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1914.7.28. - 1915.7.9.
프랑스인 소요 1916. ~ 1917.
제3차 발칸 전쟁 1916.9.22. ~ 12.12.
플로레알 27일의 쿠데타 1917.5.16. ~ 5.18.
제2차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1918.
캅카스 내전 1918.10.10. ~ 11.4.
포르투갈 왕정복고 1919.1.8.
수에즈 사태 1919.4. ~ 5.
인도 독립 1919.10.7.
대영제국 붕괴 1919.11. ~ 12.
오스만 전쟁 1920.4.11. ~ 11.3.
러시아 내전 1921.1.8. ~ 1928.10.3.
힌두 장교 쿠데타 1921.7.7. ~ 7.20.
네덜란드 혁명 1922.11.10. ~ 12.5.
네덜란드 코뮌 1922.12.5.
프랑스 코뮌 혁명 1923.5.1. ~ 7.9.
카이세리 쿠데타 1925.8.8.
아나톨리아 선포 1925.8.10.
프레사 델 포타레 1924.4.6.
리우 왕당파 혁명 1924.11.15.
포르투갈-브라질 1924.11.17.
1월 쿠데타 1925.1.2.
세르비아 전쟁 1924.2.1. ~ 1925.10.10.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5.7.12. ~ 1925.10.10.
헝가리-세르비아 전쟁 1925.10.10. ~ 1926.1.10.
에르데이 전쟁 1925.12.20. ~ 1926.3.21.
빈 조약 1926.1.18.
검은 금요일 1926.4.6.
피우수트스키 쿠데타 1928.6.30.
폴란드 제2공화국 선포 1928.7.3.
프랑스 제4공화국 선포 1929.5.18.
안트베르펜 혁명 1929.8.1.
벨기에 내전 1929.8.21. ~ 9.14.
강철 조약 체결 1930.1.11.
베오그라드 동맹 1930.3.13.
제4차 발칸 전쟁 1931.6.29. ~ 11.18.
비아리스토크 점령 1932.11.11.
비아리스토크 합병 1932.11.24.
스페인 내전 1933.7.7. ~ 1935.12.4.
튀르키스탄 침공 1933.8.8. ~ 1933.11.10.
10월 쿠데타 1934.10.10.
폴란드-리투아니아 선포 1934.12.7.
군부동맹 1935.8.2.
리가 사건 1936.1.18.
제2차 세계 대전 1936.3.4. ~ 1941.9.18.
포니아토프스키 사건 1942.12.8. ~ 19.
마아양가 사건 1942.10.2 ~ 20.
이스라엘 건국 1943.4.6.
에게 해 학살 1944.2.19. ~ 4.10.
10월 3일 사건 1944.10.3.
핀란드 내전 1944.10.3. ~
빌냐 소요 1945.6.6. ~ 9.
발트 민족 무장사건 1945.6.7. ~ 1946.1.7.
벨라루스 서부 사태 1945.6.7. ~ 1947.
9월 쿠데타 1945.9.5.
발트 병합 1947.1.18.

Erster Weltkrieg
제1차 세계 대전

1914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차기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이 그의 아내 초피 초테크 폰 호헨베르크 여공작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유럽은 7월 위기라 불리는 사태를 겪게 된다. 약 한달뒤, 독일에게서 백지수표를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꽤나 가혹한 조건의 최후통첩을 세르비아에게 보낸다. 세르비아는 갑자기 최후통첩을 거절하였고, 결국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그 이후 독일프랑스러시아에게 동원령의 해제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프랑스러시아는 이에 답하지 않았고, 결국 8월 3일, 프랑스러시아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독일은 오랫동안 양면 전선이라는 위협에 노출되었고, 그들의 전쟁 계획은 어느 한쪽을 무너트린 후 한 전선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슐리펜 계획러시아의 동원이 긴 기간을 소요할 것이라 판단하고 그 사이에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하여 무너트리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과정에서 벨기에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벨기에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양국의 통행권 요구를 거부하였으나 독일은 이를 무시하고 벨기에를 공격한다. 독일벨기에 침공은 영국의 참전을 불러왔다. 벨기에리에주 등의 요새에서 항전헀으나, 이는 중포의 포격에 무너졌다. 독일은 빠른 속도로 파리를 향해 남진하였다. 점점 길어져 가는 병참선과 물러터져가는 독일 보병의 양 발도 그들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독일군은 영국 원정군이 합류한 연합군을 점차 격퇴하며 파리와의 거리를 줄였고, 마른 강 전투에서 쇄기를 박는다. 마른 강 전투로 연합군은 붕괴되었으며, 파리는 독일군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그러나 슐리펜 계획파리 점령 이후의 계획은 상정하지 않았다. 슐리펜은 파리를 점령하면 프랑스는 항복할 것이란 낙관론에 빠져 있었고, 보르도로 도망친 프랑스 정부가 항전을 부르짖자 완벽하게 깨졌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항전을 이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후의 전투에서 계속해서 패배하면서 항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영국 원정군영국 본토로 귀환하고 독일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프랑스 또한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동프로이센에 대해 러시아는 신속한 동원령을 통해 쾨니히스베르크를 위협했으나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열세인 독일군에 패해 후퇴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갈리치아 지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패배하여 프레미셀의 요새에 11만명의 병력이 포위되었다. 이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대한 공세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재정비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바르샤바를 향해 공세를 개시함으로써 바르샤바를 함략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프레미셀에서 11만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구출한다. 이후 우치를 향해 공세를 개시했으나 러시아의 반격에 패배하여 돈좌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드리나 강을 넘어 베오그라드를 향해 진격하였다. 개전 당시 3개의 군은 갈리치아에서의 대패로 인해 1개 군이 차출되었다. 그럼에도 병력의 차이는 여전하였으나 세르비아세르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드리나 강으로 퇴각한다. 이러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향해 세르비아드리나 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공격을 중지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재정비 후 다시 드리나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콜루바라 강에서 패배한 세르비아베오그라드를 버리고 내륙 깊숙히서 재정비 후 재탈환을 목표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세와 프랑스의 항복으로 인한 지원 단절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의 식민지들은 빠르게 점령되어갔으나, 독일령 동아프리카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유격전을 펼쳤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독일의 식민지들은 협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독일령 자모아뉴질랜드에, 독일령 노이기니아오스트레일리아에, 독일령 키아우초우일본에 의해 점령되었다. 한편 동아시아 함대의 드레스덴급 중순양함 SMS 엠덴은 인도양 지역에서 협상국 상선에 대해 통상파괴 작전을 실행하여 인도양을 마비시키기도 하였다.

1915

새해 1월부터 독일은 공세를 개시하였다. 포위의 위기 속에서 러시아의 10군은 20만의 피해를 입고 포위망을 탈출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네만 강까지 전선을 물린다. 이후 독일갈리치아의 회복을 위해 슐레지엔에서의 소규모 공세를 개시했으나 서부 전선의 군대가 참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또한 가담하여 대규모 공세로 변화되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고 드네르프 강까지 진격한다.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 50km 앞까지 전진하자 러시아는 항복한다. 남부 전선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공세를 개시하였다. 세르비아 또한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던 만큼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마케도니아까지 후퇴한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몬테네그로를 공격하여 1주일만에 항복시켰고, 세르비아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Vertag 조약

프랑스가 항복하고 난 이후 만신창이가 된 파리에서 조약이 체결된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대상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극후반에 참전한 이탈리아가 참여했다. 조약은 전체적으로 9월 계획에 따라 룩셈부르크, 벨기에 동부, 로트링겐독일에게 합병되었으며, 이탈리아는 니차와 사보이아를 합병한다. 벨기에독일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 대신 파드칼레를 합병한다. 프랑스 동부의 광할한 지역은 비무장화되었다.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독일의 식민지가 대규모로 확장되어 독일령 동아프리카독일령 카메룬독일령 중앙아프리카로 합병되고 독일령 노이기니아독일령 오세아니아로 변한다. 모로코가 독립하였으며, 1900년대 이루어진 모든 동맹들은 해체되었고, 더해서 영일 동맹도 해체되었다. 영국은 식민지를 잃거나 하지 않았지만 전세계에 대한 패권이 종식되었다.

슬라브 국가와의 조약은 독일과의 관계가 깊은 리가에서 이뤄졌다. 러시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대상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참여했다. 역시나 9월 계획에 따라 조약이 이루어졌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트,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캅카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핀란드 등이 독립함으로써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를 잃는다.또한 병력은 150개 사단에서 60개 사단으로 보유를 제한받는다. 발칸 반도몬테네그로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원으로 합병당했으며, 세르비아7월 최후통첩의 내용이 수용되었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빈트후크에서 포르투갈과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파리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패권국으로 인정 받은 만큼 포르투갈과의 조약에서 높은 단계의 요구사항을 관철해낼 수 있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확실한 승리를 거머쥐고 있던 포르투갈포르투갈령 앙골라포르투갈령 모잠비크 북부를 빼앗기게 된다. 일본협상국이 모두 항복한 이후에도 계속 전쟁 상태를 유지하였다. 일본과의 전쟁은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고 양측 모두 전쟁 상태의 유지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대전이 종전되고 난 뒤 1년이 지난 1916년 5월 11일에서야 도쿄에서 일본이 단지 소규모의 배상금만 지불하기로 하면서 아시아에서의 전쟁까지 끝이 난다.

Wendepunkt
전환기

1916

파리 조약1916년 1월 1일 공표되었다. 그와 동시에 효력을 가져 프랑스 동부의 영토들은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등에 합병되었다. 조약에 따라 합병될 지역들에는 이미 동맹국의 군대가 군정을 진행 중이였으며, 조약의 공표와 함께 새 지역 행정부가 수립되었다. 단 하루만에 국적이 바뀐 전 프랑스인들은 특별한 연대가 없었어도 빠른 시위를 일으킨다. 독일에 합병된 지역은 새롭게 수립된 부르군트 제국령에 저항하였고, 벨기에에 합병된 지역은 왈롱 지역의 지배에 저항하였다. 가장 큰 저항은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다. 앞선 두 곳은 이미 많은 수의 독일의 군대가 주둔중인 지역으로 조직적인 무력 진압에 빠르게 무너져내렸으나, 이탈리아는 초반의 대응을 실패하여 큰 소요 사태로 확대시킨다. 코르시카의 소요는 세 지역 중 가장 빠르게 종료되었으나 사보이아니스의 소요는 1917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1915년 10월 1일에 체결된 리가 조약1916년 6월 6일에 공표되었다. 공표와 동시에 러시아의 동부에 위치하던 독일의 군정들에서 독립국이 세워졌으며, 동시에 중앙유럽 동맹에 가입하고 친독 정부 혹은 괴뢰정부가 수립되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트,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 대부분의 독립국이 군주제를 표방했으며, 우크라이나 헤트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독일계 인물이 군주에 즉위했다. 폴란드에는 빌헬름 2세의 둘째 왕자인 프리에드리흐 1세(아이텔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리투라이나민다가우스 2세(빌헬름 카를 폰 우라흐 공작), 발트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대공자, 벨라루스에는 프리드리히 3세의 둘째 왕자인 블라디미르 1세(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우크라이나파울로 스코로파즈키, 조지아프레데리흐 1세(요아힘 폰 프로이센 왕자)가 군주를 지녔다. 그 외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캅카스 등은 공화정이 세워졌다.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불가리아는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하고 독일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하고 난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른 슬라브 국가를 견제하고 동맹을 얻기 위해 불가리아를 지원하였다. 두 게르만 국가로부터 여러 지원을 받은 불가리아1916년 9월 22일,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세르비아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비무장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몇 주만에 베오그라드가 함략되며 항복하였다. 남북의 양 전선을 가지게 된 불가리아는 잠시 고전하였으나 루마니아의 공격을 돈좌시키고 솔룬(테살로니키)을 함략, 라리사까지 진격한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중재국을 자처하여 사라예보 조약이 체결된다.

일본 제국영일 동맹을 명분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협상국에게 군수 물자를 판매했을 뿐만 아니라 칭다오 전투와 같이 직접 교전을 일으킴으로써 독일을 적대했다. 그러나 단 1년 만에 프랑스영국독일에 항복함으로써 1차 대전 참전은 오판임이 명백해졌다. 1년 가까이 독일과 홀로 대치하다가 결국 1916년, 도쿄 조약을 통해 독일과 종전 조약을 맺었다. 도쿄 조약으로 인해 6년 전에 합병한 대한과 그 외 대륙과 태평양의 여러 패권 등을 잃고 한순간에 몰락하였다. 대한1910년 이전으로 돌아갔으며, 대륙과 태평양의 영토들은 독일령 동아시아독일령 오세아니아에 편입되었다. 전쟁에 대한 패전의 책임으로 오쿠마 시게노부와 그의 내각은 총사퇴하였으며,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임시 군사 내각이 패전 정국 안정을 위해 조각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계에 책임을 떠넘기며 그들과 갈등을 빚었고, 혼란한 정국은 수습되지 못하였다.

