겐 1석   ·    작센코부르크고타 1석   ·    리페 1석   ·    리히텐슈타인 1석   ·    샤움부르크리페 1석   ·    마조비엔 1석   ·    오버슐레지엔니더슐레지엔 1석   ·    발데크 1석   ·    슈바르츠부르크 1석   ·    로이스그라이츠 1석   ·    로이스게라 1석   ·    베스트로트링겐 1석   ·    티롤 1석   ·    발로니엔 1석   ·    외젤 1석   ·    함부르크 2석   ·    브레멘 2석   ·    뤼베크 2석   ·    리가 2석   ·    트리스트 2석 

94석
위원회
육군위원회
해공군위원회
외교위원회
 프로이센 2석   ·   오스트리아 2석   ·   바이에른 2석   ·   작센 1석   ·   뷔르템베르크 1석   프로이센 3석   ·   올덴부르크 1석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1석   ·   쥐트리프란트 1석   ·   에스틀란트 1석   ·   함부르크 1석   ·   브레멘 1석   ·   뤼베크 1석   ·   리가 1석   프로이센 2석   ·   뷔르템베르크 1석   ·   룩셈부르크 1석   ·   엘자스로트링겐 1석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1석   ·   헤센 1석   ·   브라운슈바이크 1석   ·   발데크 1석 
8석 11석 9석
세무위원회
재무위원회
통상위원회
 프로이센 2석   ·   오스트리아 1석   ·   바이에른 1석   ·   작센 1석   ·   뷔르템베르크 1석   ·   바덴 1석   ·   룩셈부르크 1석   ·   엘자스로트링겐 1석   ·   부르군트 1석   ·   잘츠부르크 1석   ·   티롤 1석   프로이센 2석   ·   오스트리아 1석   ·   작센 1석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1석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1석   ·   작센마이닝겐 1석   ·   로이스그라이츠 1석   ·   로이스게라 1석   ·   트리스트 1석   프로이센 2석   ·   바이에른 1석   ·   뷔르템베르크 1석   ·   엘자스로트링겐 1석   ·   헤센 1석   ·   주데텐란트 1석   ·   노르트리프란트 1석   ·   리페 1석   ·   발로니엔 1석   ·   함부르크 1석   ·   브레멘 1석   ·   뤼베크 1석 
12석 10석 13석
교통통신위원회
행정위원회
법무위원회
 프로이센 2석   ·   바이에른 1석   ·   작센 1석   ·   바덴 1석   ·   룩셈부르크 1석   ·   헤센 1석   ·   쿠를란트 1석   ·   브라운슈바이크 1석   ·   작센알텐부르크 1석   ·   샤움부르크리페 1석   ·   슈바르츠부르크 1석   ·   리가 1석   프로이센 1석   ·   오스트리아 1석   ·   바이에른 1석   ·   주데텐란트 1석   ·   림부르크 1석   ·   안할트 1석   ·   작센코부르크고타 1석   ·   리히텐슈타인 1석   ·   오버슐레지엔니더슐레지엔 1석   ·   외젤 1석   프로이센 1석   ·   오스트리아 1석   ·   바덴 1석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1석   ·   리타우엔 1석   ·   마조비엔 1석   ·   베스트로트링겐 1석   ·   트리스트 1석 
13석 10석 8석

독일 연방참의원은 라이히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입법 기관이다. 독일 연방참의원의 의석은 국가헌법에 의해 결정되어 9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국 당시 58석이던 연방참의원은 이후 세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라이히의 구성국이 증가하면서 현재와 같은 90석이 되었다.

독일 연방참의원국가의회에게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으며, 국가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을 심의하고 의결한다. 또한 국가의회에서 통과된 예산안을 검토하고 의결하며,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 행정적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어 국가수상국가정부를 최종적으로 탄핵할 수 있으며, 국가의회를 해산할 수도 있다. 독일 연방참의원은 구성국 간의 분쟁 해결을 위해 구성국들의 정부에 대해 강력한 행정 권력을 지니며, 군대 파병, 관료 임명에 대해 권한을 지닌다.

독일 연방참의원국가헌법에 따라 각 역할을 하는 9개의 의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육군위원회, 해공군위원회, 외교위원회, 세무위원회, 재무위원회, 통상위원회, 교통통신위원회, 행정위원회, 법무위원회가 존재한다. 육군위원회는 독일 육군을 구성하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의 대표로만 선출된다. 해공군위원회는 오직 황제에 의해 임명되며, 그 외 다른 위원회는 연방참의원 내 논의를 통해 선출된다.

독일 연방참의원의 참의원은 구성국들에 의해 국가헌법에 의해 할당된 의석만큼의 의원이 선출된다. 그들의 임기는 제한되지 아니하며, 국가의회 의원을 겸직할 수 없다. 참의원은 그들이 대표한 국가를 대변하기 위해 언제든 발언할 수 있다. 몇몇 구성국들은 다수의 의원을 지니나, 투표는 단 한명의 참의원이 그들 국가에 할당된 표를 대표하여 투표한다.

