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이클루아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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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프랑수아 이클루아의 일생에 대해 다룬다.

성장기

187년 5월 이클리우스 시티주 센트럴타운시 피오플리아현에서 안네소피 가문의 1남 2녀 중 1녀로 태어났다. 프랑수아가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지만 아버지 사르코지는 보수적인데다 급진왕당파 출신이며 어머니 임마누엘은 아버지에 비해 개방적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이클루아에게 학교를 보내기 위해 명문소학원인 이클리우스 왕립소학원에 진학시켰다. 이클루아는 왕립소학원 진학 중 물리, 수학, 사회 등에 만점을 받아 전교 3등에 빛낼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이후 15살에 어머니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총리조르주 멜리아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아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왕립대학 진학 중 정치사회과에 들어가 이클리우스의 정치를 배우게 된다. 왕립대학 졸업 후 정치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은 이클루아는 정치대학원에 입학한 끝에 졸업하였고, 이후 18살의 나이에 이클리우스 민주당에 입당 가입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입당심사위원회는 이를 통과시켰지만 고작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중앙당 측은 그녀의 입당 신청을 불허했고 결국 좌절하게 된다.

신성교 회장 시기

그러다 자신이 그동안 신봉하던 신성교에서 이른바 신성한 연설을 통해 신도들의 큰 인기를 얻으며 전 총회장인 알렉스 도너반에 이어 새로운 총회장이 된다. 이클루아가 신성교를 이끌던 당시, 비리와 성추문 등으로 비판받았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종교 개혁과 국제 구호 사업을 추진하여 신성교의 명성을 올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210년 다시 한번 정계 입문을 위해 신성교 총회장에서 사퇴하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정치 활동

라나프 내각 시기

같은 해 알렉산드르 라나프 내각의 국정대변인, 211년에는 라나프 내각의 이클리우스 사회부장관을 맡았다. 212년 4월 사회부장관을 사퇴하고 총선에서 이클리우스 시티 제13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보수당 오스카르 테리아 후보에게 1만 표차로 낙선하게 되었다.

212년 이클리우스 총선

212년 4월 이클루아는 8월 총선 출마를 위해 사회부 장관을 사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클루아는 이클리우스 시티 제13선거구에 출마하면서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방송인 출신 보수당의 오베라 테리아 후보와 맞붙으면서, 208년 총선에 이후 4년 만에 민주-보수 후보 간의 리턴매치가 성사되었다.

212년 8월 총선 결과 이클루아는 테리아 후보에게 패했지만, 민주당은 연방의회의 전 의석 734석 중 394석을, 연방상원에서도 전 의석 296석 중 179석을 흭득하여 압승하였다. 이클루아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216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 대신 정치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당수 시기

213년 1월 요루비치 사루카나 당수가 이클리우스로 귀화하기 전 극우정당인 앵본제일당의 지지자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과거사 논란이 불거졌고 민주당 윤리위원회 측은 그를 제명시켰다. 이후 조르주 멜리아 총리가 임시당수를 맡았지만 전 당수의 제명 등으로 여론이 나빠지자 멜리아 임시당수도 6월 사퇴하면서 당수가 공석이 되고 만다. 그러던 중 임시의원총회를 열어 이클루아를 당수로 내정하자는 의견이 생기면서 만장일치로 통과함에 따라, 이클루아는 민주당의 당수가 되었다.

이후 이클루아가 민주당의 당수가 되고, "더 이상 민주당이 부패해선 안된다"는 발언을 하여 민주당의 개혁을 추진한다. 이후 당권을 잡았던 연합민주전선이 힘을 잃고, 이클루아는 프랑수아계를 이끌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를 두고 패권주의라는 보수파, 일부 비주류의 반발이 있기도 했다.

213년 11월 이클루아 당수는 당 쇄신을 목적으로 기존의 지도부를 대신하여 앙겔라 홀론은 국정정책위원장에 선출했고 프랑수아 드 라티몽을 원내교섭총무로, 이반 헤소를 당사무총장으로, 프리드리히 보른을 윤리위원회장으로, 브라이언 올리안을 혁신개혁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216년 총선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원내 1당으로 올라섰고, 총리 지명 투표를 거쳐 총리가 된다.

총리 재임시

취임식

나는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 국가 발전에 노력하기 위해
민주연방 헌법을 수호하며 총리로서의 국정 활동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선언한다.

I declare that I will defend the Constitution of Democratic Federation of Icliusia and faithfully carry out state affairs activities as prime minister in order to strive for the freedom and welfare of the people and the development of the nation.
- 이클리우스 민주연방 헌법 제3장 55조

이클루아는 216년 4월 제3대 민주연방 총리가 되었고, 취임식은 이클리우스 광장에서 진행하였다. 이클루아는 29살의 나이로 집권하게 된 이클리우스 최초의 최연소 여성 총리, 신성교 출신 총리, 프랑수아가 출신 총리으로 기록되었다.

이클루아는 "모든 시민들과 함께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으며 이 말은 후에 언론과 외신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자택으로 돌아가자 지지자들과 민주당원, 그리고 시민들의 박수가 이어졌고 이클루아는 시민들과 악수하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국정 방향과 내각 조각

이클루아 내각의 국정 방향은 "혁신·변화·전진"을 강조하면서 여야 통합을 주장했다.

이클루아는 부총리 후보자에 프랑수아 드 라티몽을 지명했고, 센트리아궁 민정수석 후보자에 알렉산드르 나브로를, 또 사회정의부장관드미트리 레이너스를, 경제부장관레오니다스 베샤르를, 안보국방부장관루이스 장피에르 마르샤를 각각 임명했다. 센트리아궁이클리우스 행정부에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전 내각의 98%가 개편되면서 라나프 내각은 이클루아 취임식 다음날 해산되고 제1차 이클루아 내각이 조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