1917

러시아의 최대 곡물 생산지인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게 됨에 따라 일시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이는 1915년 한 해의 생산량 또한 줄어 든 것과 합쳐져 러시아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게 된다. 기근은 대도시에서 더욱 심각하여 식량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일부 농부들은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전체 인구 1억명 중 최소 5백만 명에서 최대 2500만명까지 아사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러시아 정부는 리가 조약의 배상금 지불의 문제로 해당 사항에 큰 예산을 투자하지 못하였고, 부족한 예산에 부정부패로 대부분의 예산이 빼돌려지면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은 매우 적어진다. 여러 악재들로 겨우 사용된 예산들은 대부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변의 기아를 위해 사용되었다. 기근으로 인해 민심은 하락하였으며, 구제받지 못한 지역들에서는 반정부 단체들이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고, 이들 중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가장 큰 지지를 얻는다.

독일우익 공세 기간 프랑스의 임시 수도 보르도에서는 항복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져 내각이 총사퇴하고 보르도 내각이라 불리는 임시 반전 정부가 수립되어 파리 조약을 주도하였다. 보르도 내각은 종전 이후에도 친독일적인 행보를 보이며 파리 조약의 질서에 편승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들로 하여금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했으나, 몇몇 극우주의자들과 군부로 하여금 큰 불만을 이끌어내었다. 5월 16일 새벽, 나폴레옹 4세와 그를 지지하는 군부대는 파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들은 빠르게 파리를 장악하고 나폴레옹 내각을 조각하는 등 초기의 모습은 성공적이였으나, 해당 소식이 전해진 라임스동프랑스 독일군 전병력 상급지휘관에서는 상급지휘관의 권한 하에 상부에 어떠한 통보도 없이 비무장지대의 군대가 일제히 파리와 그 주변의 군부대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파리 시민들은 나폴레옹 4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어 쿠데타 사건은 단 이틀만에 종료가 된다.

독일제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으로 100억 금마르크에 달하는 배상금을 배상 받게 된다. 프랑스의 경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와 같이 공채를 발행하여 신속하게 단계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하여 독일은 단기간에 수 십 억 금마르크을 국고로 충당하게 된다. 프랑스의 항복 이후 독일 내부에서는 경제에 대한 낙관이 증가하여 파리 조약이 체 체결되기 전에 이미 경제는 호황을 달리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항복 이후로 상승세는 계속되어 베를린 증권거래소은 호황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 거대한 자본까지 투자되자 증시는 매일매일 최고가를 기록한다. 배상금을 지불 받기 전에 이미 본토의 전후 복구는 사실상 완료가 된 상태였으며, 동유럽의 신생국들에게 대규모의 자본이 투자되어 이들이 소속되고 독일이 최대 수혜국인 중앙유럽 동맹은 큰 성공을 맛본다. 일부 전문가들은 일련의 현상에 대해 대불황과 같은 사황에 대해 경고했다. 그럼에도 베를린 증권거래소유럽 최대의 주식시장으로 부상하고 독일의 경제력 또한 미합중국의 그것을 뒤쫓아갈 정도로 고도 성장을 이룩한다.

1918

오스만1894년에 이미 영토 내의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학살을 벌인 바 있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러시아 내의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에서 아르메니아가 건국되면서 오스만은 영토 내에서 아르메니아인의 독립 요구가 증가한다. 일부 극단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은 테러를 벌이며 오스만 정부에 저항했고, 이는 오스만 정부가 이들을 탄압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오스만아나톨리아시리아아르메니아인들을 아르메니아 국경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대량의 사망자가 나온다. 오스만의 탄압을 받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적응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이 국경을 넘어 독립국 아르메니아로 이주하였고, 그 외 해외로 이주하였다.

리가 조약으로 형성된 캅카스는 다민족 국가로 러시아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수민족이 인구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권력이 강할 수 밖에 없었고, 일부 독일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내각 관료들이 러시아인들로 채워지면서 여러 소수민족의 불만을 표출시킨다. 그러던 1918년 10월 10일, 체첸인들이 독립을 선포하며 체첸 공화국을 수립하였고, 이들의 독립을 캅카스가 거부하며 내전으로 번지게 된다. 체첸인들의 독립에 이어 인구시인, 오세트인, 아디게인 등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규모는 커진다. 오세트인의 독립은 조지아남오세티야의 반란을 유도했으며, 압하스인들까지 반란에 가담하면서 대규모 내전이 된다. 결국 독일이 해당 문제에 개입하였고, 우크라이나세바스토폴에서 중재가 이루어진다. 세바스토폴 조약으로 캅카스는 연방 국가가 되었으며, 조지아의 경우 압하스인오세트인에게 강한 자치권을 주는 것으로 내전은 종전된다.

1919

1910년 10월 5일, 영국과의 외교 문제와 경제 불황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혁명이 발생하여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공화국은 공화파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하였으며, 빈트후크 조약으로 아프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잃자 정치는 더더욱 혼란에 빠진다. 공화국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왕당파가 다시 득세하기 시작한다. 1919년 1월 8일, 왕당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중의 지지하에 정권을 장악한다. 왕당파 장교들은 이후 마누엘 2세를 다시 포르투갈 국왕으로 추대한다. 2월 1일, 리스본에서 마누엘 2세가 다시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포르투갈 민주공화국이 무너지고 포르투갈 왕국이 선포된다.

이집트 술탄국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패권이 종식되어감에 따라 영국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앵글로-이집트 합의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며 알렉산드리아 협정을 통해 수단 지역에서의 강력한 지배권을 갖췄다.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 이집트 케디프국은 국고 확보를 위해 수에즈 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영국프랑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프랑스 모두 마찬가지로 수에즈에서의 이익이 필요했기 때문에 거절한다. 그러자 1919년 4월 4일, 이집트 케디프국수에즈 운하를 점거한다. 수에즈 운하엳국프랑스가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당 점거를 통해 이집트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한다. 프랑스영국 모두 해당 사건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였으나, 프랑스의 경우 패전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영국만이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러자 독일이 해당 문제에 직접 개입하여 파리 조약을 이유로 영국에게 이집트에 대한 무력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조약에 따라 영국은 무력 시위를 중단하였고, 독일이집트와의 협상에 들어간다. 협상으로 이집트 케디프국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이집트독일이 7:3의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의 후퇴로 인해 파리 조약에 의해 명시된 영국의 범세계적 패권 상실은 점차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영국령 동아프리카영국령 우간다 식민 정부가 붕괴되어 독일령 중앙아프리카에 합병되었으며, 전세계의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증가하였다. 영국령 인도에서의 저항은 그들 중 가장 뛰어났으며, 모한다스 간디의 전인도에서의 비폭력투쟁이 그 중심을 차지하였다. 모한다스 간디의 비폭력 투쟁에 반대하는 일부 급진파 독립 단체들은 영국령 인도 식민 정부의 공관을 테러하기도 한다. 결국 1919년 10월 7일, 영국령 인도 식민 정부는 붕괴된다. 인도 아대륙 남부의 번왕국들은 이미 영국령 인도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북인도 지역은 인도 국민회의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두개의 임시 정부가 세워지게 된다. 이윽고 세 세력들은 모한다스 간디를 중심으로 뭉쳐 인도 공화국을 성립하게 된다.

영국에게 영국령 인도는 "왕관보석식민지"라 불리며 대영제국의 핵심이였다. 그러나 그러한 영국령 인도 정부가 붕괴되어 인도로 독립함에 따라 영국파리 조약으로 인한 국제적인 지위 상실과 더불어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받게 되었다. 인도가 독립한 다음날인 1919년 10월 8일, 런던 증권거래소는 개장 직후부터 지수의 하향가를 타기 시작하였으며, 단 한달만에 70%가 하락하여 런던 증권거래소는 붕괴된다. 런던 공황이라 불리는 일련의 런던 증권거래소 붕괴로 영국은 심각한 경제 불황에 직면하며 극단적인 이념들이 각광을 받게 된다. 이들 중 영국 사회당은 수많은 지지를 받으며 총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그러나 의석의 과반을 차지한 보수당은 이를 거부하였고, 영국 사회당의 시위대는 의회를 점거하고 브리튼 코뮌을 선포한다.

인도가 독립했음에도 전세계에 거대한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이 공산 혁명에 브리튼 제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통제력을 상실한다. 거대 식민 제국의 예상치 못한 붕괴는 일시적으로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영국인으로 구성된 영국인 식민지는 원주민들과 기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였다. 이전까지 영국 당국에 의해 차별받고 핍박 받아온 원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기득권층을 공격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미 영국의 강한 통제권이 미치고 영국인이 대다수인 영국령 캐나다,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영국령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등은 안정된 상태로 독립국으로 나아갔으나, 영국령 말레이와 같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영국령 동아프리카 같은 아프리카 지역, 영국령 온두라스 같은 카리브해의 식민지들은 무정부 상태에 이르렀다. 그 결과 독일, 미합중국, 이탈리아, 남아프리카와 같은 외부 세력에게 합병되어 식민지가 계속 유지되기도 한다.

1920

아르메니아는 고대에 현재 아르메니아 지역부터 시리아 지역과 동부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이였다. 그러나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아르메니아인들은 피정복 민족이 된다. 오스만 아래에서 이미 한차례의 대규모 탄압을 겪어 고대부터 이어지던 그들 민족의 분포는 줄어들었다. 리가 조약으로 아르메니아는 결국 독립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에 대한 위협을 느낀 오스만은 영토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탄압하면서 오스만아르메니아 사이의 관계는 최악에 다다른다. 그러던 1920년 4월, 오스만-아르메니아 국경에서 벌어진 군사충돌은 곧 전면전으로 이어진다. 당시 오스만이 쇠퇴하여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지는 이미 오래였지만, 그들의 군사력은 무시할 수준이 되지는 못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신생 독립국으로 독일중앙유럽 동맹의 회원국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또한 오스만과 같은 민족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노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오스만의 동맹으로 참전한다. 그러나 오스만의 승리로 보이는 전쟁에 러시아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란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그레이트 게임에 의해 영국러시아의 영향력이 닿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 조약브리튼 혁명으로 영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시점에 러시아는 다시즘 중동 지역으로 진출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진출의 발판으로 과거 크림 전쟁 등으로 난항을 겪게 했던 오스만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동맹국을 가지기 위해 아르메니아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또한 조지아는 국경 조약을 맺고 오스만과의 공동 전선을 이룬다. 이후 바쿠가 함략될 위기에 처하고 서부 전선 또한 아르메니아 측에 더 유리하게 흘러갔다. 한편 러시아는 독립 성향을 지닌 여러 민족들에게 반란을 지원하였고, 이는 메소포타미아 반란을 발생시킨다. 양면전선을 가지게 된 오스만은 천천히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르메니아가 점차 승기를 잡아가자 그리스위대한 이상에 따라 고토 회복을 명분으로 오스만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스는 빠르게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이후 에게해 연간의 오스만 영토를 차례대로 점령하기 시작한다. 펠레스폰토스 해협을 점령한다. 이후 계속해서 동진하여 콘스탄티니예를 압박한다. 아르메니아에서의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번짐에 따라 독일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세바스토폴에서의 중재의 결과로 아르메니아트라비존까지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나고르노카라바노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영유권을 상실시켰다. 조지아리제까지의 조금은 적은 영토를 합병하고 이전의 아르메니아와의 국경 조약을 공식화한다. 아랍지역에서의 아랍인쿠르드인의 반란으로 쿠르디스탄시리아가 독립한다. 그리스위대한 이상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키프로스에게해 연안의 영토를 획득한다. 보스포루스 해협펠레스폰토스 해협은 미무장화되어 해협위원회에 의해 30년 간 관리되다 그리스로의 할양되기로 한다.

