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민주 정치의 발달 (푸른 오얏꽃2)

성조 시대

비변사는 임진왜란 때부터 의정부와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이 관직을 겸하였으며, 각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국가의 중요한 관원이 비변사에 참여하였다. 그에 따라 사실상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여 행정, 국방, 인사 등이 처리되었으므로, 지나치게 확대된 기능으로 인해 존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비변사 기능의 확대·강화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행정체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인식으로 성조 2년(1778년) 의정부와 비변사의 업무 한계를 규정하여 외교·국방·치안 관계를 제외한 모든 사무를 의정부에 이관하였다. 이러한 성조의 정책은 훗날 광무 시대에 이르러 현재 대한조선국 삼권분립의 초석이 되었다.

광무 시대

광무 11년(1875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팽창과 그에 따른 국내 사회상의 변화로 문제가 복잡해지자 고종 태황제는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시키고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삼사라 불리우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폐지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하여 중추부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후 중추부는 중추원으로 승격되며, 중추원은 대한제국의 입법부로 자리매김한다. 대한조선국도 이 중추원을 승계한다. 또한 의정부를 행정부와 내각으로 분할하여, 초대 총리대신으로는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인 김홍집이 선출되었다. 육조 또한 그 기능을 개편하고 정리하며 지금의 국가행정조직에 이르게 된다. 즉, 현재 대한조선국의 행정부는 의정부를 승계한다. 또한 근대적인 체계로써 법을 제정하는 입법부와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사이에 법을 적용하는 과정의 필요성을 절감해 사법부를 신설했다. 궁내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원초적인 사권분립은 대한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고 대한조선국이 건국되기까지 균형을 유지했다. 

태화 시대

대한조선국의 초대 총리대신 김구을축개혁에서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행정조직도를 크게 개편하려고 노력했으며, 궁내부는 비서실과 경호처를 제외하고 모든 권한을 행정부와 내각에 위임하였다. 국왕의 영향력은 궁내부에서도 사라지고 상징적 의미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삼권분립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익문사는 내각 직속 기관으로 이관되었다. 총리가 공화정의 대통령급 권한을 가지는 총리중심제도 이때 자리잡았지만, 태화 10년(1936년) 이범석의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자 중추원과 권력 균형을 이루던 익문사를 장악했다. 이 파시스트 정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민주화의 물결이 파도치며 다시 김구가 세운 삼권분립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