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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유엔 통치령 한반도 북부지역 민정장관
조만식
曺晩植
출생 1883년 2월 1일
평안도 평양부
(現 평양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사망 1968년 7월 4일 (향년 85세)
평양
직업 종교인, 교육인, 정치인
임기 조선민주당 초대 당수
1945년 ~ 1951년
1946년 ~ 1949년 부당수 이윤영 권한대행
유엔 통치령 한반도 북부지역 민정장관
1951년 2월 16일 ~ 1951년 5월 31일
조선민주당 3대 당수
1951년 ~ 1957년
자유당 초대 주석
1957년 ~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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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2, 3, 4
성향 중도 우파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좌우합작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생애

(광복 이전 행적 생략)

조선이 광복을 맞자 조만식은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신탁 통치 오보 사건으로 찬탁/반탁 갈등이 촉발되었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한지 겨우 한 달 후 신탁통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민정청과 좌익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하지만 1949년, 남북한 정부가 양측의 정치범을 교환하면서 서울에 오게되었다.

통일전쟁으로 유엔령 북한이 성립되자 이승만의 추천으로 유엔령 북한의 민정장관을 3개월간 맡아 북한 지역의 재건과 통일 총선을 준비했다. 남북이 다시 통일된 직후 치루어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조선민주당이 20석을 얻어 원내 3당이 되어 민주국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했다.

하지만 제3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하여 민국당이 3선 개헌을 시도하자 조만식은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 야권 통합에 합의했다. 그런데 야권통합추진 과정에서 김언봉 간첩 사건가 터지면서 근민당의 발언권이 약해졌고 그 결과 우파 정치인이었던 조만식이 신당 자유당의 초대 주석으로 선출됐다.

이후 제3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고 평양의 자택에서 1961년 숙환으로 사망했다.

어록

북녘과 내 고향 동포들이 그 자의 통치하에 억압받고 고통받고 있는데 나 혼자 좋게 살라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 나는 이곳에 남아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
1946년, 월남을 권하는 비서 백선엽에게
박수 받을 때 떠나는 사람이 제일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총통 각하, 이 격언의 뜻을 다시 한 번 숙고하여주십시오.
개헌을 추진하는 이승만에게

역대 선거 결과

선거 종류 연도 소속정당 득표율 당락 비고
국회의원 선거 1951 53.1%
평남1

당선
초선
국회의원 선거 1956 49.8%
평남1

당선
재선
총통 선거 1958 46.5%
낙선
2위
국회의원 선거 1961 전국1
당선
3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