1921

중동 정세에 깊게 개입하여 꽤나 거대한 출혈과 그만한 대가를 러시아는 얻는다. 그러나 그들은 리가 조약에서 정해진 배상금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생긴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였을 때 행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출혈에 대한 대가를 얻었다고는 하나 그 기간 동안 출혈을 버텨낼 충분한 국력이 되질 못했다. 아랍 전쟁그리스-오스만 전쟁으로 아르메니아, 조지아, 그리스는 직접적인 이득을 얻었으나, 러시아세바스토폴 조약으로 얻은 물질적 이익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1917년과 같은 대기근이 발생하고야 만다. 이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만을 가져가지 않았다. 이미 1917년의 대기근으로 세를 얻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조직적인 파업과 시위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시위대가 러시아군과 무력 충돌함으로써 발생한 무력시위는 이후 혁명으로 번져 전러시아를 휩쓸기 시작한다. 1921년 1월 8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한 시위대는 러시아 코뮌을 선포한다. 그리고 1921년 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함략되기 직전 탈출한 로마노프가모스크바에서 수도의 혁명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진압을 선언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토스노에서 혁명군과 정부군이 출동한 것을 시작으로 러시아 내전이 시작된다. 중동에서는 여러 튀르크계 국가들이 난립하여 그들만의 전역이 펼쳐졌으며, 우랄 산맥 동쪽에서는 우파 독립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우랄 산맥 서쪽 곳곳에서 혁명군에 가담한 도시들이 늘어갔으며, 제정과 군대는 그들을 다시 점령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대전에 수많은 외부 세력이 난입하여 내전은 더더욱 혼란에 빠져갔다.

인도의 독립 이후 인도 사회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인도 국민회의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사회를 분열시켰다. 수적으로 우세한 인도 국민회의는 대부분의 정책의 주도권을 지녔으며,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그럼에도 모한다스 간디무함마드 알리 잔나인도의 화합을 강조하며 어느정도 안정감을 되찾아갔다. 그러나 1921년 7월 7일, 힌두 국가를 지향하는 장교들의 쿠데타가 발생한다. 모한다스 간디무함마드 알리 잔나, 자와할랄 네루 등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이들은 인도 국민회의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해체를 선언한다. 이에 무슬림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인도 국민회의의 일부 인사들 또한 반발하였다. 7월 19일, 뉴델리에서 발생한 반군부 시위를 시작으로 시위는 점차 북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모한다스 간디는 시위대에게 비폭력운동을 요구했으며, 시위대는 이를 따랐다. 일부 지역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긴 했으나, 큰 규모로 커지지는 않았다. 일부 장교들의 쿠데타는 군 내에서도 반발이 작용했으며, 코단데라 마다파 카리아파 등 반쿠데타 세력은 역쿠데타를 일으켜 힌두 국가주의자들을 축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해방했다. 정권이 다시 민간으로 돌아오고부터 인도군 내부의 급진파 청년 장교에 대한 대규모 체포가 벌어졌다. 인도군 내부의 분열주의자들은 모조리 뿌리가 뽑혔으며, 쿠데타 주동자들은 처형되었다. 또한 북인도에서의 시위로 시크교도무슬림들은 같은 목표를 지닌 일시적인 공동체를 지님으로써 그 이후의 세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22

네덜란드에서 총선이 치뤄졌다. 제3인터네셔널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이 최다 의석을 확보하였으나, 로마 가톨릭 간부회 대중 연맹반혁명당, 기독교역사연합 등은 연정을 맺어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의 정권을 거부한다. 이에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의 과격파가 당내 권력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네덜란드 공산당과 기타 사회주의 정당들과 합당하여 11월 10일, 암스테르담에서 혁명을 일으킨다. 혁명은 곧바로 주변 도시로 퍼져나가 주요 대도시가 장악된다. 네덜란드 왕가와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군부는 아른헴을 거점으로 삼고 혁명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결국 혁명은 내전으로 번졌고, 이에 브리튼 코뮌이 혁명을 지지하며 막대한 지원을 퍼붙는다.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이나 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플란데른에서 소수의 지원금만 받을 수 있었다. 결국 12월 5일, 단 25일 만에 아른헴이 함략되면서 정부 인사 대부분이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진다. 빌헬미나와 몇몇 정부군 인사들은 독일로 망명하였다. 1922년 12월 10일,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코뮌이 선포된다.

1923

브리튼네덜란드의 희소식은 막대한 배상금과 끝없는 경제 불황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나폴레옹 쿠데타 당시 개입한 동프랑스 독일군 전병력 상급지휘관은 당시 지휘관이 해임되고 난치히로 본부가 옮겨져 축소되었으며, 1920년에 비용과 인력 문제로 해체되었다. 때문에 인터네셔널 프랑스 지부프랑스 공산당독일이 이에 개입할 방법이 없을거라 믿고 연대해 1923년 5월 1일, 노동절에 혁명을 일으킨다. 에투알 개선문에서 모인 시위대는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엘리제궁으로 진격했다. 엘리제궁까지 가는 동안 시위대는 계속 불어났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닳은 폴 데샤넬은 인근 도시인 로 탈출했다. 프랑스 육군 내에서도 좌파 장교들에 의해 몇몇 부대가 혁명에 가담하였으나, 대부분의 부대가 정부에게 충성하여 파리를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혁명군과 정부군은 수 개월 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하였다. 정부군은 파리로 들어가는 모든 물품을 차단하여 혁명군의 항복을 요구했고, 혁명군은 이에 맞서 직접 정부를 수립하고 민병대를 조직했다. 7월 1일, 정부군은 파리에 대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혁명군은 강하게 저항했으나 빠르게 제압당했다. 혁명정부 내각은 체포되어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주요 인사들 또한 교수형에 처해졌다. 수많은 시민들이 사살되고 체포되었다. 그러나 파리로 돌아온 폴 데샤넬은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몇 개월뒤 사망하였다. 폴 데샤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3공화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으며, 혁명의 여파를 채 수습하지 못하였다.

세바스토폴 조약 이후 오스만은 신속하게 무너져내렸다. 술탄은 군대를 통한 폭정으로 불만을 찍어눌렀지만 전국적으로 봉기와 반정부 시위는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브리튼 코뮌의 지원을 받은 아나톨리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대가 결집하였다. 근 20년 간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인기를 얻은 무스타파 케말아나톨리아 공산당에 동조하며 아나톨리아 공산당은 대규모 정당으로 발돋움한다. 아나톨리아 공산당과 협조로 군부에 의해 견제받아 목숨에 위험을 느낀 무스타파 케말1925년 8월 8일, 오스만의 수도인 카이세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무스타파 케말아나톨리아 공산당은 군부를 점거하고 메흐메트 6세를 체포했다. 8월 10일, 술탄과 군부의 숙청과 함께 무스타파 케말앙카라에서 아나톨리아 공화국을 선포한다. 이윽고 치뤄진 선거에서 아나톨리아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코뮌 정부가 세워진다.

1924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는 후반에 참전하여 적은 피해로 사보이아와 니차, 코르시카를 획득하는 등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새로 합병한 영토에서 발생한 프랑스인들의 폭동은 적지 않은 사회 혼란을 들고왔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 또한 유입되었다. 또한 적은 피해로 영토를 얻은 것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려는 제국주의적 여론이 증가하는 영향을 줬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사회주의적 관점을 지니다 파리 조약에 의해 국가주의자로 전향한 베니토 무솔리니국가주의제국주의를 중심으로 여러 이념들을 혼합한 파시즘을 창시하였고, 파시즘 정당인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설하였다. 1924년 4월 6일 치뤄진 총선에서 국가 파시스트당은 큰 지지를 얻으며 여당에 당선되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총리로 재임한다. 국가 파시스트당은 집권초기부터 국가안보의용민병대를 통한 폭력 행사로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는 제1대 두체로 취임한다. 이러한 국가 파시스트당의 일당 독재체제의 성립과는 별게로 베니토 무솔리니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여러 공공사업을 진행하였고, 또한 군대를 증강시키며 이스트라 반도달마티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더해서 스파치오 비탈레라는 일종의 영토 확장 계획을 선전하여 인민적 지지를 증가시켜 정권을 안정시켰다.

1919년의 왕당파 혁명으로 왕정이 세워진 포르투갈은 국가를 부흥시킬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은 빈트후크 조약으로 80%를 상실해버렸으며, 국내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눈에 브라질이 띈다. 브라질포르투갈과 통합된 연합왕국으로써 존재해왔으나, 1889년의 쿠데타로 공화제로 전향하여 일명 카페 콩 레이치라 불리는 체제가 수십년째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 카페 콩 레이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증가하였고, 포르투갈은 이를 통해 새로운 연합왕국을 구상한다. 포르투갈의 왕당파들은 브라질의 왕당파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이렇게 브라질의 왕당파들은 세를 불렸다. 1924년 11월 15일, 1889년 쿠데타가 일어난지 35년 째에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왕당파 혁명이 발생한다. 왕당파들은 성공적으로 정부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과거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브르 연합왕국의 재건을 선전하였고, 미누엘 2세를 브라질의 왕으로 추대하였고, 미누엘 2세가 이를 수락함과 동시에 포르투갈-브라질 연합왕국을 선포한다.

1925

1922년,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원인인 흑수단세르비아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재결성되었다. 리가 조약 이후 세르비아대세르비아주의는 붕괴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의해 정치가 간섭되었다. 세르비아 인민들은 이에 분노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대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대세르비아주의가 다시금 수면위로 상승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단결 혹은 죽음1924년의 선거에서 제1야당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선거 결과에 만족하지 않은 단결 혹은 죽음1925년 1월 2일, 자신들을 지지하는 일부 장교들을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단결 혹은 죽음은 빠르게 베오그라드의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알렉산다르 2세를 확보하였다. 다음날, 단결 혹은 죽음은 왕정 폐지를 선언하며 세르비아국을 선포한다.

단결 혹은 죽음세르비아국의 정권을 장악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단결 혹은 죽음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알렉산다르 2세의 복고를 주장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국에게 정권을 알렉산다르 2세에게 양위하고 단결 혹은 죽음을 해산할 것을 요구한다. 세르비아국은 이를 거절하였고, 1925년 2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발칸 반도에서의 새로운 전쟁에 다시금 유럽은 긴장에 빠진다. 그러나 독일이 직접 주변 국가들과 협상을 마련하며 주변 국가들의 개입을 차단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국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기록하였고, 몬테네그로에서의 봉기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1925년 7월 7일, 세르비아국은 국경을 넘어 몬테네그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범게르만주의를 바탕으로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펼치며 헝가리와 함께 이중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독립 운동을 탄압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중앙유럽 동맹 가입을 거절하고 독자 노선을 걸으며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발칸 반도 영향력은 독일의 지원을 받는 불가리아에 의해 줄어들었고, 세르비아에서 단결 혹은 죽음이 재설립되어 이들의 화살이 일리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의 선전은 세르비아 전쟁으로 몬테네그로에서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다. 포드고리차에서 시작된 봉기는 점차 북쪽으로 펴저나갔다.

1925년 7월 12일, 보헤미아 왕국프라그에서 체코가 선포된다. 체코군은 민병대의 대대적인 참여로 삽시간에 병력을 불려나갔고, 또한 보헤미아 왕국모라바 변경백국의 도시들이 체코에게 투항하였다. 체코의 소식은 이중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이는 일리리아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혼란을 불러온다. 그리고 프라그의 일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이 발발한다. 세르비아국일리리아의 반란군과 동맹을 맺고 사라예보를 점령, 계속 북상하여 자그레브로 향한다. 이에 내전의 발발로 오스트리아의 행정을 벗어난 헝가리는 단독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세르비아군에게 맞선다.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체코주데텐란트를 두고 충돌하였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폴란드우크라이나가 내전에 개입하며 양분하였다.

발칸의 혼돈에 결국 1925년 10월 10일, 독일이 협상을 중재한다. 크라쿠프에서 열린 협상으로 이중제국은 붕괴되었고, 3개의 국가로 분할되었다. 또한 폴란드우크라이나가 개입으로 점령한 땅의 합병을 인정하였고, 슬로베니아 지역을 제외한 발칸 반도 지역에 대해 세르비아국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헝가리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지배권 상실을 이유로 협상에 응하지 않고 세르비아국과의 독자적인 전쟁을 지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헝가리 없이 진행된 협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일리리아, 소폴란드, 갈리치아로 일시적으로 분할되었고, 이후 일리리아, 소폴란드, 갈리치아는 각각 세르비아국, 폴란드, 우크라이나에게 합병되었다. 또한 1926년 1월 18일, 에서 치뤄진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독일의 구성국으로 가입하였다.