독일 연방참의원은 건국 당시에는 현재보다 더욱 강력한 권한을 지니어 현재 독일 국가의회의 역할 대부분을 수행하였으나, 슐라이허의 도당으로 인해 해산되어 약 20년 뒤에 52혁명을 통해 부활하였다. 그러나 52혁명을 통해 인민에 의해 선출된 독일 국가의회의 권한이 커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권한이 약해져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별게로 연방참의원은 여전히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국가의회

사법

국가대법원

Reichsobergericht

국가대법원(독일어: Reichsobergericht 라이히스오베어게리흐트[*])는 라이히의 최고 법원으로 사법부를 총괄한다. 국가수상에 의해 제안되어 연방참의원국가의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된 1명의 국가대법원장(독일어: Reichspräsident 라이히스프래지덴트[*])와 2명의 국가대법원부원장(독일어: Reichsvizepräsident 라이히스피체프래지덴트[*]), 6명의 국가대법관(독일어: Reichsrichter 라이히스리흐테어[*])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국


Struktur des Deutschen Reich
100%
100%
Königreich
왕국

Preußen
프로이센

Österreich
오스트리아

Bayern
바이에른

Sachen
작센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베를린 뮌헨 드레스덴 슈투트가르트
Großherzogtum
대공국

Baden
바덴

Oldenburg
올덴부르크

Luxemburg
룩셈부르크

Elsass-Lothringen
엘자스로트링겐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카를스루에 올덴부르크 룩셈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 슈베린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Hessen
헤센

Saxe-Weimar-Eisenach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슈트렐리츠 다름슈타트 바이마르
Herzogtum
공국

Sudetenland
주데텐란트

Limburg
림부르크

Burgund
부르군트

Kurland
쿠를란트

Nordlivland
노르트리프란트
라이헨베르크 마스트리흐트 비잔츠 미타우 도르파트

Südlivland
쥐트리프란트

Estland
에스틀란트

Lietauen
리타우엔

Anhalt
안할트

Braunschweig
브라운슈바이크
볼마어 레발 볘로스토크 데사우 브라운슈바이크

Saxe-Altenburg
작센알텐부르크

Saxe-Meiningen
작센마이닝겐

Saxe-Coburg-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알텐부르크 마이닝겐 고타
코부르크(여름)
Fürstentum
후국

Lippe
리페

Liechtenstein
리히텐슈타인

Schaumburg-Lippe
샤움부르크리페

Masobien
마조비엔

Ober- und Niderschlesien
오버니더슐레지엔
데트볼트 파두츠 뷔케부르크 플로크 트로파우

Waldeck
발데크

Schwarzburg
슈바르츠부르크

Reuss-Greiz
로이스그라이츠

Reuss-Gera
로이스게라
발데크 루돌슈타트 그라이츠 게라
Grafschaft
백국

Westlothringen
베스트로트링겐

Wallonien
발로니엔

Ösel
외젤
난치히 펠비슈 아렌스부르크
Freiestadt
자유시

Hamburg
함부르크

Bremen
브레멘

Lübeck
뤼베크

Riga
리가

Triest
트리스트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 리가 트리스트

라이히는 연방 국가로써 5개의 왕국, 8개의 대공국, 13개의 공국, 9개의 후국, 3개의 백국, 4개의 자유시로 구성된다. 각 구성국들 아래에는 독립적인 행정 구역 체계가 존재한다. 라이히 설립 당시 4개의 왕국, 6개의 대공국, 5개의 공국, 7개의 후국, 3개의 자유시, 1개의 제국령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현재와 같이 변화하였다. 독일 헌법에 따라 이들은 라이히를 구성하며, 독일 연방참의원에 의석을 지니고 있다. 철도와 같은 교통과 해군-공군, 외교권을 제외하고 각 구성국들은 구성국만의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군대 또한 보유하고 있는 등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경제

국방

독일군(독일어: Deutsches Armee 도이체스 아르미[*])는 라이히의 정규군으로 독일 황제를 최고 통수권자로 한다. 독일 육군, 독일 황립해군, 독일 황립공군으로 구성된다. 현대 참모 체계의 원형이 되는 국가로 대장군참모라 불리는 일련의 참모본부 체제를 지니고 있다. 대장군참모는 오직 개인의 지적 능력을 중심으로 편성되며, 대장군참모장이 이들을 총 지휘한다. 대장군참모독일군의 각군대를 전담하는 최고사령부가 존재하여 최고육군사령부(OHL), 최고해군사령부(OML), 최고공군사령부(OLL)이 그것이다. 각 최고사령부의 수장으로써 육군사령관, 해군사령관, 공군사령관이 존재한다.

독일 육군프로이센을 비롯한 라이히의 구성국들의 군대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은 평시에 각 구성국들의 독자적인 명령을 따르나, 전시 혹은 특수 상황에 경우 최고육군사령부의 통일된 지시를 받는다. 세계 대전 시기까지만 해도 이들은 독자적인 제식 장비를 채용하였으나, 제3차 세계 대전 이후 동일된 복식과 장비로 무장하여 일부 부분에서만 이들이 어떤 구성국에 소속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독일 육군은 현대적인 전차 운용과 엘리트적인 장교로 대표되는 세계 최강의 육군력을 자랑하고 있다. 독일 황립해군의 경우 빌헬름 2세세계정치의 일환으로써 창설되었으며, 오직 라이히의 지휘를 받는다. 팍스 게르마니카 시대에 라이히는 유럽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동맹국에 그들의 함대를 파견하여 해양 패권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 황립해군해상대대(독일어: Seebataillon 지바탈리온[*])이라 불리는 해병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다. 독일 황립공군제2차 전간기 시기 육군의 내부 조직이던 독일 제국 항공대가 독립하여 최고공군사령부와 함께 창설되었다. 이들은 황립해군과 마찬가지로 오직 최고공군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군대이다. 같은 시기 창설되었던 독일 해군항공분견대황립해군의 조직으로 남아있다.

라이히는 징병제 국가로 고등교육을 받은 18세 이상 남성은 2년 간 병역을 져야 한다. 또한 과거 독보적이던 예비군 제도를 활용하는 국가로 3단계의 예비군 단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전역 후 5년 동안은 예비군 부대에 입소해야했고, 39세까지 국방대(독일어: Landwehr 란트베어[*])에 소속되었다. 그 후 45세까지 국민군(독일어: Landstrum 란트스트룸[*])에 소속되었다.

교육

사회

문화

대외 관계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