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경상남도 통영시, 창원시 일대에서 유래한 김밥의 한 종류이다. 충무라는 이름의 어원은 충무공 이순신, 대한제국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충무급이다.

역사

19세기말 당시 한독동맹 이후 대한제국은 독일의 문물들을 도입하면서 많은 유학생들을 독일에 파견하였고 당시 세계 2위의 해군이었던 독일 해군에도 많은 유학생을 파견해 독일의 선진 해군기술과 제도를 도입하였다.
광무 31년(1895년) 대한제국 황립해군 장교였던 이두진은 독일의 함선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독일에 유학하던 중 독일 해군의 급식인 자우어크라우트와 소세지를 맛보았다. 이두진은 함선의 성능 뿐만 아니라, 수병의 체급도 서양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우어크라우트와 소세지를 조선 수병들의 입맛에 맞게 개량한 음식으로 체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도입된 한국식 자우어크라우트와 소세지[1]가 당시 해상에서 보존이 쉬웠던 김에 싼 맨밥과 결합해 조선화된 것이 현재의 충무김밥이다.
이 충무김밥은 당연하게도 그 특이한 조합 덕분에 해군들에게는 좋든 나쁘든 강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고 1890년대에는 바다를 떠다니는 일이 많은지라 요일 감각을 잃기 쉬운 해상에서 수요일 점심마다 충무김밥을 제공하는 것으로 요일감각을 살려주게 하였다. 이런 풍습은 전후, 현대 대한조선국 왕립해군에도 이어졌다. 여러모로 기원이 일본의 카레라이스와 비슷하다.

상세

손가락 굵기의 아무 속 없는 김밥과 양배추, 정확히는 '자우어크라우트'라 부르는 독일식 양배추 김치와 소세지야채볶음, 김밥이라기 보다는 주먹밥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간단한 구성을 자랑한다.
일반 김밥과 다른 점은 조리법뿐만 아니라 먹는 법에도 있는데 고속도로 휴게소를 제외하면 젓가락이 아닌 기다란 이쑤시개 같은 나무 꼬치로 꽂아서 먹는다. 실제 충무김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옛날 진해 군항을 거쳐가는 연안 여객선 내에서 팔던 충무김밥의 경우 지금과 같은 도시락 형태가 아니라 이 김밥과 반찬들을 꼬치와 같은 형태로 꽂아 넣고 팔던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 1회용 용기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기도 하고, 대도시도 아닌 지방에서 구하기란 더더욱 쉽지 않았다. 충무김밥이 일반 김밥과 달리 김밥 속이 없는 맨김밥인 데다 옆구리 폭이 상당히 넓으면서 지름은 작은 형태다 보니 꼬치로 쑤셔도 터질 가능성이 현저히 적고, 반찬으로 나오는 것들도 꼬치로 잘 꽂아지는 속성이 있어 이런 구성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통영이나 창원 원조 식당에 가서 먹는 경우 수저가 비치되어 있긴 한데, 충무김밥 주문 시에 이 기다란 이쑤시개 같은 꼬치는 식당에서 먹어도 기본적으로 주고 실제 사람들도 웬만하면 꼬치로 먹는다.
통영과 창원의 별미로만 알려진 지역색이 강했던 충무김밥이 전국구 음식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건 대한제국이 기타큐슈 조약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한 1917년 뒤부터다. 전쟁 이후 전역한 수병들이 주둔지에 눌러앉거나 각자의 고향에 돌아간 뒤 군 복무 시절 먹었던 충무김밥을 재현하면서 주변에 널리 퍼진 게 원인으로 알려져있다.
대한조선국에서의 충무김밥은 거의 대한민국의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짜장면같이 어릴 적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대중적인 요리가 됐다. 특히 대한조선국의 전후 부흥기 이후 바쁜 주부나 아이들이라도 쉽고 빠르게 조리해 먹을 수 있어서 가정의 메뉴로 인기가 높았던 지라 조선인들에게는 자우어크라우트의 시큼한 냄새는 한국의 된장찌개 냄새처럼 어머니가 만들어준 추억의 맛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나 학생들의 학교 급식이나 대학생 MT나 동아리 같은 야외활동에는 마치 대한민국인의 삼겹살과 인스턴트 라면 못지않게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그야말로 추억이 가득한 조선의 대표적 국민 음식이 되었다. 조선국내에서 등장한 시기도 1차 대전 전후인지라 심지어 노년층들 조차도 충무김밥에 대한 향수나 어릴 적의 추억이 상당한 편이다.

  1. 조선식 자우어크라우트는 간단하게 고춧가루만 뿌리면 만들어지는 것이고, 소세지는 야채와 볶아먹었다. 이건 소흥 시대까지도 군인들에게 '쏘야'라는 별칭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