헝가리일리리아를 인정하지 않으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병력을 집중하며 세르비아군에게 맞섰다. 하지만 일리리아의 민병대와 함께 북상하는 세르비아군은 몇몇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서는 헝가리에 반대하는 봉기들이 발생하며 헝가리군에 혼란을 가하였다. 1925년 11월 1일, 자그레브에서 치뤄진 헝가리군과 세르비아군-일리리아 민병대-크로아티아 민병대의 전투에서 헝가리는 큰 패배를 당하고 자그레브에서 후퇴하였다. 자그레브가 함략된 이후에도 헝가리는 항전을 주장하며 되려 도나우 강을 넘어 베오그라드를 공격하였다. 자그레브에서의 패배한 헝가리군은 이후 재정비를 가져 세르비아 연합군을 상대로 슬라보니아 지역의 방어를 성공하였고, 전쟁은 대치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12월 20일, 루마니아헝가리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루마니아의 전쟁 선포로 인해 에르데이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면서 슬라보니아의 병력이 차출되었다. 그리고 이로 발생한 틈을 통해 세르비아 연합군이 공세를 가하였고, 12월 25일, 방어선은 돌파당한다.

1926

헝가리는 국경의 절반에 달하는 길어진 전선을 감당할 역량이 되지 못하였다. 에르데이에서는 루마니아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었으며, 슬라보니아의 방어선은 돌파되어 도나우 강을 끼고 방어선을 형성했다. 1월 9일, 헝가리일리리아의 독립 인정과 함께 휴전 협정을 세르비아국에게 요청했으며, 무리한 전쟁을 지속한 세르비아국은 이를 수락한다. 세르비아국과의 전쟁이 종전되면서 헝가리는 빠르게 에르데이로 병력을 급파했으며, 루마니아군의 북상을 데버에서 격퇴한다. 이후 루마니아의 점령지들을 탈환하며 2월 3일, 브러쇼를 탈환하면서 카르파티아 산맥 서쪽을 모두 탈환하였다. 이후 도나우 강을 통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은 헝가리군은 빠르게 올트강으로 진격한다. 3월 19일, 크라이오바를 포위한 헝가리군은 수십일의 포위전 끝에 크라이오바를 점령하고 이에 루마니아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에르데이 전쟁은 종료된다. 부더페슈트에서 이루어진 조약에서 루마니아올테니아를 비무장화하고 크라이오바에는 헝가리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미합중국은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1910년 대에 미합중국은 전세계 철강 생산량과 석탄 생산량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외교는 먼로 독트린을 기반으로 고립주의를 이루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승전하는 것을 지켜만 봤다. 미합중국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지역에 대해 대규모의 경제적 투자를 진행했다. 이들의 투자금은 독일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들에게 투자되었다. 그러던 1925년, 미합중국이 유럽에 투자한 투자금 중 최대 규모에 해당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몇개월의 내전의 결과 순식간에 해체되어 버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투자된 대규모의 금액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이중제국을 계승한 여러 국가들은 투자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문제로 미합중국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이어서 미합중국의 여러 투자자들은 유럽 내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1926년 4월 9일, 베를린의 증권거래소가 거대한 폭락을 기록한다. 폭락은 멈추지 않았고 일주일간 폭락이 지속됐다. 대공황이 도래했다. 검은 금요일이라 불린 베를린의 증권거래소의 대폭락은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파장을 끼친다. 독일의 경제는 무너졌고, 동시에 중앙유럽 동맹 또한 파탄에 이른다. 중앙유럽 동맹에 가입한 여러 국가들은 독일의 투자금이 빠져나감에 따라 경제가 붕괴되었다. 독일에서의 공황은 이후 중앙유럽 동맹을 넘어 전세계로 확대된다.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제가 침체되었고, 이는 극단적 사상의 부상을 야기했다. 대공황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1927

192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혁명으로 발생한 내전이 전러시아 전역으로 퍼지며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크게는 사회주의자들의 러시아 코뮌과 군주주의자,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반동주의자 등 여러 중도에서 우익 성향의 러시아 제국으로 나뉘어졌고, 튀르키스탄과 극동에서는 독자 세력이 나타났다. 코뮌군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러시아의 공산화를 경계한 독일과 동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제국군이 크게 선전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코뮌 또한 브리튼 코뮌제3인터네셔널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제국군의 공세를 격퇴시키고 볼가 강까지 전진하는 등 막상막하의 상황이 수년째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 제국은 튀르키스탄의 여러 세력들과 연합하여 코뮌 세력을 격퇴하고 극동까지 안정적으로 통치를 끼치는 등 점차 승기를 잡아가는 듯 했다. 그러던 1926년, 베를린의 증권거래소가 붕괴하면서 독일과 동유럽의 경제가 붕괴함에 따라 러시아 제국으로 향하는 지원이 끊긴다. 우크라이나로부터 곡물의 대부분을 지원받던 러시아 제국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군대로까지 확대가 된다. 반면 러시아 코뮌아나톨리아 공화국브리튼 코뮌 등 여러 국가로부터 곡물을 안정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었고, 러시아 제국의 혼란을 틈타 대규모 공세를 개시한다. 혹한기 공세라 불린 겨울의 공세는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던 러시아 제국을 크게 격퇴하고 우랄 산맥까지 전진하는 성과를 올린다. 러시아 제국러시아 코뮌의 공세에 임시 수도를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옴스크로 옮겼고, 튀르키스탄의 여러 세력들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등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기존의 강남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던 영국의 영향력을 산동 반도에 국한돼 있던 독일이 승계받은 것이다. 1916년도쿄 조약으로 일본 또한 그나마 확보한 대륙에서의 영향력 마저 잃고 열도로 쫓겨났다. 완전히 중국 대륙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독일중국의 여러 항구들을 조차하고 독일령 동아시아에 관리를 맡겼다. 영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국독일에 종속되었다.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한 위안스카이중화민국독일의 자본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한순간의 번영은 무너져내렸다. 베를린 증권거래소 붕괴의 여파로 중화민국 내에서 독일의 자본이 빠져나갔고, 이는 중국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대공황중국 전역을 덮치자 지난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봉기가 발생하였고, 이에 분쇄된 중화혁명당의 잔당과 남부 군벌들이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가담하면서 위안스카이의 굳건하던 독재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1928

포르투갈-브라질은 성립되면서 경제는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1926년대공황으로 포르투갈-브라질의 경제는 다시 곤두박질쳤고, 정치는 다시금 불안정해졌다.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내각이 다섯번 교체되었으며, 결국 군부 통치로 전환된다. 군부는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무기한 연기하는 등 군부독재를 펼치기 시작한다. 군부는 강압적인 통치로 불만은 제압하는것과 동시에 대포르투갈을 주창하며 시선을 외부로 돌렸다. 군부는 국가적으로 공공사업을 실시하며 국토를 개발하고 아마존에 고무 산업을 다시금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을 가했다. 또한 군수 산업을 양성하며 전쟁 경제로 점차 나아가기 시작한다.

도쿄 조약 이후 일본은 군부와 정계의 권력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당장 육군과 해군이 서로 적대하고 있던 일본군의 내부 혼란이 정부에까지 영향을 미쳤기에 군부와 정계의 다툼에 더해 국정은 더욱더 혼란해졌다. 국정이 혼란하니 도쿄 조약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의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민생은 파탄에 이르렀다. 군부와 정계 모두 민심을 잃자 민심은 천황의 직접 통치를 추구하는 친황파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반황파로 나뉘었다. 특히 반황파들은 제3인터네셔널의 지원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이 강한 영향력을 지녔고, 친황파는 자연스럽게 반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건다. 1927년, 중국대공황의 영향이 닥치자 일본 또한 대공황에 빠졌다. 빠른 속도로 실직자들이 늘어났고, 이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졌다. 토쿄에서 여러차례 소요가 발생하자 군부와 정계는 손을 잡고 이들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무력 진압으로 빠르게 사그라질 것 같았던 소요는 무력 투쟁으로 변모하였고, 이윽고 혁명으로 진화한다. 브리튼 코뮌, 러시아 코뮌 등을 비롯한 제3인터네셔널 국가들이 이들의 혁명을 지원했다. 심상치 않은 흐름으로 흘러가자 일본 정부와 천황요코하마로 피난했으며, 이로 인해 토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여러 대도시들로 혁명이 퍼져나가게 된다. 토쿄를 점령한 반황파 혁명군은 1928년 1월 24일, 일본 코뮌을 선포한다. 전국적인 혁명에 농촌에서는 반황파들에 대항하여 친황파들의 근황 봉기가 벌어졌으나 이는 군부의 진압과 천황의 명령으로 해산된다.

1928년 6월 30일, 바르샤바에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한다.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군은 바르샤바의 관공서와 궁전을 장악하였고, 최종적으로 폴란드의 군통수권을 위임받는다. 7월 3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바르샤바 왕궁에서 호엔촐레른가프리에드리흐 1세의 폐위와 함께 폴란드 제2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독일과의 협상으로 프리에드리흐 1세의 신변을 보장하는 것을 대가로 정부를 인정받는다. 8월 8일 치뤄진 선거에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80%에 달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폴란드 통령에 오른다. 이어서 선출된 의회 또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지지하는 재건 의원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였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재건은 강력한 정치권력을 바탕으로 통령의 권한을 비대시킨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며 헌법으로 합법적인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면서도 대공황을 대체하기 위해 진행한 급진적인 경제 계획이 성공을 거두면서 인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어 안정적인 정권을 유지하였다.

러시아 코뮌은 튀르키스탄의 여러 세력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독립을 약속하는 대가로 지원을 얻는다. 러시아 코뮌옴스크를 점령했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통해 반년도 체 되지 않아서 이르쿠츠크를 점령한다. 계속되는 패배에 러시아 제국 내부는 혼란에 빠진다. 수뇌부 대다수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외국으로 빠져나갔으며, 몇몇 장교들은 러시아 코뮌에 투항했다. 전선의 부대들 또한 오직 탈영병만으로 해체되는 부대가 생겨났고, 그외의 수많은 병력이 아사하거나 동사하였다. 1928년 10월 3일, 결국 러시아 코뮌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다. 연해주의 녹우크라이나 군벌은 항복하였고, 시베리아 북부로 후퇴한 몇몇 군벌들은 곧 수년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항복하니 1921년부터 진행된 러시아 내전이 8년 만에 종결되었다.

1929

프랑스 제3공화국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혼란에 빠져왔다. 나폴레옹 4세의 군부 쿠데타나 프랑스 공산당의 코뮌 혁명이 그것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혼란과는 별게로 경제적으로 프랑스는 안정된 상태였다. 군대 제한과 과거 독일과의 국경에 지어진 수많은 요새들 또한 해체되면서 군비 지출은 압도적으로 줄었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매우 안정적으로 빠르게 지불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독립된 상태였다. 또한 거기에 미합중국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큰 경제적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미합중국의 투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해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프랑스에서 막대한 투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정치적 혼란에 더불어 상황은 악화되었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파산자 또한 늘어났다. 혼란을 틈타 프랑스 공산당은 세를 불려나가 다시 한번 파리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며, 다른 도시들에서도 각기 다른 혁명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하였고, 정부 내 권력을 차지한다. 1929년 5월 18일, 사실상의 권력을 잡은 군부는 정치 안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군은 정부에 무혈 입성하여 공식적인 권력을 장악한다.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을 선포하며 군부 독재 체제를 이룩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벨기에는 오랫동안 혼란에 빠져있었다. 독일의 괴뢰 정부와 주둔하는 독일군은 벨기에 인민에게 큰 불만과 반발을 가지게 했다. 반정부 세력이 벨기에 인민들에게 서서히 힘을 얻었고, 그들의 행동은 벨기에를 더더욱 혼란에 빠트렸다. 1929년이 되었을때, 벨기에의 반정부 세력은 네덜란드 코뮌의 지원을 받는 플란데런의 사회주의 세력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왈롱의 파시스트였다. 그러던 와중에 대공황까지 발생하면서 독일에게 경제가 종속된 벨기에 정부는 파산 직전까지 이른다. 결국 1929년 8월 1일, 플란데런의 안트베르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 발생하였고 혁명은 삽시간에 플란데런 전역으로 퍼졌다. 플란데런 지역브뤼셀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점령당하면서 코뮌 정부가 선포된다. 그러나 왈롱의 파시스트와 인민은 이에 반하면서 일부 벨기에군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다. 파시스트들은 왈롱 지역을 점령하고 브뤼셀 해방을 천명하며 진격한다. 8월 21일, 워털루에서 코뮌 민병대와 왈롱군이 충돌하면서 벨기에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독일의 벨기에 주둔군과 벨기에군 잔병들은 빠르게 브뤼셀을 탈환하였고 브뤼셀의 중립을 선언한다. 브뤼셀의 중립 선언에 코뮌과 왈롱의 군대는 브뤼셀로의 진격을 중지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브뤼셀의 중립화로 내전은 장기화되었고, 양측은 무의미한 전투를 지속한다.

