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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가 원수
1대
1920 ~ 1925
2대
1925 ~ 1928
3대
1928 ~ 1930
4대
1930 ~ 1936
5대
1936 ~ 1945
폴 드 샤넬 알렉산드르 밀랑 에두아르 달라디에 필리프 페탱 레옹 블룸
6대
1945 ~ 1949
7대
1949 ~ 1956
8대
1956 ~ 1968
9대
1968 ~1972
10대
1972 ~ 1990
폴 라마디르 기 몰레 조르주 퐁피두 피에르 메스메 프랑수아 미테랑
10대
1990 ~ 1994
11대
1994 ~ 2002
12대
2002 ~ 2006
13대
2006 ~ 2010
14대
2010 ~
로랑 파비위스 리오넬 조스팽 자크 시라크 세골렌 루아얄 프랑수아 바이루
Philippe Joseph Pétain
필리프 조제프 페탱
페탱
제 4대 총리
전임
에두아르 발라디에 (3대)
후임
레옹 블룸 (5대)
근무기간
1930년 ~ 1936년
당서기
정당
국가사회주의 프랑스 파시스트협회
근무기간
1923년 ~ 1936년
국회의원
지역구
파리 제 3구
정당
국가사회주의 프랑스 파시스트협회
근무기간
1924년 ~ 1928년
신상 정보
출생
1856년 4월 25일, 프랑스 파드칼레
사망
1948년 7월 23일, 조선 경성
종교
천주교
정당
국가사회주의 프랑스 파시스트협회

앙리 필리프 베노니 오메르 조제프 페탱(프랑스어: 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 1856.4 ~ 1948.7)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군인이었으며, 흔히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존속했던 파시스트 프랑스를 이끈 독재자로 알려져있다. 1차대전 당시 무훈으로 국민 훈장까지 받을정도로 인기있었으나 말년에 파시스트 사상을 추종하고, 1930년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유린하였다. 1936년 독일이 지원한 혁명으로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자 대조선제국으로 도주하였고, 그곳에서 약 12년을 더 살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생애

페탱은 1856년, 프랑스 제 2제국의 주중 하나였던 북부 파드칼레주의 코시알라투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큰아버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페탱 본인도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교도로 성장했다. 1876년 20세의 페탱은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4년 뒤에 실전에 배치되어 많은 시간을 보병 장교로써 근무했다. 얼마 뒤 육군 교관 학교 교관이 되었으나, 1차대전이 터져 전선으로 배치된다.

1차대전

페탱은 1차대전때 베르됭 전투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생각보다 독일군이 너무 빠르게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무너트리자 파리 방어군으로 재배치된다. 1915년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되자 페탱은 제 2 방어군을 이끌고 독일군에 격렬히 맞섰다. 이때 파리는 모든 보급선이 끊긴 상황에서 무려 3달을 버텼고, 이로 인해 페탱은 1921년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독일군들도 페탱의 군사적 실력을 감탄했을 정도였다. 페탱은 파리 포위전 당시 Ils ne passeront pas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파리는 1915년 7월 끝내 함락되고, 프랑스는 항복하였다. 페탱은 독일군의 프랑스 강점때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파시스트로써

1921년 이탈리아에 방문한 필리프 페탱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페탱은 프랑스에 귀국하여 국가사회주의 프랑스 파시스트 협회라는 작은 단체를 파리에서 열었고 그곳에서 민족주의적 연설을 대중들에게 하였다. 많은 이들이 전쟁 영웅인 페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졌고, 1920년대 말 경에 페탱의 파시스트 협회는 주요 정당을 위협할 수준의 위치까지 성장했다.

1930년, 페탱은 마침내 최후 결단으로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독일의 나치당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약간 받아 일어난 이 운동은 오를레앙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오를레앙의 국회의사당이 포위되고 국회의원들은 체포당했으며 대통령은 총살당했다. 페탱은 이후 라디오 연설로 자신이 민족적 위기를 겪는 프랑스의 유일한 지도자이며 또 유일한 구원책인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에 따라서 모든 야당이 금지되고 유일하게 남은 야당인 기독교민주당을 식물정당화해 독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탄압적 정책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33년 그는 반유대법과 반유색인종법을 발동해, 유대인과 흑인, 황인을 재판 없이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았다. 경찰들을 선동해 유대인들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1931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져 페탱 정부는 더욱이 고립되어갔다.

1934년 페탱의 지시로 트루아 인근의 작은 도시인 사비에흐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 3000명의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것 없이 공산주의자들이라며 재판 없이 처형당했고, 이중의 1/3은 유대인들이었다. 페탱 정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하였으나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단체인 그라쿠스 형제단이 이 사건을 폭로하면서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오토 벨스가 이끌고있던 독일제국 정부는 더이상 프랑스를 놔둘수 없겠다 판단해, 이 이상 독재정을 유지하면 프랑스를 무력으로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전쟁은 실질적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단체들을 간접적으로 돕는 식으로 쿠데타를 유도했다. 1936년 파리와 오를레앙, 리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 유대인들이 봉기했고 프랑스 경찰은 통제력을 잃었다. 페탱과 정부 요인들은 배를 타고 몰타를 경유하여 대조선제국으로 도피하였다.

페탱은 이후 대조선제국 정부에게서 보호를 받다가, 12년을 더 살고 죽었다.

사후 평가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페탱을 프랑스 공공의 적, 프랑스 민주주의를 훼손한 범죄자로 인식하고있다. 민주화 이후 약 20년간 좌파가 장기집권할정도로 페탱 정권 6년의 충격은 컸다. 프랑스 우파 역시 페탱을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파시스트에 불과하다고 극렬하게 비판한다.

반면 극우주의자들에게는 일정부분 옹호받는다. 프랑스 공화당의 분파인 프랑스의 미래(La futur de France)의 대표이자, 현 프랑스 총리이기도 한 로랑 보키에가 페탱의 애국주의적 정신을 무시할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업적 대부분은 좌우 할것없이 비판받는다. 2014년 프랑스 24가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악의 프랑스인 3위는 루이 16세, 로베스 피에르를 이은 페탱이 차지했다. 4위인 기조와도 2배 이상의 표차가 날만큼 페탱에 대한 국민적 여론은 좋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