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의 황녀 문조 ~ 숭영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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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광종의 황녀 회순공주 | 懷純公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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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7년 5월 12일 | |||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
사망 | 1905년 2월 21일 (향년 27세) | |||
평양부 공하도의원 | ||||
능묘 | 회순공주지묘(懷純公主之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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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의 황녀. 세조 무황제의 동복동생으로 광종 열황제의 유일한 적녀이다.
생애
훙서
아비가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데 자식이 어찌 먼저 떠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
훙서 소식을 들은 직후 광종이 부마 정은호에게 보낸 편지 중 |
1905년 2월 21일, 부군인 정은호와 새로 지은 학교들을 순행하던 공주는 급작스럽게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사인은 폐색전증이었다. 잦은 순행으로 신체에 무리가 간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세조 무황제와 더불어 둘 밖에 없던 적자녀였던 탓에 광종은 큰 슬픔에 빠졌고 공주의 장례가 끝나고서도 한달동안 정무를 수행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공주는 평소에 건강했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는 죽음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광종은 공주의 훙서 이틀 뒤인 23일 곧바로 ‘회순(懷純)’이라는 시호까지 내려 그녀를 기렸다.
세조에게도 공주의 훙서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뜩이나 정목귀비 소생의 이복동생인 온양왕에게 태자 자리가 위협받고 있던 상황에서 동복자매가 세상을 떠난 것은 자신을 온전히 지지해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불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시기 세조는 시종에게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공주의 유해는 2월 24일 한성으로 운구되었고 일주일간 장례를 치른 뒤 태릉 인근에 묻혔다.
기타
- 오빠와 외모가 많이 닮아 한눈에 남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외모도 미녀형이라기 보단 미남형에 가깝다. 신장도 그 당시 여성치고는 매우 큰 170cm 정도였다.
- 성격도 괄괄한데다 바깥에서 뛰노는 편을 더 좋아하는 왈가닥, 말괄량이였다고 전한다. 활쏘기를 좋아한데다 태조의 후손 답게 실력도 뛰어났다고. 부마가 괴롭히면 멀리서 쏴버리라고 광종이 농담할 정도였다.
- 부군인 정은호(1876~1944)는 공주의 훙서 7년 뒤인 1912년이 되어서야 황제로부터 재혼을 허가받았지만 측실 한명만 두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자녀는 측실 소생으로 세명이 더 있다.
- 효명황제의 모후인 효연황태후는 회순공주의 장남인 산곡공 정영준의 사위인 김순문의 조카딸이다.