1930

파리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잡은 군부는 필리프 페텡을 중심으로 프랑스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프랑스 제4공화국은 파시즘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눈에 띈다. 1929년, 벨기에 내전이 발발하며 프랑스이탈리아가 왈롱에게 지원을 보내면서 양국은 협력의 가능성을 느낀다. 그렇게 1930년 1월 11일, 필리프 페텡의 사절단은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한다. 그들은 곧 강철 조약이라 붙은 동맹을 체결한다. 강철 조약은 서로의 신뢰와 협력을 약속하며, 군사, 경제 등의 중요 정보를 공유하였다. 양국은 동질적인 정부를 가지고 동질적인 정책의 실행을 실행하게 된다. 더해서 파리 조약에서 사보이아, 니스 등 이탈리아가 합병한 영토를 양토 받았다. 또한 필리프 페텡의 사절단은 벨기에 내전의 개입에 대해 이탈리아의 동의를 얻고, 확전 시 지원 약속을 받는다.

1931

1930년 3월 13일, 세르비아국을 중심으로 그리스, 루마니아베오그라드에서 대불가리아 동맹을 체결한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협력하며, 제3차 발칸 전쟁으로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기를 원했다. 베오그라드 동맹이라 불리는 새로운 동맹이 자신들을 해체시키기 위해 생겨나자 불가리아독일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한편, 알바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1931년 6월 29일, 베오그라드 동맹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제4차 발칸 전쟁이 발발한다. 불가리아제3차 발칸 전쟁의 승리와 대공황으로 인한 우경화로 사회가 군국주의화되어있었다. 불가리아군은 스스로를 발칸의 프로이센군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베오그라드 동맹은 질적으로는 부족할지 모르나 양적으로 불가리아를 상회하고 있었다. 더불어 불가리아알바니아의 영토까지 보호해야 함으로 병력은 분산되었다. 전쟁 초반, 불가리아군은 레스코바츠 전투브러일라 전투, 규뮤르지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선전하였으나, 베오그라드 동맹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점차 무너져내렸다. 비딘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군과 루마니아군에게 대패하면서 전쟁은 베오그다르 동맹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 솔룬 포위전에서 10만명의 불가리아군은 그리스군에게 항복하였고, 계속된 패배로 11월 4일, 스코피에가 함략되면서 불가리아마케도니아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11월 9일에는 불가리아와 단절된 알바니아가 조건부 항복에 동의하면서 결국 불가리아11월 18일, 항복하였다.

이윽고 비딘도나우 강을 사이에 둔 칼라파트에서 종전 조약이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세르비아국그리스마케도니아 지역과 관련하여 갈등을 빚었고, 루마니아와 양국은 루마니아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결국 1932년 3월 2일, 칼라파트 조약에서 세르비아국그리스블라고에브그라드-데버르 라인으로 마케도니아를 양분하였고, 루마니아실리스트라-만갈리야 라인 이북을 합병한다. 불가리아베오그라드 동맹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알바니아와의 조약으로 에피리 지역을 합병한다.

1932

벨기에 내전통에런 전투 이후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코뮌과 왈롱 양측은 전선을 따라 백여km의 참호를 파고 대치하였다. 그러던 1932년 2월 1일, 왈롱군은 루벤을 향해 공세를 개시한다. 초기 왈롱군은 코뮌군의 참호를 돌파하며 전진하였으나, 곧바로 코뮌 측의 병력 투입으로 돈좌된다. 그럼에도 왈롱군 사령부는 공세의 지속을 명령하였고, 곧 전선은 지옥도로 변모한다. 양측의 포격 지원에 지면은 망가졌으며, 기관총과 육탄전은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전투는 약 반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어느 한쪽도 승기를 잡지 못하였다. 결국 8월 10일, 왈롱군 사령부가 공세 중단을 명령하면서 루벤 전투는 십수만명의 사망자를 내며 종료되었다. 6개월 간의 살육전 끝에 양측은 전쟁을 지속하는 것에 의문을 품었고, 결국 9월 3일, 브뤼셀에서 왈롱의 제안 하에 종전 협정이 진행된다. 9월 14일, 양측은 플란데런왈롱, 브뤼셀 중립 지대벨기에를 해체한다. 플란데런 코뮌은 이후 네덜란드 코뮌에 가입하였고, 왈롱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제4공화국에 합병된다. 브뤼셀 중립 지대는 독일군 1개 사단과 브뤼셀 방위군이 창립되며 중립 지대 역할을 하였다.

비아리스토크는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으나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 입헌왕국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 모두 비아리스토크를 가지지 않았다. 1915년, 리가 조약이 체결되면서 비아리스토크폴란드벨라루스 중 하나에게 합병될 예정이였다. 그러나 독일은 프로이센 내의 폴란드인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신생국 폴란드의 영토 확장을 원치 않았고, 비아리스토크벨라루스에 합병된다. 그러나 폴란드 제2공화국이 선포되며 독일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면서 상황이 변한다. 벨라루스는 건국부터 계속 다른 중앙유럽 동맹의 가입국 보다 뒤떨어졌다. 반면 폴란드 제2공화국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집권 아래로 지속적으로 군대를 확장해왔고, 경제 또한 대공황으로부터 벗어나 지속적으로 상승 중이였다. 결국 1932년 11월 11일, 폴란드군은 벨라루스 국경을 넘어 비아리스토크를 점령한다. 폴란드비아리스토크 점령민스크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벨라루스 정부는 곧바로 폴란드에 항의하며 군대를 소집하였으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경제적 원조를 대가로 비아리스토크의 합병을 요구한다. 11월 19일, 폴란드군을 공격하였던 벨라루스군이 대패하면서 결국 벨라루스 정부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11월 24일, 바르샤바에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비아리스토크 합병을 선언하면서 비아리스토크폴란드에 합병되었다.

1933

스페인 왕국1874년, 단 1년의 기간 동안만 존속한 스페인 공화국을 무너트리고 건국되었다. 스페인은 수백년 동안 혼란의 상태였고, 이는 스페인 왕국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더불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여러 식민지를 잃었다. 스페인은 계속해서 군부 독재에 시달렸으며, 이에 반하는 여러 아나키스트들이 세력을 넓히는 등 계속해서 혼란에 빠져들었다.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지속된 리프 전쟁에서 리프 공화국에게 대패함과 동시에 대공황이 닥치는 등 악재가 계속되었다. 아나키스트의 테러는 계속되었고 민족주의의 기승은 스페인 인민으로 하여금 불안감에 빠지게 했다. 군부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독재를 지속하였다. 그러다 1933년 7월 7일, 전국노동자연합의 혁명이 발생한다. 이들은 브리튼 코뮌러시아 코뮌, 네덜란드 코뮌 등 유럽 내에서 코뮌 정부를 수립한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스페인 전역으로 혁명을 퍼트린다. 이에 알폰소 13세와 군부는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한 여러 극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반코뮌 전선을 형성한다. 프랑스포르투갈-브라질은 반코뮌 전선을 지원한다. 거기에 더해 바스크의 독립주의자들이 봉기하면서 양상은 복잡해진다.

8년 동안 치뤄진 러시아 내전으로 러시아 코뮌의 영토는 황폐화되었다.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극소한 산업 지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수차례의 기근은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켰다. 러시아의 재건은 브리튼 코뮌네덜란드 코뮌 등 이미 산업화된 국가들로부터 큰 지원을 받으며 천천히 이루어졌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도시 개발 계획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산업의 재건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리가 조약 이후 거세된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한다. 카잔톨리아티볼가 강이라는 운송 수단을 끼고 군수산업이 발전한다. 또한 러일 전쟁 이후 붕괴된 함대의 재건이 아르헨겔스크에서 시작되었다. 더해서 브리튼 코뮌으로부터 발전된 기술과 전술을 전해받으면서 러시아 코뮌의 군대는 러시아 제국 그 이상에 이른다. 그리고 1930년부터 진행된 군대 증강의 결과물로써 러시아 코뮌은 튀르키스탄을 침공한다.

튀르키스탄은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되기 시작하였다. 반 백년의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러시아령 튀르키스탄으로 존재하였으나, 러시아 내전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면서 러시아령 튀르키스탄에는 여러 독립 국가들이 새워졌다. 일부 사회주의 국가가 토후국 등과 싸웠으나 모두 축출당하고 사라졌다. 러시아 코뮌제국을 무너트리기 위해 이들과 협정을 맺어 공동 전선을 이루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나서 이들은 모두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코뮌이 내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군대를 재무장함에 따라 러시아의 영토로 여겨지던 튀르키스탄에 대한 침공은 불가결한 사항이 되었다. 1933년 8월 8일, 알라시에게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러시아 코뮌튀르키스탄 침공이 시작된다. 코뮌군은 압도적인 전술과 화력으로 이들의 군대를 묵사발을 내며 진격하였고, 9월 28일알라시의 수도인 알마티가 함략되어 항복하였으며, 이후 부하라, 히바, 튀르키스탄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1933년 11월 10일, 알마티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코뮌튀르키스탄 침공은 완료된다.

1934

대공황 발생 원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미합중국은 곧이어 대공황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해체로 인해 몇몇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고 주식이 하락한 것을 시작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있던 미합중국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 및 기타 유럽 선진국들의 투자금이 빠져나가면서 베를린에서의 일이 뉴욕에서 재현됐다. 캘빈 쿨리지미합중국 공화당오스트리아-헝가리 해체 당시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과 더불어 대공황으로 인해 지지도를 크게 잃어 1932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서 앨 스미스에게 참패한다. 하지만 앨 스미스 또한 그의 가톨릭적인 여러 정책들로 인해 큰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이는 1932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서 미합중국 사회당이 득표를 하는 등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1933년에는 루이지애나 주지사휴이 롱사회당앨 스미스의 정책에 반대하며 민주당을 탈퇴해 미합중국 국민당을 새우는 등 미합중국의 정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리투아니아리가 조약 이후 전적으로 독일에 의해 탄생하였다. 리투아니아 국왕 또한 독일인인 민다가우스 2세가 즉위하였다. 민다가우스 2세는 즉위식 때 그가 리히텐슈타인 성에서 배운 리투아니아어로 연설을 하면서 리투아니아인에게 큰 주목을 받고 지지를 받는다. 이후 민다가우스 2세는 안정적으로 리투아니아를 통치하다 1928년 그의 차남인 비타우타스 2세빌헬름 폰 우라흐 대신 왕위를 잇는다. 비타우타스 2세빌헬름 폰 우라흐가 예상치 못한 스캔들과 그의 계승 거부로 인해 갑작스럽게 왕위를 이은 만큼, 민중으로부터 큰 지지를 얻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존재는 우라흐가리투아니아 통치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독일계 리투아니아 국왕에 대한 불만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민족주의자 세력에게 폴란드 제2공화국과의 새로운 연방은 숙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자 세력은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중앙유럽 동맹 아래 종속된 그들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면서 반독일적인 여론과 극단주의 세력이 증가하는 것에 힘입어 우라흐가가 무시하지 못할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1932년폴란드 제2공화국비아리스토크 점령은 새로운 연방의 가능성을 열었다. 1934년 10월 10일, 리투아니아 내 민족주의자 세력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우라흐가빌뉴스에서 추방된다. 쿠데타 세력은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세우고는 한달뒤인 12월 7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선포되며 폴란드 제2공화국리투아니아 공화국은 합병된다.

1935

스페인 내전 초기 코뮌군은 돌출부를 형성한 마드리드를 포위하고자 공세를 가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저항에 톨레도만 점령한 체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고, 동시에 사라고사 방면에서 카탈루냐와 남부의 허리를 자르고자 한 정부군의 공세에 코뮌군은 마드리드 북쪽 돌출부를 상실하고 후퇴하였다. 공세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둔 정부군은 이어서 사라고사 방면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북으로 공세를 가하였다. 그러나 레리다에서 패배하고 사라고사가 포위되고 코뮌군이 팜플로나를 점령한 바스크군과 닿으면서 승기를 잃었다.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코뮌군은 이후 바야돌리드를 향해 공세를 가했다. 정부군은 사라고사 공세에서 획득한 점령지를 모두 포기하며 후퇴했고, 더해서 바다호스 방향으로 공세가 시작되면서 코뮌군의 승리가 다가왔다. 그러던 1934년 7월 11일, 프랑스 제4공화국이 내전에 개입한다. 프랑스 제4공화국의 내전 개입과 함께 전세는 역전되어 압도적인 화력 앞에 코뮌군은 바르셀로나를 함략당한다. 프랑스의 공세에 점령지 절반과 군대 1/3을 잃은 코뮌군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고, 그라나다발렌시아를 점령당하고 무르시아까지 밀린다. 그러나 코뮌군의 빠른 퇴각으로 그들은 내전 발발 당시 군대의 절반을 지켜내고 무르시아를 거점으로 항전을 이어나갔다. 브리튼 코뮌네덜란드 코뮌은 계속해서 물자를 지원헀고, 이는 내전의 양상을 고착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간의 항전 끝에 결국 1935년 11월 3일, 무르시아가 점령당하고 12월 4일, 마지막 코뮌 부대가 전멸하면서 스페인 내전은 종료된다.

프랑스 제4공화국벨기에 내전 이후 독일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부의 전체적인 정책 아래서 급속도로 성장을 이루어왔다. 그들의 공업력은 독일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고, 군사력 또한 독일과 동등해졌다. 그럼에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여진 것처럼 독일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하다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강철 조약을 시작으로 반독일적인 행보를 보이는 여러 국가들과의 동맹을 원하였다. 그 중 하나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뒤를 이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폴란드-리투아니아마누엘 다 코스타포르투갈-브라질이였다. 1935년 8월 2일, 필리프 페텡파리에서 그들과 회담을 가졌다. 파리 회담이라 불린 회담의 결과 프랑스, 폴란드-리투아니아, 포르투갈-브라질군부동맹이라 불리는 새로운 외교 동맹을 형성하였다. 이런 군부동맹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스페인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가 가입하는 등 독일의 패권에 반대하는 세력이 부상하였다.

1936

발트리가 조약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생겨났다. 동유럽의 독일인들이 주축이 된 국가로써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독일인이 유입되었다. 이들의 이주는 일부 슬라브인들과 지속적인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발트가 6개 공국들의 연합체로써 각 공국의 대표가 의회를 구성하였는데, 이는 독일인의 권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황들에 슬라브인들은 불만을 표출했으나, 연합공국 측은 이들의 의견을 조금씩 수용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1926년대공황 이후 이러한 안정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대공황은 기존의 부당한 상황과 더불어 극단적인 슬라브인들을 양성하였고, 이는 과격 민족 단체를 발생시켰다. 이들은 가끔씩 연합공국에 대해 테러를 자행하며 그들의 의지를 알렸고, 연합공국 측은 점차 그들에 대해 파악해 나갔다. 그러던 1936년 1월 18일, 독일 제국 건국 행사가 한창이던 리가 시내에서 테러와 함께 과격 민족 단체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테러로 인해 행정이 마비된 틈을 타 이들 단체는 관공서 등을 장악하며 선전했고, 연합공국 측은 군대를 파견해 며칠 동안의 기간 동안 겨우 진압을 성공하였다. 사건 이후 연합공국 측은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연합공국 내 과격 민족 단체들이 발각돼 체포 소동이 일었다. 토벌 도중 연합공국은 한 민족 단체로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개입 의심 문서를 발견하였고, 이는 베를린을 뒤집어 놓았다. 테러로 정부요인 몇몇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은 독일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해당 사건의 진위 여부에 대해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이를 무시하였고, 다음날인 3월 3일, 독일은 대사를 통해 최후통첩을 전달한다. 최후통첩을 받아든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해당 통첩을 거절했으며, 3월 4일, 독일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1936년 11월 3일, 1936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가 치뤄진다. 1932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 이어 미합중국 사회당이 선거인단을 확보하였으며, 휴이 롱미합중국 국민당 또한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미합중국 민주당의 후보로는 31대 대통령을 지닌 앨 스미스가 출마하였으며, 미합중국 공화당에서는 허버트 후버가 출마하였다. 그러나 미합중국 공화당대공황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앨 스미스는 그의 개혁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1936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앨 스미스가 연임에 성공하였으나, 미합중국 사회당미합중국 국민당이 약 백만표를 득표하는 등 미합중국의 정치는 불안하였다.

Zweiter Weltkrieg
제2차 세계 대전

1936

1936년 3월 4일 독일의 선전포고 이후인 3월 5일, 프랑스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군부동맹을 명분으로 독일에게 선전포고 철회를 요구한다. 12시간의 최후통첩을 독일은 응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3월 5일, 프랑스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같은날 프랑스의 선전포고와 함께 군부동맹의 다른 국가들도 덩달아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군부동맹 국가들의 참전이 이어지자 독일 또한 자신의 동맹국들을 호출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한다.

본격적인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독일이 아닌 벨라루스를 향해 진격한다. 민스크 공세라 명명된 3주간의 공세로 벨라루스민스크가 함략당하고 지휘계통이 마비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지원으로 민스크 공세는 중지되었고, 우크라이나벨라루스 정부의 군통제권을 넘겨받아 벨라루스군은 우크라이나 참모부의 지휘를 받는다. 한편 약 2개월 뒤, 준비를 끝낸 독일우치 방면으로 공세를 가한다. 11·12·13군을 동원한 우치 공세는 11군이 브롬베르크를 함략시키지 못하고 12군과 13군이 각각 제1차 코닌 전투, 첸스토차우 공방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저항에 의한 소모로 국가 전체적으로 약 9개월 간의 재정비 기간을 가져야했다.

제2차 세게 대전에 참전한 프랑스독일라인란트의 공업지대를 중요 거점으로 인식하고 제22계획을 준비해 공세를 가한다. 제22계획라인란트 점령으로 독일의 공업 생산량에 타격을 주어 장기적인 타격을 줄려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새로운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 갈 것이라 예상했다. 난치히 전투로 시작된 제22계획이 개시되었으나 난치히 전투아르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패배했고, 곧 독일행진 작전이 개시된다. 과거 슐리펜 계획을 베이스로하여 짜여진 행진 작전은 그 이름에서부터 전쟁 종결을 희망하는 계획이였다. 독일군은 빠르게 서진했고, 왈롱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다. 그러나 라임스 공방전릴 공방전에서 독일군은 패배했고, 공세는 중단되었다. 이후 양측은 재정비 기간 동안 점령비 방어를 위해 참호를 건설하였다.

전쟁에 참전한 이탈리아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진입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곧 그라츠 공세라 일컫은 공세를 게시하며 알프스 산맥을 넘기 시작한다. 타르피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탈리아군은 사바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로 진격한다. 필라흐를 점령한 이탈리아군은 군을 나누어 그라츠잘츠부르크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곧 독일군의 저항에 패배하고 돈좌되었다.

전쟁 발발 이후 세르비아는 압도적인 군세로 헝가리에 공세를 가한다. 세르비아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부다페스트를 향해 진격했으며, 헝가리군은 세르비아군의 공격적인 전술에 격퇴되어 부다페스트까지 후퇴한다. 또한 비슷한 시기, 루마니아 또한 트란실바니아 공세를 개시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진격하였다. 헝라기는 양면 전선으로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구스타브 야니의 참모진과 적은 소모로 후퇴에 성공한 군은 7월 1일, 세케슈페헤르바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저지한것을 시작으로 머르철리 전투더버시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에르데이 전선에서는 데버 전투에서 러요시 처터이의 4군이 대승을 거두고 너지바녀 전투콜로즈바르 공방전에서 루마니아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독일의 선전포고 이후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발생했다. 중앙아프리카군은 황금해안에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카자망스 강 유역의 지긴쇼르에서 최초의 전투가 발발하였다. 중앙아프리카군의 주력은 해안을 따라 진격하였고, 유목민 출신의 중앙아프리카군은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북상하였다. 프랑스군과 동맹군들은 수적 열세로 인해 계속해서 패배했다. 그러다 서아프리카의 다카르에서 식민지 남부의 병력이 모두 집결하면서 독일 식민지군에 맞서기 시작했다. 다카르는 삼면이 바다로 쌓여있는 곶이였기 때문에 독일령 중앙아프리카다카르를 함략시키는데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37

3월 3일,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이름을 딴 폴란드-리투아니아소비에스키 공세가 개시된다. 갈리치아볼히니아의 4방면에서 3·4·5·6군이 공세를 가하였다. 네 방향으로 진격한 그들은 리비우 방면의 6군을 제외하고는 적은 빈도의 전투를 거치며 진격했다. 그러나 루츠크 공방전에서 4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방어군이 완만하게 퇴각하였고, 이들이 두브노 전투에 가담하면서 3군과 4군의 공세가 저지당했다. 6군은 공세 초기부터 큰 저항에 부딪치며 리비우 공략을 실패하며 돈좌되었고, 5군은 적은 전투에도 잘리즈치 전투에서 돈좌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치열한 저항으로 공세 규모에 비해 적은 영토를 점령당했지만, 리비우두브노에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또한 후방 예비군 또한 모두 소모하는 등 저항으로 큰 이득을 취하지는 못했다.

소비에스크 공세가 공세 중반에 넘어가고 있을 무렵, 독일발트잘차 공세를 개시한다. 우치리투아니아 두 방면에서 공세는 개시되었다. 1936년우치 공세에서의 패배를 교훈삼아 독일군은 다시금 우치에 대해 공세를 가했다. 11군은 브롬베르크를 함략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바이크셀 강을 따라 전투를 치르며 이동하였다. 13군은 쳉스토호바우치 두 방면으로 나뉘어 공격하였다. 12군과 13군 일부는 우치를 공략하는 데 성공하였고, 다른 13군은 쳉스토호바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우치를 점령한 12군과 13군의 일부는 이후 나뉘어 일부 13군은 점령된 쳉스토호바와 전선을 잇기 위해 진격하였고, 12군은 플로츠를 점령한 11군과 함께 바르샤바를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13군은 라돔스코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바이크셀 강 북안으로 이동하던 11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9군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돈좌되었다. 12군 또한 스키에르니에비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지라르두프 전투로 돈좌되었다. 한편 리투아니아 방면의 연합공국군 2개 군은 세 방면으로 공세를 이루었다. 발트해의 1군은 팔랑가를 함략시키며 다른 군부동맹으로부터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원을 차단하였고, 이후 승리를 거두며 카우나스로 진격하였다. 2군은 두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동부로 진격한 1군은 파네베지즈 공방전에서 패배를 경험하면서 공세를 중단하였고, 서부로 진격한 1군만이 공세를 계속하였다. 샤울라이를 함략시키고 2군과 마찬가지로 카우나스로 진격하였다 켈메 전투에서 돈좌되었다.

행진 작전의 종료 이후 양측의 전선은 교착화되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점령지 방비를 위해 독일이 참호를 파기시작했고,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참호의 유용성을 본 프랑스 또한 참호를 팠다. 한편, 프랑스행진 작전에서의 피해를 복구하고 군대의 확충을 이루어내면서 다시금 공세를 계획하였다. 9월 5일, 룩셈부르크 공세라 불린 공세가 난치히 전투를 시작으로 개시된다. 프랑스메츠, 더 나아가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여 라임스 방면의 독일군 돌출부에 큰 패널티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프랑스군 2군과 3군이 각각 난치히메츠로 진격했으며, 독일군 4군과 3군이 이들과 싸웠다. 그러나 초기 프랑스군의 예상과 달리 난치히는 함략되지 않았고, 3군은 메츠 근처로도 진격하지 못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양측은 각각 난치히 공방전야르니 전투라 불린 두 전투에서 특별한 우위없이 그저 손실만을 반복했다. 난치히 공방전에서 프랑스군 약 13만 명, 독일군 약 11만 명이 전사하였으며, 야르니 전투에서는 프랑스군 약 17만 명, 독일군 약 16만 명이 전사했다. 그럼에도 전선의 변화는 없었고, 결국 프랑스군 군부는 12월 22일, 야르니에서의 철수를 시작으로 12월 29일, 난치히에서 퇴각하면서 룩셈부르크 공세는 양측 합 약 60만 명의 전사자만을 발생시킨체 종료되었다.

세르비아의 공격적인 공세는 중앙동맹국으로 하여금 불리한 상황에 이르게하였다. 헝가리는 영토의 절반을 점령당했고, 독일은 동부와 서부에 비해 남부는 중요도가 떨어져 큰 지원을 가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루마니아와 대치만 할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공격을 막기에도 버거웠다. 그렇기에 중앙동맹불가리아으로 하여금 참전을 요청했다. 그들은 제4차 발칸 전쟁으로 다시금 영토를 잃었으며, 복수를 원했기에 그들의 참전은 어쩌면 정해진 일 일터였다. 그럼에도 군부동맹 측은 불가리아의 참전에 대해 큰 가능성을 두고 있지 않았다. 결국 4월 11일, 불가리아제2차 세계 대전독일의 동맹으로 참전했다. 세르비아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허둥지둥 새로운 부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이틀 뒤, 불가리아니시 공세가 개시되었다. 불가리아군 3개군은 수적·질적 우위를 가지고 공격적인 공세를 가하였다. 한달만에 니시가 함략되었으며, 이후 그들은 베오그라드로 향하였다. 그러나 니시 공방전에서 세르비아군 몇사단이 저항을 하며 한달의 시간을 번 덕분에 세르비아는 2개 군을 창설할 수 있었다. 결국 불가리아군은 여섯 전투에서 패배하며 공세를 중단했지만 그럼에도 작전은 성공적이였다.

우크라이나폴란드-리투아니아의 공세에 남부 전선에 대해 큰 역할을 하지 않고 있었다. 5월 초에만 하더라도 폴란드-리투아니아소비에스크 공세에 저항하기 위해 온 전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전선에서 잘차 공세가 개시되면서 소비에스크 공세의 강도가 약해졌고, 더해서 남부 전선에서는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전황이 회복되는 등 우크라이나군이 남부 전선에 전력을 투자할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5월 18일, 우크라이나 8군과 9군의 몰다비아 공세가 개시된다. 루마니아우크라이나와의 전선에 큰 병력을 투자하고 있지 않았고, 그렇기에 몰다비아는 점차 유린되어갔다. 우크라이나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으려는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루마니아군을 카르파티아 산맥 너머로 퇴각시켰으며, 도브루자에서는 불가리아군 7군이 북상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부저우까지 전진했으며, 불가리아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슬로보지아까지 점령했다. 우크라이나군은 플로이에슈티로, 불가리아군은 부쿠레슈티로 진전했다. 그러나 루마니아군은 저항했으며, 8월 20일, 커저네슈티 전투에서 부쿠레슈티를 수호했으며, 이틀 뒤에는 플로이에슈티 전투에서 승전해 플로이에슈티를 방어한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한 우크라이나-불가리아는 공세를 중단한다. 그러나 몰다비아 공세는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루마니아는 영토의 절반을 점령당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불가리아가 중앙동맹 측으로 참전하고 니시 공세몰다비아 공세로 발칸 동부가 무너져내린 시점에서 세르비아를 위시하는 발칸의 군부동맹 국가들은 그리스의 참전을 위해 협상을 개시했다. 협상의 결과 그리스불가리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받았고, 그리스의 공세와 함께 오스트리아 지역에 대한 세르비아의 공세 또한 수립되었다. 10월 2일, 그리스세르비아불가록토노스 공세슬로베니아 공세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불가록토노스 공세그리스의 다섯 개 군을 모두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편되어 혼란한 불가리아의 네 개 군에게 모두 진격이 저지당한다. 소피아 방면에서의 공격만 조금의 승리를 거두었을 뿐, 동부의 4개군 모두가 빠르게 돈좌되었다. 5군 또한 불가리아의 저항에 분쇄되면서 불가록토노스 공세는 단 한달만에 종료된다. 한편, 세르비아슬로베니아 공세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경을 넘은 세르비아의 2군과 3군은 10월 28일그라츠를 함략시키고 동쪽으로는 11월에 벌러톤 호 동쪽 가장자리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에서 90km 남쪽에서 세르비아군 2군은 독일군 14군에 의해 돈좌되었고, 3군은 베스프렘 전투에서 패배하여 2달 만에 공세는 종료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독일의 해군력은 프랑스를 상회했다. 프랑스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1880년 대의 불랑주의자들이 세력을 얻는 등 독일에 대한 복수의 여론이 크게 증가하였고, 프랑스 전쟁부해군부독일을 잠재적 적국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독일을 잠재적 적국으로 규정하여 수립된 그들의 전쟁 계획에서 독일의 해군력은 거대한 위협이었으며, 이는 프랑스의 해군 팽창으로 이어졌다. 대공황이 발생하고 제4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프랑스의 해군 증강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독일의 함대에 의해 대서양은 봉쇄되었고, 군부동맹에게 큰 경제적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하였다. 대서양 봉쇄로 인한 피해로 군부동맹은 봉쇄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브라질 3개국의 해군이 연합한 동맹함대가 창설된다. 1937년 3월 3일, 비스케이만을 정찰하던 대양함대동맹함대의 정찰 함대는 서로를 포착하였고, 곧바로 본대가 출격하였다. 약 3시간 뒤 브레스트 북서쪽 300km 지점에서 해전이 발발한다. 동맹함대는 수적 열세를 지니고도 대양함대의 전함 여러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압도적인 화력에 궤멸당하고 만다. 스페인포르투갈-브라질의 해군은 붕괴되었으며, 프랑스 해군 또한 절반이 대파되었다. 비스케이만 해전대양함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군부동맹지중해를 통한 운송에 그들의 경제적 필요욕구를 충족해야하는 불리한 위치게 서게 되었다.

1938

소비에스트 공세는 꽤나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작전 중요 목표 중 하나인 리비우를 함략시키지 못했으며, 두브노의 우크라이나 2군에 의해 두개의 돌출부가 생겼다. 서부의 잘차 공세를 방어해낸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곧이어 포돌리아를 목표로 대대적인 공세를 계획한다. 포돌레 공세라 명명된 공세는 리비우를 포함한 갈리치아를 함략시키고 포돌리아의 장악을 목표하였다. 2월 2일, 리비우 전투를 시작으로 동부의 6개 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한다. 리비우두브노를 함략시킨 연방군은 빠르게 동진하여 5월 초에 포돌리아 대부분을 장악한다. 연방군은 포돌리아 뿐만 아니라 몰다비아 북부를 점령하고 키이우까지 진격하는 등 거대한 승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1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온전히 퇴각하여 체르니우치 공방전에서 몰다비아 서부를 방어하였고, 빈니차 공방전우크라이나의 승리로 돌아간다. 또한 7월 27일에는 키시니우 공방전에서 패배하면서 공세를 중지해야 하였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는 서부 대부분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키이우를 벗어나 폴타바로 피신하였다. 벨라루스마힐료우를 점령당하면서 벨라루스는 사실상 남북이 양분된다.

1939

1940

1941

Vertag 조약

두 차례의 쿠데타 끝에 프랑스 제4공화국은 항복하였고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는 독일, 네덜란드, 브리튼이 참여하였다. 전간기 기간 동안 프랑스에게 합병된 사보이-니스, 코르시카, 왈롱, 카탈루냐가 기존 국가들에게 할양되었고, 안도라가 해방되었다. 더해서 부르군트 일대, 파드칼레, 피리네우스 오리엔탈스가 각각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게 합양되었다. 파리는 비무장지대가 되어 파리 중립위원회가 세워졌다. 프랑스는 중동부의 제5공화국, 옥시타니아가 되는 남부의 남프랑스 국가판무관부, 브르타뉴, 노르망디, 앙주, 푸아투로 분할되는 서프랑스 인민위원회로 총 3개의 통치 기구로 분할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에 대한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에는 독일, 우크라이나, 발트, 벨라루스러시아가 참가했다. 팔랑가마조비엔-리타우엔, 빌뉴스 인근이 발트, 독일, 벨라루스에게 합병되었다. 또한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하여 비타우타스 2세가 다시 즉위한다. 전쟁에서 러시아의 활약으로 인해 러시아는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했고, 이에 따라 벨라루스의 동부와 볼가 강 유역의 캅카스 영토가 러시아에게 합병되었다.

스페인포르투갈-브라질의 전후 처리를 위해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브라질은 해체되어 브라질에는 공화정이 들어섰으며, 포르투갈은 왕정이 유지되었다. 스페인의 경우 부르봉가가 폐위되어 이사벨 2세가 폐위될 당시 왕위계승권을 포기하였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알브레흐트 폰 프로이센 왕자의 후손인 기예르모 1세가 즉위한다. 히브랄타르, 세우타, 멜리아독일에 50년 간 조차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스페인령 기니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독일령 중앙아프리카에 합병되었다.

부다페스트 조약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군부동맹 국가들의 전후 처리를 위해 헝가리, 불가리아, 아나톨리아가 참여하였다. 헝가리헝가리-세르비아 전쟁 당시 상실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를 회복했으며, 더해서 위성국인 보스니아를 획득한다. 불가리아제4차 발칸 전쟁 당시 상실한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아나톨리아오스만 전쟁에서 상실한 보스포루스 해협 지역과 키프로스, 로도스를 합병했다. 또한 코소보, 에피리 지역알바니아에 할양된다.

트리스트 조약에서 이탈리아이라크의 처리와 관련해서 독일, 쿠르디스탄이 참가하였다. 이탈리아사르데냐 왕국, 롬바르디아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모데나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교황령,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사르데냐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롬바르디아부르군트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모데나 공작으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차남인 조르조 1세(게오르크 빌헬름 폰 하노버 공자)가, 파르마 공작으로 보르보네파르마가주세페 1세가, 토스카나 대공작으로 빌헬름 3세의 삼남인 카를로 1세(후베르투스 카를 폰 프로이센 왕자)가, 양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알폰세 1세가 즉위하였다. 이라크쿠르디스탄에게 합병되었다.

Kalterkrieg
차가운 전쟁

1942

1942년 1월 18일, 독일 육군 제1근위보병사단빌헬름 3세와 귀족 및 장교들의 행열을 선두로 에투알 개선문에서부터 에펠탑의 앞을 지나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했다.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한 빌헬름 3세와 귀족 및 장교들은 거울의 방으로 행차했다. 독일 황제의 관과 보주, 셉터를 든 빌헬름 3세빌헬름 1세가 70년 전 오른 단상에 올라서며 4대 독일 황제로써의 즉위를 선포한다. 빌헬름 3세의 즉위식은 1871년의 영광을 재현함과 동시에 굴욕을 재상기시켰다. 거울의 방의 재현은 이윽고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독일에서는 조국에 대한 환호를, 프랑스에서는 굴욕과 침울을, 제3인터네셔널에서는 군주제에 대한 반감으로. 빌헬름 3세1941년, 전쟁이 끝나기 전 붕어한 빌헬름 2세를 대신하여 독일의 명예를 드높혔다. 그리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자신을 70년 전의 빌헬름 1세를 보좌하며 독일을 일으킨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대입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프랑스는 국경 영토를 잃은 것 뿐 아니라 삼분할 당하고 파리는 중립지대가 된다. 제4공화국의 수뇌를 구성한 장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장교들과 함께 새로 건설된 현대적인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어 곧 있을 국제재판을 기다렸다. 또한 군대는 해산되어 프랑스 지역에는 독일군브리튼 대륙혁명군이 진주하였다. 독일군프랑스 제1공화국을 계승한 프랑스 제5공화국과 남부의 남프랑스 국가판무관부에 진주했고, 브리튼 대륙혁명군서프랑스 인민위원회의 영토에 진주했다. 세 프랑스 모두 독자적인 정부를 지녔었으나, 세 프랑스를 오가는 데에 제약은 없었다.

1943

피우수트스키 쿠데타로 인해 폴란드의 국왕의 작위를 잃은 프리에드리흐 1세폴란드-리투아니아가 해체되고 폴란드 제2왕국이 재건되면서 다시금 폴란드의 국왕의 작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42년 12월 8일, 프리에드리흐 1세가 붕어한다. 프리에드리흐 1세는 자식이 없었고, 이는 폴란드의 국왕의 자리가 공석이 됨을 의미했다. 빈첸티 비토스폴란드 제2왕국 의회는 호엔촐레른가로부터 벗어나고자 빠르게 새로운 국왕을 탐색했다. 빈첸티 비토스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비합리적인 논쟁을 통해 폴란드 의회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군주의 가문인 포니아토프스키가루드비크 레오폴트 포니아토프스키폴란드의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루드비크 레오폴트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를 승락하면서 비호엔촐레른가 군주가 탄생할 것으로만 보여졌다. 그러나 빌헬름 3세는 신속하면서 조용히 벌어진 빈첸티 비토스의 행각에 분노하였고, 1942년 12월 19일, 바르샤바에 진주한 제6근위보병사단을 통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폴란드 의회를 해산하고 빈첸티 비토스루드비크 레오폴트 포니아토프스키 구속하였다. 루드비크 레오폴트 포니아토프스키폴란드의 국왕 작위를 포기하면서 석방되었으며, 빈첸티 비토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미합중국으로 추방되었다. 1943년 1월 1일, 폴란드 제2왕국이 해체되고 빌헬름 2세의 오남인 오스카르 폰 프로이센폴란드의 국왕으로 한 폴란드 제3왕국이 선포된다.

1943년 4월 6일,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그러나 그들의 영토는 시온주의에서 주장한 옛 땅인 가나안이 아닌 아프리카 동남쪽에 있는 마다가스카르섬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37년, 쿠르트 폰 슐라이허시온주의 세계대회마다가스카르섬에 그들만의 국가를 건설해주며 지원하는 대가로 전쟁 지원을 요청한다. 시온주의 세계대회슐라이허의 도당의 거래를 받아드리며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슐라이허의 도당시온주의 세계대회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시온주의 세계대회는 이에 여러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모조리 무시당하였고, 이에 1942년 3월 3일, 시온주의 세계대회는 독단적으로 마다가스카르섬에 그들 스스로 그들만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선언한다. 이윽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넘어가 정착하기 시작헀으며, 이 과정에서 원주민과의 갈등이 심화된다. 1942년 10월 2일, 마아양가(현재 에일라트 주변)에서 사칼라바족과의 사소한 일로 시작한 갈등이 학살로 번졌다. 약 40만명의 인구 중 양측 도합 2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마아양가 사건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슐라이허의 도당의 약속이 공개가 되었고, 독일 내외로 비난이 발생하였다. 결국 독일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하고 보장한다.

헝가리마자르 민족과 슬라브계 민족들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이다. 그러나 헝가리의 소수민족들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를 제외하고는 자치권을 지니지 못했다. 헝가리-세르비아 전쟁 이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세르비아에 합병되었고, 헝가리 본토만이 남았었다. 헝가리-세르비아 전쟁에서 영토의 30% 가량을 잃은 헝가리는 내부 슬라브계 민족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동화정책의 강도를 높혔고, 이는 꽤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수행하면서 헝가리마자르인이 위치한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당했고, 이는 슬라브계 민족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헝가리는 그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것을 대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조약에서 헝가리헝가리-세르비아 전쟁으로 잃어버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를 다시 합병했다. 그리고 약 1년의 기간을 거쳐 1943년 8월 20일, 헝가리, 슬로바키아,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카르파츠카가 설립되었다.

1944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에게 해 연안은 고대부터 그리스 세계의 하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오스만에 의해 멸한 뒤 에게 해 연안은 아나톨리아 민족의 비율이 높아진다. 그리스는 독립 이후 위대한 이상이라는 그리스 민족의 민족국가를 염원하는 것으로써 아나톨리아 반도 에게 해 연안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이는 오스만 전쟁으로 상당부분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다시금 상당 부분이 아나톨리아에 합병된다. 연안에 거주하던 그리스 민족아나톨리아의 통치와 사회주의에 저항했으며, 사회주의 체제에 불만을 품었던 아나톨리아인들도 가담하면서 거대한 폭동으로 발전한다. 이에 아나톨리아는 군대를 동원하며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아나톨리아 공화국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더불어 무고한 그리스 민족을 학살한다. 이러한 에게 해 연안의 사건은 곧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곧 수많은 국가들이 아나톨리아를 비난함과 동시에 경제 제재를 실시하게끔 한다. 결국 경제 제재에 아나톨리아는 굴복했고, 곧 독일러시아의 중제 하의 그리스와의 협정을 통해 아나톨리아그리스 민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리스와의 국경을 개방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아나톨리아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국제적 우려가 등장했으며, 이를 방관한 제3인터네셔널에 대한 우려 또한 등장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하였다. 독립 핀란드독일의 영향권 안에 들어섰고,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의 군주주의자들은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을 옹립한다. 이후 핀란드중앙유럽 동맹의 일원으로써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독일중앙유럽 동맹 회원국들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핀란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러시아 내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핀란드 내부에서는 반독일-반군주주의-사회주의자들이 세력을 키워나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에서 러시아 코뮌이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이 확장됨에 따라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제3인터네셔널의 영향력이 증대하였다. 결국 1944년 10월 3일, 빌헬름 1세가 건국기념일 행사에서 핀란드 적위대에 의해 암살당한다. 암살 직후 핀란드 적위대는 쿠데타를 일으키며 헬싱키의 관공서들을 장악하고 핀란드 코뮌을 선포한다. 그러나 카를레 2세와 그의 정부는 투르쿠에서 핀란드 코뮌에 대한 토벌을 선포한다. 10월 13일, 살로에서 발생한 전투를 시작으로 핀란드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한다.

1945

1945년 6월 6일, 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 인사 및 장교들로 이루어진 리투아니아 해방군이 전 수도, 빌냐(빌뉴스)를 비롯한 벨라루스 서부와 폴란겐메멜 지역에서 소요를 일으킨다. 독일군은 빠르게 메멜의 봉기를 진압하였으나, 벨라루스발트는 되려 전국적으로 민중에게 퍼져나갔다. 벨라루스에서는 리투아니아 민족 운동으로, 발트에서는 반독일 발트 민족 운동으로 발전했다. 특히 발트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된 민족무장단의 잔당과 그 지지자를 중심으로 발트 독일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까지 발생했다. 리가를 비롯한 발트 독일인의 거주 도시에서는 거주자들이 직접 자경단을 꾸리는 등 발트 연합육군의 진압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되려 발트 연합육군 내에서도 민족주의자 장교들에 의해 하극상이 벌어지는 등 발트 전체가 무정부 상태에 접어들었다. 결국 1945년 8월 14일,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명령 하에 독일 육군 1개 군단과 독일 황립해군 1개 함대가 리가 만에 상륙하고 발트 정부를 점거, 발트의 군권과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가져온 뒤 약 반년에 걸친 토벌을 게시한다. 1945년 9월 2일, 리가를 시작으로 발트 독일인 거주 도시의 무장단체가 토벌되고 자경단이 해체되었으며, 1946년 1월 7일, 발트 민족 무장사건은 종료된다.

벨라루스민스크 공세민스크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점령당하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국토에 행정력이 닿지 못했다. 또한 민스크 공세로 무너진 장교단은 점차 사회주의자 청년 장교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러시아와 인접한 국경 지대에서는 행정력이 부재한 틈을 타 벨라루스 사회민주당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원을 받고 그 세를 불렸다. 쾨니히스베르크 조약 이후 벨라루스 동부가 러시아에 할양되고하면서 벨라루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 해방군에 의해 벨라루스 서부 사태가 발생한다. 리투아니아 해방군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벨라루스 정부의 서부에 대한 행정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성장한다. 벨라루스 서부 사태는 사실상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1945년 9월 5일, 그러한 혼란기 와중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핵심 요직을 차지한 사회주의자 장교단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진압 이후 그들은 배후 세력은 없으며 단독의 쿠데타라 설명하였으나 명백히 러시아의 지원이 있었으리라 볼 수 있다. 민스크 궁전에 돌입한 쿠데타 장교들은 독일 육군 소속의 제8근위보병사단에 의해 궁전 내 돌입을 저지당하고 곧 이어 진압당했다. 9월 쿠데타라 불린 사회주의자 청년 장교단의 쿠데타 이후 벨라루스벨라루스 서부 사태 진압보다는 벨라루스 왕립군 내 반정부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힘을 썼다. 벨라루스 서부 사태는 약 2년 뒤인 1947년이 되어서야 반정부 세력 축출에 성공한 벨라루스 왕립군에 의해 사태가 진정된다. 9월 쿠데타로 인해 벨라루스 내의 모든 좌파 세력이 축출되고 반사회주의벨라루스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

1946

발트 민족 무장사건이 종료되고 며칠 뒤인 1946년 1월 18일, 급작스럽게 발트독일 본국과 같은 수준의 계엄령이 떨어지고 독일과의 합병이 선언된다. 발트 연합육군프로이센 육군에, 발트 연합해군독일 황립해군에 병합 절차를 밟았다. 해당 결정은 오직 슐라이허 국가내각빌헬름 3세 조차 명령하지 않은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며, 이에 발트의 연합정부 일부 인사들과 군대는 이를 거부하며 저항했다. 발트의 인민들과 일부 발트 독일인 조차 해당 결정에 반발하며 시위 및 소요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 러시아를 비롯한 제3인터네셔널의 지원을 받은 발트 사회당의 봉기까지 쥐트리프란트에서 이어지면서 독일군의 진압은 더욱 강경해진다. 발트 소요라 불린 수 개월 간의 기간 동안 반병합파에서 수 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독일 육군에서도 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결국 발트 소요를 진압하는데 성공, 1946년의 병합 발표 이후 딱 1년만인 1947년 1월 18일, 발트의 7개 구성국의 독일 가입을 선언한다. 한편, 쥐트리프란트 동부에서 일어난 발트 사회당은 반병합파 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토벌되어 수뇌부 대다수가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발트 소요에서 제3인터네셔널이 일부 개입한 사실은 독일로 하여금 그들과 적대 관계를 이루기에 충분했다.

투르쿠 정부는 살로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이는 적위대에게 큰 위협이 되질 못하였다. 되려 주요 전장은 무주공산인 동부가 되었다. 동부의 크고 작은 호수들 사이로 지배자가 달라졌다. 1945년 중반에 들어서 살로-탐페레-미켈리-요엔수를 이은 전선이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적위대를 감싸는 모양새이던 전선은 투르쿠 정부에 유리해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투르쿠가 헤멘린나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적위대는 헬싱키의 안전을 이루었으며 라펜란타가 적위대에 온전히 남아 맞닿은 러시아 코뮌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내전은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일찌감치 독일은 투르쿠 정부를 지원하였고, 러시아 코뮌의 지원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러시아 코뮌에게 핀란드상트페테르부르크 뿐만 아니라 북부 중앙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발판이었기에 이들을 사회화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을 안정화함과 동시에 발트해로 진출할 열쇠였다. 양측은 약 1년 간 소규모의 교전만 치루면서 힘을 비축하였다. 전쟁 속의 평화를 깬 것은 투르쿠 정부였다. 1년 전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로흐야헤멘린나에 공세를 가했다. 초기엔 적위대가 전투의 승기를 잡는 듯 보였으나 점차, 빠르게 투르쿠 정부 측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방어선이 총체적으로 무너지면서 주력이 포위될 위기까지 몰리던 적위대는 결국 두 도시에서 후퇴를 결정하였다. 그렇게 전장은 헬싱키로 급격히 좁혀졌다. 라흐티에서 적위대의 역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완전히 승기가 잡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적위대는 헬싱키 공방전이라 불리는 방어전에서 끝까지 저항했다. 그들은 헬싱키와 그 외곽 도시들의 건물을 엄폐물로 하여 끈질기게 저항했다. 투르쿠군이 헬싱키에 포격 결정을 내릴 정도로 격렬했다. 포격 이후에도 그들은 저항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거 같은 헬싱키 공방전의 끝은 매우 허무했다. 천천히 투르쿠군이 전진하자 핀란드 코뮌 수뇌부는 발트해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주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적위대는 빠르게 항복하였다.

1947

1947년 7월 14일, 서프랑스 인민위원회의 통치 하에 있던 서프랑스 일대에서 브르타뉴 코뮌, 노르망디 코뮌, 앙주 코뮌, 푸아투 코뮌이 선포되고 이들이 연합한 프랑스 코뮌 연합이 선포된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이루어진 협정에서 독일브리튼은 프랑스를 세 개로 나누되, 남프랑스 국가판무관부를 제외한 북부 프랑스 지역을 차후에 통합하여 중립화할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북동 프랑스에는 동프랑스 국가판무관부가 아닌 프랑스 제5공화국이 들어섰으며, 파리파리 중립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브리튼의 주도 하에 벌어진 서프랑스의 분할과 프랑스 코뮌 연합의 선포는 이러한 협상의 내용을 지극히 침해하는 건이였다. 때문에 독일은 즉각적으로 반발하였고, 프랑스 제5공화국에 주둔한 독일 육군을 통해 파리를 점거하고 프랑스 코뮌 연합5공화국-옥시타니아 국경을 차단한다. 이에 대응하여 프랑스 코뮌 연합서프랑스 인민위원회 통치 하의 지역 뿐만 아닌 동부 프랑스 지역에 파리 코뮌, 오를레앙 코뮌, 상파뉴 코뮌, 부르고뉴 코뮌 등을 선포하며 이들을 미수복 해방 코뮌 지역이라 선포한다. 그 중 부르고뉴 코뮌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합병한 부르군트을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줘 양국 간 관계는 급격하게 적대적으로 돌아선다. 더해서 파리 중립위원회를 구성하던 네덜란드독일 육군파리 점령을 비난하고 러시아 또한 이에 거들면서 제3인터네셔널독일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다. 독일 육군이 진주한 제5공화국에서는 제3인터네셔널과 관련 있는 사회주의 단체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체포 작전이 벌어졌고, 프랑스 코뮌 연합 내에서 친독일 인사나 반사회주의 인사들의 숙청이 이루어졌다.

1948

1949

1950

Dritter Weltkrieg
제3차 세계 대전

Zeitgeschichte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